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화(18/817)
〈 18화 〉 잡몹이 맞이한 필연 (5)
* * *
***
재능이란 대체 무엇일까.
어린 시절, 세티는 곧잘 재능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재능이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과 자매들을 괴롭게 하는가?
비각술을 익히기 위해 수백 대의 회초리를 맞을 때도. 천둔검법을 배우기 위해 손아귀가 찢어질 때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놈의 재능, 재능이 무엇이기에, 고작 발차기 하나를 배우지 못했다고 그녀의 동기들이 결함품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대체 재능이 무엇이기에, 그녀의 자매들은 매일 같이 채찍질 당해야 하는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건 잘나신 정부나 잔혹한 양치기들이 아니었다.
빛나는 재능을 가진 세 사람, 정부가 자매들과 비교하던 진짜 천재들.
그릇, 성녀, 전윤성….
그들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나서야, 그녀는 재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재능,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빛이다.
마음을 불태우는 질투의 장작이고, 닿을 수 없는 달빛이며, 미래로 이끄는 별자리다.
그것을 깨달은 날… 그녀는 밤새워 울었다.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정부가 싫어서 울었고, 똑같이 패배한 자매들이 안타까워서 울었으며, 재능 없이 태어난 스스로가 불쌍해서 울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현재.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울고 싶었다.
***
세티가 그의 재능을 확인하자고 했을 때, 쇠똥구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동의했다.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고 싶은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비각술부터 확인해볼까요? 얼마나 익히셨는지부터 봐야겠어요.”
사람이 다니지 않는 모텔 뒷산 아래. 적당한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세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순한 시연을 바라는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먼저 비각술의 기본을 설명했다.
근육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경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한 자세를 취하려면 어떻게 근육을 움직이고, 어디에 마나를 둘러야 하는지…
그녀가 알려 준 것은 쇠똥구리 스스로 찾아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하체뿐만 아니라 상체의 마나 또한 유기적으로 움직여 줘야 한다는 것 정도?
미미한 가르침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쇠똥구리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마나가 몸을 타고 움직이는 법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응용하는 방법 또한 늘어났으니까.
“우선, 초식부터 보여주세요.”
“초식?”
“기술이요. 기술. 알고 계신 비각술의 기술을 쭉 펼쳐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쇠똥구리의 발이 움직였다.
가장 기본이 되는 발차기부터, 깃걸음과 날아 차기를 지나, 진각이라 불린 내려찍기까지.
일련의 비각술이 그의 발끝에서 펼쳐졌다. 마치 모든 게 하나의 기술인 것처럼,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어….”
비각술 시연이 끝났을 때, 세티는 뭔가 어처구니없는 걸 본 표정으로 쇠똥구리를 바라봤다.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쇠똥구리를 보던 그녀는, 생뚱맞은 걸 물어왔다.
“…쇠똥구리씨, 비각술의 진의가 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진의?”
“본질, 뜻… 쉽게 풀어쓰자면, 무술을 만들 때 뭘 생각하고 만들었을까, 뭐 그런 거요.”
그걸 왜 나한테? 쇠똥구리는 슬쩍 미간을 모았으나, 세티가 아무 이유도 없이 물었을 리 없었다.
그는 꽤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나름의 답을 내놨다.
“연결… 이 아닐까 싶다만.”
“…연결이요?”
“땅과 발을 연결하고, 뛰어올라 하늘과 나를 연결한다. 하늘, 나, 땅이 동시에 연결된 뒤,같은 원리로 발끝에서 시작한 마나가 머리끝까지 연결된다.”
“….”
“내가 느낀 비각술의 진의는 이게 전부다.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떠올리지 못하겠군.”
나름의 답을 내놓은 쇠똥구리는 문득 세티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쇠똥구리는 대체 왜 저러는 건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내 해석이 그렇게 엉망인가?”
“….”
“내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 가감 없이 말해 봐.”
세티는 말을 잊은 것처럼 빤히 쇠똥구리를 응시했다. 그녀는 잠시 아랫입술을 씹다가, 대뜸 다른 걸 물어봤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예전에 다른 무술 배우신 적 있죠?”
“없다. 초인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나 좀 봤을까.”
“…이건 사기야.”
그녀는 잠시 빌어먹을 재능충이니 어쩌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쇠똥구리씨, 비각술의 진의가 연결이라는 건… 정확한 해석이에요. 구결도 비급을 보고 읽으신 것처럼 정확했구요.”
“…그래?”
“그으래…? 감상이 그게 전부에요? 별일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니, 제 처지가 좀 슬퍼지네요.”
세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곤, 쇠똥구리가 비각술을 펼쳤던 공터 가운데로 걸어갔다.
“원래 계획은비각술부터 완성해드리려고 했는데…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야겠어요.”
“다음?”
“새로운 무술을 알려드릴게요. 비각술이랑은 다르게 한국 정부는 모르는 무술로.”
세티는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았다. 보폭을 넓히고, 오른손이 왼손을 앞선 자세.
전투 자세라기보단, 춤의 준비 자세 같아 보였다.
“이 무술의 이름은… 파양결이라고 해요. 중국이 차원 탐사 중에 찾아낸 무술이죠.”
파양결. 어째서인지, 낯선 이름에서 흐릿하게 피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구결에 비해 초식이 단순한 무술이니까, 둘 다 동시에 보여드릴게요.”
세티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쇠똥구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우는 진짜 무술이었다. 그는세티의 몸짓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술은 가벼운 손짓으로 시작되었다. 손가락을 쭉 뻗은 손날이 허공을 가르고, 물을 뜨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인다.
“파양결의 근본은 몸속의 마나를 물처럼 여기는 거예요. 강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마나도 몸을 따라 흐르게 하는 거죠.”
그렇게 말한 다음, 세티는 손날을 접고 주먹을 쥐었다.
“강물을 만든 다음에는, 홍수.”
그녀의 근육이 수축하고, 몸속 마나가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처럼 격렬한 변화였다.
“홍수가 넘친 뒤에는,파도.”
파악! 세티가 주먹을 휘두르자, 흘러넘치던 마나가 일제히 그녀의 주먹에 고였다. 지켜보고 있던 쇠똥구리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다.
“파도의 크기는 물이 깊을수록 높아지는 것처럼, 파양결의 한계는 오직 사용자의 마나와 숙련도에 달려 있어요. 바로…이렇게!”
그녀가 주먹을 내려치자, 주먹 속에 고여있던 마나가 허공을 때렸다.
!!!
소리 없는 충격파가 세티의 주먹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공터 주변의 풀들이 일제히 쓰러지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비각술의 진각과 비슷한 수준의… 아니, 그 이상의 위력이 담긴 주먹.
‘이게… 진짜 무술.’
충격파가 몰고 온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쇠똥구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티의 주먹을 바라봤다.
“어때요? 마나 운용이 중심의 무술이라, 조금 난이도가 있긴 하지만, 응용할 곳이 무궁무진한 무술이에요.”
쇠똥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처음 본 마나 응용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다른 생각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무아지경.
초인들은 흔히 깨달음이라고 부르고, 마법사들은 각성이라고 부르는 상태.
안타깝게도, 그가 무슨 상태인지 모르는 세티는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각술에 파양결을 응용하면, 정부 측 사람들도 쉽게 알아보지 못할 거에요.”
“….”
“무기에 마나를 입히는 연습을 하신 뒤에는, 무기에도 응용하실 수 있을 거고, 외부에 방출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타격 하나하나에 폭발을 심을 수도 있죠.”
“….”
“저는 마나에 대한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묵혀두고 있었지만…쇠똥구리씨는 저와 다르… 응?”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세티는 쇠똥구리가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요?”
세티는 슬그머니 쇠똥구리의 얼굴을 살폈다. 차분한 호흡, 초점 없는 눈동자, 그리고 죽은 사람처럼 멈춰 버린 마나.
겨우 시범 한 번을 보고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그녀는 단박에 쇠똥구리가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곧이어 감탄, 질투심, 황당함이 차례대로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사기야….”
***
요 며칠간, 청소부 길드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가장 일을 잘하던 작업반장 팀이 통째로 살해당하더니, 이튿날엔 작업소장이 실종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창고’마저 원인불명의 화재로 타버리고,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지부장이 직접 현장에 나와 소방서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말단들이야 신경 쓰지 않고 일이나 하면 그만이었지만, 짬이 좀 되는 청소부들은 막연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폐쇄된 13번 부두를 청소하며 정점을 찍었다.
부두 바닥에 흥건한 오물들과 가득 쌓인 고깃덩어리, 정부 측 사람이 분명한 양복쟁이들의 시체…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현장 아닌가.
거기다 TV나 인터넷에서 기사 한 줄 안 나는 게, 윗선이 직접 소문을 억누르는 게 분명했다.
보고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청소부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눈을 돌렸다.
눈치 없는 신입이 양복쟁이들에게 대체 저 역겨운 게 뭐냐고 물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뒤로는, 아예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청소부가 입을 다문 건 아니었다. 목숨 아까운지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청소부 박구식은 그런 목숨 아까울 줄 모르는 사람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술만 들어가면 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해내는 술꾼답게,이번에도술에 취하자마자 뱉어선 안 될 말들을 뱉어냈다.
미친 도시야, 미친 도시! 살인마가 돌아다니는데, 경찰들은 아직 수사 시작도 안 했다니까?
미친 살인마가 대체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알아? 내가 확인한 것만 수십 명이야! 사람만 죽인 줄 알아? 엘프까지 둘이나 죽였다니까?
시발, 분명 작업반장님을 죽인 그놈이 13번 부두를 그렇게 만든 범인일 거야. 내가 장담한다니까!
취객의 헛소리에 익숙한 술집 주인은 아이고 이 사람이 많이 취했네 라는 말로 운을 띄우고,자연스레 그를 가게 바깥으로 쫓아냈다.
으아, 더러운 도시. 여기도 맥아더, 저기도 맥아더. 시발 여기가 미국 식민지야, 한국이야?
인사불성이 된 채 인천의 밤거리로 내몰린 박구식은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낡고 퀴퀴한 반지하, 그의 유일한 보금자리.
끼익.
그가 낡고 녹슨 비명을 지르는 문을 연 순간,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뭐야 시… 헙!”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그의 뺨을 차가운 뭔가가 푹, 찔렀다.
검. 그의 어깨를 두들긴 건 손이 아니라, 곧게 뻗은 검이었다.
검을 보자마자, 술이 확 깬 박구식은 양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비굴하게 말했다.
“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 지갑이 있으니, 목숨만은…”
“우린 강도가 아니다.”
그에게 검을 겨눈 사람은 여자였다. 그것도 소름 돋게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자.
“그, 그럼 원하시는 게 뭔지…”
“아까 술집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하나?”
“수, 술집에서요?”
박구식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올린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윗선인가? 윗선에서 날 감시하고 있던 건가?’
그는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하려 했다. 정부를 거역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그저 술김에 지껄인 헛소리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살해당한 엘프들.”
엘프? 예상하지 못한 단어를 들은 박구식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그의 등 뒤로, 두 여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두 사람의 체형은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가녀렸다. 박구식은 여차하면 덤벼볼 심산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즉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모두, 지구에선 볼 수 없는 기다란 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엘프들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