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6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68화(168/817)
〈 168화 〉 과거의 유령, 현재의 인연 (7)
* * *
드레이테리얼의 도심과 지하 무기고 사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지하 벙커.
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스탈린카, 흔히 소련 인민복이라 불리는 옷을 입은 쥐 수인이 벙커 안으로 들어왔다.
“제 1 서기 각하, 승부가 났습니다.”
쥐 수인은 경례하며 말했다. 일반적인 쥐 수인과 달리 어투가 몹시 매끄러웠다.
“벌써? 승자는?”
쥐 수인의 말을 받은 건 벙커 정 가운데,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있는 노인이었다. 도시의 시민들에게는 동 궁정백이라 불리는 자.
“붉은 용입니다.”
“…해골이 졌다? 전부 예상과 다르군.”
노인이슬쩍 미간을 찌푸리자, 쥐 수인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외부인의 개입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외부인이라.”
“용의 해방자, 천여명이 해골용의 심장을 베었습니다. 저희 예상으로는, 붉은 용은 천여명이 만주에서 살려줬던… 오르세 타불인 것 같습니다.”
“으음… 그 외에는?”
“대물 저격총으로 무장한 사제와 까마귀 수인을 확인했습니다만, 정체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동 궁정백은 잠시 말을 아꼈다.
그가 뭔가를 고민하듯 주먹을 쥐락펴락하자, 쥐 수인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용을 요격하기 위해 무기고에서 개인용 대공 미사일을 꺼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30분 내로…”
“스트렐라.”
“예?”
“그 무기의 이름은 대공 미사일이 아니라, 스트렐라라네. 러시아어로 화살이란 뜻이지.”
“….”
“소련의 무기는 소련 이름으로 불러야지. 안 그런가?”
쥐 수인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듯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동 궁정백은 그런 쥐 수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가짜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다 해도, 진짜 인민의 군대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역시 믿을 건 초인적인 지도자뿐인가. 동 궁정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언을 용서하겠네. 하지만, 스트렐라 배치는 나중으로 미루게.”
“하오나, 각하. 이대로 용에게 도시의 제공권을 내준다면…”
“지금 제공권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
“중요한 건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다. 이 아래의 관제실만 장악할 수 있다면, 용 따윈 아무 상관도 없어.”
쥐 수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므로. 동 궁정백은 지하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말했다.
“전 병력을 무기고로 불러들여라. 난 관제실로 가겠다.”
***
하늘을 가리던 마법진이 사그라들고, 거리를 가득 채운 시체들이 우르르 쓰러졌음에도, 도시는 평화를 되찾지 못했다.
도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 때문에?
아니, 도시를 점령한 쥐 수인 군단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저것들도 시체와 다를 것 없는 존재로군. 지구의 기술과 마도학으로 만들어진 가짜들.]오르세 타불은 도시 곳곳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쥐 수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언데드들과 싸우며 수가 줄긴 했어도, 여전히 수천 마리가 넘는 군세.
[카할 마그두와 쥐 수인… 성녀가 내게 부탁한 이유를 알겠다.]용이 그렇게 말하자, 그의 어깨에 타고 있던 여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새삼스럽지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으므로.
이참에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그가 도시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사이, 붉은 용이 먼저 말했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다. 용에게 은혜란 천금과 같으니, 천여명, 나는 그대가 베푼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성녀께서 용 비늘 산맥까지 찾아와 그 대가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만.]오르세 타불은 그렇게 말하며 쥐 수인들이 모인 곳을 향해 화염 마법을 날렸다.
대규모 포격처럼 땅으로 떨어진 마법들은 용을 노려보던 쥐 수인들을 노릇한 숯불구이로 만들었다.
겁을 먹은 녀석들은 호들갑을 떨며 하수도 아래로 도망치거나, 시민들이 모인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을 방패로 쓰려는 생각인가?’
역겨울 정도로 영악한 놈들.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시민 따윈 상관하지 않고 쓸어버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그는 용에게 애꿎은 민간인 학살을 부탁할 정도로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중요한 건 쥐 수인 군단이 아니라…
“오르세, 저기, 찾았다.”
여명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그의 시야 끝, 건물 폐허 위에서 죽은 듯 앉아있는 세티가 보였다.
흡사 배터리가 방전된 듯한 모습이었는데, 아마 혼자서 연전을 겪느라 체력이 거의 다 바닥난 것 같았다.
[여기서 땅으로 내려가면 되겠는가?]마찬가지로 세티를 발견한 용의 제안에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내려갈 수 있으니.”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얼음송곳 주문을 엮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용은 땅으로 내려가는 대신, 슬며시 속도를 늦췄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 나는 남은 가짜 수인과 시체들을 처리하고 있겠다.]다음 순간, 여명은 용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뿌려놓은 얼음송곳을 발아래로 옮긴 뒤, 염동력으로 단단히 붙잡아 발판으로 만들었다.
탁, 탁, 탁.
다른 마법사들이 봤다면 기겁할만한 마나 응용력. 여명은 수십 개의 얼음송곳을 연달아 펼치며 아래로 내려왔다.
이윽고 세티의 뒷모습이 손바닥보다 크게 보일 때쯤.
여명은 훌쩍 뛰어올라 그녀 옆에 착지했다. 가벼운 발소리가 울리자, 세티가 고개를 돌렸다.
“…설마, 용에서 뛰어 내린 거야?”
그녀는 멀어지는 오르세 타불과 여명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여명은 대답 대신 얼음송곳 하나를 띄워 그 위에 올라탄 뒤,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씨, 마법 배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묘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서, 저 용이 만주에서 만났던 그 용이야? 용 비늘 산맥의 수호자, 드워프 왕의 친구?”
“응. 그 용이야. 이름은 오르세 타불.”
“와…어쩌다 여기에 온 거야? 그것도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여명 네가 불렀을 리는 없고…혹시 주변에 있었던 거야? 운명처럼?”
“아, 그건…”
여명이 대답하려는 그때, 저편에서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에티!!!”
무엇보다 확실한 정답. 세티의 고운 미간이 확 찌그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대물 저격총을 들고 오는 성녀와 네티를 확인한 뒤, 눈을 비볐다.
“성녀? 쟤가 왜 여기있… 아, 맞다. 예지.”
혼자 답을 찾아버린 세티는 푹 한숨을 쉬더니, 이마를 짚었다. 여명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아 성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있는 폐허까지 올라온 성녀는 대물 저격총을 집어던지고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렇게 동시에 두 사람을 끌어안은 성녀는 아무 말도 없이 꽈악 팔에 힘을 줬다.
그 어떤 인사보다도 확실한 행동.
세티는 말없이 성녀를 안아줬고, 덩달아 두 사람 사이에 낀 여명은 양팔을 위로 올렸다.
“…뭐꼬?”
훈훈한 모습이었으나, 성녀의 짐가방을 들고 마지막으로 폐허로 올라온 네티 입장에선 황당한 광경이기도 했다.
그녀는 눈살을 팍 찌푸리고 세 사람을 훑었다.
“형부… 제가 지금 뭘 보는 거죠?”
“….”
친구 간의 재회라기엔 너무나 노골적인 포옹이었기에, 여명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세티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정작 성녀는 고개를 획 돌렸다.
“…형부? 여명이 왜 니 형부야?”
“…형부를 형부라 부르지, 뭐라 불러요?”
뻔뻔한 네티의 대답. 두 사람을 끌어안은 성녀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세티와 여명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서, 설마… 너, 너희 내가 없는 사이에 겨, 결혼했어?”
“….”
“아,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농담이지? 하, 우리 네티가 농담을 엄청 잘하네?”
용을 봤을 때보다도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여명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누르며 두 사람의 품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성녀는 그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야, 천여명! 너 왜 도망가!?”
***
짧은 휴식, 그리고 해명이 끝난 뒤.
일행은 지하 무기고로 향했다. 정확히는, 처음 목적지였던 남 궁정백의 지하 창고 입구로.
중간중간 쥐 수인들과 마주쳤음에도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쥐 수인들은 여명을 보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으니까.
“…큰 싸움이 날지도 몰라. 체력이 부족한 사람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찌그러진 컨테이너 사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여명이 말했다.
물론 일행 중 누구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넷은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싸늘하고 텁텁한 공기와 함께 어둠이 계단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네티가 무기 가방에서 조명탄을 꺼내 불을 붙이고, 맨 앞에 선 여명에게 건넸다. 준비성 하나만큼은 그녀가 가장 나았다.
아무튼, 그렇게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자 작은 지하실이 나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전자기기와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군형 무전기와 끊어진 선들, 그리고 작은 모니터들까지.
아마 통신실로 썼던 공간인 듯싶었다. 남 궁정백의 지하 창고는 아마 통신실 인원들을 위한 비상 대피로였으리라.
일행은 별다른 감상 없이 방을 나섰고, 이윽고 익숙한 복도를 만날 수 있었다.
조명탄을 하나 더 터트린 네티는 복도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저번에 왔던 무기고랑 연금술 실험실 너머에 있는 아마 벙커 샛길 같은 곳인가 본데요.”
그녀의 말마따나, 저 너머에서 쥐 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여명은 녀석들과 싸우는 대신, 반대편으로 걸음을 돌렸다.
벙커의 가장 깊숙한 방이 있는 방향.
조심스러운 걸음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네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부, 이 아래에 정확히 뭐가 있는 건가요?”
형부란 소리에 성녀가 발끈하건 말건, 여명은 담담하게 답했다.
이제는 알려줄 때도 되었으니까.
“소련의 핵무기.”
“…네?”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장전된 핵탄두, 숫자는 적어도 열두 개 이상. 다탄두 미사일이라면 오십 개도 넘겠지.”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걸까, 네티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세티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조용히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남 궁정백이 말했던 발사 코드란 건 핵무기 발사 코드겠네. 여명, 넌 알고 있는 거지?”
“응.”
“….”
망설임 없는 대답. 짙은 침묵.
그리고 일행이 걷는 복도가 지하로 향하듯 기울어질 때쯤.
세티가 다시 물었다. 일행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여명, 그 핵무기… 한국에 쏠 생각이야?”
히끅, 놀란 네티의 딸꾹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여명과 세티의 복수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네티의 이마로 식은땀을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아래로 떨어진 바로 그 순간.
여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 가능하면 안 쓸 생각이야.”
가능하면…? 성녀와 세티는 그 말을 각각 다르게 받아들였다.
쓰고 싶지 않다, 혹은 쓸 수 있다면 쓰겠다.
두 사람의 생각이 얽히고, 네티의 딸꾹질이 계속 이어지던 그때.
일행의 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은 아마 안에서만 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지, 열쇠 구멍이나 손잡이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올려보니, 정공법으로 뚫으려면 미사일조차 버텨낼 정도로 두꺼웠다.
어디까지나, 정공법으로는.
“모두 뒤로 물러나 있어.”
여명은 조명탄을 내려놓고 품에서 황금 옥새를 꺼냈다.
짧게 심호흡하고 옥새에 마나를 불어넣자, 그의 마나에 반응한 황금빛 마법진이 철문을 뒤덮었다.
번쩍!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문의 너머에서 끼기긱 소리가 들렸다.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
곧이어 문이 열리며 부스스 먼지를 피웠다. 여명은 가장 앞장서서 먼지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지난번에 본 탱크 보관소만큼이나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족히 수십 평이 될만한 커다란 공간. 하지만 미사일이 보관된 사일로는 아니었다.
미사일은커녕 단단해 보이는 중앙 벽면에는 거대한 모니터가 걸려있었다.
또한 그 앞에 늘어선 수십 대의 컴퓨터와 책상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관제실…?”
여명이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우주선이나, 비행기 관제실이 딱 이런 모습이었다.
‘…미사일 발사 관제실인가.’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여명은 즉시 관제실 정중앙, 유일하게 불이 들어온 모니터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모니터 옆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이걸로 세 번째로군. 다시 봐서 반갑네. 천여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