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8화(188/817)
〈 188화 〉 요조숙녀, 옛 인연, 미국인, 오랜 원한
* * *
…이 세상에 천국을 강림시키려는 무수한 시도 중 가장 끔찍한 시도는, 영과 혼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아샤 마법사 연구 – 네크로맨서 편 중 발췌』
***
오토바이가 우르르 쓰러지며 흙먼지가 튀었다.
노련한 녀석들은 그 와중에도 낙법을 치거나 옆으로 쓰러지며 피해를 줄였지만, 대부분은 비명을 지르며 속절없이 바닥을 굴렀다.
브레이크를 밟는 바퀴 소리, 충돌음과 신음 소리.
흙먼지와 혼란이 가득 피어나는 가운데, 도적놈 중 몇몇이 벌떡 일어났다.
여명에게 반격하려고? 아니, 녀석들은 동료와 오토바이를 버리고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멀어지기도 전에, 여명의 한마디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망치면 죽고, 항복하면 산다.”
도적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콧방귀를 뀌며 계속 달리는 녀석들과 눈치 빠르게 무릎을 꿇는 놈들.
여명은 그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도망치는 놈들의 모가지를 염동력으로 붙잡았다.
컥컥거리는 숨소리와 바둥거리는 팔다리.
곧이어 그가 주먹을 쥐자, 도망치던 녀석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무릎 꿇은 녀석들이 기겁하건 말건, 여명은 거리를 좁히며 도적들의 생각을 헤아렸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어떻게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까?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건, 그 속에 후회나 속죄는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말을 꺼낼 리 없으니까.
“상단 호위나 하는 좆같은, 마법사 새끼가… 감히, 우리가 어디 소속인 줄 알고…”
여명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을 나불거린 상대는 오토바이에 하체가 깔린 청년이었는데, 다른 도적들보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나름 높은 자리에 있는 녀석인 듯했다.
“소속? 너희가 어디 소속인데?”
여명은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오토바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물었다.
“우리는… 라 코사 노스트라의 휘하의, 코헨 패밀리 소속이다.”
“코헨 패밀리…”
“이제 좀 좆 된게 느껴지나 보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너랑 저 상단은 전부 뒤진 목숨이야.”
오토바이에 깔린 녀석치고는 자신만만한 목소리.
여명은 녀석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코헨 패밀리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라 코사 노스트라와 ‘패밀리’라는 단어만 들어도 대충 뭐 하는 놈들인지 예상이 갔다.
‘마피아.’
안 그래도 각성의 물약 때문에 녀석들과 만날 예정이었는데, 때마침 이렇게 악연을 만들게 될 줄이야.
우연이라기엔 공교롭고, 필연이라기엔 난잡했다.
‘이 인연을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으려나…’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도적들을 바라보길 잠시.
그러자 오토바이에 깔린 녀석이 뭔가를 오해한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야 좆 된게 실감 되냐? 흐, 이제 와서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진짜 ‘패밀리’를 건드린 이상 너희에게는 협상도, 용서도 없다.”
패밀리라는 말에 묘하게 악센트를 주는 게, 어딘가 묘했다.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은 더 신나서 떠들어댔다.
“라 코사 노스트라는 결코 혈족의 원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넌 지구와 이 땅 모든 곳에서 쫓길 거다. 그 알량한 마법 실력이 널 얼마나 지켜주는지 두고 보자고!”
혈족, 혈족이라. 여명은 녀석이 지껄이는 걸 가만히 내버려 뒀다.
덕분에 녀석은 한참을 패밀리니, 혈족이니 하는 말을 떠들었고, 위협이랍시고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너도, 너희 상단도! 전부 지구식 고문에 피눈물을 흘리며 죽을 거다!”
“…지구식 고문?”
어이없는 단어 선정에 여명이 헛웃음을 흘리자,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어? 이 미친 새”
“헛소리는 그 정도면 됐고, 패밀리의 혈족이 누구냐?”
“뭐?”
“니가 여태껏 지껄인 사람 말이다.”
그제야, 녀석은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떠들었다는 걸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애매한 침묵.
무릎 꿇은 도적들의 이마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가 돼서야,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앤드루 페르시코의 아들, 카를로 페르시코다. 나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라면…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해주마.”
자신을 카를로라 밝힌 놈의 얼굴에는 수치심과 기대감이 반반 뒤섞여 있었다.
오토바이에 깔린 채 멍청하게 입을 놀렸다는 수치심.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들었으니 당연히 겁을 먹을 거라는 기대감.
물론, 여명의 반응은 녀석의 기대와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앤드루 페르시코가 누군데?”
“…뭐라?”
카를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표정으로 여명을 노려봤으나, 거기까지였다.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염동력이 그의 목을 콱 조였으니까.
“…뭐, 설명은 나중에 듣지. 목적지까지 시간은 많으니까.”
여명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카를로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
결론적으로, 상단 행렬에 포박된 도적들이 추가됐다.
이미 붙잡힌 용병들과 합치면 오십 명이 훌쩍 넘는 숫자.
상단의 일꾼들은 그 숫자에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으나, 상인 틴다멜은 다른 부분에서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앤드루 페르시코의 아들을 잡아 오셨다… 그 말씀이십니까?”
조금 전까지 세티가 앉아 있던 마차 운전석 위, 틴다멜이 꿀꺽 삼켰다.
여명은 대답 대신 마차 뒤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상태가 좋지 않은 도적들이 실린 수레가 있었는데, 그와 같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 틴다멜이 말했다.
“설마 저 중에…?”
“저기, 다리부러진 곱슬머리.”
여명의 손가락을 따라 기절한 카를로를 발견한 틴다멜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다급히 일꾼을 불렀다.
“…저 수레에 실린 도적들에게 응급처치를 해주게. 가능하다면 치료도 해주고.”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으나, 일꾼은 순순히 그의 명령에 따랐다.
아마 일행 중 성녀가 있으니, 도적들에게도 선행을 베푼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아무튼, 일꾼이 멀어지는 걸 본 여명이 틴다멜을 향해 물었다.
“앤드루 페르시코가 단순히 깡패는 아닌가 봅니다?”
“깡패… 예, 단순한 깡패 그 이상입니다. 정확히 분류하자면, 소토카포(sottocapo)입니다.”
“소토카포?”
뒷골목 생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여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소토카포, 과거에는 마피아 부두목을 지칭하는 이탈리아어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선 다른 의미로 쓰이는 단어였으니까.
소토카포라 불리는 깡패, 그건 즉…
“…초인이군요.”
“정확히는, 마법사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스스로 마법을 깨우쳤다더군요.”
혼자서 마법사가 됐다고?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었으나, 여명은 전혀 다른 물건을 떠올렸다.
각성의 물약.
마차 안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성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운전석 쪽 창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녀석이 네크로맨서 끄나풀이라는 데 백만 원 건다. 여명은?”
“….”
여명은 세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통째로 꺼냈다.
“…농담이었는데?”
묵직한 주머니를 본 성녀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명은 주머니 아래 깔려있던 육포를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려주며 대답했다.
“돈 내기에 농담이 어딨냐?”
“….”
성녀는 말없이 육포를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여명은 의외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
그렇게 초원을 따라 이틀 정도 북상하자, 상단은 1차 목적지인 철도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의 정확한 이름은 케네디 역.
제미니 자치령이라 불리는 영토의 가장 남쪽, 대륙 종단 열차의 종아리쯤 되는 곳에 자리한 역이었다.
역의 외관은 생각보다 현대적이었고,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북적거렸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기보단, 물자가 지독하게 많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사람이 3할, 짐마차와 물자가 7할 정도?
틴다멜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최근 드레이테리얼 철도가 망가져, 이곳으로 온갖 상인들이 몰린 탓이라나?
덕분에 틴다멜 상단의 짐을 내리고 화물 열차에 태우기까지 거의 반나절이 넘게 소요됐으나, 일행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구인답게 이런 기다림에 익숙한 탓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틴다멜이 열차의 특등석 좌석을 구해준 덕분이었다.
이틀 연속 노숙에 지친 일행을 위해 주머니를 연 것인데, 정작 일행의 반응은 틴다멜의 예상과 달랐다.
“객실마다 두 명, 객실 두 개…?”
세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특등석 안내 책자를 읽다가, 여명을 보며 말했다.
“…우리 일행은 다섯인데, 왜 객실은 두 개야?”
타당한 지적이었다. 코르부스와 성녀, 세티와 네티, 그리고 여명.
남자는 하나에 여자만 넷이라 인원을 셋, 둘로 쪼개기도 어려웠다.
즉, 누군가 여명과 같은 객실에서 자야 한다는 뜻인데… 여명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누군가 특등석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두 개밖에 안 남았다더라.”
“….”
“신경 쓰지 마, 난 일반석을 쓸 생각이니까.”
세티가 한마디 하려는 그때, 성녀가 조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은 객실 쓸래?”
“…뭐?”
“코르부스랑 나랑, 너랑. 어때? 코르부스는 까마귀 상태로 있으면 침대에서 잘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성녀는 빨개진 귓불을 가리기 위해 옆머리카락을 슬쩍 눌렀다.
여명은 잠시 성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스승의 침대를 뺏으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하, 하지만 코르부스도 괜찮다고 할걸?! 그치? 코르부스?”
성녀가 이마를 붙잡고 획 고개를 돌리자, 코르부스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예, 뭐…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한숨이 섞여있었다.
여명이 정말 괜찮냐는 뜻으로 코르부스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눈빛으로 답했다.
‘난 모르는 일이오. 알아서 하시구려.’
성녀는 그것도 모른 채,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저거 봐, 괜찮다니까? 특등석을 탈 기회가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같은 객실 쓰자!”
여명이 이 푼수데기 성녀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네티가 불쑥 한마디 했다.
“형부, 그냥 같은 객실 쓰세요. 틴다멜의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네티마저 그렇게 말하니, 세티와 여명도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두 손을 들었다.
LA차원문으로 향하는 특등석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예약하신 손님분들께서는 11번 개찰구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가 역에 들어섰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일행은 대충 짐을 챙겨 특등석 열차로 향했다.
11번 개찰구를 너머로 보이는 열차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녹이 슨 다른 열차들과 달리 새로 칠해져 있는 건 물론이고, 차원문 너머에서는 보기 어려운 LED전등이 달려 있었으니까.
굳이 문제를 꼽자면, 지구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LED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달려 있…
“어우, 눈이 다 아프네. 저게 다 뮙니까?”
그때, 개찰구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우리 팀장이 유행을 모르네. 임마, 저게 여기서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이야. 여기 귀족들은 LED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지랄 마십쇼. 부단장님.”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귀족들한테 직접 물…”
여명이 개찰구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신나게 떠들던 목소리의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거친 풍파를 겪어온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굳건한 눈동자.
그건 너무나 익숙한 눈동자였기에, 여명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김만수 부단장님, 그리고 톈린 팀장님.”
선죽 용병단, 만주에서 함께 했었던 용병들이 개찰구 앞에 모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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