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63)
을 위한 세계는 없다-163화(163/817)
〈 163화 〉 과거의 유령, 현재의 인연 (2)
* * *
***
여명은 침대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방의 창문 너머에서는 수많은 발소리와 요제프의 고함 소리, 그리고 당황 섞인 발라구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고, 그의 몸에서 일렁거리는 마나 또한 격렬하기 그지없었지만…
여명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심재좌망(心??忘).
파양결속에서 깨달은 진의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태풍 속 소나무였고, 파도 앞의 바위였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명상에 빠져있었을까?
어느 순간, 위장 속에 있던 세계수의 결정이 녹아내리며 그의 몸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결정은 정순한 마나의 결정체.
마나를 머금은 동물의 내장이나, 열매 같은 다른 영약들과 달리 결정은 순식간에 여명의 몸을 가득 채웠다.
본래라면 이 상황에서 세계수의 의지와 힘겨루기하며 마나를 흡수해야 했겠지만, 여명은 이미 세계수에게 인정받은 자.
정순한 마나는 순순히 여명의 몸속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몸속 마나가 반발하거나, 흡수를 방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었다.
여명은 세계수가 아니었고, 피와 살로 이루어진 그의 육체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를 견디지 못했으니까.
넘치는 마나가 몸을 비집고 들어온 순간, 가장 먼저 실핏줄들이 우수수 터져나갔다.
그다음으로 근육이 뒤틀리고, 동맥이 찢어지며 내출혈이 일어났다.
울컥, 몸 안팎으로 피가 흘러내린다. 신경계가 발작하며 머리가 하얗게 물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치민다.
당장이라도 흡수를 멈춰야 했으나, 여명은 마나를 억누르긴커녕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뒀다.
다른 초인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만한 광경.
그는 그저 견뎠다. 버티고, 또 버티다가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잊었다.
그렇게 감각을 잊고, 자신마저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흐른 뒤.
마나가 그의 몸 곳곳에 단단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얼어붙었던 살에 생기가 돌아오고, 찢어진 혈관들이 제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몸 곳곳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오다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여명은 몸 주변에서 일렁거리던 마지막 마나를 후욱 밀어내며눈을 떴다.
아직 밤인 건지,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눈동자로, 방을 채운 어둠이 담겼다.
짧은 성취감, 그리고 그보다 조금 긴 침묵.
잠시 후, 여명은 이 어둠이 자연스러운 밤의 어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미그니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검은 드레스 자락이 펄럭였다.
***
『오랜만이로구나, 나의 간택자.』
“….”
이번에는 세티의 몸을 빌리지 않은 걸까?
저번보다도 더욱 어둠과 동화된 미그니움의 모습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명은 그녀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미그니움의 손에는 플레이어의 잘린 머리가 들려 있었으니까.
“…왜 찾아온 거냐.”
『내가 누군지 잊었느냐? 간택자여, 나는 오직 바라기만 하는 이 세상의 저열한 신들과 다른 존재이니.』
“….”
『그대의 공물에 걸맞은 대가를 내려주러 왔노라.』
공물이라니?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그녀는 플레이어의 머리를 보란 듯 흔들어대며 웃었다.
『신의 힘을 세 개나 다루던 운명의 주인. 최고의 공물이로다.』
“…신의 힘?”
미그니움은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세상 모든 걸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
『무엇이든 죽이기만 하면 강해지는 육체.』
『아무 조건 없이, 무엇이건 담을 수 있는 아공간.』
『이게 신의 힘이 아니면 무엇이 신의 힘이겠느냐?』
상태창, 경험치, 그리고 인벤토리.
별다른 설명이 없었음에도,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미그니움이 가리킨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떻게?
그가 작은 혼란을 느끼는데, 미그니움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그리고 플레이어의 머리를 내밀며 속삭였다.
『나의 간택자, 내 직접 그대의 선택을 도와주려 했건만…』
“…?”
『그대는 이미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구나. 아주 좋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내 기꺼이 그대에게 대가를 내리노라.』
미그니움의 손이 그의 뺨을 쓸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손에선 어떠한 감촉이나 열기도 느낄 수 없었다.
여명은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문뜩 피눈물의 열쇠 속에서 봤던 살기를 떠올렸다.
비전 유물의 환상이 끝나기 직전, 그에게 가방을 던져주던 청소부 모습의 자신.
‘…그 가방이 인벤토리였나?’
살기가 어떻게 그걸 알고 선택한 거지? 여명의 의문이 길어지려는 찰나.
미그니움의 그림자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 잠깐을 버티질 못하다니, 이래서 현실이란.』
“….”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녀에게서 당황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그니움은 느긋하게 잘린 플레이어의 머리를 어둠 사이로 집어 던진 뒤, 여명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나의 간택자, 시간이 남으니, 내 특별히 조언해주마.』
『절대로 타협하지 말거라. 이 땅의 신들이 그대를 주시하고 있으니.』
***
만남과 마찬가지로, 미그니움과의 이별은 갑작스러웠다.
신들이 무엇인지, 인벤토리는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여명이 무어라 질문하기도 전에, 그녀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
여명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창밖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달빛과 횃불, 그리고 전구의 빛이 뒤섞인 자연스러운 밤의 어둠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의 어둠.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가에 섰다.
도시는 고요했지만,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도시 곳곳에는 화재의 흔적이 선명했고, 골목에는 바리케이드가 가득했으니까.
잠깐의 휴식기, 혹은 폭풍 전의 고요.
여명은 시선을 돌려 여관 앞 텐트촌을 확인했다. 다행히 큰 싸움은 없었는지, 텐트들은 비교적 멀쩡했다.
외곽 텐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쥐 수인의 시체가 쌓여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었다.
‘…일이 잘 풀렸네.’
여명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복도로 나갔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문 앞에 있던 누군가가 움찔 놀라며 총을 들었다. 세티보다 조금 더 연한, 하늘색 눈을 가진 소녀.
그녀를 본 여명이 물었다.
“네티. 불침번 중이야?”
“예? 예, 십분 뒤에 언니랑 교대… 아니, 형부, 결정은 다 소화하셨어요?”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네티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엘프도 아닌데… 비결이 뭐예요? 전 지하에서 먹은 영약도 아직 다 소화 못 했는데.”
“…그냥 해보니까 되더라.”
“오… 최악의 대답이네요. 형부만 아니면 확 쏴버리는 건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오다가, 갑자기 확 고개를 돌리고 뒷걸음질 쳤다.
“으엑, 형부 대체 뭘 했길래 냄새가…”
“냄새?”
여명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그의 옷에는 검은 얼룩이 가득했는데, 전부 피와 오물이 말라붙은 듯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진짜 영약 한 번 제대로 드셨… 웁!”
“…그렇게 심하냐?”
“코가 썩을 거 같아요! 언니 만나기 전에 샤워부터 하세요! 갈아입을 옷은 제가 챙겨갈 테니까.”
네티는 코를 막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여명은 순순히 화장실로 향하면서도, 틈틈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얼마나 방 안에 있었던 거야?”
“대충 이틀 반 정도? 정확히 계산하면… 어디 보자, 발라구가 언니한테 혼나고부터 대충 육십 시간 정도 흘렀어요.”
“그 사이 공격해온 상대는?”
“쥐 수인들이 두어 번 왔어요. 아이들이 골목에서 대기하다가 신호탄 터트려서 피해는 거의 없었구요.”
예상외로 큰일은 없었다. 여명은 안도감 반, 걱정 반을 삼키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비누 다 써도 되니까, 제대로 씻고 1층으로 오세요!”
네티의 당부를 신호 삼아 샤워를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말라붙은 피딱지와 오물들은 쉽사리 씻겨나가지 않았다.
단순한 피와 오물이 아닌 건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나, 비누를 두 개를 다 쓰니 그나마 사람 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튼, 샤워를 마친 여명은 네티가 화장실 문 앞에 둔 옷으로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홀에는 네티가 불러 모은 일행들이 둥그렇게 탁자에 모여 있었다.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는 발라구와 권총을 닦고 있는 요제프, 삐딱하게 벽에 기대고 있는 핀엘과… 세티.
“여명, 몸은 어때?”
“지켜준 덕분에.”
이틀간 잠도 자지 않고 방문을 지킨 건지,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피로가 느껴졌다.
여명이 애틋함을 느끼며 세티의 손을 붙잡으려는 순간.
감자와 스팸이 담긴 그릇을 옮기던 네티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스킨십은 단둘이 있을 때만! 지금은 식사랑 보고부터!”
“….”
동생의 지적에 세티와 여명은 피식 웃어버린 뒤, 나란히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감자를 집어 먹기 시작할 때쯤.
외팔이 엘프, 핀엘이 입을 열었다.
“동 궁정백과 쥐 수인 군단이 도시 주요 거점 대부분을 점령했다. 북부 역, 하수도, 중앙 시장…”
“서 궁정백은 실종. 그 휘하 마법사단은 남 궁정백에게 붙었다. 남 궁정백은 궁정에서 농성 중이다만… 큰 의미는 없다.”
“쥐 수인들 대부분은 북부 역 복구와 점령군 노릇을 하는 데 투입되고 있다. 덕분에 이 여관도 아직 버티고 있지.”
이틀간의 상황 보고. 여명은 보고를 들으며 모자랐던 식사를 채우려는 듯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다.
눈치 빠른 발라구가 부엌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며, 여명이 물었다.
“지하 무기고는?”
“녀석들에게 먹혔다. 쥐 수인들이 무기를 꺼내오고 있어.”
“…탱크도?”
“탱크? 그건 모르겠군. 난 멀리서 염탐만 했으니… 하지만 쥐 수인들이 탱크까지 조종할 수 있을 거 같진 않군. 애초에 그럴 지능이 안 돼.”
그나마 탱크랑 싸울 일은 없는 건가? 여명은 탁자를 두들기며 눈을 빛냈다.
잠시 후, 발라구가 접시 가득 스팸을 담아올 쯤, 누군가 여관 문을 두들겼다.
똑똑.
“…분명 여관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여관 앞에 텐트를 친 여인이나 꼬맹이라고 생각한 걸까? 발라구는 음식을 내려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여명을 비롯한 초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모두 뭔가를 느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바라봤다.
똑 똑 똑!
그사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더욱 다급해졌다.
발라구가 가서 문을 열자 역시나, 아이를 안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것도 처음 연막탄을 터트렸던 바로 그 여자.
“셀리나, 이렇게 룰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분명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여관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발라구가 설교하려 하자, 셀리나라 불린 여인이 다급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 급한 일 때문에 왔어요! 진짜 급한 일이에요! 저기, 저것 좀 보세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분명 조금 전까지 없던 무언가가 달빛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푸른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원형 마법진.
“이런 미친…”
마법사의 노예 노릇을 하느라 어느 정도 마법진을 읽을 수 있던 발라구는 침을 삼켰다.
“저, 저기 여러분? 지금 바깥 하늘을 좀 보셔야겠습니다.”
1층에 있던 모두가 여관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자, 발라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저, 제 눈이 정확하다면, 사자 부활, 시체 조종, 그리고 광역… 주문으로 엮은 마법진 같습니다.”
발라구는 스스로도 못 믿는 눈치였으나, 여명은 그의 해석이 옳다고 확신했다. 저 푸른 불꽃은 분명 카할 마그두의 불꽃이 틀림없었으니까.
“…저 마법진이 발동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여명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발라구가 아닌 의외의 장소에서 돌아왔다.
그어어…
여관 입구 너머, 대충 파묻어 놨던 시체들이 기괴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