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3)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3화(183/817)
〈 183화 〉 삼포 가는 길 (7)
* * *
***
무시무시한 악명과 달리, 직접 마주한 데메론드는 어딘가 털털한 아저씨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와인을 홀짝이는 모습이 꼭 술집에 온 작업반장님을 떠올리게 했으나, 여명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가 만난 몇 안 되는 엘프 중 대부분은 정신병자였고, 눈앞의 엘프는 그런 정신병자의 정점에 선 존재였으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죽일 생각이었으면 벌써 죽였을 테니.”
긴장하지 말라는 듯, 데메론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명은 슬쩍 마나를 끌어 올리며 답했다.
“…절 찾아오신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자, 데메론드가 덧붙였다.
“지나가던 중 세계수의 마나가 느껴져서 왔다고 하면 믿겠나?”
“….”
“몇 킬로미터 바깥에서도 느껴지는 마나라니, 엘프라면 누구라도 찾아올 수밖에 없지.”
드레이테리얼에서는 핀엘, 이번에는 데메론드.
세계수의 결정에 의외의 단점이 있다는 걸 깨달은 여명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데메론드가 잔을 싹 비우며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질문하지. 자네가 잘못한 게 없다면, 서로 피 볼 일은 없을 거야.”
문제가 있다면 피 볼일이 생긴다는 말.
여명은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언제든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낼 수 있도록.
“드레이테리얼에서 올라온 것 같은데, 핀엘이란 엘프를 만난 적 있나?”
핀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건가?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메론드가 묘한 눈빛을 보냈다.
“죽였나?”
여명은 ‘아뇨, 팔만 잘랐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품에서 핀엘의 편지를 꺼냈다.
“그건?”
“핀엘과 헤어질 때 부탁받은 물건입니다. 당신께 보내는 보고서라더군요. ”
설마 하루 만에, 그것도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주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편지를 받은 데메론드는 거리낌 없이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그 안에는 작은 종이 한 장만 덜렁 들어있었는데, 데메론드는 순식간에 편지를 읽고는 그대로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천여명…자네가 그 천여명이었군. 어쩐지, 용과 함께 있더라니… 로드 하우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이곳으로 왔나?”
엘프는 조금 전과 다른, 그러니까 놀람과 의문이 뒤섞인 눈빛으로 여명을 훑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차원문을 넘어와 핵을 막을 만한 사정이라, 그게 뭔지 정말 궁금한걸. 신들에게 계시라도 받았나?”
마치 핵무기가 발사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말투.
다음 순간, 여명의 머릿속으로 작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만남, 공산주의자, 핵무기, 그리고 운명…
그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드레이테리얼로 가고 계셨군요.”
“….”
“핵무기가 제국 수도를 쓸어버리는 운명이 틀어진 이유를 찾기 위해서.”
데메론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론이나, 놀람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여명을 바라봤다.
미리디스와 꼭 닮은 그의 녹색 눈동자가 여명의 황금색 눈동자와 얽혔다.
눈은 마음에 창이라고 했던가?
여명은 데메론드의 눈동자 너머,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당황, 의심, 그리고… 기대감.
***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데메론드가 갑자기 와인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따라주겠나?”
“….”
“어머니 세계수를 걸고, 오늘 밤 절대 피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엘프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 병을 향해 눈짓했다.
세계수를 건 맹세? 여명은 엘프의 부탁대로 병을 잡고 잔에 와인을 따랐다.
쪼르르 잔을 채우는 와인을 따라 묘한 긴장이 차오르길 잠시.
데메론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긴장을 박살 냈다.
“우리 딸,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나?”
“….”
갑자기? 여명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그때, 옆에 있던 세티가 대신 대답했다.
“잘하고 있어요.”
그녀는 긴장을 이겨내려는 듯,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살짝 들이킨 뒤 말했다.
“성적도 잘 나오고, 교우 관계도 원만해요. 정체도 들키지 않았구요.”
“…그쪽은?”
“따님의 룸메이트, 홍세티라고 합니다.”
데메론드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우연에 일희일비하기에는 그가 겪어온 삶이 너무나 길었으므로.
그 대신, 가만히 쫄아 있던 네티가 엘프 몫만큼 놀랐다.
“쇠미리 언니 엘프였어?! 그것도 뉴스에 나온 엘프 공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쌍의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그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네티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자칫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으나, 엘프는 피식 웃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딸의 가명 때문에.
“쇠미리? 쇠미리라니… 왜 하필 쇠 씨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잠시 쇠라는 단어를 입에 넣고 굴리던 엘프는 여명과 세티를 보며 말했다.
“혹시, 아카데미에 쇠 씨 성을 가진 학생이 있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네티는 눈을 깜빡였으나, 세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여명도 애써 엘프의 눈을 피했다.
두 사람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직감한 데메론드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나 보군. 그럼 혹시 그놈이 내 딸 남자친구인가?”
“아니요.”
즉답. 데메론드는 재차 질문했다.
“그러면 내 딸이 좋아하는 사람은 있나?”
세티는 슬쩍 여명을 바라봤다. 엘프 또한 똑같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말고. 다른 학생 중에서.”
“…미리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많지만, 제가 아는 한 미리가 호감을 표하는 남자는 없어요.”
여명 빼고, 세티는 일부러 뒷말을 삼켰다.
“그런가? 아쉽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엘프의 얼굴에서 실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딸의 연애사 이야기하는 것치고는 이상한 태도였다.
아무튼, 잠시 후 데메론드가 대뜸 손뼉을 쳤다.
“아, 그럼 혹시 여자는?”
“…예?”
“우리 딸이랑 사귀거나, 호감을 표현하는 여학생 말이야. 동성애라고 하던가? 최근 지구인들에게 유행한다고 들었는데.”
“….”
세티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이 엘프가 뭐라는 거야?
그리고 그녀의 당황을 ‘없다’로 이해한 데메론드는 아쉬운 듯 턱을 쓸었다.
“음표가 꼬이는데, 연주자의 자리는 아직도 비어있구나. 얄궂은 일이야.”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엘프는 술을 홀짝거리다가, 여명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로, ‘혹시?’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으음… 천여명?”
“예.”
“자네 혹시, 내 딸 하고 잤나?”
뜬금없는 질문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언니 몰래 와인을 홀짝이던 네티는 푸흡 와인를 뿜었고, 세티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며, 여명은 그냥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저의가 뭡니까?”
“이제 막 땅에 떨어진 도토리라면 나무가 되기 위해 온갖 우연이 필요하지만, 이미 싹이 난 도토리는 물만 줘도 되니까.”
“….”
“반응을 보니 싹이 나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알겠군. 방금 그 말은 잊어주게.”
잊을 수 있겠냐? 목이 탄 여명이 와인을 들이켰다.
술이 오갔으니 분위기가 좀 풀어질 법도 하건만, 데메론드도 여명도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후, 다음 병을 딴 데메론드가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이참에 제안 하나… 아니, 두 개의 제안을 하지.”
“…제안이라면?”
“첫 번째, 여기서 서로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고, 이대로 조용히 헤어진다. 물론 술값은 두고 가지.”
엘프는 판초우의 사이에서 금화를 꺼내 탁자 위에 올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대신, 조언과 가르침을 받는다. 어떤가?”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이었지만,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데메론드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했으므로.
여명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데메론드가 그의 잔을 채워주며 덧붙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자네의 자유야. 내가 굳이 이런 제안을 한 건, 어디까지나 세계수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두게.”
“….”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상인들이 떠드는 소리와 네티가 와인을 홀짝이는 소리가 귓가를 울릴 때쯤.
여명은 선택했다.
“두 번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
두 번째 제안을 선택한 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데메론드의 경지가 결정적이었다.
차원문 너머와 지구를 통틀어 가장 강한 열 명 중 한 명.
싸우는 모습조차 극비로 취급되어 도시 전설만 존재하는 그는 대체 어떤 가르침을 줄 것인가?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조금 무리한 부탁을 받는 것도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여명을 향해, 데메론드는 가르침 대신 조언부터 꺼냈다.
“용은 집으로 돌려보내게.”
네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대로 용과 함께 다닌다면, 용을 노리는 자들을 계속 끌어들이게 되겠지. 카할 마그두의 용 뼈를 챙긴 인간과 진짜 용이라, 밀렵꾼들에게는 걸어 다니는 로또나 마찬가지야.”
“…밀렵꾼이라면 얼마든 이겨낼 수 있어요.”
세티가 반론했으나, 엘프는 고개를 저었다.
“이겨낼 수 있으니 하는 조언이다. 밀렵꾼을 물리치면? 그럼 거기서 끝인가? 아니지, 진짜 문제는 밀렵꾼을 물리친 다음이다.”
“…다음?”
“범죄자라도 국민은 국민이거든, 지구의 정부들은 국민 타령하면서 개입하는 걸 좋아하지. 그렇지 않나?”
마치 겪어본 듯한 말투. 엘프와 미국의 역사를 아는 세티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 사이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카할 마그두가 유언 직전에 남겼던 경고를 떠올렸다.
용의 시체를 노린 자들이 그를 쫓을 거라는 말.
게다가 그는 만주에서 용의 갈비뼈를 두고 벌어진 추악한 짓거리를 이미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용 혼자 있는 것보단 일행과 함께 있는 편이…”
네티가 못내 아쉬운 듯 말했지만, 엘프는 즉시 반박했다.
“용 비늘 산맥은 천혜의 요새다. 스탈린처럼 독가스를 폭격하며 기갑 사단을 끌고 오면 모를까, 용에게 그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고 단언하마.”
“….”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여명은 고개를 돌려 용을 눈에 담았다.
붉은 용은 야영지 옆에서 커다란 소고기를 입김으로 굽고 있었는데, 상단의 상인과 일꾼들이 주변에 모여 신기한 듯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용이 그를 돕다가 죽는다면, 옥새를 넘겨준 드워프 왕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나.
고민은 길지 않았고, 선택은 빨랐다.
“…조언대로 하겠습니다.”
여명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 조언을 받아들인 게 의외였던 걸까, 엘프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진짜 동료로 생각했군. 자네 정말로 지구인이 맞나?”
“….”
“…내가 조언 하나 더 하자면, 그 마음가짐, 오래오래 간직하게. 용은 사람의 진심을 잊지 않거든.”
데메론드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실력 좀 볼까?”
여명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탁자 아래 세티의 손을 꽉 잡아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엘프의 등을 따라 야영지 바깥으로 향했다.
사박사박 풀잎이 밟히는 소리, 코르부스의 웃음소리,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용이 소고기를 씹어먹는 소리가 작아질 때쯤.
데메론드가 입을 열었다.
“여기면 충분하겠군.”
그와 여명이 도착한 곳은 야영지 멀지 않은 작은 공터였다.
데메론드는 언제 챙겨온 건지 알 수 없는 와인 병을 꺼내더니, 대충 바닥에 주저앉았다.
“혹시나해서 묻는데,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두 번째 제안을 받은 건가?”
“대단한 부탁은 안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 데메론드는 뚱한 표정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믿음이 아니라 확신이군. 왜, 자네가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라서 내가 적당히 할 거라 생각했나?”
여명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무언의 긍정.
데메론드는 부정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으며 ‘영악한 건 마음에 드는 군.’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아무튼, 엘프는 와인 병을 반쯤 비우고 나서야 가르침을 시작했다.
“자네가 알고 있는 무술, 지금 여기서 전부 시연해봐.”
여명의 상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단, 마나는 하나도 쓰지 않은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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