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0)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0화(170/817)
〈 170화 〉 누구를 위하여 가방은 열리나
* * *
황태자님께 삼가 아뢰옵니다.
(중략)
…저 멍청한 귀족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비료가 없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기차가 없어도 상인들은 물건을 팔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다릅니다.자유는 마나와 같아서, 그것을 한번 맛본 자들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중략)
용사께서 마왕을 쓰러트렸어도 마경은 여전히 남아있듯, 스탈린이 뿌린 공산 마족들 또한 여전히 암약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니 부디, 혁명의 불씨가 퍼지기 전에 평화의 횃불을 밝히시옵소서.
『마탑주 마하간이 암살당하기 13일 전,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
제 1 서기, 비코프가 한 걸음 내디뎠다. 기다란 수염 아래 감춰진 입술을 달싹이면서.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로군.”
몸에 두른 살기 때문일까. 비코프의 눈에서는 붉은 안광과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동시에 인민복 아래 숨겨져 있던 근육들이 부풀어 오르고, 자잘한 상처들이 재생되며 주가시빌리 유파의 힘이 깨어났음을 증명했다.
여명은 그에 발맞춰 마리지천신공을 일으켰다. 그의 몸 위로 유형화된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를 본 비코프는 흥미로운 듯 눈썹을 기울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무기고에 있는 핵무기로 다른 궁정백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 했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군. 알고 싶지도 않고.”
그 대답에 비코프는 눈웃음을 지었다. 눈가 주름을 따라 피눈물이 고이는, 섬뜩한 웃음.
“서 궁정백, 지구 문화에 빠진 그 얼간이는 핵무기를 팔아 지구의 귀족이 되려고 했다네. 하, 지구의 귀족이라니. 민주주의를 뭘로 보고.”
“….”
“그리고 남 궁정백은… 뭐랄까, 고전적이었지. 그는 제국 황제에게 핵무기를 바쳐 제국이 미국과 동등한 국가가 되길 바랐다네. 껍데기만 남은 제국이 뭐라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여명은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비코프를 노려봤다.
다른 궁정백들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건,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뜻.
여명은 어렵지 않게 이 도시의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눈앞의 빨갱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시에 세계수의 결정과 마탑주의 비전유물, 그리고 핵무기가 있다는 소문을 뿌린 것도.
핵무기에 미친 다른 궁정백들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전부 비코프의 의도였으리라.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이 도시엔 혁명이 필요하기 때문일세.”
“혁명…?”
“혼란은 혁명의 씨앗이라네. 외부인들이 혼란을 뿌리고, 궁정백들이 혼란을 막긴커녕 오히려 그 혼란을 부추긴다면… 이 쓰레기 도시의 시민들이 가만히 있었겠나?”
“….”
“마지막에 내가 쥐 군단을 이끌고 혼란을 종식 시키려 했지만…”
“…우리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졌군.”
정확히는, 세티가 퍼트린 소문이 문제였으리라.
하수도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도시민들은 혁명을 일으키긴커녕 보물에 눈이 멀었으니까.
“그래, 잘 아는군. 자네가 퍼트린 소문 덕분에 혁명은 시작도 못하고, 애써 숨겨온 쥐 군단을 먼저 움직여야 했다네.”
“….”
“다행히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라네. 지금이라도 도시 위의 용과 자네를… 처리하면 되겠지.”
비코프는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았다.
오른 주먹을 높게, 왼 주먹은 낮게 들고 넓게 벌린 발은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도록 마나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단순히 빠르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지르기 위한 자세.
아카데미에서 알려주던 기본 무술보다도 엉성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여명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 엉성한 자세가 어떤 공격으로 이어질지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관제실 입구에서 기도인지 욕설인지 모를 성녀의 목소리와 총소리가 들려왔으나, 두 사람의 귓가에는 오직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들렸다.
길어지는 호흡, 수축하는 근육, 그리고 흘러내리는 땀과 피눈물.
다음 순간, 비코프의 피눈물과 여명의 땀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진다.
검을 든 여명의 리치가 조금 더 길었으나, 먼저 공격한 건 비코프였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
그의 주먹은 바로 여명의 얼굴을 노렸다. 마나 섞인 살기가 바람을 일으키고, 여명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여명은 당황하지 않고 검으로 주먹을 베어냈다.
비코프의 주먹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으나,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명의 품으로 파고들며 왼손으로 하체를 노렸다.
정확히는, 성기를.
여명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며 그 공격을 피했다. 다분히 감정 섞인 움직임이었고, 자연스레 짧은 틈이 드러났다.
비코프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시 허리를 크게 돌리며 돌려차기로 여명의 손목을 후려쳤다.
우드득 비코프의 발에 실린 살기는 여명의 마나를 뚫고 손목뼈를 박살 냈다.
부러진 뼈가 근육을 찌르고, 손아귀에서 힘이 탁 풀렸다. 검을 놓친 손이 허전했다.
목울대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쉴 틈은 없었다. 비코프가 몸을 회전하며 손날을 뻗어왔으니까.
여명은 즉시 비각술을 펼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살기를 머금은 손날이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여명은 발바닥으로 땅을 박차며 다리를 휘둘렀다.
백핸드스프링 킥이라고 해야 할까, 여명이 뒤로 돌며 올려친 발은 그대로 비코프의 턱을 후려쳤다.
“큭!”
예상외의 일격을 허용한 비코프의 공격이 멈춘 사이, 뒤로 한 바퀴 돈 여명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
턱뼈가 부러진 건지, 비코프는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여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들거렸다.
“용과 싸우며 마나를 소비하고도 이 정도라… 멀쩡한 상태에서 싸웠다면 아슬아슬했겠군.”
“….”
“하지만 검사가 검을 놓친 이상, 승산은 이미 기울어졌다네.”
그 말을 끝으로, 비코프는 다시 달려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슬쩍 확인한 여명은 손날을 펼쳐 대응했다.
그러나 검이 없는 이상 근접전은 필연.
손날을 몇 번 교환하기 무섭게, 여명과 비코프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붙게 되었다.
둘 중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전투는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난타전으로 흘러갔다.
손날이 어깨를 베고, 주먹이 얼굴을 강타한다.
코뼈가 부러지는 사이 팔목을 찍어 으스러트리고, 무릎으로 복부를 차고…
그때마다 신음 대신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주변의 책상이 우르르 무너지고, 모니터가 날아다녔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서로를 향해 살기를 일으켰다.
비코프는 주먹을 내지르며 외쳤다.
“이 살기! 이 재생력! 누가 보면 자네가 주가시빌리인 줄 알겠군!”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여명은 왼발을 휘둘러 비코프의 하체를 후려쳤다.
무릎에서 우드득 소리가 울리며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비코프는 오히려 허리를 기울이며 여명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
“윽!”
여명은 처음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물러나려는 다리를 붙잡고, 머리가 휘청거리는 반동을 이용해 비코프의 머리에 똑같이 박치기를 날렸다.
으그극 누구의 이마가 부서지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여명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비코프는 휘청거리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애써 재생된 코뼈가 다시 부러지는 감각과 동시에, 발끝에서 비코프의 성기를 후려친 감각이 느껴졌다.
“크흐윽!”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둘 다 피로 흠뻑 젖은 꼴이 몹시 살벌했는데, 가랑이를 부여잡은 비코프 쪽이 조금 더 심각해 보였다.
“…방금 그 일격, 내 공격을 따라 한 건가?”
비코프는 여유로운 말투로 물었다. 물론, 피눈물을 질질 흘리며 하체를 붙잡은 꼴로 여유를 부려 봐야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여명은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좋은 게 있으면 나눠야지. 그게 공산주의 아닌가?”
“…허허.”
“그래서, 나눠줄 건 그게 끝이냐?”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도발적인 말.
비코프는 황당하다는 듯 웃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가시빌리의 무서움이 뭔지 모르는군.”
그의 몸 주변에서 아른거리던 살기가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몸 곳곳의 상처로 흘러들었다.
곧이어, 상처에서 치이익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상처가 재생되는 게 아닌가?
여명의 재생속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재생력이 아니라, 재생한 뒤 남은 마나였다.
‘…왜 줄어들질 않지?’
아니, 마나뿐만이 아니었다. 비코프의 몸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살기는 처음 전투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 늘었으면 늘었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눈치챘는가?”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자, 비코프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입가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피눈물과 각혈. 모두 마나가 넘쳐나서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설마…?
“내가 용을 무서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걸세.”
그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전에, 비코프는 다시 여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코프는 이전 격돌처럼 얼굴부터 노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는 것.
그러니 여명의 대응도 처음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염동력을 펼쳐 주먹을 끌어당긴 뒤, 진각을 밟았다.
쿵!
발아래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관제실 전체에 진동이 퍼졌다. 염동력에 저항하던 비코프는 아주 잠깐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마법과 비각술의 오의까지 펼쳐 만든 아주 짧은 틈.
여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코프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주먹? 발차기? 아니면 손날?
비코프는 여유를 가지고 여명이 파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급소는 어디라도 막을 자신이 있었고, 급소가 아닌 곳은 얼마든지 재생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여명이 펼친 공격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손도, 발도 쓰지 않았다. 파도치는 것 같은 마나를 일으켜, 그대로 유형화된 살기에 마나를 부딪쳤다.
!
팔다리로 펼치는 무술이 아닌, 직접 마나를 겨루려는 건가?
하긴, 대체 무슨 영약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천여명의 마나는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다른 상대였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공격이었겠으나…
‘주가시빌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비코프는 승리를 확신했다.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군. 주가시빌리의 진정한 능력을.”
“….”
두 사람의 마나가 서로를 밀어내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잠시 여명이 우세를 점하다가, 주가시빌리의 붉은 마나가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했다.
비코프는 이를 악문 여명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주가시빌리는 살기 자체를 마나로 바꿀 수 있다네. 자신의 것이건, 상대의 것이건 상관없이.”
살의를 품을수록 늘어나는 마나. 그것이 소련이 추구한 살인 무술의 오의였다.
“간단한 진리지. 효율적인 살인을 위해 빠른 속도와 강한 힘을 얻었으면, 마지막으로 필요한 게 무엇이겠나?”
소련의 답은 간단했다. 유지력.
수십 번 공격을 펼쳐도 줄어들지 않는 힘. 수십 킬로를 달려도 지치지 않을 체력! 그것이야말로 완성된 주가시빌리였다.
“상대를 알지 못한 것, 그게 자네의 패착일세.”
비코프는 자신만만하게 여명을 짓눌렀다. 혹시 여명의 동료들이 개입하지 않을까, 여유롭게 문까지 확인했다.
걱정과 달리, 세 명의 소녀들은 쥐 수인 군단을 막느라 이곳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저 소녀들은 천여명을 끝장낸 뒤, 천천히 처리하면 되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비코프는 고개를 돌려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명을 바라봤다.
그의 마나는 거의 보이지 않고, 주가시빌리 특유의 붉은 마나만이 그의 주변에 가득했다.
아쉽지만 이제 끝내야겠군.
비코프는 손날을 들어 꼼짝 못 하는 여명의 목을 내려쳤다.
그때, 여명이 고개를 들어 그의 손날을 피했다. 그리고 역으로 손날을 휘둘러, 비코프의 가슴을 깊게 베었다.
“커흑…!? 어떻게?”
비코프가 가슴을 부여잡고 물러나는데, 여명은 대답 대신 마나를 움직였다.
파도치는 파양결의 마나가 아닌, 살기로 붉게 물든 주가시빌리의 마나를.
“….”
비코프는 멍하니 허공에서 움직이는 붉은 마나를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만에 하나 천여명이 주가시빌리의 계승자라고 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 오의를 익히기 위해선 살기를 머리끝까지 채우고, 다시 살기를 제압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봤자,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은 엄연한 현실.
끝없이 공급되던 살기와 마나가 반으로 뚝 줄어드는 게 그 증거였다.
“…상대를 알지 못한 건 내 쪽이었나.”
비코프는 눈에서 흐른 피를 쓸어내며 덧붙였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질문을 받은 여명은 가라앉은 금색 눈으로 비코프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천여명.”
“….”
“지금부터 당신을 두들겨 팰 사람이다.”
***
네티는 관제실 철문이 열리는 걸 강제로 붙잡고 있었다.
사실 닫아버릴 생각으로 펼친 염동력이었으나, 그녀의 힘으로는 반쯤 열린 걸 멈추는 게 한계였다.
그나마도 성녀가 축복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1분을 넘기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 축복조차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우라! 우라!!
찌, 찍! 밀어! 밀어!
쏴! 쏘라고!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쥐 수인들의 고함, 그리고 철문 사이로 이어지는 총소리.
네티는 고개를 돌려 입구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언니와 성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거의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며 장전과 사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총과 탄환 대부분은 성녀가 등 뒤에 메고 있던 거대한 가방에서 꺼낸 것들이었는데, 대체 성녀가 저런 무기를 왜 들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저런 사격술은 어디서 배운 거지? 언니야 정부에서 강제로 배웠다지만, 성녀씩이나 돼서 사격을 배울 일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순간.
콰아앙!!
관제실 안쪽에서 폭발음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드디어!
‘형부.’
네티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녀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휘이익 날아와 철문과 충돌했다.
철문에 부딪힌 건 사람이었다. 그것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사람.
그가 철문 가득 피를 묻히며 아래로 떨어지자, 쥐 수인들과 일행 사이의 사격이 잠시 멈췄다.
짧은 침묵.
먼저 침묵을 깬 건 인민복을 입은 쥐 수인이었다.
“찌, 찍! 제 1 서기님! 서기님이 당했다! 구해라! 구해!”
녀석이 소리치자마자, 쥐 수인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수인들은 총을 집어 던지고, 비코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성녀가 사격을 가했지만,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격렬하게 달렸다. 어떻게든 제 1 서기님을 지키겠다는 듯이.
하지만 다음 순간, 녀석들은 일제히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티가 비코프를 인질로 잡았으니까.
“전부 멈춰! 더 다가오면 이 노인은 죽는다.”
철컥, 다 죽어가는 노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의 손을 올리는 모습이 몹시도 악랄해 보였다.
“…거참, 누구 언니인지.”
네티는 그제야 염동력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한계 이상으로 마법을 유지해서 그런가, 온몸의 근육이 저릿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형부가 관제실 정중앙 모니터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거 용케도 안 부서졌네?
이제 저곳에 코드를 입력하고 핵무기를 접수하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나리라.
네티는 싱글벙글 웃으며 언니와 성녀님의 곁으로 다가갔다.
탄피가 가득 굴러다니는 철문 앞. 세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여명은?”
“코드 입력하고 있어.”
세티와 성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행 모두가 드디어 끝을 떠올린 그때.
멱살을 잡힌 채, 머리에 총이 겨눠진 비코프가 웃었다. 그는 얼굴 모든 구멍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기에, 세티와 성녀는 미처 그 웃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티는, 피에 젖은가족의웃음을 기억하고 있던 네티는 그의 미소를 간파했다.
“…뭐야, 당신 왜 웃어?”
네티의 물음에 비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낀 네티는 기억을 되돌려봤다.
비코프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금 전 여명과 비코프의 대화까지.
그리고 불현듯,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 왜 형부한테 발사 코드 안 물어봤어?”
“….”
돌아오지 않는 대답. 네티가 다급하게 고개를 뒤로 돌리려는데, 비코프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잡았다.
“황제 축일.”
“…뭐?”
“내일이 바로 제국 황제의 생일일세. 이 땅의 온갖 귀족과 마법사들이 제국의 수도로 모이는 날이지.”
“….”
“내일 쏘는 게 베스트였겠지만… 방해꾼들이 내 상상 이상으로 강하더군.”
대체 무슨 소리야? 이상함을 느낀 세티가 비코프의 목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말해.”
“쿨럭, 무기고의 핵무기 전부를 발사하기 위해선 발사 코드가 필요하다네. 하지만 단 한발이라면?”
“….”
“정상 발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준비된 예비 미사일… 그건 현장 사령관이 당에서 지급된 임시 코드로도 발사할 수 있지.”
충격적인 고백을 들은 성녀가 숨을 죽였으나, 네티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 어떤 미친놈이 예비 미사일에는 핵탄두를 달아?”
“예비 미사일에… 쿨럭, 핵탄두를 다는 게 어려웠을 것 같나?”
“…그래도 소용없어. 임시 코드보다 발사 코드가 더 상위 코드니까. 형부가 당신보다 권한이 더 높은 거지.”
“크, 크흐흐…”
“그리고, 소련제 미사일은 액체 연료라 발사 준비에 수십 분은 걸린다고. 당신은 졌어.”
네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코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웃음을 참기 어렵다는 듯이.
“졌다고? 꼬마야, 나는 창작물 속 악당이 아니다. 수십 년을 준비한 계획을 너희가 막을 가능성이 있었다면, 내가 여태껏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시간을 끌었을 것 같으냐?”
“….”
“35분 전에 이미 입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