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6)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6화(186/817)
〈 186화 〉 삼포 가는 길 (10)
* * *
***
성녀의 뜬금없는 박해(?)와 상관없이, 여명은 잠들지 않았다.
그는 상인들이 준비해준 천막으로 가는 대신, 데메론드와 용을 이끌고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숲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별 아래, 숲을 가로지르며 걷기를 잠시.
“이쯤이면 누가 엿들을 걱정은 없겠네요.”
썩은 나무가 쓰러져 만들어진 공터를 발견한 여명이 말했다.
곧이어 인간과 엘프, 그리고 용이 공터에 둥글게 자리를 펴고 둘러앉았다.
그렇게 대화의 장이 만들어지자마자, 용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데메론드, 세계수의 탕아여.]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지, 용은 후드를 뒤집어쓴 엘프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오르세 타불, 용 비늘 산맥의 수호자시여,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메론드는 후드를 벗으며 대답했다. 흉터 가득한 얼굴을 본 용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를 비롯한 모든 엘프가 빨갱이가 되었다지. 스탈린에게 무릎을 꿇고, 심지어 성 씨마저 바꿨다고?]“….”
[드워프들의 피와 눈물이 아직도 이 땅에 흐르고 있거늘, 부끄럽지도 않느냐?]용이 크고 거침없는 어조와 목소리로 엘프를 비난했지만, 그는 그저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을 뿐이었다.
데메론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목마른 갈증에 죽을 것 같다면, 뭐라도 마셔야지요. 우리는 이게 바닷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엘프에겐 바닷물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죽느니 바닷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그새 혓바닥이 길어졌군. 탕아여, 그게 너 자신에게 하는 변명이더냐?]용은 고개를 길게 내밀어, 엘프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파충류 특유의 살기 어린 눈동자, 뜨겁게 달궈진 입김.
그러나 엘프는 겁을 먹긴커녕, 팔짱을 끼며 용과 눈을 맞췄다.
그가 용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아니, 아니었다.
“오르세 타불, 절 타박하시는 건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저기 젊은 친구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 당신께 의리를 지켰습니다.”
[의리? 빨갱이가 감히]“오르세 라날.”
누군가의 이름인 듯한 단어가 엘프의 입에서 나온 다음 순간, 반쯤 열렸던 용의 입이 딱 닫혔다.
용의 표정이 구겨지는 가운데, 데메론드가 덧붙였다.
“당신의 누이는 지금 지구에 있습니다.”
[…뭐라?]“제 오라비의 시체라도 찾겠다고 지구로 건너간 걸 제가 구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짧은 침묵.
용은 믿지 못하는 얼굴로 엘프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세계수를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어머니 세계수를 걸고 맹세합니다. 전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한 데메론드는 빤히 용을 바라보았다.
오르세 타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엘프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감사 인사는 딱히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용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부끄러운 듯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여명을 바라보았다.
‘그대도 알고 있었는가?’ 라는 표정.
여태껏 조용히 용과 엘프를 지켜보고 있던 여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누이 분의 이름은커녕, 두 분이 아는 사이인지도 몰랐습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지만, 아니, 그런 말이기에 오르세 타불은 한숨을 쉬었다.
[탕아여, 내 태도를 사과하겠다.]“사과하실 것까지야. 제가 빨갱이인 게 틀린 말도 아닌데.”
용은 쓴웃음을 머금은 데메론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무슨 일로 여명과 나를 불렀는지 말하라. 경청하겠다.]“아, 그거라면 제가 아니라 저 친구가 말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용과 엘프의 시선이 여명에게 모였다.
여명은 너스레를 떠는 대신, 큼큼 헛기침하고는 아까 전 데메론드와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 오르세, 산맥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상외의 말이었던 걸까, 용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여명은 기나긴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했다.
살아있는 용, 여명이 가진 카할 마그두의 시체, 그리고 둘을 노리고 몰려올 밀렵꾼.
직설적인 설명이 끝난 뒤, 용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태워주지 않으면 성녀와 긴 시간을 함께 해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라고, 말했다.
“….”
대체 드레이테리얼로 성녀를 태우고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명은 당황을 삼킨 뒤,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오르세 타불은 ‘수컷은 고달픈 법이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원한다면, 가장 가까운 역까지는 태워다 주겠노라.]“…오르세, 이미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희를 위해 이 이상 보는 눈이 많은 곳에 모습을 드러내실 필요 없습니다. ”
사려 깊은 말. 용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아침이 오는 대로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나겠노라.]그렇게 말한 용은 다시 야영지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올 때와 달리, 돌아가는 길은 조용하지 않았다.
“용이시여, 원한다면 제가 호위를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용의 옆을 따라 걷던 데메론드의 말.
[아까 숲에서 싸우는 걸 다 봤다. 네놈 꼬리에 붙은 추적자들이나 신경 쓰거라.]용이 데메론드를 기습한 용병들의 존재를 지적하자, 엘프가 피식 웃었다.
“돈 많은 지구인들이 엘프를 노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용 밀렵꾼들에 비하면 별거 아닌 놈들입니다. 그리고…”
[…그리고?]“녀석들을 죽인 건 제가 아니라 이 친구입니다.”
데메론드는 그렇게 말하며 나란히 걷던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대가? 하지만 손속이 너무 잔인하던데. 내가 느낀 건 여명이 아니라 빨갱이의 손속이었다.]오르세 타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데메론드는 여명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래서 용의 감각이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지 않나?”
그 미소를 마주한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까 전 숲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
시간을 조금 돌려, 오르세 타불이 용 숨결 직화구이를 굽고, 세티가 와인에 취하던 그 시간.
여명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인생을 한 줄로 표현해 보라.’
언뜻 간단해 보이는 그 질문의 답을 한참 동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요약실력이 부족해서? 아니면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아니, 사람의 인생이 으레 그러하듯, 그의 인생은 한 줄로 줄이기에는 너무 복잡한 탓이었다.
쇠똥구리였던 시절조차 한 줄로 정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초인이 된 이후라면야.
답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명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깎고 깎았다.
천사님, 봉인, 청소부, 가족, 플레이어, 복수, 세티, 동질감, 증오, 분노, 사랑, 성취감, 연민, 그리고…
미그니움.
여기서 무언가를 더 빼면 자신의 인생이라 할 수 없었기에, 여명은 이 이상 어느 것 하나 빼지 못했다.
‘….’
깊은 고민과 그보다 더 무거운 침묵, 숲의 냄새와 밤바람.
그렇게 별들이 반짝이던 어느 순간, 데메론드가 입을 열었다.
“어렵지? 요약하자니 잘라내야 하고, 잘라내자니 내 인생이 아니고…”
“….”
“당연한 일이야. 자신만의 진의를 세우는 게 그렇게 간단했다면, 개나 소나 다 진의를 품고 살았겠지.”
여명이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묻기도 전에, 엘프가 말을 가로챘다.
“자, 다음으로 넘어가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는데요?”
“그럼 자네가 첫 단계의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 내가 옆에서 붙어 있으리?”
“그건…”
여명이 말끝을 흐리자, 데메론드는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네 실력이라면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 한 오십 년쯤?”
“….”
엘프 기준으로 오래 걸리지 않는단 소리였나.
여명이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요정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자, 다음 단계, 요약한 인생을 가슴 속에 세운다.”
“…세운다?”
“가슴에 품을 수도 있겠지. 자연스레 물들일 수도 있을 거고… 어쩌면, 가둬둘 수도 있겠지.”
장황한 비유였으나, 여명은 어쩐지 그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아지경, 혹은 심상.
엘프가 말하는 이 단계는 분명 그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마지막 단계가 가장 쉬워. 무술의 기존 진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진의를 채워 넣으면 끝이니.”
“….”
아리송한 말의 연속이었지만, 여명은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무아지경, 진의, 인생.
마치 불교의 화두 같은 단어들이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머릿속을 간질거렸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깨달음.
아주 조금,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짧은 거리를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여명이 애타게 깨달음을 갈구하던 바로 그 순간.
가까운 숲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감각이 그의 상념을 깨웠다.
‘뭐지?’
여명은 잡힐 듯 가까웠던 깨달음을 밀어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감각을 끌어 올렸다.
냄새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마나의 진동이 느껴졌다.
투명 망토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기척.
분명 전문적으로 은신 기술을 연마한 자들의 기척이 틀림없었다.
누구지? 아까 도돈 형제단이 지원을 부른 건가? 그럴 시간은 주지 않았는데?
적의 정체를 가늠하며 여명이 마나를 끌어 올리는데, 데메론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저것들은 전부 내 손님이니.”
“…당신을 쫓아왔다고요?”
상대의 은신술이 대단하긴 하지만, 데메론드를 상대할 만한 병력 같지는 않았다.
혹시 정찰 부대인가?
여명의 의문은 타당했으나, 데메론드의 답은 그의 예상을 조금 벗어나 있었다.
“정확히 날 쫓아온 건 아니고… 엘프 숲을 벗어난 엘프를 추적하는 놈들이지.”
“예?”
“엘프 사냥, 모르나?”
엘프 사냥?
그건 돈 많은 부자들이 엘프 숲 주변에 용병들을 박아 놓고 가끔 보호 구역 바깥으로 나오는 엘프를 납치한다는 도시 전설이었다.
초인의 간을 먹으면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허황한 소문인 줄 알았는데…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그런가, 날 평범한 엘프인 줄 알고 쫓아왔나 본데.”
“….”
여명은 그것만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야영지에서 기척을 완전히 숨겼던 그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녀석들이 쫓아올 수 있도록 마나와 흔적을 흘린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벌인 이유야 뻔했다.
엘프 숲 주변에서 엘프 사냥꾼들을 치울 미끼가 될 생각이었거나, 역으로 사냥해버릴 생각이었거나.
몰타 발표에 참여한 데메론드가 대놓고 용병들을 죽일 수는 없었을 테니, 이런 음습한 방식을 쓰는 것이리라.
아무튼, 엘프는 와인 병을 들고 사냥꾼들이 충분히 다가오길 기다렸다.
대충 느껴지는 것만 해도 서른 이상.
녀석들이 충분히 가까이 다가오자, 살기가 숲을 채우기 시작했다.
주가시빌리를 익힌 자라면 누구나 감응할 수 있을 정도로, 진한 살기.
살기의 근원은 데메론드였다.
역시 빨갱이는 빨갱이인 걸까. 마나를 끌어 올리는 그에게서 주가시빌리와 비슷한 살기가…
‘…살기?’
그 순간, 불현듯 여명의 머릿속으로 작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인생을 통해 자신의 진의를 만드는 첫 번째.
그 진의를 마음에 품는 두 번째.
마음속 진의를 무술에 적용하는 세 번째.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건너뛰고, 마음속에 품은 것을 진의 대신 쓸 수 있다면?
여명은 즉시 이 깨달음에 대해 물었다.
“데메론드, 여쭤볼 게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게 아니면 나중… 아, 중요한 거로군.”
질문을 끊어내려던 엘프는 여명의 눈을 보고 가벼운 질문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그는 어디 물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가르쳐 주신 진의 무술 말입니다. 혹시 마음속에 진의 말고 다른 걸 쓸 수 있을까요?”
“다른 거라니, 마음속에 진의 말고 뭘 품을 수 있길래?”
“…살기 같은 거 말입니다.”
살기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데메론드는 고개를 저었다.
“살기를 마음속에 품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마지막 단계가 가장 쉬우니까. 하지만…”
“….”
“어떤 미친놈이 마음속에 살기를 품겠나? 주가시빌리같은 놈들이라면 모를…”
엘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은 즉시 마음속의 살기를 일으켰다.
몸 주변으로 붉은 기운을 풍기는 그를 보며 데메론드의 표정이 기묘해진 그때.
여명은 손날을 펴고, 진의가 비어있는 엘프 검술 속에 살기를 담았다.
그리고 데메론드가 와인 병으로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목표는 저편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을 겨누고 있는 용병.
다음 순간, 여명의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
다시 시간을 돌려, 새벽이 다가오는 야영지.
성녀는 네티와 세티 자매가 잠든 천막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밤 중에 어디를 간 거람.’
한참 바깥을 살피던 성녀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의 별들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시간이었건만, 거대 파충류와 귀쟁이를 따라간 여명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세티가 몰래 여명의 천막으로 찾아가 입을 맞추는 예지가 빗나갔으니까?
‘…키스.’
성녀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예지 속 키스를 상기했다.
예지 속 세티의 키스는 아름다웠다. 죽어가는 세티를 구하기 위해 여명이 했던 엘릭서 키스만큼이나.
세티는 역시 여명을 좋아, 아니,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는 키스.
성녀는 괜히 우울함을 느끼며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천막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저기요, 성녀님.”
네티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부스스 잠자리에서 일어난 네티가 눈을 비비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예.”
무안할 정도로 직답. 성녀가 무어라 사과하기도 전에, 네티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성녀님, 성녀님도 형부 좋아하죠?”
“…으, 응?”
“쓰읍, 모른척 하지 말고요. 옆에서 보면 다 보이니까.”
“….”
그렇게 티가 났나? 성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네티가 옆자리에 잠든 언니와 성녀를 번갈아 봤다.
“우리 언니도 좋아하고.”
“….”
“둘 중 누가 더 좋아요?”
성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누가 더 좋냐니? 그거야…
“형부죠?”
흠칫, 성녀가 몸을 떨자, 네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언니한테 마구잡이로 스킨쉽 걸 때부터 알겠더라고요. 여자니까 별 의심도 안 받고, 겸사겸사 형부랑 언니랑 붙어 있는 것도 방해하고. 뻔해, 뻔해.”
“아니, 나는 그럴 생각은…”
말꼬리가 길어지려는데, 네티가 칼같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기요, 성녀님.”
“…넵.”
“언니랑 형부랑 사귀면, 친구도 잃고 연인도 잃을 거 같아서 무섭죠? 혼자 남을까 봐?”
“….”
정곡. 성녀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약점을 찔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피 대신 당황이 흘러내렸다.
“어, 그게… 어… 음…”
꼬이는 혀, 후끈거리는 귀.
그녀는 전대 성녀님께 비밀 일기를 들켰을 때만큼이나 부끄러움을 느꼈다.
네티는 잠시 그 추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우리 언니, 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과음했어요.”
“….”
“왜인 줄 알아요?”
“포, 포도주가 맛있어서?”
네티는 아슬아슬하게 성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게 아니라,연적들이 공주랑 성녀잖아요. 성녀님은 배경이 어마어마하고, 미리 언니는 뭐 말할 것도 없죠. 그에 비해 우리 언니는…”
약쟁이와 창녀의 딸, 희생양, 자매란 이름의 짐 덩어리 셋을 달고 있는, 돈도 빽도 없는 여자.
네티는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데메론드를 따라간 형부의 빈자리를 보며 포도주를 연거푸 들이켜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으므로.
짧은 침묵이 흐르고, 네티는 답을 내렸다.
“성녀님.”
“으, 응?”
“언니랑 형부랑 둘 다 놓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어쩔래요?.”
네티의 어투는 딱딱했으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달콤했다.
흡사, 악마의 속삭임처럼.
성녀의 상식은 당장 천막 바깥으로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은 유혹을 거절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그 방법이라는 게… 뭐, 뭔데?”
네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뒤졌다.
역시나, 막내가 몰래 넣어둔 게 틀림없는 ‘그 물건’이 손에 잡혔다.
“이거요.”
“….”
네티가 내민 ‘그 물건’을 본 성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상식이 없어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줄줄이 포장된 사각형 비닐, 그건…
“이, 이걸로 뭘 하라고? 서,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당연히 그거죠! 시발, 그럼 이걸 물주머니로 쓰겠어요!?”
“….”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일단 저질러요. 분위기 좋을 때 난입을 하건, 선수를 치던 최대한 빨리!”
“어, 어떻게 그런 짓을…”
성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잠든 세티를 바라봤다. 그러자 네티가 그녀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고 물러나실래요? 친구 사이로…그건 또 싫죠?”
…싫었다.
성녀는 잠시 세티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각오한 표정으로 ‘그 물건’을 받았다.
어스름한 하늘, 별들이 한숨을 쉬는 새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