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7)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7화(177/817)
〈 177화 〉 삼포 가는 길
* * *
엘프를 죽이고, 사람을 살려라.
Kill the elf, and Save the Man.
『제2차 서부 개척 시대 기록물 no.444 – 이름 모를 숲 주민의 표어.』
***
발라구와 일행이 성벽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발라구는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에게 말했다.
“뒤따라오는 천것들에게 적당한 장소를 내어줘라. 혹시라도 불순한 일이 생겨 내 얼굴에 먹칠을 한다면… 그냥 넘어가진 못할 거다. 알겠나?”
상급자가 까라면 까야 하는 법. 하물며 그게 성질 더러운 귀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경비병은 후다닥 꼬맹이들과 여인들을 데리고 사라졌고, 발라구는 요제프 일당과 핀엘만을 데리고 궁정백의 성으로 향했다.
도반은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했으나, 발라구는 일부러 그보다 앞서나갔다.
성 내부로 들어선 그는 곧장 궁정백의 집무실로 향했다. 만에 하나 궁정백이 성 내부에 남아 있다면 기습해야 했으니까.
핀엘과 요제프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뒤따라가는 도반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궁정백의 집무실은 비어있었다. 발라구는 안도의 한숨을 꿀꺽 삼킨 뒤, 자연스레 집무실 책상에 앉으며 말했다.
“도반, 경비대에게 전해라. 성 밖으로 나가서 주변의 치안을 유지하고, 집을 잃은 천것들은 구조해서 성으로 데리고 오라고.”
“예?”
그를 남 궁정백이라 믿고 있던 도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발라구가 노려보자 즉시 고개를 숙였다.
“왜? 내 명령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도반은 놀란 표정을 숨기려는 듯, 기합이 팍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를 속이는 게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발라구는 연기를 계속했다.
저번에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그리고 천여명을 위해서.
“아, 그리고 경비병들은 최소 인원만 남기고 전부 주변 치안 유지에 투입해라. 한놈이라도 농땡이를 피면 내가 직접 널 벌하겠다. 알겠나?”
경비 병력을 퍼트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궁정을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계략이었다.
물론, 도반은 그런 음모를 눈치채지 못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 성과 궁정백님의 지킬 병력이…”
“아까 용들의 싸움이 끝나는 걸 보지 못했나? 이제 와서 지키기는 뭘 지킨단 말이냐?”
“….”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거라면 이분들로도 충분하다.”
발라구는 즉흥적으로 대답하며 핀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핀엘은 슬쩍 검을 뽑더니, 그 위에 검기를 씌웠다.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반투명한 검기.
진짜배기 초인의 증거를 본 도반은 고개를 숙이며 쭈그러들었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발라구는 손을 휘휘 저어 나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도반이 즉시 문을 닫고 떠났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핀엘이 말했다.
“하… 이런 계획이 먹힐 줄이야.”
“가끔은 허무맹랑한 계획이 더 잘 먹히는 법이죠.”
요제프와 떡대들은 동의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이 작아질 때쯤, 발라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린 남 궁정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핀엘은 하나 남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동맹도, 근거지도 잃은 늙은이 하나쯤이야.”
“동맹도 잃고, 근거지도 잃었지만 그는 마법사입니다. 그것도 꽤나 실력 있는 마법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발라구는 그렇게 덧붙이며 집무실 곳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요제프와 핀엘이 무슨 짓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자, 발라구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 늙은이 성격이라면 집무실에 비밀 통로 하나쯤 반드시 만들어 뒀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미리 찾아내는 게 좋을 것 같…”
발라구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입을 벙긋거리던 바로 그때, 덜컹! 소리를 내며 집무실 책장이 밀려났으니까.
요제프 일행은 물론이고, 핀엘조차 할 말을 잃고 열린 책장을 바라봤다.
곧이어 그 책장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익숙한 청년 한 명과 소녀 셋.
“…뭐야, 다들 왜 여기 있어?”
아까 전 여관을 떠난 천여명 일행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양팔을 벌리던 발라구는 움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여명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피떡이 된 남 궁정백이 붙잡혀 있었으니까.
***
시간을 조금 돌려, 여명이 핵미사일을 인벤토리에 넣은 직후.
갑자기 핵미사일이 사라진 걸 본 네티와 성녀의 머리 속으로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지?
여명이 뭔가를 하긴 했는데, 대체 뭘 한 거야? 마법? 무술? 그것도 아니면 신성?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두 사람과 달리, 세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아하, 그게 ‘가방’이구나?”
“…뭐?”
어떻게 알았어? 여명이 되묻자, 세티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거든.”
처음부터? 설마 미그니… 여명이 역으로 질문하려는 찰나, 성녀가 불쑥 두 사람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잠깐, 스톱.”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세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스킨십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여명과 세티 사이를 가로막는 모양새였다.
“우선 설명부터 해줘, 가방이란 게 대체 뭔데? 핵은 또 어디로 날려버린 거고?”
설명이 길어질 걸 예감한 여명은 잠시 인벤토리 속에 있는 물건 목록을 떠올렸다.
수백 개의 목록 중 차원문 너머에서 보기 어려운 물건을 적당히 고르고, 그대로 허공을 쥐었다.
다음 순간, 여명의 손으로 작은 캔 콜라가 나타났다.
“어?”
작게 입을 벌리는 성녀를 보자마자, 여명은 콜라를 회수했다.
그리고 다시 꺼내고, 회수하고, 꺼내고, 회수하고…
인벤토리 회수 능력은 거리와 크기에 영향을 받는 건지, 캔콜라를 회수하는 데 드는 마나는 극소량에 불과했다.
아무튼, 그렇게 콜라를 넣고 빼기는 걸 잠시 반복하자 성녀가 아닌 네티가 손뼉을 쳤다.
“아! 뭔지 알았어요. 아공간이죠?”
“…맞아. 정답.”
이게 퀴즈쇼는 아니었지만, 여명은 보상으로 캔콜라를 네티에게 던졌다.
차가운 캔을 받은 네티가 놀라는 사이,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이해한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사된 핵미사일을 회수할 수 있는 아공간이라고…?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는 아공간은 들어본 적도 없어.”
“….”
“그렇다고 눈앞에서 직접 본 걸 부정할 수도 없고…”
성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그가 이런 식으로 상상 이상의 능력을 보여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핵은 핵이었다. 성녀는 잠시 말을 고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명. 하나만 약속해줄 수 있어?”
“약속?”
“조금 전에 회수한 핵무기. 무고한 사람들에게는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예지를 쓴 걸까? 아니, 그녀는 예전에 여명과 함께 봤던 예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가 세티와 함께 여의도를 불바다로 만들고, 국회의사당을 쓸어버린 미래.
고민은 없었다. 여명은 성녀와 세티를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내가 무슨 살인마도 아니고…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약속할게.”
“……고마워.”
성녀가 대답하자마자, 네티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형부, 형부! 아공간에 앞으로 얼마나 더 넣을 수 있어요?”
“…뭐?”
“다른 게 아니고… 쥐새끼들이 도망간 방향에 무기고랑 탱크 창고가 있었잖아요? 쫓아가는 김에 무기랑 탱크 한 대 챙기면 어떨까 해서요.”
“….”
탱크?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비해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매만졌다.
무기와 탱크라,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
안타깝게도, 무기고는 이미 털려있었다.
커다란 무기고에서 여명이 회수할 수 있는 건 소총 수십 정과 총알 박스가 전부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딱히 실망은 없었다. 이미 쥐 수인들이 무기고를 털었다는 걸 핀엘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중요한 건 탱크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탱크 보관소로 향했는데…
“여기도 털렸네.”
탱크 보관소는 텅 비어 있었다. 연료는 물론이고, 부품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안 돼! 내 탱크!”
네티가 절규하건 말건, 여명은 입술을 만지며 고민했다.
나갈 출구도 없는데, 무슨 수로탱크를옮긴 거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탱크 보관소를 벗어나자마자 찾을 수 있었다.
보관소의 반대쪽 문 바로 앞, 주변을 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일렁거리는 마나.
그것의 정체는 차원문이었다. 탱크가 들락날락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차원문.
“핵무기 다음에는 차원문이냐…”
성녀의 한탄과 동시에, 일행은 전부 여명을 바라봤다.
모두 ‘차원문을 넘어 쫓아갈 거냐?’ 라는 뜻이 담긴 표정이었다.
여명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두렵다거나, 준비가 부족하다거나, 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저 차원문에서 느껴지는 마나 그 자체가 문제였다.
그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싸웠던 붉은 팔과 너무나 유사한 마나였으니까.
“여기선 물러나자.”
비코프를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핵은 어떻게든 막아냈다. 굳이 지금 따라가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여명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걸음 물러난 순간.
붉은 차원문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함정에 빠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어우, 소련은 대체 뭐 하는 나라였길래. 이런 걸 남겨둔 걸까요?”
네티의 짧은 감상을 끝으로, 일행은 방향을 돌려 남 궁정백이 도망친 복도로 향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차원문이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도망친 비코프와 남 궁정백은 꽤 많은 흔적을 남겨놨다.
발자국과 핏자국, 그리고 노골적인 마나의 흔적까지.
추적에 앞장선 건 세티였다. 에카테리나가 창을 날리는데 한몫거든 궁정백을 놓치긴 싫다나?
아무튼, 그녀는 무기고 바깥 도시 골목까지 착실하게 남 궁정백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한참 난리가 난 도시 뒷골목을 돌고 돌기를 한참.
일행은 골목 사이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나무 문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내려가 보니, 그곳은 위스키 통이 가득 쌓인 술 저장고였다.
은은한 술 냄새와 나무 냄새에 피 냄새가 희석되고, 발자국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마나 또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추적을 끝내야 하는 건가?
세티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여명이 대뜸 술통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탁탁, 통통, 텅텅.
나무통들은 속에 든 알콜 양에 비례해 다른 소리를 냈는데, 탁탁 소리에 가까울수록 내용물이 많다는 뜻이었다.
“뭐 하는 거야?”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명은 계속 통을 두들기며 대답했다.
“이상한 점이 있어서.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 후, 그는 연속적으로 탁탁 소리가 나는 술통들이 쌓인 보관대 앞에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보관대를 밀자, 드르르륵 소리와 함께 보관대 뒤의 숨겨진 복도가 드러나는 게 아닌가?
“뭐야? 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숨겨진 복도로 들어서면서, 세티가 물었다. 여명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무로 만든 술통에서 위스키를 보관하면 매년 알콜이 증발하면서 양이 줄어들거든.”
“…그래서?”
“그런데 뽀얗게 먼지가 쌓인 술통에 내용물이 가득하다? 하나도 아니고 보관대 전체가? 그럼 뻔하지 뭐.”
설명을 들은 세티는 작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또 나만 모르는 소리 하네 뒤따르던 성녀가 작게 투덜거리고, 네티가 괜찮아요. 저도 뭔 소리인지 모르거든요 라며 그녀를 위로할 때쯤.
복도가 끝나고 작은 방 하나가 나타났다.
옷장과 거울, 그리고 위로 향하는 사다리가 준비된 고급스러운 방.
그곳에선 남 궁정백이 몸에 묻은 피를 벅벅 닦아내고 있었는데, 그는 여명 일행을 보자마자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
그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집어 드는 것보다, 여명이 그의 턱에 비각술을 먹여주는 게 조금 더 빨랐다.
깔끔한 돌려차기, 박살 나는 어금니.
일격에 제압 당한 궁정백의 신음을 끝으로, 일행의 뒷정리가 끝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