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92)
을 위한 세계는 없다-192화(192/817)
〈 192화 〉 요조숙녀, 옛 인연, 미국인, 오랜 원한 (5)
* * *
***
스칼렛은 멀어지는 여명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나간 놈, 죽으려면 혼자 죽어야지.’
그녀는 총을 들고 당장 조종실로 향했다.
다행히 빌어먹을 ‘아줌마’는 이제 막 열차 제동장치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철컥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스칼렛은 즉시 아줌마에게 총을 겨눴다. 차가운 총구가 정확히 뒤통수를 조준했다.
“제동장치에서 손 떼.”
그러자 아줌마가 고개를 돌려 스칼렛을 바라봤다. 그녀는 딱히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갑자기 무슨 짓거리야?”
“이봐, 아줌마. 살 사람은 살아야지. 멍청한 당신 남편하고 함께 죽어줄 의리는 없어.”
“멍… 뭐? 이게 살려줬더니 못 하는 말이 없네?”
남편 욕이 불쾌했던 걸까, 국밥집 아줌마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스칼렛은 살짝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 나었다.
“그럼 이대로 열차를 멈추고 타이탄에게 죽을까? 동반 자살할 생각이라면, 그쪽 부부끼리 해. 애꿎은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동반 자살? 어차피 열차의 살덩어리들이 달려들면 결과는 똑같을 텐데?”
“머리 칸을 열차 칸과 분리할 거야. 조금만 시간을 끌면 본국에서 지원이 올 테고… 적어도 당신 남편의 무모한 계획보단 살아남을 확률이 높겠지.”
“그거야 네 생각이지. 여기가 마인드 필드가 아니면 어쩌려고?”
국밥집 아줌마의 얼굴을 한 성녀는 스칼렛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스칼렛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당신과 말싸움할 생각 없어. 당장 총 내려놓고 조종실에서 나가.”
성녀는 잠시 스칼렛을 노려보다가, 순순히 그 협박에 따랐다. 정확히는, 따르는 척 했다.
제동장치에서 손을 떼고, 양손을 뒤통수에 올린 뒤 조종실 바깥으로 향하던 바로 그 순간.
“투쟁 없이는 화평 또한 없나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붉은 투쟁의 신 레독스의 기도문이자, 다섯 신 교단에 몇 없는 공격용 축복 주문.
“…내가 너희에게 검을 주러 왔노라.”
너무나 작은 기도였기에, 스칼렛이 들은 건 마지막 구절이 전부였다.
“주문?”
스칼렛이 그 기도문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허공에서 붉은색 주먹이 나타나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한데, 그 위력이… 성녀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콰앙!!
스칼렛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조종실 벽에 처박혔다. 충격에 열차 칸이 흔들거릴 정도.
“어?”
뭐지? 그냥 기절시킬 생각으로 펼친 주문이었는데?
성녀가 얼떨떨하게 붉은 주먹을 바라보자, 주먹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어… 레독스님?”
대체 어떻게? 신들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실 수 없는데?
신께서 저렇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곳은 그녀가 축복을 받았던 성도의 성소가 유일했…
성녀의 고민이 깊어지려는 찰나, 붉은 손이 답답한 듯 조종석을 가리켰다.
“아.”
그제야 성녀는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허겁지겁 조종석으로 돌아가 제동장치를 당겼다.
끼이이익!
변화는 극적이었다.제동장치가 끼기긱 비명을 지르고, 브레이크 걸린 바퀴와 철로가 마찰하며 열차 전체가 출렁거렸다.
그렇게 열차가 멈추고, 레독스님의 붉은 손이 사라진 뒤.
성녀는 소총을 들어 스칼렛을 겨눴다.
이대로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자비 때문에? 아니, 아직 저 여자에게 들을 정보가 남아있었으니까.
‘네크로맨서와 추락한 별…’
그녀는 총을 거두고, 소총의 어깨끈을 풀어 스칼렛의 팔다리를 묶었다.
하필 뼈가 부러진 곳을 묶었는지, 스칼렛은 기절한 상태로 끄으윽 신음을 흘렸다.
깨어나면 더럽게 아프겠네.
물론 성녀는 스칼렛이 아파하건 말건, 줄에 묶인 그녀를 질질 끌고 열차 머리 칸을 나섰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타이탄과 여명이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
여명은 늪지에 발을 딛지 않았다.
그는 수십 개의 얼음송곳을 허공에 흩뿌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하늘로 뛰어올랐다.
[갈림 길을 걷는 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건지, 감탄 섞인 미라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너 는 누구의 별 이냐?]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이 아니라 폭력을 주고받을 순간이었으므로.
주가시빌리의 살기가 몸을 감싸고, 파양결의 마나가 혈관을 타고 흘렀다.
검에 고이는 것은 파도치는 검기.
[파도 ? 포세이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동시에, 언데드 타이탄이 여명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무수한 시체가 뭉쳐 만들어진 거인의 팔 앞에서 여명은 날벌레나 다름없었으나, 벌레도 벌레 나름인 법.
뛰어오른 여명의 검은 흡사 말벌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타이탄의 손을 꿰뚫었다.
다음 순간, 검기의 마나가 폭발하며 썩은 살점과 뼈, 그리고 그것들을 한데 묶고 있는 뒤틀린 마나를 동시에 갈라버렸다.
피와 살점이 흩날리는 가운데, 여명은 녀석의 손목에 착지한 뒤, 그대로 팔을 타고 달렸다. 목표는 타이탄의 머리.
순식간에 어깨까지 도달한 그는 훌쩍 뛰어올라, 타이탄의 머리를 향해 발을 내려찍었다.
비각술의 진각, 인천 항구의 타이탄을 끝장냈던 바로 그 기술.
쿠 어 어 !
타이탄의 단말마가 허공을 채우는 것과 동시에, 타이탄의 머리가 썩은 토마토처럼 으깨졌다.
인천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
그러나 결과는 인천 항구 때와 똑같았다.
막대한 충격에 타이탄을 이루고 있던 주문이 흩어지고, 거대한 몸체가 그대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놀랍 군!]단 한 번의 전투로 타이탄을 잃었지만, 목소리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긴, 타이탄은 아직도 스무 마리나 남았… 아니,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이 늪지 전체가 시체 밭인가.’
여명은 얼음송곳 위에 서서 지평선을 메우는 타이탄들을 바라봤다.
두려움은 없었다. 소모전이라면 그 또한 자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것이 걸렸다. 이곳이 그의 예상대로 누군가의 심상이라면…
이런 심상을 가진 자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언데드의 신이라도 되나?’
여명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를 향해 다가오던 타이탄 한 마리가 갑자기 팔을 쥐어뜯었다.
갑자기 자해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 아니었다.
녀석은 으스러진 살점과 뼈를 손에 가득 쥐더니, 어깨를 크게 젖혔다.
그리고 그대로…투척.
어마어마한 가속도와 뒤틀린 마나가 뒤섞인 살점들이 여명을 향해 쏟아졌다.
여명은 얼음송곳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슬아슬하게 포격을 피했으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것 도 피해 봐라 !]거의 10마리가 넘는 타이탄이 동시에 살점을 뜯어 손에 쥐더니, 각자 투척 자세를 잡았다.
타이탄이란 게 저딴 식으로도 쓸 수 있는 거였나?
여명은 이를 악물고 허공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녀석들이 그대로 살점을 투척했다.
우중충한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빼곡한 살점들.
이번에는 피할 공간이 없었다.
여명은 살점들을 쳐내기 위해 검을 들었다. 들었는데…
[시체 폭 발]그의 검 코앞에서, 살점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
천지가 떠나갈 정도의 폭발음이 울렸으나, 여명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폭발 직후 고막이 터져버린 탓이었다.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삐이이 머리를 울리는 이명뿐이었고, 볼 수 있는 건 시야를 가득 메운 살점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추락하는 와중에도, 폭발은 멈추지 않았다.
저 멀리 열차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쾅쾅 울려 퍼졌다. 여명이 늪 속에 파묻힐 때까지, 계속.
[별 이여 본체를, 드러내라!]목소리는 경쾌하게 지껄였다. 이미 승리를 확신한 것처럼.
딱히 잘못된 태도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여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목소리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콰아앙!!
투척 자세를 잡고 있던 타이탄의 머리가 갑작스레 폭발했다.
한 놈이 아니었다. 다른 타이탄도, 그리고 또 다른 타이탄도.
[뭐?]그것을 시작으로, 지평선을 메운 거인들의 머리가 우수수 폭발하기 시작했다.
쓰러지는 거체, 늪지대를 울리는 폭발음.
목소리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그가 아닌 누군가가 시체 폭발을 사용했다. 그것도 그의 타이탄을 터트릴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시체 폭발을.
쾅, 쾅, 쾅 !
그 가설을 증명하듯, 시체 폭발에 휘말린 타이탄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새로운 타이탄이 늪지에서 걸어 나오는 것보다 빠른 속도였고,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제대로 서 있는 타이탄의 숫자는 단 한 마리에 남지 않았다.
[어떻 게?]목소리의 질문이 향한 곳은 여명이 추락한 늪지대 방향이었다.
썩은 피와 살점이 가득한 그곳에는 하반신을 반쯤 늪지에 처박고 있는 여명이 있었다.
그의 몸은 마치 도축장에서 도망친 닭처럼 너덜너덜했다. 배와 가슴은 쩍 갈라져 속을 드러내고 있었고, 얼굴은 피에 절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몰골이었으나, 목소리를 당황하게 한 건 정작 다른 물건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
혐오스러운 눈동자가 꿈틀거리는 뼈 지팡이는 아까 열차 안에서 미라가 들고 있던 바로 그 지팡이였다.
[대체 언제 그걸?]여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뒤틀린 마나를 사용한 반동 때문에 폐가 완전히 박살 난 까닭이었다.
주변에 넘치는 뒤틀린 마나를 사용했을 뿐인데, 혈관과 내장이 전부 너덜너덜해졌다.
주가시빌리의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수십 번도 더 죽었을 상처.
재생하는 내내 끔찍한 고통이 치밀었지만, 여명은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으며 허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폐와 기도를 간신히 재생시킨 그는 마지막 타이탄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팡이 잘 썼다. 빌어먹을 새끼야.”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목소리는 새로운 타이탄을 일으키는 것도 잊은 채 물었다.
[넌 대체 무슨 별 이지? 파도 와 죽음 을 동시에? 그런 별은 들어본 적 없다]여명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고, 피가 고인 눈을 스윽 닦으며 대답했다.
“그놈의 별은 무슨… 대체 그게 뭔데?”
[별 모른다? 어째서? 너는 분명, 별 인데?]목소리가 황당한 말투로 덧붙였다.
[설마 자각 하지 못 했나?]녀석이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재생에 집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마지막 타이탄의 얼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찰흙을 빗어 얼굴 조각을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재료가 찰흙이 아니라 시체라는 끔찍한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물은 다르지 않았다.
매서운 눈매, 비뚤어진 코, 그리고 얄팍한 입술까지.
어느새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선명한 얼굴을 갖춘 타이탄이 여명을 내려다봤다.
[무술에 마법, 강령술까지. 미국이 너처럼 제어 불가능한 별을 만들었을 리 없다. 대체 어떤 멍청이가 널 만들었지?]저 얼굴이 본체인 걸까? 녀석의 말투가 한결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혐오스러운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여명은 늪지대에서 발을 빼며 말했다.
“누가 만들었냐고? 글쎄, 난 나 혼자 태어났는데.”
노골적인 비꼼. 그러나 녀석은 조롱을 이해하지 못한 듯, 진지하게 여명을 바라봤다.
시체로 만들어진 거대한 눈구멍이 여명의 육체 넘어, 영혼의 밑바닥을 훑기를 잠시.
녀석이 대뜸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군. 너는 부모가 없다.]“….”
갑자기 패륜적인 말을 들은 여명이 검을 꽉 쥐는 사이, 타이탄에 깃든 목소리가 계속 지껄였다.
[부모는 없어도 별을 끌어내린 자는 분명히 있을 터. 누구냐? 누가 이토록 무분별한 괴물을 만들…]거기까지 말하던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또 뭔데?’
타이탄과 여명은 당황 섞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무거운 침묵, 엮이는 시선.
침묵이 길어지고, 여명이 재생을 끝마친 바로 그 순간.
타이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대체 뭐냐? 어떻게 영혼의 나이가 사천 살이 넘을 수 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