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09)
을 위한 세계는 없다-209화(209/817)
〈 209화 〉 지구에 있는 너에게 (2)
* * *
***
슬그머니 달이 기우는 시간, 호텔 스위트룸.
네티는 창밖에서 반짝이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언니와 성녀님, 심지어 코르부스마저 떠난 방을 혼자 지키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애달픈 까닭이었다.
물론, 그녀가 일부러 혼자 남은 건 아니었다. 형부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어찌 자리를 지키고 있겠나.
하지만 주인 몰래 빌린(?) 바이크에 셋이 타는 건 무리였다.
무엇보다, 기껏 붙잡은 네크로맨서를 가만히 버려두고 갈 수도 없었고.
결론적으로 혼자 호텔에 남겨지게 되었지만,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녀가 일행 중 가장 약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코르부스야 이미 완성된 초인이자 마법사였고, 형부와 성녀님은 아마 같은 세대에서 한 손에 꼽힐 실력자였다.
의아한 점이 있다면, 비슷한 수준이었던 언니가 어느새 실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단 사실이었다.
대체 비법이 뭘까? 재능이라면 언니나 자신이나 도찐개찐인데.
혹시, 사랑의 힘인 건가? 사랑으로 유니콘 대신 바이콘과 친해지는 게 강함의 비밀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 자매들은…
그때, 방구석에 묶여 있던 네크로맨서의 목소리가 그녀의 망상을 끊었다.
“…힘을 원하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네크로맨서가 보였다. 또 뭔데?
네티는 염동력으로 그녀의 목을 콱 졸라버릴까 고민하다가, 어디 한 번 지껄여보란 듯 턱짓했다.
그녀의 말에 혹했다기보다는, 심심했으므로.
그런 네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크로맨서는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오, 그래?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핏줄 속에 숨겨진 힘을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내 핏줄?”
네티가 관심을 보인다고 착각한 걸까, 네크로맨서가 뱀처럼 속삭였다.
“신성…!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사제들에게 적선하듯 던져주는 힘!”
“….”
“그것을 꺼내 온전히 다룰 수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될 겁니다.”
“오… 내 핏줄에 그런 게 있었어? 난 여태껏 몰랐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러자 네크로맨서는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대답했다.
“열차에서 그분의 심상 세계로 들어온 것, 그것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
“제가 준비한 함정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오직 떨어진 별, 이 땅에 추락한 신성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분명…!”
다음 순간, 네티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잠깐, 잠깐만. 그 거지 같은 곳에 빨려 들어간 게 신성의 증거라고?”
“예, 원래는 CIA 요원을 노린 함정이었습니다만, 여러분들도 함께 잡히신 겁니다.”
“….”
“처음에는 마법에 오류가 있었나 싶었지만, 아무리 되짚어봐도 오류는 없었습니다.”
단언하는 네크로맨서를 보며 네티는 피식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나?
“에이, 거짓말을 할 거면 조금 더 그럴싸하게 해야지.”
언니나 자신은 몰라도, 형부와 성녀님이 그런 핏줄을 가지고 있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마 성녀님의 정체를 모르니 저렇게 지껄일 수 있는 거겠지.
흥미가 식어버린 네티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이제 잡담은 그만.”
“자, 잠깐!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제 마법은 완벽했단 말입니다! LA에 있는 동료들에게 가면…”
“예, 예, 그러시겠죠.”
네티는 염동력을 일으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고, 세티에 의해 마나가 막혀버린 네크로맨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억울한 얼굴로 무언가를 읍읍 거릴 뿐.
잠시 후, 제풀에 지친 네크로맨서가 방구석에 쪼그려 앉았고, 스위트 룸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꽃을 든 두 소녀가 여명을 끌고 올 때까지, 계속.
***
부지런한 자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
제미니 시티 외곽 창고에 자리 잡은 틴다멜 상단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얼굴 대부분이 화상으로 뒤덮인 험상궂은 드워프.
외눈 안경을 까딱이는 그 드워프는 제미니 시티를 들락거리는 상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자였다.
“제, 제푼 디가락? 이 시간에?”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을 들은 틴다멜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믿기지 않는 건 소식을 전해온 일꾼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대답했다.
“마피아 행동 대장이 대체 왜…?”
설마 도적단을 억류하고 있어서?
틴다멜은 불길한 상상을 떠올리며 창고 입구로 향했다.
그와 일꾼들이 창고 문을 열자마자, 거의 수십 명에 달하는 마피아들이 그를 바라봤다.
양복 차림의 마피아들은 전원이 검이나 메이스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이 도시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기사단이라는 걸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그냥 평범한 라 코사 노스트라의 마피아도 아니고, 기사단이라니.
틴다멜은 애써 겁먹은 걸 숨기며 가장 앞에 서 있는 제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제푼 디가락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제푼은 슬쩍 틴다멜의 얼굴을 훑더니, 무언가를 확인하듯 물었다.
“남부에서 온 틴다멜 상단. 맞소?”
“예, 제가 틴다멜입니다만…”
“이 창고 안에 도돈 형제단과 도적단원들을 잡아 놓고 있다던데. 그것도 맞소?”
“….”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성녀님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틴다멜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목울대를 넘어가는 침, 등허리로 흐르는 식은땀.
뒤에서 지켜보던 동료 상인들과 일꾼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는데, 제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우린 도와주러 온 거니.”
“예?”
“당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받았소.”
“부탁이라뇨? 누, 누구에게요?”
“금색 눈동자를 가진 친구. 어제 바로 만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더군.”
제푼은 알아들었냐는 듯 눈썹을 으쓱였고, 틴다멜은 멍하니 그와 기사단을 바라봤다.
“천여명? 그분이 어떻게…?”
“어떤 선행이나 인연은 종종 행운으로 돌아오기도 하지. 그렇지 않소?”
“….”
“틴다멜 상단은 오늘부로 우리 기사단의 보호를 받을 것이오. 동의하시오?”
틴다멜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제푼이 기사단원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그러면 우선… 도적놈들은 경찰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데려가겠소.”
그 직후, 검과 메이스를 든 퇴역 기사들과 그의 제자들이 우르르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 기사단? 당신들이 여긴 왜…? 자, 잠깐!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 악! 자, 잠깐만! 뼈, 뼈 맞았어!
오늘 내로 풀려날 거라 확신하고 있던 어떤 도련님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
태양이 도시를 비추는 시간.
아침을 맞이하는 제미니 시티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차원문 앞에 길게 줄을 서는 트럭과 차량들, 아침부터 짐 싣는 소리가 들려오는 역, 그리고 일터로 향하는 무수한 노동자들까지.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도시의 풍경이었으나,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아낸 자들이 있었다.
우선, 보리 빵을 팔던 드워프들.
그들은 아침마다 보리 빵 샌드위치를 사 가던 지구인 마피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을 깨닫자마자, 드워프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다음으로 이상을 눈치챈 건 일자리를 구하던 오크들이었다.
그들은 경쟁자인 수인 노동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음을, 특히 초원 형제단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어진 오크들의 반응도 드워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생일지라도,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아무튼.
눈치 빠른 자들이 사라진 거리 사이로, 작은 트럭 한 대가 차원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은 트럭이었다.
짐칸에 포장된 가구와 살림살이, 그리고 후줄근한 복장의 여인네들이 앉아있는 트럭.
뭣도 모르고 지구로 향하는 무지렁이들이 틀림없었다. 혹은, 그렇게 보이려고 위장한 트럭이거나.
어느 쪽이건 도시민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정작 짐칸에 앉은 여인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형부, 정말 이대로 차원문을 넘을 수 있는 거 맞아요?”
걱정과 기대가 반반씩 섞인 소녀의 목소리.
그 질문이 향한 건 트럭 맞은편에 앉아 있는 금색 눈동자의 청년이었다.
“글쎄, 아마도?”
믿음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질문을 꺼낸 소녀, 네티는 점점 가까워지는 차원문을 힐끗 확인하며 말했다.
“차원문 감시대는 장난 아니라고 들었는데… 형부는 긴장도 안 돼요? 이거 걸리면 우리 다 깜빵행이라구요!”
“우리가 차원문 너머에서 한 대부분의 일처럼?”
“….”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는 네티를 보며, 여명은 피식 웃었다.
“별일 없을 거야. 이 도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마피아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인데, 그렇게 간단히 걸리지는 않겠지.”
그 말대로였다.
세티가 가짜 신분증을 비롯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산초는 그들에게 딱 맞는 가짜 신분증을 구해왔다.
시골에서 올라온 천 씨네 가족.
6.25 전쟁 당시 차원문 너머로 도망친 한국인의 후예인데, 최근 돈을 좀 벌어서 지구로 돌아간다는 설정이라나.
꽤 그럴싸한 설정이었으나, 네티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 하나에 여자 넷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본인은 네티 양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이건 이상하오!”
가족의 ‘애완동물’ 역할을 맡은 까마귀가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자 짐칸 구석에 앉아있던 ‘아내’ 역할의 성녀가 반대 의견을 냈다.
“왜, 난 괜찮은 거 같은데.”
“….”
“어차피 가짜 신분이란 게 다 그런 거잖아?”
네티는 눈살을 찌푸리고 성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남편’ 역의 형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참, 노골적이시네.’
애써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네티는 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티는 짐칸이 아닌 조수석에 앉아 산초인가 뭔가 하는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부르기가 뭐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내 역할을 뺏겼는데 일이 눈에 들어오나?
아니, 어쩌면 저런 여유야말로 언니의 장점일지도 몰랐다.
하긴, 그러니까 자매 중 가장 먼저 부뚜막에 올라갔지… 라는 불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네티는 금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차피 그녀의 계획 속에서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네티는 가까워지는 차원문을 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형부, 지구로 돌아간 뒤에는 어쩌실 거예요? 바로 아카데미로?”
“아니, 아카데미로 돌아가긴 해야겠지만, 우선 LA에서 며칠 묵을 생각이야.”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딜라를 바라봤다. 세티에게 육체가 종속된 네크로맨서.
“LA의 네크로맨서들에게 볼일이 있거든.”
그녀는 차갑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를 보며 침을 삼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명은 그녀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차원문 검문소에 도착한 덕분이었다.
[차량 번호 8WDG112. 정지하십시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군 초소가 떠오르는 검문소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도로에서 정지봉이 솟아올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검문소 저편, 도로가 다 내려다보이는 초소에는 무장한 미군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진짜로 차원문 앞까지 왔다는 게 실감 나는 풍경.
“제발, 제발, 그냥 넘어가라…”
네티가 살짝 긴장한 듯 웅얼거렸으나, 검문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트럭을 끄는 산초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검문하던 군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정지봉을 내려버렸으므로.
[확인했습니다. 통과.]저 아저씨,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인 건가?
네티가 눈을 껌뻑이고, 성녀가 부부 연기를 핑계로 여명의 옆자리에 앉는 사이.
일행이 탄 트럭은 추가로 검문소를 두 곳을 더 지나쳤다.
개중에는 마나를 탐지하는 기계가 설치된 곳도 있었는데, 이번에도 산초가 검문관을 향해 몇 마디 하자 검문소 직원들은 일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넘어가 버렸다.
그나마 미군이 지켜보지 않을 때 넘겨서 망정이지…네티는 살 떨리는 긴장을 삼키며 여명에게 물었다.
“…차원문 검문소는 엄청 삼엄한 거 아니었어요?”
“삼엄하지. 이런 일반 트럭만 해도 세 번씩이나 검문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건 너무 쉬운 거 같은데요…”
그녀는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고, 여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운전하고 있는 저 사람, 이 도시에서는 알아주는 거물이야. 그러니 얼굴을 보자마자 순순히 길을 내주는 거고.”
거물? 네티는 혼란에 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런 거물이 왜 직접 얼굴 까고 우리 밀입국을 돕는 건데요?”
이걸 뭐라고 정리해야 하지? 여명 잠시 고민하는 사이, 산초 본인이 대답했다.
“은혜도 갚고, 겸사겸사 다른 조직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오.”
“…신호요?”
“동맹은 이제 끝났다는 신호. 여러분들을 차원문 너머로 태워준 뒤에,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오.”
네티는 더욱더 혼란에 빠졌지만, 성녀는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했다.
“…죄의 대가는 더디지만, 반드시 찾아오는 법.”
짧은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트럭이 드디어 차원문으로 진입하는 줄에 합류했다.
차원문을 넘기 위해 무수한 차량들이 줄을 서 있는 곳.
불과 몇백 미터 앞에 있는 차원문을 보며,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터덜거리는 트럭의 진동을 따라, 각자의 생각이 깊어진다.
각오,사랑,두려움, 그리고 복수.
“다시…지구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여명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트럭은 차원문을 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