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89)
을 위한 세계는 없다-189화(189/817)
〈 189화 〉 요조숙녀, 옛 인연, 미국인, 오랜 원한 (2)
* * *
***
열차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융단이 깔린 복도,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들어갈 정도로 넓은 객실, 열차 칸 하나를 통째로 개조해서 만든 각종 편의 시설들까지.
하지만 그 고급스러움에 감탄할 틈도 없이, 여명은 바로 식당 칸으로 향했다.
중앙에는 작은 바가 놓여있고, 창가를 따라 고급스러운 식탁이 늘어선 식당 칸.
그곳에서, 여명은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했다.
김만수 부단장과 톈린 3번 팀 팀장.
“…팀장 자리는 짤렸다.”
“잘리셨다고요? 승진이라도 하신 겁니까?”
“승진은 개뿔, 지금은 일 번 팀 말단이다.”
톈린은 그렇게 말하며 손 위로 작은 얼음 조각을 만들어냈다.
마나와 주문이 엮인, 마법사가 됐다는 증거였다.
여명은 그제야 톈린의 말을 이해했다.
마법사가 되면서 초인들로만 이루어진 1번 팀으로 승진했는데, 하필 팀에서 막내란 소리였나.
“축하드립니다. 용의 꼬리가 되셨네요.”
“난 뱀의 머리가 더 좋았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두 용병의 맞은편에 앉았다.
열차 칸 창문에 붙은 테이블 위로 햇빛이 흘러드는 사이, 김만수가 말했다.
“이야, 우리 막내, 못 본 사이 신수가 훤해졌구만, 역에서는 정말로 못 알아볼 뻔했다.”
여명은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부단장님도 눈에 띄게 좋아… 아니, 강해지셨네요.”
빈말이 아니었다. 김만수의 마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짙어져 있었으니까.
“흐, 딱 보면 느껴질 정도냐?”
“예, 한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대단한 일은 아니고, 용병단이 둔간 중공업 산하로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좋은 걸 주워 먹었다. 크, 역시 영약이 좋긴 좋더라고.”
김만수는 톈린이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영약 덕분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후배 앞에서 주책 좀 부리지 마십쇼. 그거 다 빚입니다. 드워프들이 얼마나 깐깐한데.”
톈린이 핀잔을 줬지만, 김만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한국 정부에게 견제를 받아 만주에서 활동을 완전히 접었다느니, 드워프 휘하로 들어간 뒤 매국노 취급을 받게 되었다느니, 한국군에게 저격당할 뻔했느니…
자칫 듣기 거북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김만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뭐, 결론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나?
…아무튼.
열차가 출발하고, 식당 칸을 지키던 직원이 다른 곳으로 떠날 때쯤.
김만수가 조심스레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왜 아카데미가 아니라 여기 있는 거냐? 신문에서 네 얼굴을 본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사정이냐?”
김만수는 무슨 사정인지 묻는 대신, 대뜸 도움부터 주려 했다.
여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해결하고 돌아가는 중이거든요.”
“그래? 다행이네, 난 또 네가 말도 안 되는 일에 엮인 건 줄 알았지.”
톈린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괜스레 마음이 훈훈해져서 다른 용병들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톈린이 뭔가 떠올린 듯, 손뼉을 치며 물었다.
“잠깐, 너와 성녀님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거, 혹시 기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냐?”
“기밀이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언론이나 정부 기관에 알려지면 곤란하겠지?”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혹시 이 주변에 기자나 카메라맨이 있나?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지구인들은 이런 곳까지 거의 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직 피눈물의 환상을 쓰지 않고 있었던 건데…
톈린이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특등석 객차에 미국 중앙 정보국 요원이 타고 있다.”
“…미국 중앙 정보국? CIA요?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
“우리가 지금 호위하는 고객이야.”
지금 절 위해 고객 정보를 흘리시는 겁니까? 여명이 헛웃음을 머금은 그때.
김만수가 설명을 추가했다.
“우린 원래 둔간 중공업의 의뢰로 어떤 상인을 호위하러 왔는데… 그 상인이 지구인보다는 동향 사람이 좋다고 대뜸 다른 용병단하고 계약했더라고?”
“…혹시, 그 상인 이름이 틴다멜입니까?”
“어? 그걸 어떻게 알았냐?”
“….”
“뭐… 어쨌든,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CIA 요원이 우릴 고용했다.”
여명은 기묘한 우연을 느끼다가, 문뜩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정말로 이게 단순히 우연일까?
CIA 요원이 차원문 너머의 남부까지 찾아왔다가, 급히 용병단을 고용해서 지구로 돌아간다고?
‘…드레이테리얼과 관련된 일이다.’
증거는 없었지만, 그의 직감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여명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문을 열었다.
“부단장님, 방금 괜찮다고 말해놓고 이런 말씀드려 죄송한데… 역시,도와주셔야겠어요.”
“우리 사이에 그렇게 미안할 게 뭐 있냐? 당연히 도와주마.”
자칫 고객을 배신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지만, 김만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가면이라도 하나 챙겨줄…”
김만수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가면이란 단어를 꺼내자마자, 여명의 얼굴이 갑자기 돌변한 탓이었다.
여명이 이대로 늙으면 이럴까 싶은, 중년 남성의 얼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김만수와 달리, 여명의 환상이 마법이라는 걸 깨달은 톈린이 한마디 했다.
“…가면 값은 굳었군.”
***
LA 차원문으로 향하는 철도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언덕 위.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탈색된 여성이 철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차여, 머나먼 길이여…”
허공으로 흩어지는 여성의 말에 대답한 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두개골이었다.
“낡은 집 떠나, 고향을 등지니. 낯선 이들은 반기지 않고, 그리움은 사무치네.”
해골은 반쯤 삭아버린 턱을 덜덜 떨며 계속 말을 이었다.
“기차여, 문명의 길이여. 이 땅의 푸름은 고향과 다를 바 없는데, 사랑하는 이는 이곳에 없네…”
처음 운을 뗐던 백발의 여성은 힐끗 해골을 노려봤다. 그러자 해골의 눈에 박힌 보석을 반짝였다.
“파렐록 레락이 쓴 ‘고향과 철도’. 나도 좋아하는 시지.”
백발의 여성은 잠시 해골과 눈을 마주 보다가, 한숨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 싫어해요. 파렐록은 지구가 정말로 좋은 의도로 철도를 깔아줬다고 믿을 만큼 멍청한 이상주의자였어요.”
“시인다운 순수함 아니겠나?”
“귀족답지 않은 멍청함이죠. 철도를 공짜로 깔아주면 뭐 합니까? 기차도, 철도 유지비도 전부 돈인데.”
여성은 그 말을 끝으로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사람의 뼈와 괴물의 근육을 엮어 만든 혐오스러운 지팡이였다.
“허, 벌써 시작할 생각인가? 열차는 점심때나 올 텐데?”
해골이 한 소리 했으나, 백발의 여성은 개의치 않고 마나를 끌어올리며 검은 보석을 발아래로 떨어트렸다.
쨍그랑 땅에 부딪힌 검은 보석이 깨지며 그 속에서 막대한 양의 뒤틀린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뒤틀린 마나는 썩은 물처럼 언덕길을 흘러내렸다. 대지가 전율하고, 햇빛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수백 명의 시체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피와 살, 그리고 황금이 만들어낸 기적.
뒷골목을 뒤지고, 무덤을 파내고, 장의사에게 웃돈을 주고…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어렵게 만들 일이 아니었다.
부줌 오라버니라도 살아 있었다면, 하다못해 한국 정부와의 커넥션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지금에 이르러선 다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이미 조직의 지갑은 얇아졌고, 주문은 시작되었으니까.
쿠구궁…!
다음 순간, 뒤틀린 마나가 철도 주변까지 흘러가 웅덩이를 만들었다. 썩은 물처럼 고인 검붉은 마나가 공기를 더럽히고, 땅을 오염시켰다.
마법사라면 전율이 일어날 광경.
그러나 애석하게도 관람객은 두 명의 네크로맨서와 태양뿐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뒤틀린 마나가 철도 전체에 퍼진 걸 확인한 백발의 여성은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읊조렸다.
“불사의 왕이시여, 이곳으로.”
그녀의 주문과 지팡이를 따라, 거대한 마법진이 철도 위에 피어났다.
“천국이여, 이곳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진이 그대로 철도와 땅을 집어삼켰다. 그건 흡사 괴수가 입을 벌리는 광경처럼 보였으나…
풍경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철도는 물론이고, 땅조차 마법을 펼치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깔끔한 영혼계 연결이라니. 오랜만에 눈 호강을 했군.”
해골이 칭찬을 내뱉었으나, 여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주문의 후폭풍으로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든 탓이었다.
두개골은 그런 여성이 안쓰러운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지만 별 대단한 도움은 되지 못했다.
결국 그녀가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습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한층 더 하얗게 탈색된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그녀가 선언했다.
“그 양키 년은… 이제, 우리 겁니다…”
***
여명이 김만수와 대화를 끝내자마자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도 성녀의 얼굴에 환상을 씌우고, 겸사겸사 CIA 요원의 얼굴을 볼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용병들이 우르르 식당 칸으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절반 정도는 아는 얼굴인 용병들은 마치 전투를 준비하는 것처럼 기합이 팍 들어가 있었는데,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또각, 또각.
용병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식당 칸으로 들어오는 한 여인.
나이는 스물 중반쯤 되었을까?
그녀는 누가 봐도 지구인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철제 안경이나,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정갈한 정장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깔끔한 주황색 단발과 녹색 눈동자,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주근깨까지.
그건 차원문 너머에서 보기 어려운, 흔히 진저라 불리는 아일랜드계 지구인의 특징이었으니까.
그 외에 특징이 있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곤에 절어있다는 점?
미리 CIA 요원이라는 걸 듣지 못했다면 야근에 지쳐 퇴근하는 사무직 여성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초인은 아니지만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준 초인, 무장은… 기껏해야 허리에 찬 권총이 전부인가.’
순식간에 그녀에 대한 판단을 끝낸 여명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여명이 한걸음 내딛는 순간, 그녀가 빤히 그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뭐지? 설마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본 건가?
여명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용병들도 복도로 향하는 자리를 비켜주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저기요?”
“…무슨 일이시오?”
“이렇게 같은 열차에 탄 것도 인연인데, 혹시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말은 정중했지만, 그 사이로 숨길 수 없는 의심이 느껴졌다.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본 것 같지는 않은데…대체 뭐지?
여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구에서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는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라오.”
“…아, 맞다. 죄송해요, 제가 직업상의 이유로 자꾸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
“저는 스칼렛 오하라라고 합니다. 신사 분의 성함을 알려주시겠어요?”
스칼렛 오하라? 여명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애써 참았다. 그건 가명이 틀림없었으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 주인공 이름이라니. 떠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여명은 의심을 속으로 삼킨 뒤, 순순히 대답했다.
“내 이름은 레트 버틀러요.”
“…아?”
똑같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남 주인공 이름을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지구인이셨군요?”
“그게 아니라면왜LA 차원문으로 향하는 열차에 타고 있겠소?”
여명은 그렇게 말한 뒤 등을 돌렸다.
용병들이 눈치껏 그를 막으려 했지만, 김만수가 큼, 큼 헛기침하자 모두 한걸음 물러났다.
그렇게 여명이 식당 칸을 벗어나길 잠시.
“검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 우연인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는 스칼렛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점심까지 1시간, 성녀가 코르부스를 객실에서 내쫓기까지 30분 남은 시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