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08)
을 위한 세계는 없다-208화(208/817)
〈 208화 〉 지구에 있는 너에게
* * *
오늘의 미국 유머.
바이콘 뿔 두 개 달린 징그러운 살인 말.
지난 3년간 12명의 미국인을 살해했으나, 들소보다 사람을 덜 죽였다는 이유로 유해 마수로 지정되지 않음.
유니콘 뿔 하나 달린 친절하고 진실한 말.
백악관과 국회, 그 외 수많은 연예인들의 거짓말을 밝힌 죄로 유해 마수로 지정됨.
『빌 클린턴이 유해 마수 토벌법에 싸인 한 다음날, 월스트리트 저널의 메인 사설』
***
단장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나이 때문인가, 어둠에 익숙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충 열 번쯤 눈을 껌뻑였을까, 고요한 방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환자용 침대와 꽃병, 은은한 약 냄새와 삑삑거리며 숫자와 파장이 기록되는 낯선 기계들, 그리고 피부에 연결된 수많은 호스들까지.
단장은 이곳이 VIP 병실이란 것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슬그머니 마나를 움직여보니, 혈관이고 근육이고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솔직하게 평가하자면,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수준.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
“일어나셨군요.”
그때, 병실 구석 소파에서 익숙한 누군가가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천여명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여명이 침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단장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훑었다.
마지막 싸움에서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는지, 그의 얼굴에는 아직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이건 꿈인가?
짧은 침묵.
단장이 다시 입을 연 건, 여명이 침대에 달린 간이 식탁을 전부 펼칠 때쯤이었다.
“어떻게 한 건가?”
“뭘 말입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 말일세. 성녀님이라도 살리기 어려운 상처였을 텐데.”
“예, 뭐, 그렇더군요. 거의 일곱 시간 정도 축복을 불어 넣었는데… 많이 모자랐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삼 개월은 휠체어 신세를 지셔야 할 겁니다.”
“…?”
그렇더군요?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던 단장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여명이 앉아있던 소파에 뻗어있는 어떤 아줌마를 발견했다.
…설마?
단장은 눈에 힘을 주고 아줌마의 얼굴을 훑었다.
다음 순간, 단장의 눈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환상은 물론이고, 그 아래 숨겨진 고운 얼굴까지 간파했다.
“….”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단장은 몇 번이고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성녀…님?”
“….”
“어떻… 아니, 이게 정말 현실은 맞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여명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무언의 긍정. 단장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여명과 소파에 머리를 처박은 채 코를 고는 성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렇게 단장의 당혹감이 이어지길 잠시.
여명이 총 한 자루를 꺼내 간이 식탁 위에 올려놨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무튀튀한 리볼버.
그건 단장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전우의 총이었으니까.
“…성기사단 부단장이 쓰던 총이군.”
사랑 때문에 성검을 포기한 자, 성기사단의 오점, 호주의 스파이, 아샤의 수치, 그리고…
현시대 성녀의 아버지.
단장이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여명이 철컥 리볼버 해머를 당기며 말했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치매는 고치지 못했습니다.”
“….”
“성녀가 말하길, 엘릭서를 마시지 않는 이상 앞으로 몇 년 완화하는 게 전부라더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장이 웃었다.
“…애석한 일이군.”
그는 죽음 너머에서 만난 전대 성녀를 떠올렸다. 그건 단순히 꿈이었던 걸까? 아니면 죽기 직전 뇌가 만든 환상?
어느 쪽이건 간에, 또다시 자신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짧은 한숨, 무거운각오.
그렇게 단장의 입에서 ‘쏘게’ 라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여명이 주머니에서 다른 물건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그건 총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옅게 희석된 피가 담긴 혈액 팩.
너무나 뜬금없는 물건이었기에, 단장은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가?”
“얼마 전 엘릭서를 마신 소녀의 피에, 성수와 치유 물약을 섞은 겁니다.”
“….”
“확실하진 않지만, 혈관에 투여하면 아마 엘릭서 한 방울… 정도의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보란 듯 리볼버와 수혈 팩을 나란히 놓았다.
“이 피를 수혈 받아도 기억을 잃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치매 발작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입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여명을 향해, 단장이 물었다.
“…이보게, 천여명.”
“예, 어르신.”
“내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뭔가?”
여명은 뭔가 어색한 듯 코를 긁다가, 익숙한 수첩을 꺼냈다.
“부탁하셨잖습니까.”
“…부탁이라.”
단장은 스위트 룸에서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이건 내 부탁과 조금 다르군.”
“저는… 어르신께 선택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냥, 그뿐입니다.”
무슨 선택권을 말하는 건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짧은 헛웃음, 그보다 짧은 감정의 흔들림.
단장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옛 전우들을, 전대 성녀를, 그리고 부단장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기억 속 과거가 선명해지고, 현시대 성녀님의 코골이 소리가 익숙해질 때쯤.
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
“현재의 성녀님도 이 말을 자주 하시던가?”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그런가?”
“예.”
“그럼 이건 우연이겠군.”
산초가 그를 끌어들인 것도, 제 정신을 차리고 하필 그와 만난 것도,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추하게 살아남은 것까지, 전부.
작은 깨달음이 찾아온 직후, 단장은 빙그레 웃었다.
“내게 아직 맹세를 지킬 시간이 남았다면, 기꺼이 그 시간을 받겠네.”
“….”
“천여명? 나는 수혈 팩을 선택하겠네. 부탁이니, 지금 당장 수혈해줄 수 있겠나?”
여명은 말없이 그의 부탁을 이뤄주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건지, 그는 능숙하게 단장의 몸에 연결된 의료기기에 수혈 팩을 연결했다.
호스를 따라 흐르는 피, 그리고 성녀에게 향하는 단장의 눈동자.
그 사이 여명은 묵묵히 수첩을 챙기고 리볼버를 제자리로 가져다 놨다.
그러니까, 성녀의 허벅지의 가죽 홀스터에 총을 꽂아 넣었다는 뜻이었다.
단장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천여명 자네, 분명… 자신을 세티의 연인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나?”
“…예? 아, 네. 그랬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였기에, 여명은 말을 아꼈다.
“현재 성녀님의 이름도 만만치 않게 이상한 이름이지만… 세티는 아니던 것 같은데. 아마 그 소녀가 내게 피를 준 소녀겠군. 안 그런가?”
갑자기 웬 추리? 여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단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젊은이들이란.”
“…?”
뭔데 대체? 여명의 눈썹이 휘어지건 말건, 단장은 침대 옆에 놓인 장식용 꽃병을 향해 턱짓했다.
“천여명, 나 대신 그 세티란 소녀와 성녀님께 꽃 한 송이 전해주게. 나는… 조금 더 자야겠네.”
수혈팩 때문인지, 단장의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여명은 순순히 꽃병에서 꽃 두 송이를 뽑아 든 뒤, 성녀를 등에 업었다.
그렇게 성녀의 묵직한 감촉을 느끼며 방을 나서는 그의 등으로, 단장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맹세…”
그것을 마지막으로, 여명은 조용히 병실 문을 닫았다.
***
“어떤 선택을 하셨나?”
일행과 함께 병원 복도에서 여명을 기다리고 있던 산초의 첫 질문은 그것이었다.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단장이 무슨 답을 택했는지 뻔했으니까.
여명은 등에 업힌 성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수혈 받으셨습니다.”
확답을 들은 산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참… 다행이로군.”
혹시라도 죽고 싶어 하는 단장을 억지로 살린 게 아닐까, 여태껏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부단장은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정말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산초의 말꼬리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안도하는 건 지불이 끝난 뒤에 해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세티였다. 그녀는 여명에게 업혀 있는 성녀와 산초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제 피 값, 성녀가 탈진할 때까지 치유의 기적을 사용한 값, 그리고 여명은 목숨을 잃을 뻔한 값.”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얼마나 싸늘했는지, 산초가 가볍게 몸을 움츠렸다.
“저희가 얼마를 받아야 적당할까요?”
산초는 즉시 대답했다.
“원하는 값을 말하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게 무엇이건 뭐든 주겠네.”
무언가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
산초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검집 채로 들어 의자 위에 내려놨다. 기사단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보검.
아마 저것만 팔아도 한동안 놀고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여명이 머리를 스치는 가운데, 세티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크게는 호텔 수익권부터, 작게는 가짜 신분증 같은 자잘한 요구 사항이 빼곡히 적힌 종이.
여명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건 말건, 산초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를 정독했다.
단장을 살리는 데 세티의 공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세상 천지 어디서 최근에 엘릭서를 마신 피를 구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여명이 축 늘어지는 성녀의 몸을 들썩여 다시 자세를 잡고, 세티가 그걸 뚱한 눈으로 지켜볼 때쯤.
산초가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소. 여기에 있는 요구, 전부 받아들이겠소.”
예상외였던 걸까, 세티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정말요? 흥정은요?”
“내가 무슨 염치로 흥정을 하겠소?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눈동자가 여명을 향했다.
“때마침 괜찮은 사업 아이디어가 하나 있소.”
그 은근한 눈빛에 여명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깨닫고 피식 웃어버렸다.
“영화?”
산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기사단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생각이오.”
“…단장님의 이야기가 되겠군요.”
여명은 단장이 학살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그의 맹세를 떠올렸다.
산초 또한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꽤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가폰을 잡는 게 몇십 년 만이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은 영웅으로 기록되어야 하오. 그게 영화건, 역사서든 간에.”
짧은 침묵, 깊어지는 생각.
조금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여명과 산초의 웃음이 얽히는데, 세티가 갑자기 분위기를 깼다.
“…타임아웃. 이제 자는 척 그만하고 내려와.”
마치 게임에 빠진 아이를 훈계하듯, 엄격한 목소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가 슬쩍 눈을 떴다. 그녀는 여명의 등에서 슬그머니 내려온 뒤, 특유의 방정맞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단장님하고 대화하는 데 끼어들기 어색해서,자는 척하다 보니… 그… 알지?”
“…알긴 뭘 알아?”
여명은 아직 등과 손에 남아있는 그녀의 감촉을 삼킨 뒤, 병실에서 가져온 꽃으로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