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9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98화(198/817)
〈 198화 〉 도시에는 꿀이 뜨고, 문에는 달이 흐른다. (4)
* * *
***
플레이어와 작가, 그리고 이번에는 감독까지.
세계 바깥에서 온 자를 만나는 게, 이걸로 세 번째라서 그런 것일까?
여명은 그리 큰 당황은 느끼지 않았다.
그저 왜 이렇게 뜬금없는 만남이 이뤄지게 되었는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차라리 적의를 보내왔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습당했다면 기꺼이 반격했을 테고.
그러나 자신을 감독이라 밝힌 산초는 어떠한 위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행에게 리무진을 보내고, 오는 내내 부하의 입을 통해 상황을 설명했다.
보스의 건강 악화와 그로 인해 분열되는 조직.
이제 막 얼굴이나 보는 외부인에게 알려주기엔, 지나칠 정도로 위험한 정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를 플레이어로 착각하고 있어서?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태도는 말이 안 됐다.
작가와 플레이어 둘 다, 또 다른 바깥에서 온 자들을 걱정하며 정체를 숨기고 다니지 않았던가.
‘분명 무언가 속내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직접 얼굴을 맞대보니 그게 적의나 악의는 아닌 것 같았다.
당장 그가 내뱉고 있는 말부터가 그랬다.
“처음 감독 제의를 받았을 땐 좀 충격이었지, 나 같은 중견 감독에게 프랜차이즈 세계관이라는 건 뭐랄까… 커리어의 마침표 같은 느낌이거든.”
“….”
“영화를 찍는 실력은 나쁘지 않지만,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기엔 좀 모자란? 나를 그런 감독으로 봤다는 소리니 말일세. 솔직히 돈이 아니었다면 안 찍었을 거야.”
거리감을 좁히고, 분위기를 풀기 위한 잡담.
가벼운 말투로 ‘그래도 거부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어’라 덧붙이는 그의 모습에선 묘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잡담이 길어지다 못해 영화 촬영 기술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올 때쯤.
여명이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래서,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너무 직설적인 질문이었던 걸까, 시답잖은 말로 분위기를 풀던 산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는 잠시 탁자 위의 검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얼마 전, 자네가 주인 없는 용의 둥지를 털었다는 걸 알고 있네.”
여명은 플레이어가 차원문 너머에서 주인 없는 용의 둥지를 털었음을,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자원으로 인벤토리를 가득 채웠음을 떠올렸다.
녀석이 물처럼 마시던 온갖 영약들이 바로 그 용 둥지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그 용의 둥지는 말일세, 내가 오 년 전부터 찾고 있던 곳이라네.”
“…오 년.”
긴 시간이었다. 이 세계의 온갖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의아한 눈초리를 마주한 산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와 달리, 나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 기껏해야 영화를 찍으며 찾아본 정보들이 전부지.”
“….”
“내가 용의 둥지에 대해 아는 건 지나가듯 언급되는 대사 한 줄이 전부였다네.”
“대사?”
“수정 호수 어딘가에 있는 용의 둥지, 그곳에 있는 엘릭서라면 그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도 기억나는군. 성녀 역을 맡은 배우가 더럽게 연기를 못했었거든.”
여명은 눈살을 찌푸려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엘릭서가 목적이었군요.”
정답이었다. 산초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용의 둥지를 턴 걸 확인한 뒤, 다른 엘릭서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무리였다네. 이 세상에 기껏해야 세 병밖에 없는 물약을 또 어디서 찾겠나?”
“….”
“불쾌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네의 뒤를 캤다네. 그리고 자네가 비정상적으로 효율적인 아공간을 쓰고, 사람을 죽여 강해진다는 사실도 알아냈지.”
인벤토리와 레벨 업.
여명은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리무진을 보낸 건지 이해했다.
환상으로 얼굴을 가린 그를 플레이어로 확신할 수 있는 이유.
방법은 모르겠지만, 시비를 걸어온 수인들의 손가락을 자를 때 쓴 인벤토리를 본 게 틀림없으리라.
우연. 또 우연이었다.
차원문 너머로 온 이후로 겪었던 수많은 우연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공교로운…
‘…정말로 우연이 맞나?’
여명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는 사이, 산초가 탁자 구석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룸서비스를 위한 전화기였다.
“마실 것도 없이 말하려니 입이 텁텁하군. 혹시 좋아하는 술이 있나?”
살짝 가벼운 말투. 그는 어떻게든 호의적인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은 것 같았지만, 여명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내놨다.
“엘릭서는 팔 수 없습니다.”
수화기를 든 손이 멈칫, 굳었다. 잠시 후, 산초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유가 뭔가? 혹시… 돈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네. 눈앞에 있는 이 검, 이걸 계약금으로 주지.”
기사단의 보검을 고작 계약금으로? 탐나는 이야기였으나, 여명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없는 걸 거래할 수는 없었으므로.
“죄송하지만, 엘릭서는 이미 사용했습니다.”
“아…”
실망이 담긴 한탄, 연이어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여명은 혹시 그가 태도를 바꿀까, 은밀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산초는 하늘이 무너진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채우기를 한참.
산초가 조심스레 침묵을 밀어냈다.
“전부 다 마신 건가? 혹시 남아 있다면 말해주게. 다섯 방울… 딱 다섯 방울이면 된다네.”
“죄송합니다.”
“…다른 엘릭서의 위치는? 혹시 모르는가?”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그는 플레이어를 죽이고 권능을 빼앗은 찬탈자였다. 엘릭서의 위치를 알 턱이 없었다.
“….”
또다시, 침묵.
희망 끝에 보이는 절망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라고 했던가? 산초의 표정은 그 말을 그대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고통, 실망, 그리고 슬픔.
산초는 떨리는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네, 지금 레벨이… 아니, 얼마나 강하지? 검기는 쓸 줄 아나?”
싸우자는 말은 아니었다. 어투에서 간절함이 묻어나왔으니까.
여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용과 싸울 정도는 됩니다.”
“…용이라.”
산초는 주먹으로 입술을 꾹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여명이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꺼냈다.
“자네, 나랑 같이 사람 한 명 죽여줄 수 있겠나?”
***
같은 시각, 세티를 비롯한 일행들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짐을 풀고 있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무거운 것들은 전부 여명의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었고, 일행들의 가방에 든 건 비상용 지갑과 여명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속옷 같은 게 전부였으니까.
아무튼.
순식간에 짐 가방을 정리한 네티는 곧장 창가 앞으로 다가가 도시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차원문 너머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LED 떡칠 때문일까, 제미니 시는 지구에 뒤지지 않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특히 LA차원문 주변이 걸작이었는데,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차원문과 LED불빛들이 뒤섞인 모습이 흡사 반짝이는 거대한 다이아몬드 같았다.
반쯤 군사 기지인 개성 차원문과 비교하면 예술이나 다름없는 풍경.
그 아름다운 야경에 빠져있던 그녀의 귓가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티, 방 인원 나눌 건데, 어떻게 할래?”
고개를 돌려보니, 형부의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성녀님과 코르부스는 보이지 않았는데, 두 사람 다 욕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방을 나눠? 왜? 여기 정도면 다 같이 자도 되잖아.”
“이런 스위트룸을 세 개나 빌렸는데 굳이 한 곳에 있을 필요 없지. 여명은 남자잖아? 그리고 또…”
말끝을 흐리는 세티의 시선이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인질로 붙잡힌 네크로맨서가 있었다. 형부의 환상으로 머리카락이 노랗게 염색된 그녀는 뭐가 그리 불안한지, 눈을 빙글빙글 굴리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세티는, 다시 여명의 짐 가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네크로맨서는 내가 다른 방으로 끌고 가서 감시할게. 너는 성녀랑, 코르부스하고 같이 이 방을 써.”
“어… 그러면 형부는?”
“혼자 써야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형부는 성녀님과 단둘이 객실을 쓸 때도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은 젠틀보이 아니던가.
같은 방을 써도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지는 않은데…
네티는 뭔가 미묘함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세티가 여명의 가방 속에서 작은 가방을 꺼냈다.
우라간의 손잡이와 황금 옥새 등 마도구가 든 가방.
평소에는 웃옷 속에 넣어놓고 다니는데, 잠시 떼어놓은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네티는 언니가 작은 가방을 여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언니 잠…”
한데, 그녀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언니는 우라간의 손잡이에게 공격당하긴커녕, 손잡이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확인까지 했다!
“….”
충격적인 광경에 네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충격에서 벗어난 건, 언니가 가방 정리를 전부 끝낸 뒤였다.
“어, 언니…”
“또, 왜?”
“설마, 뒤로한 거야?”
세티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가, 동생의 시선이 가방으로 향한 걸 보고 나서야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너 미쳤니?”
“아니,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언니지! 대체 무슨 생각으…”
네티의 헛소리는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참다못한 세티가 기어코 그녀의 이마를 내려쳤으니까.
***
같은 시각, 같은 호텔의 6층.
용병들과 함께 층 하나를 통째로 빌린 CIA 요원, 스칼렛 오하라는 손톱을 씹고 있었다.
일이 더럽게 꼬인 탓이었다.
원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 드레이테리얼을 정리하고, 제미니 시의 일도 깔끔하게 끝내 상부의 인정을 받으려 했는데…
정작 드레이테리얼의 일은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끝나버렸고, 제미니 시의 분위기도 그녀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나빴다.
중간에 정신 나간 네크로맨서에게 습격당한 건 덤이고.
FUCK.
열차에서 만난 그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정작 그들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용병단에게 그들의 뒤를 쫓으라고 부탁했지만, 자신들이 계약한 건 호위 임무지, 수색 임무가 아니라며 거부했다.
빌어먹을 용병 놈들.
이런 간단한 부탁을 거절하는 걸 보면 뭔가 아는 게 틀림없는데, 그녀는 그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 금색 눈동자의 남자가 설마… 기사단을 만나러 온 건 아니겠지?’
이성은 그게 말이 되냐고 속삭였지만, 감성은 그런 게 틀림없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그작, 아그작.
애써 가다듬은 엄지손톱이 너덜너덜해지고, 고민이 고이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때쯤.
스칼렛 오하라… 아니, 디나는 뭔가를 결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창가로 다가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정확히는, LED 불빛에 가려진 달빛을.
곧이어 그녀의 눈이 달빛과 닮은 은은한 백색으로 물들었다.
달은 눈이 되고, 눈은 달이 되는 기적.
그녀의 육체는 그 기적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으나, 디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눈에 힘을 줬다.
직후, 달빛이 도시 위로 고개를 내밀고, 추락한 자의 의지를 따라 땅을 밝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차원문을 파괴할 노인을 찾아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