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62)
을 위한 세계는 없다-162화(162/817)
〈 162화 〉 과거의 유령, 현재의 인연
* * *
매듭을 끊어도 줄은 남는다.
지도자가 죽어도 인민은 남는 것처럼.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일화를 들은 ???의 감상.』
***
발라구는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남은 총알을 가늠해봤다.
담을 넘으려던 멍청이에게 한 발.
입구를 기웃거리던 바보들에게 세 발.
하수구 뚜껑을 열고 들어오려던 등신들에게 두 발.
총 여섯 발을 쐈나? 아니, 담을 넘는 놈에게 두 발을 쐈던 거 같기도 하고…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그는 결국 총알을 세는 걸 포기하고, 벽면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이 척추를 쓸자, 여태껏 참아온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이 혼란이 언제 끝날 것 같습니까?”
두서없는 말이었으나, 옆에서 창문 바깥을 감시하던 요제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곳을 노리는 놈들 다 죽거나, 우리가 다 죽거나. 그전에는 끝나겠지.”
“….”
“얼굴 펴, 농담이니까.”
요제프는 AK인가 뭔가 하는 길쭉한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도저히 농담하는 모습으로는 안 보였지만, 발라구는 벽에서 등을 떼고 그가 지키는 창가 앞에 나란히 섰다.
요제프가… 아니, 두 사람이 지키는 창가는 여관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2층 중앙 창문이었는데, 원래는 기관총을 설치한 떡대가 지키던 자리였다.
그런데 그 떡대가 하필 눈먼 석궁에 어깨를 맞은 터라, 예비 병력인 요제프와 발라구가 이곳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요제프는 발라구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왜, 혹시 죽을까 걱정이야? 그런 걱정이라면 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군. 구급 키트도 있고… 여관 주변에 쌓인 시체를 보고도 달려들 멍청이는 더 없을 테니.”
발라구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제프의 말마따나, 철조망을 뒤집어쓴 여관 담장과 입구 주변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깡패, 도둑, 강도… 전부 무장한 여관을 노리던 무법자들의 시체.
개중에는 치안 보호를 위해 총을 요구하던 자칭 경비대와 자칭 자경단들의 시체도 있었는데, 쫓아내자마자 하수도로 침입하려고 한 걸 보면 이미 도시의 치안은 끝장난 게 틀림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피해를 받는 건 언제나 밑바닥 인생들뿐…’
그렇게 발라구가 시체를 보며 애매한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요제프가 골목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총을 들었다.
쏘, 쏘지 마세요! 아이! 아이가 있어요!
이제 막 돌이나 지났을까? 보자기에 싸인 갓난아이를 높이 들어 올린 여인.
그녀는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걸 확인하자마자, 천천히 여관 정문을 향해 다가왔다.
“멈춰라! 그 이상 다가오면 쏘겠다!”
여인이 정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쯤, 보다 못한 요제프가 소리쳤다.
여인은 겁을 먹은 듯 우뚝 발을 멈추더니, 아이를 더 높게 들어 올렸다.
아, 아이만이라도 받아주세요!
여인의 애타는 목소리에 요제프는 총알로 대답했다.
탕! 그녀의 바로 몇 미터 앞에 총알이 꽂히며 흙먼지가 튀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요제프!”
발라구가 놀라 요제프를 불렀지만, 그는 발라구를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애새끼가 아니라 뒤를 봐라.”
“뭐?”
“씨발, 저 계집이 나온 골목을 보라고.”
발라구는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이 온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건물의 그림자와 쓰레기통에 가려진 골목 사이사이, 이곳을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들이 있었다.
꾀죄죄한 꼬맹이들과 비슷한 몰골의 여인들, 그리고… 무기를 든 쥐 수인들까지.
얼마나 꼼꼼히 숨어있는지, 유목민 생활에 익숙해진 오크의 눈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할 정도였다.
‘머릿수만 따지면 적어도 수십 마리…’
발라구가 대체 저걸 어떻게 발견했냐고 물으려는데, 요제프가 먼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다른 놈들이 있는 거 맞냐?”
직접 본 게 아니라,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춘 거라고? 발라구는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남미나 여기나… 쓰레기들이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그는 퉤 창문 바깥으로 침을 내뱉고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원, 경계 태세! 파라과이 스타일이다! 꼬맹이건 계집이건, 누구든 다가오면 쏴버려!”
대답 대신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여관 곳곳에서 울렸다.
아이를 든 여인은 총구를 보고 겁을 먹은 듯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꺄아악!
그녀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골목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왔으니까.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은 겁에 질린 듯, 골목과 여관을 번갈아 바라보며 벌벌 떨기만 했다.
“인간을 방패로 쓰다니, 쥐 수인들이 그렇게 똑똑할 리가…?”
발라구는 권총을 꽉 쥐며 말하자, 요제프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똑똑한 돌연변이가 나왔거나, 인간이 가르쳐 줬거나. 뭐든 엿 같군.”
“….”
“어쨌든, 다가오면 난 쏠 거다. 보기 힘들면 뒤로 빠져라.”
배려에 가까운 말. 발라구는 그대로 물러나는 대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요제프, 우리가 나가서 저들을 구하는 건…”
“좆까는 소리는 화장실에서만 해.”
“….”
“누군지도 모를 계집과 애새끼 때문에 지정학적 이점을 포기하자고? 응? 나와 내 부하들이 초인으로 보이냐? 아니면 영웅으로 보여?”
발라구는 반박도, 비난도 하지 못했다.
당장 자신부터가 얼마 전까지 노예를 잡아 팔던 놈 아니던가?
사정이 있었다지만, 노예 상인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여자와 아이를 구하자니,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 나 혼자 가서 아이만이라도 구해오지.”
“….”
“저 여자를 쏴도 다음, 그다음이 계속 이어질 거야. 그러느니 아예 처음부터 아이들만이라도 챙기는 게 낫지 않겠나.”
요제프는 잠시 방아쇠를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고 싶으면 해라. 단, 아이만 구해와. 여자는 안 돼.”
“….”
“그리고 이 장소에 위협이 되는 순간… 니 목숨은 보장 못 한다. 난 알량한 정의감보다 거래가 우선이야. 알겠어?”
“…과분한 배려, 고맙다.”
발라구는 요제프에게 고개를 숙인 뒤, 권총을 들고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육중한 덩치의 오크가 땅에 내려서자, 정문 앞에 서 있던 여인의 눈이 떨렸다.
희망, 절망, 그 외에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
발라구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를 이리 주시오.”
“…저, 저는요?”
“미안하오. 아이라면 몰라도, 당신까지 안으로 들어오는 건 힘들 것 같소.”
여인은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면서 아이를 감싼 보자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발라구가 조심스레 아이를 받아든 바로 그 순간.
손이 자유로워진 여인이 품에서 기다란 깡통을 꺼냈다.
“미, 미안해요.”
발라구는 그 깡통이 요제프가 밀수한 ‘연막탄’이란 물건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손을 뻗었으나, 여인이 핀을 뽑는 게 조금 더 빨랐다.
푸쉬이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발라구와 여인 사이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이 신호였다.
다음 순간, 골목 저편에 있던 쥐 수인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는 게 아닌가?
그들의 손에는 여인과 똑같은 연막탄이 들려 있었는데, 녀석들 모두 어색하게나마 핀을 뽑아 여관을 향해 집어 던졌다.
던지는 폼이 엉성해 멀리 날아간 연막탄은 많지 않았지만, 양에게는 양만의 질이 있는 법.
삽시간에 새하얀 연막으로 가득 찬 여관 앞으로 무수한 발소리와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찌, 찍! 점령해!
건물, 건물 빼앗아라!
우라! 우라!!
발라구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연막 너머로 손을 뻗었다.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했으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꺄악!”
그는 처음 연막탄을 쏜, 그러니까 아이를 안고 온 여인을 붙잡고 여관 안으로 내달렸다.
곧이어, 그가 서 있던 자리로 두두두두 총알이 쏟아졌다.
요제프와 부하들이 쥐들이 몰려들 정문을 향해 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쥐 수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문 대신 담장의 철조망을 밀어내며 여관 안으로 쏟아졌다.
“들어가!”
발라구가 여관 입구에 여인을 집어 던지고 문을 잠그는 순간.
가장 앞서 달린 쥐 수인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탕!
발라구는 망설이지 않고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그에게 달려들던 쥐 수인이 휘청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쥐 수인은 터프하게 구멍 난 팔을 덜렁거리며 발라구에게 거대한 앞니를 내밀었다.
“주, 죽어라! 오크! 죽어!”
발라구는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에서는 탁탁 소리만 들려왔다.
젠장, 총알이 여덟 발밖에 안 돼?
발라구는 쥐의 얼굴을 향해 권총을 집어 던졌다. 녀석이 움찔거리는 그때, 그는 그대로 녀석의 목을 붙잡았다.
“놔! 이거 놔!”
쥐 수인은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터프함이라면 오크도 뒤지지 않았다. 발라구는 무게를 실어 그대로 쥐 수인을 엎어 쳤다.
쿵! 콘크리트 바닥에 꽂힌 쥐 수인의 고개가 꺾이고, 몸이 축 늘어졌다.
“…젠장.”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맛볼 시간은 없었다. 소리를 들은 다른 쥐 수인들이 그를 향해 몰려왔으니까.
“오크! 동지 죽였다!”
“너도 죽는다!”
처음 달려든 녀석과 달리, 이번에 달려드는 놈들은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조잡하게 만든 잡동사니가 아닌, 제대로 된 제식 무기.
발라구는 마지막으로 등 뒤의 여관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이렇게 죽는군. 좋은 일 한 번 해보려다가 사고나 치고.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는 인생이었다.
빌어먹을 전 주인도 만나지 못했는데, 이름도 모를 여자와 아이 하나 구하자고 죽게 되다니.
후회는 없었으나, 죄책감은 있었다. 특히 요제프와 자신을 믿어준 천여명에게 미안했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발라구는 쥐 수인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든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앞의 두 놈은 확실히 길동무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뾰족한 얼음덩어리가 그에게 달려들던 쥐 수인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사막에서 봤던 천여명의 얼음송곳.
발라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정작 연막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천여명이 아니라 특이한 복장의 쥐 수인들이었다.
“이런 젠…”
그가 재차 주먹을 들어 올리는데, 쥐 수인 중 망치를 든 녀석이 그의 말을 끊었다. 몹시 익숙한 목소리였다.
“젠장은 내가 할 말이지.”
“…홍세티 양?”
“저 뒤에서 하는 짓 다 봤어. 참 좋은 일 하더라? 일 끝나고 두고 보자.”
“….”
발라구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검을 든 쥐 수인이 천여명의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은 나중에 묻고, 습격부터 막자.”
“이번에는 천여명 씨? 이게 무슨…”
“질문은 거기까지. 세티랑 핀엘은 여관을 정리해줘. 그리고 발라구는… 나랑 간다.발라구? 검 들고 따라와.”
발라구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
여관을 둘러싼 쥐 수인 군단은 대략 마흔 마리.
전원이 연막탄 연기 속에 숨어 있는 탓에 애를 좀 먹었을 뿐,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명 혼자 쥐 수인을 처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5분 남짓.
“…그새 더 강해지신 겁니까?”
발라구는 검을 휘둘러 마지막 쥐 수인을 쥐/수/인으로 만드는 여명을 보며 물었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검에서 피를 털어낸 뒤, 여관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발라구, 하수도와 서부 전체를 점령하려면 이런 쥐 수인들이 몇 마리나 필요할 거 같아?”
“….”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발라구는 빠르게 대답을 내놨다.
“적어도 천 명은 필요할 겁니다.”
“서부를 벗어나 도시 중요 지역을 전부 점령하고, 도시의 모든 출입을 통제한다고 가정하면?”
“그럼 적어도 오천 마리 이상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까마득한 숫자를 들은 여명이 뭔가를 고민하는 사이, 두 사람은 목적지인 골목에 도착했다.
“여기는…?”
발라구는 서서히 연막이 걷히는 골목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처음 쥐 수인들이 튀어나왔던 골목 아닌가.
그곳에는 꼬맹이들과 여인들이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모두 쥐 수인들이 고기 방패를 위해 모아놓은 시민들이 분명했다.
“…혹시, 이들을 구해주실 생각입니까?”
발라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으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우리가 누굴 구해주고 말고 할 능력이 어디 있다고.”
“그럼…”
“이용해야지.”
이용? 이런 약자들을 어떻게 이용한단 말인가? 발라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여명의 얼굴이 또다시 변했다.
이 도시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고집스러운 노인의 얼굴.
그건 남 궁정백의 얼굴이었다.
거울이 없었음에도, 여명은 놀란 발라구의 표정으로 피눈물의 환상이 잘 먹혔다는 걸 확인했다.
곧이어, 그는 검을 휘둘러 연막을 전부 밀어내며 소리쳤다.
“모두 집중하세… 크흠, 천것들아! 모두 일어나라!”
목소리는 어딘가 어색했지만, 연막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남 궁정백을 보며 목소리를 따질 인간은 이 골목에 없었다.
궁정백?
무릎 꿇어! 빨리!
눈치 빠른 여인들이 먼저 털썩 무릎을 꿇자, 눈치 없는 것들도 후다닥 무릎을 꿇었다.
여명은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들을 향해 말했다.
“천것들아, 저 여관 앞으로 집합해라! 지금 당장!”
여인과 아이들은 겁을 먹은 듯 손발을 꼼지락거리면서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왜 저러나 하니, 시체가 가득한 여관 주변을 보고 겁을 먹은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여명이 한 마디 더하려는데, 갑자기 발라구가 땅을 쿵 내려치며 소리쳤다.
“이 잡것들이 감히! 궁정백님의 말 못 들었느냐?!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하나하나 포를 떠주마!”
그제야 여인들은 대답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여관 쪽으로 내달렸다.
여명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발라구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 이런 연기를 하시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
요새화된 여관 3층, 가장 큰 침대가 놓인 방.
세티는 창가에 앉아 여관 정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문의 분위기는 조금 전 격전을 증명하듯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요제프와 그의 부하들은 시체를 치우고 있었고, 꾀죄죄한 꼬맹이들과 여인들이 흙 주머니를 옮기며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광경.
하지만 세티의 눈길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남 궁정백…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빌린 네티가 염동력으로 텐트를 만드는 모습.
나무 기둥을 동그랗게 쌓고, 그 위에 방수천을 덮은 간이 텐트는 사막 유목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물론 진짜 유목민 텐트와 비교하면 기껏해야 반의반 토막도 되지 않았으나, 다르게 말하면 사람 한 명쯤은 충분히 잘만한 공간이란 뜻이기도 했다.
피난민에게는 나름 훌륭한 잠자리라 할 수 있었는데…
“…저거, 낭비 아닐까?”
세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여명을 담았다.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낭비지.”
“…흐응?”
“하지만 필요한 낭비야.”
세티는 어디 설명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여명은 주먹만 한 세계수의 결정을 품에서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 결정을 소화 시키는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글쎄, 상식적으로 오 년 넘게 걸리겠지만…”
너는 상식 밖에 있잖아? 세티가 굳이 말하지 않는 뒷말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여명은 작게 미소지었다.
“만주에서 손톱만 한 크기를 소화하는 데 삼 일이 걸렸어. 내가 그사이 강해진 걸 감안해도… 이 결정 전체를 소화하려면 한 달은 너끈히 걸리겠지.”
여명의 목소리를 따라, 세계수의 결정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한 달은 너무 길어. 아마 그 전에 카할 마그두가 우리를 찾겠지.”
“…그렇겠지.”
카할 마그두. 지하 무기고에서는 탱크로 밀어버렸지만, 만에 하나 녀석의 본체와 만났다면?
아무리 못해도 일행 중 하나는 죽었으리라. 적어도 지금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적.
여명은 결정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 이 결정을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로 쪼갤 거야. 그러면… 소화하는데 넉넉잡고 삼일 정도 걸리겠지.”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기겁할 이야기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만한 결정을 소화하는데 일 년은 족히 걸릴 테니까.
그러나 여명은 이미 세계수에게 허락을 받은 몸, 3일도 최대한 길게 잡은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게 바깥에 피난민들을 받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결정을 소화하는 동안, 저 사람들을 조기 경보기로 쓸 거야.”
경보기? 세티는 창문 밖 텐트가 여관의 담장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걸 확인했다.
“쥐 수인들이 오늘처럼 무고한 사람들을 고기 방패 삼아 공격하지 말란 법 없어. 저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공격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겠지.”
“….”
“뭐, 그리고 너랑 네티, 그리고 핀엘까지 있지만… 한 손으로 열 손 못 막는 법이잖아?”
세티는 반박하지 않았다. 요제프의 부하와 발라구를 전부 합쳐도 여관을 지키는 사람은 스무 명이 넘지 않았다.
무장이나 질을 따지자면 충분한 숫자였으나, 양이 부족한 건 그 자체로도 약점이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세티는 그제야 여명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텐트와 식량을 나눠주면 저 사람들도 어느 정도 싸우긴 하겠네. 전투력은 기대 못해도,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비도 시킬 테고.”
고작 3일의 안전을 위한 투자. 낭비도 맞았고, 충분한 투자도 맞았다.
단지…
“…그런 거라면 다른 깡패를 고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여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티, 넌 이 도시에서 고용한 사람을 믿을 수 있어?”
“아….”
믿을 수 없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여기는 위아래가 전부 썩은 도시였으니까.
“머릿수를 채울 수 있으면서도, 연막탄 정도는 터트릴 수 있는 사람들… 확실히, 당장 저 사람들이 딱이긴 하네.”
세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번 일이 여명 나름의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믿기로 했다.
플레이어를 죽인 뒤, 그의 마음속 복수심이 조금은 누그러든 걸까?세티는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그가 제 몸을 태우는 불이 되지 않기를, 복수 끝에 행복을 찾기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가볍게 창가에서 일어나 여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결정은 언제 먹을… 아, 지금 당장 먹겠구나.”
그는 강해지는 부분에서만큼은 언제나 다급했다. 세상이, 주변 상황이 언제나 그를 다그쳤기에.
“…걱정하지 말고 먹어. 내가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보통은 반대 아닌가?
여명은 작게 미소 지으며 결정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파삭 소리와 함께 결정이 갈라지며 그 틈에서 약지만 한 크기의 조각이 튀어나왔다.
여명은 남은 결정을 챙긴 뒤, 튀어나온 조각을 집었다.
하지만 결정을 바로 먹진 않았다. 그 대신, 여명은 조용히 세티의 등을 두들겼다. 그녀가 더욱더 그를 강하게 끌어안은 까닭이었다.
선명한 온기, 부드러운 살 내음. 세티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 이상을 원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될 테니까.
짧은 정적이 흐른 후, 세티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방을 나섰다.
여명은 문고리를 잡은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발라구 너무 갈구지 마.”
“그럼 연막탄을 터트린 그 여자를 갈굴까?”
“….”
“역시 발라구를 혼내는 게 맞지?”
세티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잠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던 여명은, 그대로 세계수 결정을 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