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4화(184/817)
〈 184화 〉 삼포 가는 길 (8)
* * *
***
룸 101.
누가 먼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부르는 방.
흔한 장식은커녕 시계조차 없이 책상만 덜렁 놓인 그 방에서, 한 노인이 잉크병과 깃펜을 꺼냈다.
그는 조심스레 깃펜에 잉크를 채운 뒤, 책상에 놓인 양피지 위에 글을 써 내려갔다.
사각, 사각
고아한 손놀림, 고풍스러운 필체.
스마트폰과 키보드가 지배하는 세상이건만, 옛것들이 만들어내는 글씨는 아름다웠다.
허나 그 글씨가 적어 내린 이야기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의 죽음, 어떤 곳의 파멸, 한 세계의 몰락.
그것은 선고를 내렸다는 점에서 판결문이었다.
과거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역사서였으며, 미래를 적었다는 점에서 예언서였다.
그러나 이 양피지에 적힌 게 무엇이건, 남들이 뭐라고 부르건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일어난 일들과 일어났던 일들을 적고 또 적을 뿐.
만주 사냥터, 변경. 원인, 성녀.
환생자, 변경. 원인…
프롤로그, 변경…
서울의 제…
쉼 없이 펜 소리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노인은 펜을 멈추고 방문을 바라봤다.
곧이어, 녹슨 철문이 열리며 양복 차림의 흑인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온 걸까. 그는 숨을 헐떡이며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특별 보좌관? 무슨 일인가?”
노인이 다시 펜을 움직이며 물었다. 흑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또 시나리오가 뒤틀렸소.”
충격적인 이야기였음에도, 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모두 예상한 바 아닌가, 나비의 날갯짓은 언제나 다른 태풍을 몰고 오니, 당황하지 말게.”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계속 이어지는데, 흑인은 말이 없었다.
마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결국,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여, 황녀가 살아남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 탕녀가 차원문을 넘기 전에 죽이라. 황족은 로드 하우에 있는 삼 황자로 충분…”
“아니오.”
“…그럼 황태자가 살았는가? 희귀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로다. 그는 내버려 두라. 삼 황자 곁의 플레이어가 기꺼이 그를 죽일 것이니.”
하필, 그 순간 깃펜에 들어찬 잉크가 바닥났다. 노인은 잉크병을 들어 펜을 채웠다.
정확히는, 채우려 했다.
그러나 그가 병을 들어 올린 그때, 흑인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핵이 사라졌소. 하나도 아니고 드레이테리얼 지하에 있던 13개, 전부.”
노인은 잉크병을 든 자세 그대로, 맞은 편의 남자를 노려봤다.
번들거리는 노인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이유는?”
“아직 파악 중이오.”
파악 중이라,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살짝 두통을 느낀 노인은 깃펜을 가지런히 양피지 위에 내려놨다.
잉크의 냄새, 양피지 속 가죽 냄새, 침묵 속을 거니는 뒤틀림의 냄새.
잠시 후, 마음을 다잡은 노인은 다시 펜을 들었다.
“주가시빌리는 어찌 되었지? 죽었는가?”
“비코프는 붉은 차원문을 열고 발투아로 도망쳤소. CIA는 그가 북부의 영지들을 공격해 혁명을 일으킬 생각이라고 확신하더군.”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공산주의자답게 움직이는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고약한 에너지 생명체들은?”
“차원 위성이 몇몇 움직임들을 포착했소. 아마 이번 핵무기 사건의 배후에는…”
대화는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제국, 아카데미, 엘프, 드워프, 그리고… 한국.
“…대통령께 이리 전하라, 정석 시나리오가 바뀌었노라고.”
노인의 일방적인 축객령이었으나, 흑인은 순순히 방을 떠났다.
그와 정부가 원하는 정보는 이미 얻었으므로.
그렇게 다시 방에 침묵이 찾아오는 가운데, 노인은 양피지의 끄트머리에 새로운 글귀를 적어 내렸다.
성녀와 공주가 모이는 곳, 용ㅅㅏ…
그 순간, 뚜둑, 깃펜이 부러졌다.
노골적일 정도로 불길한 징조.
부러진 깃펜 사이로 흘러내리는 잉크를 잠시내려다보던 노인은 방 천장에 고인 그림자를 향해짧게 혀를 찼다.
쯧.
***
전통적인 격투 무술과 초인의 무술의 차이는 누가 뭐라 해도 마나다.
초인의 육체가 타고난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것도, 비정상적인 재생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전부 마나 덕분이다.
그러나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초인 무술은 일반 무술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마나를 사용할 걸 상정하고 만들어진 만큼, 오히려 모자란 경우가 흔했다.
그렇기에, 마나 없이 펼치는 여명의 무술은 볼품없었다.
종아리와 족저근막에 마나가 고이지 않은 비각술은 엉성한 발놀림과 발차기에 불과했다.
나뭇가지를 검 삼아 펼치는 혜성검과 플레이어에게 훔친 검술은 단순 무식한 막대 휘두르기에 불과했고, 파양결이나 흑익류는 아예 사용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명은 묵묵히 무술을 펼쳤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턱 끝까지 숨이 들어찰 때까지, 계속.
그의 무술 시연이 끝난 건, 찌르르 울던 풀벌레들의 소리 사이로 엘프의 박수 소리가 들린 뒤였다.
“그만, 거기까지.”
데메론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네가 익힌 무술. 대부분 훔쳐 배운 무술인 것 같은데, 맞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 정도 되면 다 보이는 법이지. 어쨌든, 그중에서 진의를 아는 무술은 몇 개나 되지?”
“절반… 정도입니다.”
“진의를 가리지 않고 형태와 마나 사용법만 훔쳐 익혔다… 소련 놈들도 아니고, 거참.”
주가시빌리, 혹은 살기. 단번에 여명의 밑바닥을 꿰뚫어 본 데메론드는 텅 빈 와인 병을 거꾸로 들며 말했다.
“자, 이번에는 마나를 사용해서 날 공격해봐라.”
잠시 숨을 정리하고 있던 여명이 나뭇가지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맹세를 어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늘 밤은 피를 보지 않겠다… 조금 전 데메론드는 세계수를 걸고 한 맹세.
그것을 떠올린 엘프는 피식 웃었다. 간단히 말해, 피를 흘리게 해주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덤비기나 해.”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파양결을 끌어 올리자,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마나가 그의 혈관을 타고 거칠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겨우 눈 한번 깜빡일 시간.
전신에 마나를 일으킨 여명은 그대로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저 멀리 있는 성녀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일격.
그 일격을 마주한 데메론드의 대응은 간단했다. 그는 손에 들린 빈 와인 병을 여명을 향해 쑥 내밀었다.
단순한 찌르기, 혹은 밀어내기.
그러나 그 단순한 공격을 본 여명은 즉시 나뭇가지를 거두고, 두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데메론드가 다칠까 봐? 아니, 그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는 까닭이었다. 더 나가면 죽는다고.
그 직후, 나뭇가지를 타고 뿜어져 나오려던 마나가 목표를 잃고 나뭇가지 속에서 폭발했다.
퍼엉! 들고 있던 나뭇가지 파편을 뒤집어쓴 여명은 파편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당한 눈으로 데메론드를 바라봤다.
짧은 침묵.
이윽고 풀벌레 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쯤, 여명이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엘프 검술이었습니까?”
그러자 데메론드의 얼굴에 이채가 돌았다.
“한 수에 알아봤나? 눈썰미가 좋은데.”
“….”
설마가 사실이 된 순간, 여명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저게 엘프 검술이라고?
엘프 검술을 아예 모르면 모를까, 리메와 핀엘의 검술을 직접 보고, 심지어 훔치기까지 한 여명은 알 수 있었다.
데메론드가 조금 전에 보여준 한 수는, 장난감 자동차 엔진으로 로켓을 띄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그는 황망함을 삼키며 재차 질문했다.
“마나 없이 어떻 아니, 정말로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렇게.”
데메론드는 그렇게 말하곤, 와인 병을 허공에 그었다.
이번에도 가볍게 휘두른 것에 불과했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파삭! 여명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풀벌레가 반으로 갈라지며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동시에.
“….”
떨어지는 벌레들을 보며 여명이 말을 잃은 사이, 데메론드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해했나?”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놀람 때문에 입이 열리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잘린 풀벌레의 단면에서 무언가 힌트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잠시 후, 그는 한가지 가설을 내놓을 수 있었다.
“…진의.”
“오?”
“…엘프 검술에 다른 진의를 담아서 펼치신 겁니까?”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지만, 데메론드는 엘프의 검술의 진의를 바꿨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현상이었다.
데메론드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답이다. 자네가 진의 없이 형태와 마나만으로 무술을 펼친 것과 비슷하게, 나는 단 한 개의 진의로 여러 무술을 펼칠 수 있지.”
하나의 진의로 다수의 무술을? 발상의 전환을 마주한 여명은 감탄했다.
진의를 모르는 무술을 잔뜩 익히고 있는 여명에게 이보다 더 귀한 가르침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의 감탄이 길어지려는데, 데메론드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겠는데, 내가 자네에게 주려는 가르침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아니라고? 여명이 고개를 기울이자, 엘프가 덧붙였다.
“자네가 알고 있는 무술들의 진의 중, 마음을 울리는 게 있나?”
“….”
없었다. 그나마 파양결의 진의인 심재좌망(心??忘) 정도가 자그마한 깨달음을 줬을 뿐.
여명이 입을 다물자, 데메론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의란 결국 마나를 움직이기 위한 사상.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고 해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저 무술을 쓰기 위한 지식에 불과하지.”
그렇게 말한 데메론드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의 진의로 여러 무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진의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내가 내려줄 가르침은 그것이다.”
“….”
여명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면서도, 질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메론드, 당신의 진의는…뭡니까?”
겨우 와인 병으로 여명의 본능을 곤두서게 한, 살벌한 진의.
이런 질문이 나올 줄 몰랐던 것일까? 데메론드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내 진의? 내가 품은 진의는… 증오다.”
“….”
“조금 더 길게 표현하자면… 그래, 이거겠군.”
풀벌레가 울고, 달빛이 힐끗거리는 밤하늘 아래, 흉터가 가득한 엘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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