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1)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1화(171/817)
〈 171화 〉 누구를 위하여 가방은 열리나 (2)
* * *
***
“이 미친 빨갱이 새끼가…”
성녀는 리볼버를 뽑아 비코프의 머리를 겨눴다.
“제국 수도에 핵을 날리겠다고? 응? 지금 거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알고서 하는 말이야?”
차가운 총구가 피에 젖은 비코프의 이마를 꾸욱 짓눌렀다.
그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뚫어버릴 축복받은 탄환이 머리를 겨누고 있음에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압제자들이 모여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
“….”
“황제, 왕, 마법사, 기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두려워한 미국이 남겨놓은, 시대의 쓰레기들. 그들의 죽음을 장작 삼아, 이 땅에 다시 혁명의 불씨가 번질 걸세.”
성녀는 이를 악물었다. 안대 너머에 가려진 그녀의 눈이 떨렸다.
“그럼 일반인들은? 수도에 모인 무고한 사람들, 그 사람들도 프롤레타리아야! 프롤레타리아를 죽이는 게 혁명이야? ”
비코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후회하거나, 참회하는 걸까? 아니,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성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다섯 신의 경전이 아닌, 지구의 성경에 실린 구절.
비코프는 그 구절을 통해 일반인들을 죽어야 하는 밀알, 즉 대의를 위해 감내해야 할 희생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빨갱이 새끼가 감히… 성경을 운운해?”
어릴 적부터 온갖 종교의 성서를 읽고 배운 성녀는 즉시 비코프의 속뜻을 간파했다.
그녀는 기가 차서 입술을 씹었다. 성경으로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빨갱이가? 마르크스부터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떠들던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성녀의 분노와 상관없이, 비코프는 빙그레 웃었다.
“빨갱이에게도 종종 아편이 필요한 법이지. 그렇지 않나? 성녀?”
“….”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아쇠에 힘을 실었다. 이대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그때, 무기고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쿠구궁 하고 흔들리더니, 곧이어 관제실에서 가장 큰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일행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여명의 등을, 그리고 그 너머 관제실 벽면 모니터를 바라봤다.
반쯤 금이 간 커다란 벽면 모니터 위로, 발사대에 우뚝 선 미사일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여명과 일행이 앞서 지나온, 지하 무기고의 뒷길.
쿠구궁…!
발아래에서 올라오는 진동을 느낀 남 궁정백과 에카테리나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늦었군. 너무 늦어버렸어.”
남 궁정백은 이 진동이 미사일 발사의 진동이라는 걸 깨닫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지팡이를 꽉 잡았다.
“폐하… 죄송합니다. 소신이 실패하고 말았나이다. 제 불찰로 인해, 폐하께서 간악무도한입헌군주제에서벗어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늙은 궁정백은 눈물을 흘릴 것처럼 몸을 떨었으나, 정작 옆에 서 있던 에카테리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황제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하고 있지 않을 테니까.
늙은 나이는 둘째치고, 애초에 인간이 그랬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스탈린에게 엘릭서를 바치고, 변경백의 뒤통수를 친 인간.
그런 자가 핵무기 몇 개 생겼다고 미국에 대항한다? 잽싸게 미국에 팔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물론, 에카테리나는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복고주의자에게는 아직 이용 가치가 있었으니까.
“고해성사는 나중에 해. 아직 실패한 건 아니니까.”
“…뭐가 아직이란 말인가? 이미 미사일이 발사됐는데!”
에카테리나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이 커다란 곳에 미사일이 한 발뿐이겠어? 지금 발사한 건… 아마 발사 확인용 예비 미사일일 확률이 높아.”
“예비 미사일? 허, 내가 희망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로 보이는가?”
나이를 항문으로 먹은 건 아닌지, 남 궁정백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에카테리나는 짜증을 삼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희망이 싫다고 절망을 삼키면 안 되지. 잘 생각해 봐. 왜 지금 미사일을 발사했을까?”
“…자폭시킬 생각으로?”
“지구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핵무기는 발사되면 그걸로 끝이야. 자폭 버튼 같은 건 없어.”
“….”
에카테리나는 후우 한숨을 쉰 뒤 걸음을 옮겼다. 남 궁정백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나.”
“용과 싸우느라 지친 애송이들과 동 궁정백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둘이 공멸했다면 우리가 꽁으로 먹는 거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겼다면…”
“이겼다면?”
“글쎄, 힘들어지겠지?”
대답을 들은 궁정백은 제발 둘이 공멸했기를 바랐다.
부디 동쪽의 버러지와 천여명이란 애송이가 동시에 병신이 됐기를!
하지만 복도 끝에 다다라서 본 관제실의 광경은 그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피떡이 된 동 궁정백과 정문 바깥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쥐 수인들, 그리고 멀쩡한 천여명 일행까지.
“…쯧, 동 궁정백, 생각보다 무능한 인간이었네.”
에카테리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엄지를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엄지에서 피가 질질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대로 엄지를 들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아래로 떨어지던 피들은 중력을 거스른 채,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게 아닌가?
떠오른 피는 넓게 펼쳐지며 반투명한 막이 되었다.
“이건?”
“공간 차단 마법. 저격용으로 딱이지.”
그녀의 말대로, 막 너머로 마나는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늙은 남 궁정백조차 본 적 없는 특이한 마법.
에카테리나는 또다시 피를 쭉 뽑으며 말했다.
“힘들게 가야겠어.”
남 궁정백은 뽑아낸 피가 거대한 창이 되는 걸 보며 대답했다.
“…방법은?”
“저격. 당한 만큼 돌려줘야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안대를 찬 사제를 향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부터 이어진 악연.
“별내장은 싫어하겠지만, 기왕 꼬인 거… 거슬리던 년부터 처리하자고.”
***
날아다니며 도시의 남은 언데드와 쥐 수인들을 정리하고 있던 오르세 타불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하를 타고 올라오는 거대한 진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단순한 지진?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용의 감각이 쉴 새 없이 경고를 날리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지?
붉은 용은 지하로 내려간 천여명과 그의 일행들을 떠올리며 진동이 느껴지는 곳으로 날갯짓했다.
그렇게 거대한 몸체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길 잠시.
오르세 타불은 도시 외곽에서 자리한 작은 쓰레기장의 상공에 도달했다.
버려진 건축 자재와 폐기물, 심지어 동물의 사체까지 가득 쌓인 곳.
온갖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이 쓰레기장이 진동의 근원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언데드들이 쓰레기장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건가?
용이 그런 의심을 떠올리던 바로 그 순간.
쓰레기장 바닥으로 감춰져 있던 원형 뚜껑이 벌컥 열리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커다란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 자리하고 있는 건…
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사일이 발사됐다.
귀를 울리는 굉음, 사일로를 가득 채우는 불길.
불길 속에서 솟구친 미사일은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용이 불길함을 느끼고 미사일을 향해 마법을 펼쳤지만, 미사일이 가속하며 아슬아슬하게 범위를 벗어났다.
수십만의 죽음을 향해, 핵미사일이 발사된 순간이었다.
***
드레이테리얼의 모든 시민들은 하늘 위로 날아가는 미사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민 중 미사일이라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저것이 핵미사일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외팔이 엘프, 핀엘.
“…씨발.”
날아가는 미사일을 본 엘프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여관으로 몰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던 발라구는, 과묵한 엘프가 욕을 내뱉는 걸 듣고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핀엘, 저게 뭔지 아시는 겁니까?”
“…알다마다.”
핀엘은 하나만 남은 손으로 주먹을 꽉쥐고, 짧게 심호흡했다. 그는 최악의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저건 핵미사일이다. 저게 발사됐다는 건… 천여명이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아직 여명이 죽지 않은 건 분명했다. 지하에서는 아직도 세계수의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미사일 발사를 막지 못했다는 뜻인데…
핀엘은 여관의 남은 인원들을 죽 둘러본 뒤,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 오크, 그러니까 남 궁정백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있는 오크를 향해 말했다.
“발라구.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당장 다음 작전을 실행하자.”
“다음 작전이라 하시면…?”
“네 얼굴을 이용해 남 궁정백의 궁정을 점령한다.”
“….”
발라구는 숨을 삼켰다. 물론 여명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여관을 지킬 수 없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그들은 훌륭히 여관을 지켜냈고, 지금도 지켜내는 중이었다.
만약 지금 당장 남 궁정백의 궁전으로 간다면… 아이와 여자들이 따라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발라구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창문 바깥을 내려다봤다.
바리케이드에 붙어낸 좀비를 밀어내는 꼬마와 총을 발사하는 여인, 그리고 필사적으로 부상병을 옮기는 창녀까지.
그곳에 그의 도움이 필요한 나약한 사람은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발악하는, 도시의 시민들뿐.
발라구는 뭔가를 깨달은 듯 주먹을 펴고, 핀엘에게 물었다.
“…여명 씨와 세티 양을 도울 수 있는 일입니까?”
“이 여관에 처박혀있는 것보다는 훨씬.”
“그렇다면…예, 다음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요제프와 사람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라고 알리겠습니다.”
***
세티는 무덤덤한 얼굴로 관제실 벽면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미사일이 발사대를 떠나자마자, 모니터에는 간소화된 지도와 시간이 떠올랐다.
4:58
대략 5분, 미사일이 제국의 수도까지 날아가는데 걸리는 시간.
“안 돼…”
그것을 본 성녀는 털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이리라.
이런 반응은 그녀의 동생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네티는 망연한 표정으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명은? 그는 관제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법을 찾고 있었다.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여명다웠다.
그리고 세티,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이곳에 있는 일행 중 누군가는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했으니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핵이 불러올 참사, 그리고 그 참사 때문에 벌어질 미래…
제국 수도가 날아가는 순간, 아마 이곳에 남은 핵미사일은 지구 전체의 표적이 될 것이다.
특히 미국,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은 핵을 건드린 미치광이 공산주의자를 살려두지 않으리라.
결론적으로, 여명은 이곳에 있는 핵미사일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야겠지.
그 외에 제국이 무너지며 생긴 정치적 공백이나, 앞으로 변할 국제 관계 따위를 떠올리던 세티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삼켰다.
수십만 명이 죽기 직전인데, 손익계산을 하고 있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는 성녀가 아니었고, 영웅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당장 할 수 있는 걸 할 수밖에 없는, 작디작은 인간.
그녀는 애써 감정을 삼키고 자신을 위로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십만의 죽음보다는 여명의 미래가…
거기까지 세티의 생각이 이어지던 순간.
그녀는 관제실의 붉은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누군가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조금 전 지상에서 망치로 터트려버렸던 여자였다. 이름이 에카테리나였던가.
어떻게 살아난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앞에는 공성 병기가 떠오를 정도로 거대한 창 다섯 자루가 둥둥 떠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교차하는 눈동자, 올라가는 입꼬리.
“모두 피…!”
세티가 소리 지르기도 전에, 창이 발사됐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강화마법이 걸린 창은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전투에 지친 일행의 사각을 노린, 치명적인 기습.
그것을 앞둔 세티의 생각이 가속했다. 찰나라고 불러야 할 시간 속에서, 수십 개의 생각이 떠오른다.
다섯 개의 창 중 세 개는 여명이 막을 수 있다. 아니, 그라면 분명 네 개는 막아내겠지.
그럼 나머지 하나는? 여명의 사거리 바깥에 있는 하나는 무릎 꿇은 성녀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성녀는 피할 수 있을까? 못 피한다. 그럼 내버려 둬야 하나?
여태껏 유지해온 냉정함이 말했다.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자, 성녀는 치유 기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성녀를 밀어내고 대신 창을 맞을 수 있었다.
몸으로 막고, 치유 받는다. 그래, 이것이 최선이다.
만에 하나 저게 성녀가 되살리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공격이라면 어쩌려고?
아쉽지만, 그런 경우라도 자신이 대신 맞는 게 옳았다.
그녀보다는 성녀가 여명의 미래에 더 도움이 될 테니까.
합리적이었다. 합리적인 희생이었기에, 세티는 성녀를 밀었다.
!
다음 순간, 그녀의 복부에 창이 처박혔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온몸의 마나가 제멋대로 꼬이며 혈관이 터져나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이건 치유할 수 없겠네.
심장의 대동맥이 연달아 터지는 걸 느낀 세티는 마지막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곧 그녀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리는 소리, 고함 소리, 비명 소리.
모든 것들이 아련하게만 들렸다. 천천히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이 희미해졌다.
이게 죽음인 걸까?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를 구하다가 죽을 줄이야.
그래도뭐…나쁘지 않았다. 즐거운 기억은 많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걱정되는 게 있다면, 성녀가 미래에 낳을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 정도?
이름이 세티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그런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세티는눈을 감았다.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신이 그녀의 정신을 붙잡았다.
『잘했다, 첫 번째.』
『네가 미래를 바꿨다.』
소리 없는 웃음.
핵미사일 폭발까지 3분하고도 12초 남은 시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