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7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78화(178/817)
〈 178화 〉 삼포 가는 길 (2)
* * *
***
그리고 다시, 현재.
여태껏 이어진 여명의 설명을 들은 발라구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께서 용과 궁정백 둘을 담가버렸다. 이 말입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그리고 남 궁정백을 쫓다 찾은 비밀 복도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더니 이 집무실이었고요?”
“응, 설마 너희가 나보다 먼저 이곳을 점거했을 줄은 몰랐지만.”
여명은 그렇게 대답하며 집무실 바닥에 남 궁정백을 내려놨다. 발라구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차린 남 궁정백이 발라구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너으, 너… 그 어르구르…!”
턱이 박살 난 탓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보고하는 말이 무엇일지는 뻔했다.
잠시 궁정백을 보던 발라구는 여명을 향해 말했다.
“여명 씨, 제 얼굴의 환상을 해제해 주시겠습니까?”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곧이어 발라구의 얼굴이 일반 오크로 돌아오자, 남 궁정백의 반응이 더 격렬해졌다.
“너으… 너으느…!!”
“오랜만입니다. 주인님.”
“이… 이 개자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요즘도 어린 오크 성기를 드시거나, 아이들을 상대로 마법을 연습하십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역겨운 소리에 성녀의 표정이 팍 찌그러졌다. 정작 어린 시절부터 실험체로 살아온 세티와 네티는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발라구 또한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전 주인님께 별다른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으… 으… 노에… 노에 새기가…”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개판이 된 도시를 보고, 또 이렇게 주인님을 뵈니… 당장 머리를 터트려 죽여버리고 싶다는, 그런 살의가 고개를 듭니다.”
“….”
짧은 침묵. 발라구는 다시 한번 여명을 보며 물었다.
“여명 님,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남 궁정백님을 죽이실 거라면 제게 처형인 역할을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슬쩍 세티를 바라봤다.
남 궁정백의 목숨에 지분을 매길 수 있다면, 그녀가 제일 위에 있을 테니까.
세티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을 본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그제야 죽음을 실감한 걸까. 남 궁정백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그는 바닥을 기며 여명을 노려봤다.
“처, 천 한… 지구인, 네노미, 가미… 가미!!”
여명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궁정백을 향해 말했다.
“드레이테리얼의 남 궁정백, 오드리언.”
“….”
“너는 카할 마그두와 손잡고 철도를 파괴했고. 시민들을 언데드로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 이제 와서 살 생각은 하지 마.”
“가미… 내게 죄를… 묻느냐? 모, 모든 거슨… 화제… 황제… 폐하를 위한 거엇… 너이… 스레기드른…크흑!”
궁정백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오크의 발이 그의 등을 콱 짓누른 까닭이었다.
발라구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궁정백을 내려다보다가, 요제프에게 받은 권총을 들어 그의 뒤통수에 겨눴다.
잠시 후, 궁정백의 입에서 ‘폐하…’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성녀와 네티가 고개를 돌린 바로 그 순간.
발라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귀를 울리는 총소리, 떨어지는 탄피, 튀어 오르는 파편.
그러나 피는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발라구가 억지로 총구를 틀어버린 탓이었다.
“…왜?”
많은 것이 함축된 여명의 질문에, 발라구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처형하는 게 싫었던 건지, 아니면 노예 생활의 복수를 단 한 번으로 끝내기 싫었던 건지…”
“….”
“…죄송합니다.”
발라구는 권총을 허리에 다시 꼽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성의 지하에, 마법사를 가둬놓기 위한 특별한 감옥이 있습니다. 마나를 차단하는 마법진이 설치된…”
“변명은 됐어.”
발라구의 말을 끊은 건 세티였다. 그녀는 여명과 아주 짧게 눈빛을 교환한 뒤,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계약 관계지?”
“….”
“이 성에 무혈 입성한 공로를 보상하고 싶은데, 때마침 동전이 없네… 어쩔까?”
오크의 눈이 커진다. 세티는 피식 웃으며 그가 예상한 답을 그대로 내놨다.
“남 궁정백. 대가로 줄게. 저 인간쓰레기에게 금화 한 닢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치는 상대적인 거잖아?”
***
발라구는 여명의 도움을 받아 남 궁정백의 얼굴로 위장한 뒤, 지하 감옥에 남 궁정백을 가뒀다.
발라구의 완벽한 연기와 궁정백의 얼굴에 씌운 가면 덕분이었는지, 눈치 챈 하인이나 경비병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남 궁정백을 정리한 뒤 발라구는 여명 일행을 ‘궁정백의 귀빈’으로 선포했다.
귀빈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공짜 잠자리와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
개판이 된 도시를 생각하면 그 정도도 감지덕지했기에, 일행은 기꺼이 귀빈이 되었다.
귀빈이 된 뒤,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용과 코르부스에게 전령을 보내는 것이었다.
용이나 코르부스가 잘못될 일은 없겠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전령이 성 밖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일행은 그대로 목욕탕으로 가서 각자 피와 오물을 씻어냈다.
다행히 요제프가 여관에서 짐을 챙겨온 덕분에, 이상한 전통 복장이나 튜닉을 입는 일은 없었다.
성녀가 세티와 같은 옷을 입고 헤벌레하긴 했지만… 여명은 굳이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았다. 혹은, 애써 외면했거나.
아무튼, 각자 몸단장을 끝낸 일행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식사가 준비된 성의 중앙 홀이었다.
홀 가득 늘어선 나무 탁자 위에는 만찬이라기엔 애매하고, 일반적인 식사라고 하기엔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발라구가 구한 여인들이 힘을 좀 썼다는데, 그 덕분인지 탁자 위에 있는 음식들은 손이 많이 가는 서민적인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육수로 끓인 콩 스튜와 구운 빵, 채소를 잔뜩 쌓아 오븐에 구운 양고기.
기름에 쪄내듯 익힌 볶음밥, 얇게 썰어 튀긴 감자.
아샤 특유의 허브를 섞어 만든 미트볼, 치즈를 잔뜩 넣은 계란 파이,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쪄낸 찜 요리…
“…다행히 스팸은 없네요.”
홀에 쌓인 음식들을 전부 확인한 네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은 뒤, 식사를 시작했다.
주인이 허락하기 전에 손님이 멋대로 식사를 시작하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발라구가 하인들을 전부 내보낸 덕분에 그 사실을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하인들이 들어선 안 될 말을 나눌 생각인 거겠지.
여명이 그런 예상을 하며 네티에게 양다리의 살점을 발라주고 있을 때쯤.
역시나, 발라구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명 님. 이제 이 도시를 떠나실 생각입니까?”
여명은 네티의 그릇에 고기를 가득 쌓아주며 답했다.
“응, 아마 별 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떠나겠지.”
“이대로 떠나신다면… 도시는 죽을 겁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여명은 발라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지금 이 도시의 상태가 어떤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장 많은 물자가 들어오는 북쪽 철도는 끊어졌고, 도시를 관리해야 할 궁정백들은 죽거나 도망쳤으며, 거리에는 시체가 가득하다.
언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암담한 상황.
“이 도시를 위해 남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남아 달라고 해도 남을 생각 없어.”
“그래도 도움은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생선 찜 요리에서 살을 발라 네티의 접시에 담아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발라구.”
“예, 여명 님.”
“힘이 없는 선은 악보다도 못하다, 라는 말. 혹시 알고 있어?”
“…아뇨, 모릅니다. 지구의 격언입니까?”
“어, 지구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란 사람이 한 말이야.”
짧은 침묵. 여명은 생선을 뒤집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보기엔 내가 좋은 사람처럼 보이니까, 이렇게 나온다는 거 알아. 이해해.”
“….”
“근데… 그건 네 착각이야. 발라구, 난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고, 니가 지금 부탁해야 할 사람은…”
여명은 생선 살을 크게 접시에 덜어낸 뒤, 성녀에게 내밀었다. 발라구의 시선이 그릇을 따라 성녀에게 꽂혔다.
“….”
세티와 똑같은 옷을 입고,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 히히덕거리는 모습.
그 푼수가 따로 없는 꼴을 본 발라구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괜히 분위기 잡았나? 여명은 쓴웃음을 삼킨 뒤, 성녀의 가리키며 말했다.
“얘, 성녀야.”
“성녀요? 성녀라면 그…”
“맞아. 다섯 신 교단의 성녀.”
그제야, 발라구의 시선이 달라졌다. 성녀는 ‘나는 또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얘가 이 도시에 온 건 비밀이라서 많은 도움은 줄 수 없어. 기껏해야 성도에서 성기사와 사제들을 불러주는 것 정도?”
여명이 그렇게 말하자, 성녀는 그 정도쯤이야 라고 호응했다.
성기사와 사제라니, 발라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도움입니다.”
하지만 성녀는 그가 헛된 희망을 가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현실을 입에 올렸다.
“너무 기뻐하지는 마. 성도에서 여기까지 사제들이 오려면 기차 타고 열흘은 걸리니까. 지금은 철도도 없고… 이 상태로 아무리 빨리 소식을 보내도, 차 타고 오려면 한 달은 걸릴 거야.”
냉엄한 현실 앞에 좌절할 만도 하건만, 발라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한 달만 버티면 어떻게든 된다는 소리로군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여명은 발라구를 보며 턱을 괴었다.
노예에서 유목민으로, 유목민에서 노예상이 되었던 그의 삶이 지금 마음가짐에 영향을 준 것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조언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발라구, 요제프를 잡아.”
“…요제프를요?”
“당장 요제프에게 가서 새 거래를 틀고, 그의 무기를 전부 사들여. 거기에 가능하면 사막의 부족들도 싹 불러와서 도시 패권을 잡아.”
“…허, 패권이라뇨.”
“내가 생각하기에, 힘으로 찍어 누르면 한 달은 도시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마지막 질문은 세티를 향한 것이었다. 세티는 성녀가 입에 넣어준 생선 살을 우물거리며 답했다.
“음,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깡패들이 하수구에서 죽어 나간 덕분에 큰 조직은 거의 남지 않았을 테니까… 궁정백의 병력에 유목민까지 모아서 몸집을 불리면, 치안 유지 정도는 가능하겠지.”
“….”
“단, 아량은 베풀면 안 돼. 철도가 복구되기 전까진 자원이 부족할 테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덤벼들 거야. 그리고 또…”
세티의 시선이 홀의 바깥, 도시의 하늘로 향했다.
“용이 한마디 보태주면 되지 않을까? 남 궁정백으로 변장한 발라구를 지지한다. 그 한마디만 해줘도 당분간 말썽은 없을 거 같은데.”
어디까지나, 용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말이지만.
***
용까지는 몰라도, 다른 방법들은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었다.
발라구는 일행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요제프를 설득하기 위해 홀을 떠났다. 곧이어 식사를 끝낸 일행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준비된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방이라는 게…
“왜 하나야?”
성에서 가장 큰, 그러니까 여명 일행 모두가 한 번에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침대가 있는 방.
“…뭔가 착오가 있었나?”
세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그대로 커다란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여관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푹신한 침대였다.
“여명? 피곤할 텐데, 빨리 와서 누워.”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치며 말했다. 여명은 그제야 세티가 장난을 치는 거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네 옆자리는 성녀에게 양보할게.”
“….”
여명이 포문을 열자, 성녀는 주저하지 않고 장난질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침대로 달려가 세티 옆에 눕더니, 양팔로 세티를 끌어안았다.
키득거리는 세티, 볼을 비비는 성녀, 그리고 하인을 부르기 위해 줄을 당기는 여명까지.
그 꼬락서니를 전부 지켜본 네티는 딱 한 마디로 이 분위기를 정리했다.
“…삼각관계가 아니라 개판이었어?”
여명은 그 평가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인이 오기 전까지 기다릴 심산으로, 침대 옆 의자를 끌어 창가 앞에 앉았다.
일부러 침대와 거리 두려는 생각이었다. 장난이고 뭐고, 두 소녀와 동시에 같은 침대에 누울 정도로 간이 크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성녀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깨져 버린 네티 또한 침대에 올라가는 대신 여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겁지도, 길지도 않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체력이 방전된 성녀와 세티가 동시에 기절하듯 잠이 들 때쯤.
네티가 먼저 침묵을 깼다.
“형부, 발라구에게 해준 조언 중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궁금하다고? 뭐가?”
“궁정백의 얼굴이요. 형부가 떠나면 환상 마법 걸어줄 사람이 없어지잖아요. 그건 어떻게 할 건지…”
여명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글쎄, 아마 가면이라도 쓰지 않을까.”
“…그럼 나머지 초록 피부는요?”
“전신을 가리는 옷을 입고, 손에는 장갑을 끼겠지. 발라구가 그걸 몰랐을 거 같아? 그것까지 다 감내할 생각으로 궁정백 연기를 시작한 거야..”
“왜”
그렇게까지? 네티의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여명이 한발 앞서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
“그냥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죄책감일 수도 있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좋은 사람이 때를 만난 거지. 쓰레기통에 꽃이 피는 것처럼.”
쓰레기통에 피는 꽃이라. 네티는 그 표현을 혓바닥 위로 굴리며 여명을 바라봤다.
피곤한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고,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에…
“…형부도 좋은 사람이에요.”
네티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순간 창문 너머에서 석양이 기울어지며 여명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그림자와 햇빛이 반반 뒤섞인 얼굴 아래, 여명은 미소를 그렸다.
“난 너희한테만 좋은 사람이면 충분해.”
너희? 네티는 그게 설마 우리 네 자매를 말하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문뜩 그가 양소유의 관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니, 설마?
에이, 설마.
네티는 힐끔 여명의 얼굴을 확인했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일까, 귀가 먹먹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대신, 잠든 언니의 뒤편으로 가서 누웠다.
다행히 여명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대로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아니, 빠져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 올린 순간.
딱, 딱, 딱! 무언가 두들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다행히 그 소리의 근원은 그녀의 심장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소리의 근원은 방 중앙에 뚫린 창문이었다.
정확히는 창문 앞, 까마귀가 한 마리가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
이상한 점이 있다면, 까마귀가 무슨 대형견만큼이나 커다랗다는 것 정도?
저게 뭔가 싶어 네티가 멍하니 까마귀를 바라보는데,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까마귀는 즉시 방으로 들어오더니…
“나쁜 제자! 나쁜 제자 같으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여자 셋과 같은 방에서, 그것도 한 침대를 쓰다니!”
여명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올바른 성 관념이 어떻고, 아내를 여러 명 가질 수 있는 종교가 어쩌고…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네티는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녀는 확인차 언니와 성녀의 볼을 동시에 꼬집어봤다.
아, 다행히 꿈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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