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5)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5화(175/817)
〈 175화 〉 누구를 위하여 가방은 열리나 (5)
* * *
***
우웩
모니터 너머 핵미사일을 향해 회수 능력을 사용한 바로 다음 순간, 여명은 피를 토했다.
주가시빌리의 재생력을 웃도는 수준의 마나가 몸에서 빠져나간 탓이었다.
세계수의 결정으로 강화되고, 격전으로 단련된 여명의 혈관조차 버티지 못하는 양의 마나.
[하하하! 실패했군!!]그것을 지켜본 붉은 팔은 언제 좌절했냐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처음과 비교하면 훨씬 머리가 빈 어투로 말을 이었다.
[플레이어! 이제 알겠느냐? 너의 권능은 만능이 아니고,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녀석이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찢어진 고막 때문에? 아니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어쩌면 둘 다 일지도.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그의 정신은 고요 속에서 단 하나의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부족하다.’
수백 킬로미터 바깥, 대기권을 뚫고 날아가는 핵미사일을 회수하기엔 그가 지닌 마나가 부족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포기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날아가는 핵을 포기해도 기지에 남은 다른 핵폭탄은 충분히 챙길 수 있었고, 세티 또한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대로 그가 포기하면 수도에 모인 수백만 명이 죽겠지만, 그게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그도 사람인 이상 죽을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죄책감도 느끼리라.
하지만 그게 자신의 목숨을, 나아가 세티의 목숨을 걸 이유는 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의 귓가로.
[대형 모니터부터 부쉈어야 한다고? 하하하!]붉은 팔의 조롱이 닿았다.
생각이 끊긴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녀석을 노려보다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살기를 마나로 바꾸는 주가시빌리.
그리고 눈앞에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어마어마한 살기 덩어리.
돈오(??). 순간적인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스치기 무섭게, 여명은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손을 들어 녀석에게 내밀고그대로 염동력을 일으켜, 붉은 살기를 잡아 ‘뜯었다.’
[네놈, 설마?]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깨달은 팔이 발작했지만, 뜯겨나간 살기는 이미 여명의 몸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
가득 차오르는 여명의 마나, 귀를 울리는 비명, 그리고 계속 뜯겨나가는 손가락.
[플레이어!!]여명의 몸으로 빨려드는 와중에도, 붉은 팔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저주받을 꼭두각시여!! 네가 정의라고 생각하느냐? 너는…]“아니, 이건 정의랑 아무 상관도 없어.”
살기를 빨아들이던 여명은 그렇게 녀석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진심과 조롱을 반반 담아 말했다.
“난 그저… 날 플레이어라고 부른 널 엿 먹이고 싶을 뿐이야.”
[뭐? 그게 무]붉은 팔의 반박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여명이 녀석을 이루고 있던 마지막 살기마저 흡수해버렸으니까.
“나중에 보자. 빨갱아.”
그리고 그가 승리 선언을 하는 것과 동시에.
정지된 현실이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3분 11초.
시간이 다시 흐른다.
그러나 시간이 멈춰 있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구름을 가르며 날아오른 미사일을 느낀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비행.
미사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에겐 창조자의 광기를, 냉전의 증오를 이해할 지능이 없었으므로.
덜컹 !
그것은 그저 만들어진 의도대로, 연료가 바닥난 첫 번째 추진체를 분리했다.
두 번째 추진체가 불을 내뿜으며 미사일은 용조차 닿을 수 없는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을 본 별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전했다.
죽음에 대비하라.
수많은 종교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출한 딸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는, 총대주교라 불린 노인은, 그리고 성검이라 불리는 여인은 달랐다.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날아오르는 죽음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기도가 전부였지만.
***
2분 11초.
미사일은 묵묵히 파란 하늘을 뚫고 기나긴 지평선과 마주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번째 추진체가 떨어져 나갔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 추진체는 혜성처럼 하늘에서 반짝였다.
눈이 좋은 초인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는 빛.
과거에는 변경백국, 그리고 지금은 프로방스 자치령이라 불리는 땅에서.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늙은이는 그 빛에서 눈을 돌렸다.
***
1분 2초.
미사일은 공기도, 바람도 없는 검은 바다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대로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나아갈 수도 있었으나, 마지막 추진체는 둥근 지평선 위에서 정지했다.
짧은 침묵을 끝으로, 미사일 끄트머리의 탄도체가 분리됐다.
핵탄두와 디코이, 마나 채프가 든 탄도체.
그것이야말로 지구가 만든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이니…
탄도체가 몸체를 돌려 지상의 목표를 조준한 순간, 수백만의 죽음이 확정되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그것은 목표를 향해 떨어지지 못했다. 탄도체가 대기권에 재진입한 바로 그 순간.
탄도체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든 것처럼 갑작스럽게.
***
네티는 멍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형부는 분명 죽어가는 언니 옆에 있었는데?
잠깐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는 관제실 저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것도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너무 울어서 환상을 보는 건가?
네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으나, 여명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손을 들고,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주먹을 꽉 쥔 채로.
대략 2분쯤 지났을까? 그는 웃으며 손을 내렸다. 무언가 성공한 듯, 힘겨운 미소였다.
네티는 그 표정을 보며 눈물을 닦았다. 사실, 조금 화가 났다.
언니가 죽어가는데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형부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명이 다가오는 걸 바라만 봤다.
마음속에서 일렁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윽고 여명이 세티의 곁에 다가왔을 때, 그녀의 기대감은 현실이 되었다.
“성녀, 이제 그만해도 돼.”
여명은 세티 옆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성녀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진지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품에서 꺼낸 작은 물약 병 때문이기도 했다.
“너, 그거 설마…?”
성녀조차 실물은 처음 보는 물약.
그녀는 설마설마하면서도 여명이 세티의 배에 박힌 창을 뽑아내는 걸 구경만 했다.
울컥, 창이 뽑힌 자리에서 피와 살점이 쏟아지며 세티의 몸이 경련했다. 여명은 지체하지 않고 물약 뚜껑을 열어, 내용물의 절반을 그녀의 배에 부었다.
그리고 물약이 상처에 닿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진짜 엘릭서…”
성녀의 감탄을 따라, 맑고 청아한 향기가 피 냄새를 밀어냈다.
으깨진 장기가 제 자리를 되찾고, 찢어진 근육과 피부가 새로 돋아났다.
성녀의 치유술을 뛰어넘는 기적.
하지만 아직 망가진 혈관은 되찾기엔 부족한 양이었다.
여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은 물약의 절반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손으로 세티의 목덜미를 감싸고,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식어가는 입술과 뜨거운 입술이 겹쳤다. 부드러운 혀를 따라, 물약이 흘러갔다.
“오…”
네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성녀는 뭔가 혼이 나간 표정이었으나, 두 사람의 입맞춤을 막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식어가던 세티의 몸에 온기가 돌아오고, 부드러운 혀가 서로의 앞니를 두들길 때쯤.
성녀가 말했다.
“두 사람…첫 키스 아니네? 너무 능숙해.”
여태껏 들어본 성녀의 목소리 중 가장 살벌한 목소리.
훈훈한 장면에 가슴 따뜻한 감동을 느끼고 있던 네티는 눈을 깜빡이며 성녀를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네티가 당황하건 말건, 성녀는 슬그머니 허벅지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드르륵, 철컥.
탄창이 돌아가고,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
그제야, 두 사람의 입술이 헤어졌다.
하지만 세티는 고개를 들려는 여명의 목덜미를 힘껏 붙잡은 뒤,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췄다.
여명이 당황하건 말건, 입술을 뗀 그녀는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고생했어. 여명.”
“…별말씀을.”
그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야, 여명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어느새 다가온 성녀가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세티와 여명을 번갈아 보며 몸을 떨었다.
“지금 핵미사일에 수백만 명이 죽었는데… 너희는… 너희는…!”
성녀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 그녀는 그 이상 감정을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자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괜찮아?”
그녀는 그대로 여명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비참하게 울었다.
내가, 실패해서, 미안, 미안해요…
그렇게 충분한 눈물과 콧물이 여명의 옷자락을 적시고, 관제실 벽면 모니터를 본 네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을 때쯤.
여명은 성녀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성녀,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비밀? 무슨 비밀?”
훌쩍이는 성녀의 목소리. 여명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실은… 막았어.”
“막아? 뭘?”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관제실 벽면의 모니터를 향해 돌렸다.
핵이 떨어진 범위를 보여줄 거라 생각한 성녀의 생각과 달리, 모니터 위에 떠 있는 건…
[실패] [실패] [실패]폭격 실패를 뜻하는 붉은 글자. 그것을 본 성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기쁨인지, 놀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어,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해보니까 되던데?”
여명은 나름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다.
플레이어니, 가방이니 같은 일은 네티가 없는 자리에서 설명해야 했으니까.
옆에서 기대고 있던 세티는 그게 뭐냐며 키득거렸으나, 성녀는 되묻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여명의 옷을 보며 얼굴을 붉히다가…
뭔가 깨달은 듯 권총을 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 너… 내가 우는 거 지켜보려고… 아니, 화내는 거 막으려고 늦게 알려준 거지?”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여명이 어깨를 으쓱이자마자, 성녀는 이 자식이 진짜 라는 말과 함께 리볼버를 거꾸로 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나쁜 자식! 도망치지 마!”
도망치는 여명, 쫓는 성녀, 그리고 둘을 보며 미소 짓는 세티.
잠시 한걸음 떨어져 세 사람을 바라보던 네티는 슬그머니 언니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저, 언니… 이거 삼각관계 아니지?”
“….”
죽다 살아난 언니에게 하기엔 부적절한 질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