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7)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7화(187/817)
〈 187화 〉 삼포 가는 길 (11)
* * *
***
새벽이 무르익는 시간.
야영지로 돌아온 여명은 성녀와 코르부스에게 오르세 타불을 산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말했다.
“그렇소? 아쉽구려.”
코르부스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이유를 설명하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비해 성녀는… 여명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뭔가를 저지른 게 분명한 모습.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녀는 아예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아무튼.
때마침 세티가 일어나는 걸 시작으로, 일행은 용과 작별을 준비했다.
뭐 대단한 인사나 송별회를 벌인 건 아니었다.
그냥 두런두런 모여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거란 믿음이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제가 산맥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마지막 작별 인사 후, 여명은 용의 거대한 발톱에 손바닥을 올렸다.
용은 살짝 미소 지은 뒤, 날개를 활짝 펼치며 말했다.
[천여명, 짧은 만남이었지만 도움이 되어 기뻤다. 내 고향에서 만나기를 기대하마. 그리고… 성녀?]빤히 여명을 바라보고 있던 성녀는 용의 부름에 움찔, 고개를 들었다. 안대에 가려진 눈으로 새벽을 등진 용이 보였다.
[다시 만날 땐, 전대 성녀만큼의젓해지길바라겠소.]“뭐, 뭣?”
성녀가 무어라 반론하려 했으나, 용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몸체가 일으킨 바람을 따라, 야영지의 천막과 주변 나무들이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깨어난 상인들과 일꾼들이 천막 바깥으로 나와, 용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드는 새벽의 하늘을 향해 멀어지는 붉은 용.
어떤 이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경외감을 느끼는 가운데,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용이 새벽과 함께 떠나가고,아침이 찾아올때쯤.
여명이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를 향해서.
“…대체 용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성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
용이 떠난 뒤, 여명은 틴다멜에게 제미니 자치령까지 동행을 제안했다.
목적지가 같은 것도 있었고, 아무래도 여러 명이 움직이는 쪽이 편했으니까.
당연하게도, 틴다멜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배신한 용병단 잔당의 처우 문제라던가, 각성의 물약과 관련된 마피아 같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물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여명의 일행에 성녀가 끼어있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용을 타고 날아온 성녀님과 그 일행이라니.
틴다멜은 독실한 다섯 신 교도로서, 기꺼이 성녀께 고개를 숙이고, 여명 일행에게 가장 좋은 마차를 건넸다.
“이렇게 좋은 마차를 주실 필요는 없는데…”
여명이 완곡하게 거부했으나, 틴다멜은 완고했다. 성녀님과 은인에게 이 정도는 해야 자기 체면이 산다나?
아무튼, 이야기를 끝낸 상단은 바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포박된 수십 명의 용병들 때문에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일꾼과 상인들은 금세 야영지 천막을 정리하고 제미니 자치령을 향해 출발했다.
상단의 목적지는 가장 가까운 철도역.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숲을 울리고, 오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상단을 힐끗거렸다.
그렇게 숲은 다시 고요를 되찾나 싶었는데…
“그냥 저대로 보내실 겁니까?”
숲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나무 위, 누군가의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데메론드 동지,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다급한 목소리. 나무 아래에서 멀어지는 상단을 지켜보던 데메론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 판단에 불만이라도 있나?”
“…적어도, 저 지구인의 손에서 세계수의 결정은 회수하셨어야 합니다.”
지구인에게 시달린 엘프다운 말이었다.
데메론드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어머니 세계수께서 결정한 걸 내가 되찾을 수는 없지.”
“가르침을 대가로 부탁을 요구하셨잖습니까. 그 부탁을 사용…”
“아니, 지금은 때가 아니야. 부탁은 조금 더 적절한 순간에 쓸 거다.”
“….”
짧은 침묵.
상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나무 위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저들에게서 대체 뭘 보신 겁니까?”
그 질문을 기다린 걸까, 데메론드는 흉터가 가득한 얼굴 위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가능성을 봤지.”
“…가능성? 무슨 가능성 말입니까?”
“양키 새끼들이 만들어 놓은 이 판을 뒤엎을 가능성.”
***
틴다멜이 제공한 마차는 쾌적했다.
마차 내부는 다섯 명 모두가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넓었고, 무슨 마법이라도 걸었는지 흔들림도 거의 없었다.
평소 같으면 마차 성능에 대해 떠들어댔을 순간이었으나, 마차 내부는 도서실처럼 조용했다.
여명은 데메론드가 준 화두… 즉,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코르부스는 명상에 빠져 있었고, 성녀는 그런 여명을 힐끔거리며 주머니 속 뭔가를 꼼지락거렸으며, 네티는 흥미롭게 마차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티는…
숙취 때문에 빌빌거리는 모습을 여명에게 보여주기 싫어 혼자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부석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나쁘지 않았다.
듬성듬성 자라난 나무들과 완만한 언덕들, 그리고 언덕 사이로 졸졸 흐르는 개울물까지.
지평선 저 너머에서 부아앙 매연을 뿜으며 달려오는 오토바이가 아니었다면, 정말 완벽한 풍경이었을 텐데.
세티는 즉시 눈에 마나를 모아 오토바이를 헤아렸다.
대충 서른이 넘는 숫자. 사이드카에 타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머릿수는 마흔 명 정도 될까?
그냥 지나가는 폭주족이라면 좋겠는데, 녀석들이 입고 있는 엉성한 갑옷과 투구, 그리고 무기들을 보아하니 그러긴 글러 보였다.
세티는 마차 창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동쪽에서 이상한 사람들 접근 중!!”
그제야 상인들도 오토바이를 발견했는지, 마차 행렬이 멈췄다.
원래 호위였던 용병단들은 포로가 된 지 오래였기에, 전투를 준비하는 건 세티가 유일했다.
아니, 마차 문을 열고 나오는 여명도 있었다.
“적이야?”
여명의 물음에 세티가 오토바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좋은 의도로 온 사람들은 아니지?”
그 사이,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오토바이들이 멈춰 섰다.
일렬로 앞바퀴를 맞춰 멈춘 모습을 보아하니, 평범한 녀석들은 아닌 것 같은데…
오토바이 한 대가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상단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위에는 눈에 띌 정도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녀석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눈코입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오토바이 기수가 소리쳤다.
“나는 제미니 자치령 수호군 대위, 카흐닥이다! 너희는 무단으로 자치령의 영토를 침입했다! 지엄한 미국 헌법에 의거하여, 너희를 구금하겠다!”
카흐닥이란 놈의 말을 들은 틴다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여명을, 정확히는 성녀가 탄 마차를 힐끔 바라본 뒤 대답했다.
“대위님! 저는 공식적으로 자치령의 허가를 받은 상인입니다! 시장께서 직접 하사하신 허가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카흐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녀석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듯 뜸을 들이더니, 오토바이를 끌어 마차 행렬에 바짝 접근했다.
“허가서가 있다고? 내놔 봐라,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틴다멜은 즉시 하인을 불러 허가서를 들고 오게 시켰다.
이런 상황은 처음인 건지, 상인들과 일꾼들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 저자들은 뭐지? 노예들인가?”
하인이 허가서를 꺼내오는 사이, 기수가 포박된 용병들을 보며 물었다.
“원래 호위로 삼았던 용병단입니다. 중간에 저희를 배신해서,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묶어놓은 겁니다.”
틴다멜의 설명을 들은 기수는 스윽 입술을 핥더니, 오토바이에서 내려 상단 곳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저, 대위님? 이런 식의 검문은 처음입니다만, 자치령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던 겁니까?”
카흐닥은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변고? 변고야 늘 있지. 쓰레기 같은 밀입국자와 난민들. 미국에 기어오려는.”
그렇게 지껄이던 녀석은 세티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오…?”
위아래를 훑는, 노골적인 시선.
여명이 가라앉은 눈으로 마나를 끌어 올리는데, 때마침 하인이 허가서를 가지고 왔다.
“여기, 자치령의 인장이 찍힌 허가서입니다.”
녀석은 허가서를 받아 보면서도 계속 세티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은 허가서를 읽다 말고 틴다멜과 세티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마부로 쓰는 걸 보면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네 애인인가?”
“…대위님께서 함부로 부르실 분이 아닙니다.”
틴다멜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카흐닥이 피식 웃었다.
“귀족인가? 그럼 더 좋지.”
“…좋다고? 뭐가 좋은데?”
이번 질문은 여명의 입에서 나왔다. 카흐닥은 그가 빈손인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귀족 계집, 특히 이쁜 계집은 비싸게 팔리거든.”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 정렬해있던 오토바이들 사이에서 뿌우우 나팔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 나팔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오토바이들이 일제히 상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카흐닥은 혼비백산 도망치는 상인들을 기대하며 주변을 둘러봤으나, 겁먹은 상인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 일꾼들은 불쌍하다는 듯이 카흐닥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묘한 분위기를 읽은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려는데, 여명이 말했다.
“재밌냐?”
“뭐라고?”
“강도 주제에 그딴 연기나 하는 거, 재밌냐고.”
이 새끼는 왜 이렇게 긴장감이 없지?
카흐닥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억누를 생각으로 도발을 날렸다.
“이제 곧 뒤질 새끼가 미쳤나… 야, 내가 진짜 재밌는 게 뭔지 알려줘? 니 옆에 저 계집이 오늘 밤 내 침대에서 앙앙거릴…”
그의 도발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침대란 단어가 나온 순간, 마차 창문이 열리며 리볼버 총구가 불을 뿜었으니까.
탕!
깔끔하게 배에 처박힌 총알. 카흐닥은 경악이 뒤섞인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여명이 뒤를 돌아보자, 성녀가 빼꼼,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은 병에 걸려서… 이거 불치병인가 봐.”
여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나를 끌어 올리고, 달려드는 오토바이 강도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을 들 것도 없었다. 다가오는 오토바이 강도단 중 마나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다 죽이지는 마. 자치령 주변에 왜 도적 떼가 돌아다니는지 알아야 하니까.”
세티의 부탁을 뒤로한 채, 여명은 오토바이들을 향해 내달렸다.
“기사다! 상단 호위 중에 기사가 있다!”
오토바이에 맞먹는 속도로 튀어나온 여명을 본 누군가 외쳤다.
곧이어,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타고 있던 녀석들이 돌격소총을 꺼냈다.
총에 대해서 무지한 여명조차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조잡하게 복제된, 소련제 짝퉁 소총.
그러나 짝퉁이라도 소총은 소총이었다. 하물며 신뢰성과 생산력으로 유명했던 소련제 소총의 짝퉁이라면야.
“쏴! 벌집으로 만들어버려!”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구가 불을 뿜었다.
개중에 몇몇 소총이 폭발하거나 고장 났지만, 양에게는 양만의 질이 있는 법.
무수한 총알 세례 중 몇몇 총알들이 여명의 피부를 꿰뚫었고, 피가 튀었다.
“맞췄다! 씨발, 봤어?! 내가 기사를 죽였 켁!”
여명을 맞춘 녀석은 그 이상 환호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힘에 그대로 목이 돌아간 까닭이었다.
“어? 기사가 아니라 마법”
오토바이를 끄는 녀석 중 몇몇이 목이 돌아간 동료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총에 맞은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한 여명이 주먹을 쥔 바로 그 순간.
강도단의 모든 오토바이 앞바퀴가 ‘꺾였다.’
비포장도로를 제집처럼 내달리던 오토바이 기수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염동력의 향연.
오토바이들이 일제히 바닥을 구르는 가운데, 초원 전체로 당황과 공포, 그리고 오토바이 배기음이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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