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00)
을 위한 세계는 없다-200화(200/817)
〈 200화 〉 도시에는 꿀이 뜨고, 문에는 달이 흐른다. (5)
* * *
***
함께 기사단의 단장을 죽이지 않겠는가?
갑작스러운 살인 의뢰에 여명이 보인 첫 반응은 부정이었다.
무슨 대가를 내놓건 간에, 그는 깡패를 위해 검에 피를 묻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 얻은 힘이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그 대상이 산초 본인의 상급자라면야.
여명은 범죄 조직의 쿠데타에 손을 거들 생각 따윈 없다고 대답했고, 산초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떤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십 년 전 이 세상에 버려진, 어떤 감독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여명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교과서 속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라서? 아니면 그의 불행에 공감해서?
어느 쪽인지 여명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마냥 거절하는 대신,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산초 또한 그 이상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잘 생각해 달라는 말만 했을 뿐.
그렇게 호텔 방을 나서는 여명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가, 플레이어, 감독, 그리고 주인공.
운명으로 뒤섞인 이 세상에서 자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복수를 끝낸 뒤에, 그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듯,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길 한참.
여명은 일행들이 있는 스위트 룸에 도착했다.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성녀와 네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반겼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별일 없었는지…
적당히 거짓과 전실을 섞어 산초와의 대화를 설명한 여명은, 세티와 네크로맨서가 방에 없다는 걸 깨닫고 이유를 물었다.
방을 나눴어요. 네크로맨서 감시할 방, 형부 혼자 잘 방.
네티의 대답. 여명은 세티에게 한 번 들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달을 제외하면 모두 잠들 시간인 까닭이었다. 성녀와 네티도 그를 기다리느라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여명은 아침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향해 성녀가 같이 자도 된다며 농담을 던졌으나, 여명은 마법으로 얼음 조각을 만들어 던지는 것으로 화답했다.
따악 얼음 조각이 정확히 이마를 강타하는 소리를 뒤로한 채, 여명은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카드키를 꽂고 들어선 방은 아카데미 귀빈실만큼이나 화려한 방이었다.
크기는 웬만한 호텔 룸 네다섯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컸고, 창밖으로는 도시의 전경이 똑똑히 내려다보였다.
어둠에 잠긴 도시, 일렁이는 차원문, 그리고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
잠시 그 모든 것을 눈에 담던 여명은 한숨과 함께 침실로 향했다.
룸서비스라도 시켜 먹을까 했지만, 이 밤중에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조식이나 많이 먹지 뭐.
여명은 대충 몸을 씻은 뒤, 그대로 커다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이 몸을 덮고, 어둠이 눈을 덮었다.
복잡한 생각은 전부 졸음 속에 묻어둔 채, 그대로 잠에 빠지려는데…
***
끼익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일어났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뿐사뿐 다가오는 발소리가 너무나 익숙했으므로.
“…여명? 자?”
침실 문 사이로 슬그머니 들려오는 세티의 목소리.
여명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레 침실로 들어오더니, 자연스레 그의 옆에 누웠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여명은 대답 대신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세티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팔을 벴다.
“가서 무슨 이야기 했어?”
세티가 머리로 그의 팔을 꾸욱 누르며 물었다.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팔뚝을 스치는 가운데, 여명은 솔직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놨다.
감독과 그의 인생, 치매에 걸린 기사단 단장, 그리고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는 개인적인 감상까지.
한참 동안 그의 말을 경청하던 세티는, 단 한마디로 그의 심정을 정리했다.
“여명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글쎄…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안 도와주면 후회할 거 같지?”
“….”
무언의 긍정. 세티는 작게 미소 짓다가, 고개를 들어 여명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손해 보는 건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산초란 사람, 이곳의 넘버 투라며? 그러면 이참에 깡패들과 악연도 풀고, 네크로맨서도 추적하고, 가짜 신분증도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겠네.”
조금이라도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섬세한 목소리였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따스한 타인의 온기, 머리카락의 향기, 서서히 달아오르는 침묵.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기를 잠시.
세티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아까, 네티가 내가 우라간의 손잡이 잡는 거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뒤로 했냐는데?”
“….”
뒷골목 청소부들과 살며 웬만한 음담패설은 다 겪어본 여명조차 당황할 정도의 말.
세티도 그걸 느꼈는지, 작게 키득거렸다.
“내 동생이지만, 진짜 또라이야.”
“…음.”
“우리 쇠똥구리 씨가 얼마나 자제력이 뛰어난데. 그렇지?”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이었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 다시 침묵이 길어지려 하자, 세티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며 그의 발가락을 콕콕 찔렀다.
여명이 슬쩍 발을 빼려 했으나, 그녀는 발가락으로 그의 발가락을 꽉 쥐었다.
발가락은 의외로 민감한 부위라서,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꽈악 끌어안은 양팔.
여명은 그런 그녀를 슬쩍 밀어낸 뒤, 고개를 숙여 눈과 눈을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위로, 여명의 금빛 눈동자가 겹쳤다.
세티는 어색해하거나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여명은 이 세상에서 그녀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차오르는 감정에 볼이 빨개지고, 배가 아플 정도였다. 세티는 바가지로 물을 퍼내듯, 차오르는 감정을 말했다.
“고마워.”
평소라면, ‘천만에’ 라고 대답할 순간이었으나, 여명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말고.”
짓궂은 미소, 볼을 쓸어내리는 거친 손.
세티는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답했다.
“…좋아해, 좋아합니다. 어떤 대답을 원해?”
“뭐든 상관없어.”
여명은 슬그머니 그녀를 밀어내며 덧붙였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작은 웃음, 평소라면 여기서 입을 맞추고, 그대로 헤어졌을 터인데…
세티는 불현듯 다른 감정을 느꼈다.
열차에서 성녀와 여명이 단둘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침실을 비추는 커다란 달빛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그녀는 손을 잡으려는 여명보다 한발 앞서, 그의 볼을 붙잡았다.
“…왜?”
그러자 그의 이목구비가 살짝 움직이며 쓴웃음과 웃음 사이의 어떤 표정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도통 보지 못한, 진심 어린 당황.
그것을 본 세티의 마음은 봄비에 맞은 꽃잎의 그것처럼 흔들거렸다.
“어… 저기, 여명?”
사실 이럴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는데.
“나 못 참겠어.”
“…”
여명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세티는 그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적인 움직임.
여명은 그녀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끌어안지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 세티, 이건…”
“싫어?”
살짝 젖은 목소리. 여명이 다시 눈을 뜨자, 겁에 질린 세티의 얼굴이 보였다.
그 가련한 눈동자, 이대로 거절하면 흩어져버릴 민들레 같은 그 분위기가.
어떤 선을 끊었다. 한동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선이었다.
여명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옷 사이로 손을 넣어, 움푹 파인 등허리 곡선을 쓸었다. 끌어안은 손길을 따라 상아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 어?”
세티는 당황한 듯 몸을 굳혔지만,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빼고 그의 손길을 따랐다.
엉키는 발가락, 달뜬 숨결.
세티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난 야트막한 언덕을 떠올렸다.
여름이 입맞춤하고, 가을이 오자 그녀는 나무와 함께 낙엽을 벗었다.
겨울의 차가움, 그 아래 잠들어 있는 부슬부슬한 새싹들.
이번에는 봄의 따스한 입술, 가까워지는 숨결.
당황과 본능 사이의 무언가가 시키는 대로, 세티는 나무에 손을 올렸다.
두근거리는 봉오리, 화끈거리는 태양, 아, 미칠듯한 계절이여.
다시 찾아온 여름은 혀끝을 튕기며 속삭인다. 태양처럼 뜨거운 고백 아래, 흘러내리는 샘물.
가을은 금세 지나갔다. 이불인지 낙엽인지 모를 것을 밀어낸 뒤,두 사람은바싹 마른 꽃들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겨울, 말 대신 감정만이 차오르는 침묵.
다가오는 눈동자, 멀어지는 불안.
눈은 녹기 위해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눈은 언젠가 녹는 법.
“…와줘.”
힘겨운 고백에 달빛이 눈을 돌린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밤, 겨울 속의 불, 열정 속의 영혼.
유니콘의 눈물, 바이콘의 기쁨, 닫힌 문을 두드리는 애틋함이여.
누구도 밟아 본 적 없는 눈밭 위로 여명은 자신의 흔적을 새겼다.
***
제미니 시티의 외곽, 돈 많은 지구인들의 별장이 모인 부유한 교외지.
밤의 장막에 잠겨 있는 그곳을 향해, 일단의 수인들이 은밀히 다가가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들이 담장을 넘고, 도로를 넘는 동안 경찰은 그들의 털끝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늑대 수인이 발소리를 죽이고, 곰 수인이 달빛을 피해서? 아니, 아니다.
경찰의 무능은 너무 오랜 시간 범죄와 타협한 결과에 불과했다.
아무튼, 그런 은밀한 침투가 이어지길 한참.
가장 앞서서 달리던 수인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다른 수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자 수인이었는데, 그 외모가 범상치 않았다.
위엄이 가득한 얼굴, 터질 것 같은 근육, 그리고 밤의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황금빛 갈기까지.
왕이란 단어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사자의 등을 보며 다른 수인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곧이어, 밤의 어둠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수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외눈 안경을 쓴 드워프였다. 그를 본 수인들 중 몇몇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드워프는 기사단에서도 유명한 자였으니까.
“제푼 디가락.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호텔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자 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외눈 안경의 드워프, 제푼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대답했다.
“금동아.”
“…제 이름은 황금 이빨입니다.”
“그래, 금동아. 염병 떨지 말고, 그냥 집에 가라.”
틱, 틱 라이터의 소리. 드워프의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수인들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너 같은 놈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
“그러니 이대로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인들이 순순히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문제는, 무슨 수단을 가지고 왔느냐.
“제푼, 이 도시에 평화가 너무 길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황금 이빨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지, 수인들은 거의 동시에 이를 드러내며 등에 메고 있던 총기를 꺼냈다.
수인 기준으로도 거대한, 자동 샷건.
괴수 퇴치용으로 만들어진 지구산 총기가 틀림없었다. 아마 탄창에는 특수 슬러그 탄이 가득 차 있겠지.
“이거 참, 마피아도, 너희도…갈 데까지 갔구나.”
지구인과 손잡은 수인이라. 제푼은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금동이, 아니, 황금 이빨이 으르렁거렸다.
“단장을 가둬놓는 기사단만 하겠습니까.”
“….”
“우리 형제단은… 권력에 눈이 먼 부단장 대신, 그 분께 자유를 드릴 겁니다.”
제푼은 헛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진한 연기 내뱉었다.
달빛 아래 춤추는 연기를 따라, 일렁거리는 침묵.
그렇게 담배가 밑바닥을 드러내고,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
제푼이 짧게 감상을 내뱉었다.
“지랄은 니 애비 제사상에서 해라.”
“…감히.”
역린을 건드린 걸까, 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꼴을 본 제푼이 웃으며 꽁초를 던졌고, 그 꽁초가 바닥에 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터엉!
총소리가 밤을 꿰뚫었다.
게으른 경찰들은 몰라도, 가짜 병영에서 검을 휘두르던 노인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한 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