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4화(174/817)
〈 174화 〉 막간 그때 그녀는
* * *
***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세티는 별이었다.
아득한 감각 너머, 이해할 수 없는 공허로 가득 찬 밤하늘 속의 별.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서 그녀와 다른 별들이 반짝였고, 길을 잃은 영혼들이 은하수를 이뤄 흐르고 있었다.
세티는 그렇게 머나먼 곳까지 둘러본 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별들을 헤아렸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옹기종기 모인 다섯 개의 별이었는데, 모두 주변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세티가 그들을 따라 아래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시체를 기워 붙인 악몽 같은 별과 눈을 마주쳤다.
그것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처럼.
뭐, 꼬나보면 어쩔 건데?
세티가 반사적으로 눈을 부라리자, 시체 별은 불쾌한 듯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별이 사라진 빈 공간으로, 기다란 꼬리를 가진 혜성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어딘가 익숙한 빛을 품은 혜성.
한데, 혜성은 그녀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꼬리 뒤로 이런 염병 이란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혜성이 욕이라니, 아마 잘못 들은 거겠지?
세티는 황당한 눈으로 멀어지는 혜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길고 동그란 몸체, 날개처럼 펼쳐진 태양전지판, 그리고 선명하게 새겨진 성조기까지.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미국의 인공위성? 정찰 위성?
세티는 자신을 향해 몸통을 돌리는 인공위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인공위성의 카메라 범위 안에 그녀의 모습이 잡히려는 바로 그 순간.
모래로 덮인 작은 별이 세티와 카메라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위성에게서 그녀를 감춰주려는 듯.
갑자기 뭐지? 세티가 한마디 하려는데, 모래 별이 먼저 그녀에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내려가셔야 합니다.
몹시나 정중한 목소리. 별이 말도 할 줄 알아? 세티는 놀라서 되물었다.
“내려가요? 어디로요?”
나머지 다섯 분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저기요? 지금 그게 무슨 개소ㄹㅣ…”
모래 별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다음 순간, 그녀는 아래를 향해 추락했다.
***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에서 시간이 멈춘 관제실로 추락한 세티는…
죽은 채로 눈을 떴다.
조금 이상한 소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녀는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창에 꿰뚫려 죽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는 바닥에 누워있는데, 정작 그녀의 정신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이게 뭐람.’
세티는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뚱이는 아직 살아있었다.
뭐,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긴 했다.
전신 혈관이 비틀리고, 장기들은 망가졌으며, 심장은 아예 터져버리지 않았나.
그녀가 의사라면 이미 사망 진단서를 끊어줬으리라. 사인은 다발성 장기 부전과 과다출혈.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살아있다’라고 할 수 있는 건, 성녀가 치유의 기적을 펼치고 있는 덕분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자신의 마나를 모두 쥐어짜 펼치는 기적.
‘…얘도 참.’
세티는 성녀의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예쁜 얼굴이 눈물 젖은 안대와 피 때문에 엉망이 돼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그녀의 동생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는 모습을 보자니, 살짝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후회 없었다. 성녀를 위해 몸을 날리는 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세티는, 여명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살짝 입을 벌렸다.
그는 그녀의 동생처럼 울부짖지도, 성녀처럼 엉엉 울지도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불꽃 속 장작처럼 고요하고, 자기 파괴적인 슬픔.
그것을 본 세티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슬퍼하는 여명을 보는 건 가슴 아팠지만, 그에게 소중한 존재로 평생 기억될 거라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여명…
세티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만지려던 그 순간.
여명이 움직였다.
정지된 시간이 다시 흐르는 걸까? 아니, 아니었다. 움직이는 건 오직 여명뿐이었다.
세티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명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명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
여명의 생각, 혹은 감정.
그건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의 고뇌와 각오는 보석처럼 반짝였고, 슬픔은 파도처럼 그의 몸 곳곳에서 철썩였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알지 못하는 감정들, 혹은 기억들이 혜성처럼 길게 꼬리를 물며 얽히고, 뭉치며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감정은 아름다웠다. 이걸 보고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끝에는…
가방?
세티는 당황했다. 대체 저 가방이 뭔데 여명의 감정이 저걸 그리는 거지?
무슨 깨달음 같은 거나, 하다못해 청소부들이 보였다면 이렇게 당황하지 않았을 터였다.
대체 뭐야?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건 관제실을 뒤덮고 있던 검은 그림자였다.
『자랑스러워하거라 첫 번째야. 저것이야말로 네가 바꾼 미래이니.』
***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
세티가 흠칫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그림자 사이에서 그녀의 신께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밤하늘 구경은 재밌었느냐?』
…
세티는 대답은커녕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미그니움의 기운이 짓눌려 입이 열리지 않는 탓이었다.
『별로 재미있지 않았느냐? 아쉽구나. 하지만 실망하지 말거라. 그보다 재밌는 광경이 이제 곧 펼쳐질 테니.』
미그니움은 그렇게 말하며 세티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바닥에서 어마어마한 그림자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아아
불길한 소리와 함께 퍼진 그림자는 우산, 혹은 양산처럼 퍼지며 관제실을 뒤덮었다.
아니, 단순히 넓게 펼쳐진 건가?
어떻게 보면 어둠이 입을 벌려 공간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건 간에,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비현실적인 광경.
그것을 본 세티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떠는데, 미그니움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피부에 닿는 어둠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겁먹지 말거라, 이건 그저 푯값을 내지 않은 멍청이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노라.』
세티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침묵이 정지된 시간 속을 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미그니움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왔다.』
그 시선을 따라 세티의 고개도 함께 따라갔다.
거기엔 문밖으로 도망치는 비코프가 있었다.
별것 아닌 모습이었으나, 인간의 시선을 벗어난 그녀의 눈은 비코프 뒤에 있는 존재를 인식했다.
아니, 인식했다는 건 그저 비유에 불과했다.
그녀가 본 건 눈이 타버릴 정도로 밝게 빛나는 별과 붉은 거인뿐이었으니까.
‘…저게 뭐야?’
세티가 침을 삼킨 그 순간, 비코프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폭발했다.
대단한 폭발은 아니었으나, 이어진 결과는 결코 가볍지않았다.
!
미그니움이 펼친 어둠 사이로, 구멍이 뚫렸다.
거대한 빌딩에 쥐구멍이 하나 뚫린 정도에 불과했지만, 쥐구멍에도 팔을 넣기엔 충분한 법.
구멍을 확인한 붉은 거인은 문자 그대로 쥐구멍에 팔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현실과 비현실의 장막이 찢어지며 거인의 팔이 현실을 침범했다.
거인의 본체와 비교하면 지극히 작은 힘에 불과했지만…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는 여명에게도 그럴까?
세티는 두려움도 잊은 채, 미그니움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를 도와야 한다고, 지금 당장 저 팔을 막아야 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그니움은 한발 앞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첫 번째여, 너는 간택자를 믿지 못하느냐?』
추궁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어투. 세티는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믿어요. 저 자신보다도 더, 하지만…”
『그래도 돕고 싶다?』
미그니움은 소리 없이 웃는 가운데, 현실로 튀어나온 붉은 팔이 여명과 전투를 시작했다.
녀석은 플레가 어쩌니, 시나리오가 어쩌니 같은 소리를 지껄여댔으나, 세티의 귀에는 망가진 라디오 소리처럼 흐릿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팔이 여명을 짓누르는 것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피가 튀고, 바닥이 갈라진다. 저대로라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애타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미그니움에게 간청하려 했으나…
『첫 번째야, 네 마음은 갸륵하지만, 틀렸느니라.』
『다섯 신의 성녀는 네 몸을 던져 구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간택자를 구할 때는 내 도움을 바라느냐?』
『너는 간택자보다 성녀가 더 중요한 것이냐?』
미그니움의 지적에 세티는 변명하려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성녀를 살리는 게 더 옳은 길이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굳게 잠긴 문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여명의 머리 위로 주먹이 떨어졌다.
뼈가 부러지고, 땅에 파묻히는 여명을 보며 세티는 입술을 씹었다.
대체 뭘 해야 하지? 성녀를 구했던 것처럼 대신 희생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서 정신만 남은 상태. 목숨이 귀한 재산이라면, 이미 파산한 꼴이다.
그 사이 여명을 내려찍는 주먹은 점점 더 강해졌다.
쿵, 쿵, 쿵!
바닥이 울릴 때마다, 세티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익숙한 무력감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여명이 혼자 플레이어와 싸우러 갔을 때도, 도시 위에서 여명과 해골용이 싸울 때도 그녀는 이런 무력감을 느꼈다.
세티는 고개를 들어 미그니움을 바라봤다.
“저를… 시험하시는 거죠?”
그녀의 신은 미소 지었다.
『맞다. 도움이 되지 않는 노예는 처분될 뿐이니. 그저 믿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노라.』
선문답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여명이 검을 들어 주먹을 베었다.
[!!!]이어지는 붉은 거인이 비명 소리.
평소라면 여명의 승리를 확신했을 순간이었으나, 세티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화가 난 거인이 구멍을 벌려 어깨, 그리고 상체를 현실로 밀어 넣는 광경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고통과 살기가 홍수처럼 어둠을 뚫고 현실로 흘러든다.
여명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지만, 세티는 숨을 삼켰다.
저것과 싸워선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확신을 느낀 세티는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렸다.
“…미그니움.”
여명은 너무나 가볍게 부르던 이름. 그러나 세티는 그저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그니움은 대견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말하라.』
“제게 힘을 주세요.”
『대가 없는 힘은 없다. 무엇을 대가로 내놓을 것이냐?』
대가라고? 난 이미 내 모든 것을 당신과 당신의 간택자에게 바쳤어. 뭘 더 내놓으란 거야?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세티에겐 그것을 소화할 시간이 없었다.
붉은 거인은 이미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되는대로 지껄였다.
“전 이미 다 바쳤습니다. 그러니 제멋대로 가져가겠습니다.”
벌하시려면 벌하시던가요! 라는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미그니움의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켰으므로.
『정답이다. 가져가거라.』
***
사아아
붉은 거인이 파고들던 구멍 주변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곧이어, 소녀의 의지를 따라 구멍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거인이 놀라 뒤늦게 몸을 빼려 했지만, 주변을 가득 채운 그림자보다 빠르진 못했다.
그림자를 따라 공간이 닫히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그대로 닫혀 버렸다.
[커헉!]왼팔과 머리 절반이 잘려나간 거인은 거대한 육체를 출렁거리며 비현실 너머로 쓰러졌다.
쓰러진 거인의 뒤편에는 피를 뚝뚝 흘리는 별이 있었는데, 거인은 별에게 무어라 크게 소리쳤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기에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으나, 거인이 무언가를 요구했고, 별이 거절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를 이용하다니…! 당신도 다섯 신과 똑같은 족속이었나!]그게 아니라면 거인이 그렇게 소리칠 리 없었으니까.
아무튼, 배신 당한 거인은 분노하며 비현실의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피 흘리는 별은 없이 그림자와 거인의 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남겨 놓고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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