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02)
을 위한 세계는 없다-202화(202/817)
〈 202화 〉 마지막에 남는 것 (2)
* * *
***
방으로 돌아온 여명은 주머니에서 단장의 수첩을 꺼냈다.
긴 세월에 낡고, 거친 손길에 헤진 수첩.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던 여명은 이제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통 앞에서 수첩을 펼쳤다.
[성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수첩의 첫 구절은 그것이었다. 치매 노인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성 들여 쓴 글씨.
여명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수첩 속의 글은 대단치 않았다. 그것은 예언서도 아니었고,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담은 성경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기억이 흐릿해지면 검을 휘둘러라, 총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아라.]그것은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치매 노트였으며,
[산초 저놈은 대체 언제 결혼할까? 지구인이라도 좋으니 제발 사람처럼 살았으면.]기사단 단장의 일기였고,
[눈은 세상을 보는 창이요, 세상이 찾아오는 문이다. 꿀의 혈통이 그러하듯, 볼 수 있는 것 너머를 보라…]강대한 초인의 무술 비급, 그리고…
[내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기사로서 죽을 수 있기를.]한 기사의 애타는 기도문이었다.
여명은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글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겨넣듯이, 꼼꼼하게.
하지만 수첩은 뒤로 갈수록 읽기 어려워졌다.
글자들은 뭉개졌고, 문법은 망가졌으며, 애써 해석한 내용이 정신 나간 헛소리에 불과하기도 했다.
[도돌이표가 미국을 지배하는 것인가, 미국이 도돌이표를 지배하는 것인가?]여명은 굴하지 않고 인내심을 삼켰다.
그렇게 수첩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길 한참.
[맹세, 나는, 죽어야, 맹세, 한다.]여명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가득한 수첩의 마지막 장을 읽고 수첩을 덮은 그 순간.
“뭐해?”
익숙한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심각한 얼굴로.”
세티는 그렇게 말하며 여명에게 상체를 기댔다. 묵직한 감촉, 달콤한 살 내음.
“심각한 생각?”
여명이 대답하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의 귀를 깨물었다. 아프다기보단 간지러운 스킨십이었다.
침대에서도 그렇고, 의외로 깨무는 걸 좋아하네 라는 생각을 속으로 넣어둔 뒤, 여명은 세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세티.”
그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던 탓일까, 귓불을 잘근거리던 세티의 입이 멈췄다.
“지구로 돌아가는 거, 며칠만 늦추자.”
“…흐음? 왜?”
“할 일이 생겼어.”
세티는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쭉이다가,여명이 그녀의 볼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로 그 단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랑 싸우려고?”
“응.”
칼 같은 대답. 세티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그의 손바닥에 볼을 문질렀다.
“내가 도와줄 건?”
“오늘 도착할 틴다멜 상단 좀 챙겨줘. 상단이 끌고 오는 용병이랑 도적들, 경찰이 아니라 이곳의 깡패들에게 넘겨주고.”
“….”
“아, 그리고 가짜 신분증도 부탁할게.”
“…귀찮은 일은 다 나한테 떠넘기시겠다?”
여명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세티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슬쩍 눈을 피하며 말했다.
“뭐… 뽀뽀 한 번이면 못 해줄 것도 없고.”
“….”
풋풋하다고 해야 할지, 아저씨 같다고 해야 할지. 덕배 형이 떠오를 정도로 구수한 대사였다.
여명은 피식 웃은 뒤, 그녀의 목을 잡아끌었다. 그의 입술과 그녀의 볼이 만났다.
다른 뽀뽀를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세티는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반들거리는 연분홍빛 입술.
“…잘 다녀와.”
뭔가를 참아낸 세티는 그렇게 말했고, 여명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리고 그대로 방을 떠나려는데…
문뜩 성녀를 떠올린 여명은 세티를 향해 덧붙였다.
“…아, 맞다. 성녀가 꼬셔도 넘어가지마.”
“성녀가…뭐?”
“난 경고했다.”
세티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묻기 전에, 여명은 재빨리 스위트 룸을 나섰다.
세계 바깥에서 온 감독이자 기사단의 부단장, 산초를 향해서.
***
같은 시각, 제미니 시티의 뒷골목.
수인 형제단의 두목, 황금 이빨은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지 않았다. 자랑이었던 갈기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발톱은 모조리 잘려 나가 마치 인간의 그것처럼 뭉툭했으니까.
“…끄으.”
하지만 그런 꼴조차 그의 뒤를 따르는 동료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양 수인은 사지가 잘린 채 곰 수인에게 업혀 있었고, 늑대 수인은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수인 특유의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어도 백번은 더 죽었을 몰골.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야 했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병원이 아니라 뒷골목의 깊고 깊은 어둠이었다.
“대형,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그렇게 골목길을 나아가길 한참. 멧돼지 수인이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러다 이 녀석들 죽습니다. 부디, 제가 병원으로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는 숨소리가 작아지는 늑대 수인을 내려다보며 엄니를 딱딱거렸다.
다른 수인들의 눈동자가 황금 이빨에게 향했다. 모두 멧돼지의 말에 동조하는 것처럼.
황금 이빨은 그런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 본 뒤,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안 돼.”
“…형님!”
“애초에 죽을 자리라는 걸 알고 따라온 거 아니었나? 왜, 이제 와서 죽음이 두려워?”
“….”
적에게 죽는 것과 치료를 받지 못하고 꼴사납게 죽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으나, 수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동포들의 피와 눈물을 위한 일이다. 고작 눈앞의 죽음도 견디지 못하겠다면, 당장 꺼져!”
사자의 일갈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골목길의 어둠 저편에서, 작은 박수 소리가 침묵을 깼다.
짝, 짝, 짝.
귀가 좋은 수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골목 사이에서 등장한 존재를 본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골목길의 어둠보다도 더 검은 로브를 입고, 커다란 눈동자가 새겨진 가면을 쓴 자.
사자 수인은 즉시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제님을 뵙습니다.”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금 갈기 씨족의 아들이여?”
“성공했습니다!”
황금 이빨은 죽어가는 동료들을 힐끔 바라본 뒤, 설명을 덧붙였다.
“단장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총소리를 듣자마자 튀어나와 미군을 죽여야 한다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주변 건물들을 전부 박살 냈습니다.”
사제라 불린 눈동자 가면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매에 PTSD라… 모두 예상대로군요. 그의 실력은 어땠습니까?”
황금 이빨은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럽지만, 제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또한 예상한 바입니다.”
사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황금 이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첩.”
일방적인 하대였으나, 황금 이빨은 품에서 허겁지겁 낡은 수첩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저… 사제님? 우선 저의 동료들을 좀 치료해주시면…”
수첩을 읽는 사제를 향해 황금 이빨이 부탁했다. 다른 수인들도 애타는 표정으로 사제를 바라본 바로 그때.
사제가 수첩을 바닥에 던졌다.
“잘못 가져왔군요.”
“…예?”
“잘못된 수첩입니다. 보세요.”
황금 이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즉시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주워 펼쳤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수첩 안에는 꼬마가 그린 것 같은 낙서만이 가득했다.
“이, 이럴 리가…”
“눈 돌리지 말고, 부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사제님, 이건…!”
황금 이빨이 무어라 소리치려 했으나, 사제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말을 막았다.
“종말께서는 변명을 혐오하십니다. 특히 실패자의 변명은.”
“….”
“황금 갈기 씨족의 아들이여, 동료들을 치료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사제는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그의 동료들을 가리켰다. 불길함을 느낀 황금 이빨이 고개를 획 돌렸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번쩍!
손끝에서 불길한 붉은 빛이 터져 나왔고, 그 빛에 닿은 양 수인과 늑대 수인은…
그대로 잿가루가 되었다.
그들이 살아있었던 증거는 흩날리는 털 몇 가닥과 바닥에 고인 핏자국이 전부.
“….”
그들을 부축하고 있던 다른 수인들의 표정이 경악과 분노로 물들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덤벼들지 못했다.
사제가 지닌 힘 때문에? 아니, 사제가 그들에게 약속한 미래 때문에.
차원문을 넘어 풍요로운 지구로 가는 것. 황금 이빨은 그것을 위해 고개를 숙였다.
“벌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부디, 지구에서는 저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 사제님.”
그 말을 끝으로, 사제가 품에서 검은 돌덩어리를 하나 꺼내 황금 이빨에게 건넸다.
차원문 마법진이 새겨진 타락석.
초원 형제단이 애타게 바라던 바로 그 물건이었기에, 황금 이빨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수인들이 우르르 모여 타락석을 구경하는 사이, 사제는 음울하게 웃었다.
타락석에 새겨진 차원문의 좌표가 서울이란 사실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리무진 안, 창밖을 바라보던 산초가 입을 열었다.
“우리 단장님을 만났다지?”
맞은편에 앉아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여명은 힐끗, 그의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예, 새벽에 갑자기 찾아오셨더군요. 당황스럽긴 했지만… 제 예상보다 재밌는 분이셨습니다.”
“재밌다?”
산초는 피식 웃었다.
“그래, 재밌는 분이지. 혹시 자네에게도 그 소리 했나? 우연은 없다.”
“….”
무언의 긍정. 산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연은 없다. 모든 건 운명이다… 전대 성녀님께서 하신 말이라네. 변경백 령에서 함께 싸우는 동안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말이지.”
“…무슨 뜻입니까?”
“글쎄? 성녀님께서 알려주신 적 없네. 우리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고. 아마 경전 구절이 아닐까 하는데.”
여명은 성녀가 예지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전대 성녀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절망을 했건 그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아무튼, 말문을 연 산초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보다, 우리 단장님은 말일세…”
단장의 과거, 업적, 위업, 힘, 그리고 시시콜콜한 취향들까지.
산초가 온갖 이야기로 침묵을 밀어내는 가운데, 여명은 문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단장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단장님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아나? 아니 글쎄…”
“산초.”
“….”
“단장님을 죽일 자신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십시오. 가벼운 마음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산초는 여명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단장은 강했다. 그 오랜 시간 전쟁에서 살아남고, 평생 무술을 수련한 자였으니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겠지만… 산초와 여명이 동시에 힘을 합쳐야 아슬아슬하게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산초는 입을 다물었고, 여명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이 리무진을 채우길 한참.
산초가 다시 입을 연 건, 창밖으로 단장을 가둬 놓은 건물을 본 뒤였다.
정확히는, 병영을 닮은 건물 앞에 모인 수십 명의 인파를 보며 한 말이었다.
“라 코사 노스트라?마피아 새끼들이 여긴 왜…?”
하나 같이 무기를 들고, 문을 지키는 기사단원들을 위협하는 모습.
“당장 차 세워! 직접 달려가겠다!”
그들을 보고 당황해서 소리치는 산초와 달리, 여명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우글거리는 마피아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낸 까닭이었다.
***
리무진에서 뛰어내린 산초는 땅을 훌쩍 뛰어올라 건물 입구에 착지했다.
쿵!
땅이 울리는 착지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마피아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다들, 이곳에는 왜 왔소?”
마나가 담긴 목소리. 입구 주변에 모인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마피아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단장님을 뵈러 왔소. 오랫동안 찾아뵈지 못했으니 말이오.”
산초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단장님을 보러 와? 완전무장을 하고?”
그의 말마따나, 마피아들은 온갖 무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미군의 제식 소총부터, 마법진이 새겨진 수류탄, 심지어 저 멀리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녀석까지.
화력만 따지면, 웬만한 군대나 용병단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 무기들이 자신감을 주는 걸까?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마피아가 빙그레 웃었다.
“부단장이 이해 좀 해주시오. 정신 나간 초인을 만나려면 이 정도 무장은 해야 하지 않소?”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이 새끼들이 대체 무슨 용기로 이러는 건지 몰라 눈을 찌푸리는 산초와 달리,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다른 기사단원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애미없는 지구인 새끼들이…”
“차원문 너머 패배자들이라 좋겠소. 도망친 단장과 기사단원들이 서로 빨아주는 꼬라지가 참으로 감동적이구려.”
참지 못한 누군가가 검을 뽑고, 마피아들이 호응하듯 총을 들어 올렸다.
…안 돼.
그 모습을 본 산초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단장 앞에서 이만한 총소리가 울리게 할 수는 없었다.
“모두 멈…!”
그가 양측 모두를 멈추기 위해 소리를 지르려던 바로 그 순간.
수십 명의 마피아의 손과 목 주변에서 마나가 일렁거렸다.
“어?”
마나를 느낄 줄 아는 마피아의 머리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마피아들의 목을 붙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녀석들도 있었으나,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들은 팔 또한 묶었으니까.
여, 염동…! 켁, 컥!
끄윽, 끅…!
수십 명의 마피아가 허공에서 동시에 버둥거리길 잠시.
기절한 마피아들 사이로, 금색 눈동자의 중년인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환상으로 얼굴을 가린 여명.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가운데, 여명이 마피아들 뒤에 서 있던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용병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톈린 팀장님.”
그곳에 있는 건, 열차에서 헤어졌던 선죽 용병단원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