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3)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3화(173/817)
〈 173화 〉 누구를 위하여 가방은 열리나 (4)
* * *
***
[플레이어! 이 이상 시나리오를 뒤트는 건 용납할 수 없다!]플레… 뭐? 저건 또 뭐야?
이제 막 내면에서 깨어난 그의 정신은 미처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육체는 순식간에 싸울 준비를 끝마쳤다. 근육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고, 혈관 속 마나가 맥동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살기에 반응하는 주가시빌리의 본능.
그랬다, 그를 향해 날아오는 붉은 팔은 거대한 살기 덩어리였다.
저게 대체 뭐길래, 저런 살기를? 여명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까.
떨어지는 손바닥, 넘치는 살기.
여명은 피하지 않았다.
피할 공간이 없어서? 아니, 그의 등 뒤에 있는 세티와 성녀가 저 팔에 깔리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고, 양팔을 들어 붉은 손바닥을 받아냈다.
쿵!
콘크리트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와 동시에 여명의 발목이 바닥에 처박혔다. 전신을 짓누르는 충격에 관절들이 비명을 질렀다.
[만주와 아카데미의 시나리오를 망친 것도 필시 네놈 짓이렷다.]플레이어? 무슨 개소리야? 여명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애써 이를 악물었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대로 짓눌릴 게 분명했으니까.
[주인공의 기연을 도둑질하고, 준비된 시나리오를 망치면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느냐?]그것은 수십 명의 남자가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웅장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게임 중독자에 불과한 네놈의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는지!]붉은 팔이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짓누르는 힘이 더해졌다.
하체의 뼈가 어긋나는 게 느껴지자마자, 여명은 망설이지 않고 주가시빌리를 사용했다.
살기를 마나로 바꾸고, 재생력과 육체를 강화하는 무술.
여명의 몸을 붉은 살기가 감쌌다. 곧이어 원래 지니고 있던 살기는 물론이고, 팔을 이루고 있던 살기마저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가시빌리? 감히…!]팔의 반응은 격렬했다. 녀석은 보물을 도둑맞은 드래곤처럼 포효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쾅!!
그대로 여명을 내려찍었다. 단순히 손바닥으로 짓누르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충격.
막아낸 양팔이 부러지고, 미처 흘려내지 못한 충격에 바닥이 흔들렸다.
여명은 즉시 상처를 재생했지만, 주먹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이어 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섯, 열…
망치가 못을 내려치듯, 주먹은 끝없이 여명의 머리를 찍었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었다. 여명의 몸은 정말로 바닥에 처박혔으니까.
발목을 넘어 종아리까지.
무한에 가까운 주가시빌리의 재생력이 버텨주고 있었지만, 몸에 완전히 땅에 처박힌 뒤에도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여명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법을 써보기도 하고, 팔을 틀어 충격을 흘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반항도 붉은 팔을 떨쳐내기엔 부족했다.
검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맨손으로는 그저 막아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래, 검.’
여명은 감각을 펼쳐 검의 위치를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아까 전 창날을 막을 때 놓친 그의 검은 너무 멀리 있었다.
염동력으로도 닿기 어려운 거리.
그가 어쩔 수 없이 검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검신이 반짝였다.
대단한 빛은 아니었다. 그저 잠깐의 반짝임에 불과한, 그런 빛.
하지만 그 짧은 빛 속에서, 여명은 불현듯 인벤토리에 대한 걸 떠올렸다.
플레이어, 녀석은 어떻게 물건을 인벤토리에 넣었던 거지?
물건을 꺼내는 방법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꺼낼 물건을 떠올리며 허공을 쥐는 것.
보통, 가방에 물건을 넣는 건 꺼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물건은 넣는 방법은 혹시…
의심과 확신, 가능성과 죽음 사이에서 여명은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손을 쥐었다.
***
인벤토리, 즉 플레이어의 아공간이 열린 걸 느낀 붉은 팔은 더욱더 주먹에 힘을 실었다.
[쥐새끼 같은 것. 그 알량한 저항도 여기까지다. 이번 시나리오는 결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아예 머리를 터트려버릴 생각으로 내려친 일격.
하지만 주먹이 여명의 머리에 닿기 직전, 그의 오른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이는 빛살은 그대로 들이닥치던 붉은 주먹과 충돌했다.
[!!!]주먹이 갈라지며 관제실 전체에 소리 없는 비명이 울렸다. 인간의 고막을 넘어, 마나 그 자체를 울리는 비명.
여명은 귀를 막으며 바닥에 박힌 다리를 꺼냈다.
그리고 겨우 땅에 발을 디딘 뒤, 그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산의 눈물을 꽉 쥐며 생각했다.
‘…뭐지? 왜 갑자기 검에 힘이 넘치는 거지?’
붉은 팔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건지, 여명과 그의 검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깟 검 쪼가리가 내 화신을]하지만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시간을 줄 생각도, 대화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대로 검을 내려찍었다.
파양결의 파도가 앞서고, 뒤로 우윳빛 검기가 기다란 선을 그렸다.
그렇게 선이 지나간 자리로, 잘려 나간 손가락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피 대신 흘러내리는 붉은 살기.
붉은 팔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침착하게 여명과 거리를 벌렸다.
훌쩍 물러난 녀석은 잘린 손가락들을 재생하며 지껄였다.
[마나메탈… 역겨운 털짐승 놈들의 무기였군.]털짐승?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그건 드워프들을 비하하는 단어였으니까.
그것도 수십 년 전에나 쓰던 멸칭.
산의 눈물이 드워프제 무기라는 걸 알아봤어도 그렇지, 사람도 아닌 놈이 저런 멸칭을 쓰다니.
쯧, 그는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검이 녀석에게 특효약이라는 걸 확인한 이상, 이대로 끝을 낼 생각이었는데…
[커헉!]붉은 팔이 갑자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여명에게 너무 많은 살기를 빼앗겨서? 아니, 아니었다.
녀석의 살기가 줄어드는 원인은 관제실을 뒤덮은 어둠이었다.
여명에게는 익숙한 미그니움의 어둠.
그림자와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 슬금슬금 관제실을 벗어날 때마다, 붉은 팔의 살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를 이용하다니…! 당신도 다섯 신과 똑같은 족속이었나!]그렇게 소리친 팔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관제실 중앙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세티와 성녀가 굳어있는 방향. 여명은 즉시 비각술을 펼쳐 녀석의 뒤를 쫓았다.
짧은 추격전이 이어지고, 붉은 팔이 세티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던 바로 그때.
여명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붉은 팔에 닿았다.
검은 그대로 팔을 반으로 갈라버렸으나,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살기를 질질 흘리며 속도를 늘렸다.
뒤를 쫓으려던 여명은 붉은 팔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손을 멈췄다.
붉은 팔의 목표는 세티도, 성녀도 아니었으니까.
녀석이 노린 건…
‘중앙 모니터?’
콰광! 잘린 팔이 모니터 위로 추락하며 주변 기기를 전부 박살 냈다.
특히, 발사 코드 입력용 키보드는 흔적조차 남지 못하게 으깨버렸다.
…뭐지? 여명은 모니터 주변에서 발광하는 팔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깟 모니터를 부수기 위해 전투를 포기했다고? 왜?
물론 저 모니터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긴 했다. 핵무기 발사 코드를 입력하기 위한 중앙 제어 컴퓨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발사 코드를 입력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이미 발사 코드를 입력한 이상, 관제실 중앙에 연결된 컴퓨터라면 무엇이건 간에…
‘…설마?’
여명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붉은 팔이 그의 의문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비코프가 발사한 핵도, 무기고에 남은 핵들도… 너는 어느 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
[시나리오는 굳건하다. 플레이어, 너의 패배다.]혐오와 비웃음이 반반 뒤섞인 어투.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역시, 이 녀석은 내가 이미 발사 코드를 입력했다는 걸 모른다. 어째서?’
플레이어가 발사 코드를 입력하는 건 원래 ‘시나리오’가 아니라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가지, 발사 코드 입력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인벤토리의 회수 능력.”
[…,]“인벤토리의 주인은 소유한 물건이 시야에 있는 한, 그게 무엇이든 가방에 넣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여명의 머릿속으로 가설과 가설이 이어지고, 하나의 답을 내놓는다.
“발사 코드를 입력한 순간, 핵미사일의 소유권이 그 사람한테 넘어가는 건가? 그래서 발사 코드를 입력하지 못하게 저 모니터를 부순 거야. 그렇지?”
질문인지, 확인인지 애매한 말. 여명 본인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붉은 팔은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그를 비웃었다.
[이제 와서 네가 뭘 깨달았건 너무 늦었다. 발사 코드를 입력할 모니터는 이미 부서졌으니.]여명은 말없이 관제실 벽면의 대형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모니터 위에 표시된 핵미사일을 눈에 담았다.
관제실에 있던 검과 달리, 수백, 어쩌면 수천 킬로미터 너머에 있을 미사일.
저걸 가방에 넣을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충분했다. 모든 선행이 그러하듯이.
잠시 뜸을 들이던 여명은, 대형 모니터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중앙 모니터가 아니라, 대형 모니터를 부쉈어야지.”
그는 손을 쥐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공간을 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