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0)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0화(180/817)
〈 180화 〉 삼포 가는 길 (4) (수정)
* * *
***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코르부스와 달리, 네티는 깊게 잠들지 않았다.
덕분에 잠옷 차림의 언니가 몰래 방을 나서는 것도, 성녀가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것도 전부 알 수 있었다.
풀벌레도 잠들 시간인데, 둘이서 화장실이라도 가는 걸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네티는 두 사람이 형부에게 간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이 밤중에, 언니가, 성녀랑, 남자 혼자 있는 방에 갔다…
의심이 꼬리를 물던 어느 순간, 네티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니까.
언니만 갔다면 모를까, 성녀도 함께 가지 않았나.
고귀한 성녀님… 아니, 생각보다 고귀하시진 않았지만, 어쨌든, 성녀님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네티는 머릿속 마귀를 지워버린 뒤, 언니와 성녀님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해가 뜰 때까지.
코르부스가 코 고는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뜬눈으로 밤을 샌 네티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충 외투를 걸치고 형부가 묵는 방으로 달려가 문을 두들겼다.
“저기요? 형부? 언니?”
재차 문을 두들겨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티는 문고리를 잡고 망설였다. 이걸 신경 쓰는 게 맞나? 결국 언니와 형부 사이의 일인데, 자신이 끼어드는 게…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던 순간, 문이 혼자 열렸다.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던 것처럼.
네티는 사양하지 않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방 내부를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방문을 닫으려는데, 문뜩 소파에 걸린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하인이 잠옷과 함께 건넸던 외투.
‘…역시, 이 방에 왔었구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네티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까지 진도 나갔냐고 언니를 놀리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하니 그 쑥맥 같던 언니가 끝까지 진도를뽑다 못해 추가 학습(?)까지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후끈거리는 얼굴을 붙잡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때마침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저기 아저씨, 혹시 이 방에 있던 손님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하인은 형부와 언니들이 식당에서 아침 식사 중이라고 알려준 뒤, 친절하게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해줬다.
식당에는 정말로 세 사람이 아침 식사 중이었는데, 가볍게 빵 조각을 뜯거나 차를 홀짝이며 뭔가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평범한 식사 시간처럼 보였으나, 네티는 형부의 눈 아래가 조금 퀭한 걸 놓치지 않았다.분명 밤새 한숨도 못 잔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보다, 밤새 하는 게 가능한가? 아니, 여자가 둘이라 가능…
‘…염병하고 있네.’
네티는 손바닥으로 붉어지는 뺨을 두들긴 뒤,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네티? 일찍 일어났네? 잠은 잘 잤어?”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건 성녀였다.
방정맞은 목소리를 따라 언니와 형부도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었고, 네티는 두 사람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걸 본 세티가 의아한 표정을 짓건 말건, 네티는 세 사람 사이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낡은 의자는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끼이익 한숨을 내쉬었다.
“네티, 갑작스럽지만, 알려줄 게 있어.”
여명이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아, 알려줄 거요?”
바짝 굳어서 흘끔흘끔 세 사람의 눈치를 보던 네티가 움찔거렸다.
설마 여기서 세 사람의 관계를 고백하는 건가? 네티가 꿀꺽 침을 삼키건 말건, 여명은 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앞으로 여정에 대해서.”
“네?”
“이제 지구로 돌아갈 거잖아,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어디로 갈지.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
그렇게 운을 띄운 여명은 차 한 모금을 훌쩍인 뒤,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은 길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여명의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랬다.
당장 오늘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이고.
다른 도시에 들려 위장 신분을 구한 다음.
그 위장 신분을 이용해 차원문을 넘어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요, 용을 타고 가요? 진짜요?”
“응, 철도가 수리되기까지 기다리느니, 용에게 부탁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왜, 혹시 용이 무섭니?”
“아뇨, 아뇨! 탈 게요, 아니, 꼭 타고 싶어요!”
커다란 붉은 용이 태워준다는 말에 네티의 머릿속에 있던 고민이 싸그리 날아갔다.
형부가 난잡한(?) 생활을 하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용을 탈 수 있는데!
탱크 다음에는 용이라니. 동생들에게 자랑할 게 생긴 네티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가운데, 그것을 본 세티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
새벽 4시 30분. 소년의 아침은 언제나 수련과 함께 시작된다.
가벼운 몸풀기 후 휴식 없는 고강도 트레이닝, 그리고 다섯 개의 전용 무술까지.
거의 10년을 이어온 루틴을 끝내면, 하늘 저편에서 여명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년은 땀에 젖은 걸음을 옮겨 수련실의 창문을 열었다.
부지런한 학생들의 발소리, 이제 막 깨어나는 기숙사의 소음, 그리고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창문을 넘어와 그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로드 하우 아카데미의 아침.
소년은 조용히 그 풍경을 음미하다가,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수련장 구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는 습관적으로 한국의 포털 사이트를 키고, 헤드라인 뉴스를 확인했다.
『한국을 휩쓴 경무대 테러 사건, 대통령을 노린 테러인가?』
『안기부, 폭발 원인은 ‘시체 폭발’… 네크로맨서의 테러로 잠정 결론.』
『‘대통령의 자작극 아니냐.’ 홍용완 의원, 당내 반발에 ‘농담이었다’ 최악의 사과.』
다행스럽게도, 뉴스 헤드라인은 최근 일어난 경무대 폭탄 테러 사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혹시라는 생각으로 뉴스를 훑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를 주제로 한 뉴스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최고 학생은 한국인? 로드 하우 난리 났다!! 중간 평가 천여명 1위! 배반자의 아들, ‘한국 배신한 아버지 원망.’ 충격 고백!』
전형적인 국뽕 뉴스.
평소라면 그냥 무시해버렸겠지만, 소년은 자신과 아버지를 언급하는 제목을 외면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기사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부풀리고 짜집기한 쓰레기 뉴스였다.
물론, 모든 내용이 가짜는 아니었다. 최근 중간 평가에서 천여명이 1위를 했다는 것만큼은 진짜였으니까.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천여명은 진짜가 아니지만.’
소년, 전윤성은 뉴스와 아래 달린 리플을 읽으며 아이러니를 느꼈다.
진짜 천여명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상황이건만, 한국인들은 그가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가의 위상을 드높여 줄 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하긴, 사람은 진실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법이다.
당장 그의 아버지부터가…
끼익
그때, 누군가 수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전윤성이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중년인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짧게 깎은 머리에 거대한 덩치, 거기에 미군 특유의 군복까지.
“패트릭 대위님?”
전윤성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패트릭이라 불린 군인 또한 그에 맞춰 경례하며 말했다.
“전윤성 원사, 이른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은 것치고는 표정이 좋지 않은데?”
“…규칙의 문제입니다. 수련실은 학생 전용 시설입니다. 외부인이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올바른 지적이었지만, 패트릭 대위는 개의치 않았다.
“걱정 말게, 들키지 않고 잠입했으니.”
전윤성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건 말건, 패트릭 대위는 군홧발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잔말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에게 전할 급한 소식이 있네.”
“급한 소식? 대위님이 직접 하실 정도로 급한 소식이 뭡니까?”
패트릭 대위는 대답 대신 품에서 작은 수정 하나를 꺼냈다.
기억 수정. 비전유물과 유사한 기술로 만들어진, 기억 전달용 마도구.
“이건?”
“나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네. 이 물건 자체가 특급 기밀이야.”
“….”
그는 절도 있게 수정을 받았다. 차가운 수정은 마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찰싹 손에 달라붙었다.
전윤성은 그대로 수정에 마나를 불어 넣으려다가, 패트릭 대위를 보며 말했다.
“저, 대위님. 하수도에서 실종된 학생들… 흔적은 찾았나요?”
대위의 눈썹이 은근슬쩍 휘어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전윤성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기밀이라네.”
못 찾았다가 아니라, 기밀이라. 찾았다는 말을 빙 돌려 한 것이리라.
전윤성은 고마움을 담아 경례한 뒤, 수정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야가 돌변했다.
***
전윤성이 눈을 뜬 곳은 익숙한 도시였다.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지만, TV나 책 속에서 자주 접했던 곳.
‘…제국 수도?’
기억 수정이 보여주는 풍경은 단순한 상상이나, 싸구려 3d 영상과 달랐다.
냄새나 감촉은 없었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만큼은 진짜에 가까운 풍경.
드높은 황궁과 마탑, 마차와 자동차가 뒤섞인 길, 그리고 오물이 흐르는 뒷골목까지 전부 진짜처럼 생생했다.
게다가 무슨 축제라도 하는 건지, 도시 곳곳에는 가판이 들어서 있고, 다양한 패션의 사람들이 도시 전체에 바글거렸다.
특히 황궁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있었는데, 개중에는 전윤성도 얼굴을 알만한 유명인들도 있었다.
이게 무슨 기억이지? 단순히 차원문 너머를 보여주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고민을 이어 나가던 전윤성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머리 위에 떠 오른 태양을 보고 나서야, 이 기억이 ‘지난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수정에 마나를 불어넣은 ‘현재’는 이제 막 여명이 떠오르는 새벽이었으나, 지금 이곳은 태양이 쨍쨍한 정오였으니까.
다른 시간도 아니고, 왜 하필 이런 순간의 기억을 보여주는 거지?
군 상부의 진의가 뭔지 궁금해지던 그때, 전윤성의 시야로 떨어지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영상 속 사람들 또한 떨어지는 물건을 발견했다.
저게 뭐야? 습격인가?
습격은 무슨, 지금 이곳에 지구인이 몇 명인데!
연금술사들이 또 헛짓거리 하나 보군.
마치 혜성처럼, 대기를 불태우며 떨어지는 그것을 보며 수군거리길 잠시.
누군가 고함을 내질렀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수, 순간이동! 지금 당장 차원문이나 순간이동 가능한 사람 없나?!
그는 전윤성도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초인이었다. 이름이 타나하시 나세였던가.
용병계에서는 거의 왕처럼 군림하는 초인일 텐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칙쇼!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주겠다! 순간이동 쓸 수 있는 사람 아무나 앞으로 나와!! 나오라고!!!
순간이동이나 차원문 마법이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애타는 그의 외침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 저게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그보다 먼저 추락체가 수도 한가운데 떨어졌다.
누군가의 비명소리, 혹은 타나하시의 마지막 욕설은 들리지 않았다. 소리보다 먼저, 거대한 빛이 황궁을 집어삼켰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빛의 범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문자 그대로 증발했다.
건물, 차, 나무, 그리고 인간까지.
섬광이 눈을 찌르고, 전윤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가늘게 눈을 뜨고 폭발을 확인하자,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공기가 빨려드는 게 보였다.
‘저게 대체 뭐’
전윤성의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섬광은 폭발이 되었다.
!!!!!!
열기와 충격파가 도시를 집어삼켰다. 다행히, 수십,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죽은 자들을 대신해 화염이 절규한다. 누군가였던 먼지가, 무언가였던 재가 영혼 대신 하늘로 솟구친다.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음에도, 전윤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산 자에게는 찰나, 죽은 자에게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눈을 뜬 전윤성의 눈에 비친 건…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이었다.
수백만을 집어삼킨 죽음의 구름.
그것을 본 전윤성이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수도의 변두리에서, 무너진 마탑 잔해 아래에서, 끓어오른 강물 속에서.
살아남은, 불행한 자들이 목 놓아 울었다.
살려 달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고통.
그것은 죽기 전의 단말마요, 먼저 죽은 자들을 향한 부러움이었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에 전윤성은 구토를 참지 못했다.
그가 무릎 꿇고, 그대로 위산을 게워낸 그 순간.
영상이 끝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