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10)
을 위한 세계는 없다-210화(210/817)
〈 210화 〉 지구에 있는 너에게 (3)
* * *
***
여명의 기억 속, 차원문을 넘어본 사람들은 모두 다른 감상을 내놨었다.
환상적이었다.
울렁거린다.
뭔가를 봤다.
그 말을 들은 어린 쇠똥구리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지만, 나이가 든 뒤 교과서와 다큐멘터리가 알려준 진실 조금 달랐다.
‘차원문 속에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차원문은 들어갔다 나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 과정에서 뭔가를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거기다 십수 년간 차원문을 들락거린 트럭 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논문까지 있었으니, 여명 또한 그것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차원문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트럭에 타고 있던 일행들, 그러니까 어깨를 기대는 성녀와 입술을 삐죽거리는 네티, 코르부스, 딜라, 산초, 그리고 세티마저 그대로 정지해버렸으므로.
‘이건 또 뭔’
여명이 반사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으나, 그의 감각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게 조금 더 빨랐다.
후각과 미각이 곤두서고, 피부로 느껴지는 촉각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개중에서 가장 크게 변한 건 눈이었는데,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전까진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럭 난간에 쌓인 작은 먼지 한 톨, 마나가 만들어내는 현란한 매듭과 선,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들까지.
‘….’
다른 감각들도 그랬지만, 특히 눈에 보이는 감정들이 충격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성녀의 감정이었는데, 그녀의 감정은 넘치다 못해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있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세티의 들끓는 감정과 몰래 숨겨놓은 네티의 감정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모두 그에겐 과분한 감정들이었다. 어떻게 되돌려 줘야 할지 모를, 그럼 감정들.
여명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나 고민했다.
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증폭된 그의 시선은 먹먹한 하늘 위,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를 찾아냈으니까.
“…별?”
그래, 그건 별이었다.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별.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여명은 마나를 끌어 올려 증폭된 시야를 한 번 더 강화했다.
직감에 가까운,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마나로 한 번 더 강화된 그의 시야는 별의 외곽선을 넘어, 일렁이는 빛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모습을 꿰뚫어 봤으니까.
독수리인지 매인지 알 수 없는, 맹금류의 머리를 가진 거인.
거인은 마치 이집트 신화에 나올 법한 복장을 하고, 둥그런 왕관을 쓰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광경이었으나, 여명은 두려움 대신 당황을 느꼈다.
미그니움과 비슷한 초월적인 존재를 봐서?
아니, 아니었다. 거인은 미그니움과 달랐다. 그녀보다 작았고, 약했으며, 동시에…
익숙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에 여명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당황을 느낀 건 거인도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기나긴 침묵, 그보다 긴 시선 교환.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거인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트럭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여명과 시선을 나란히 했다.
육체와 영혼, 그리고 시간마저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동자가 여명의 몸을 훑었다.
여명 또한 거인과 눈을 맞췄다.
격의 차이 때문인지, 여명이 읽어낼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작은 당황, 그보다 더 작은 기대감.
잠시 후, 거인은 갑자기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부리를 열었다.
“…?”
뭔데? 뭘 알아낸 거야?
그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는 사이, 거인은 다시 허리를 폈다.
어느새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거인은 여명에게 손을 뻗었다.
여명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꺼냈으나, 차마 휘두르지는 못했다.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거인의 손가락에선 어떠한 살기도 느낄 수 없었으므로.
그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거인의 손가락은 정말로 여명을 찍어버리거나 후려치지 않았다.
그 대신, 여명이 상상도 하지 못한 짓을 벌였다.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설마 이런 짓(?)을 당할 줄 몰랐던 여명은 말을 잃었고, 이번에도 거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필시 고통과 고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을 터, 이렇듯 장성한 걸 보니 참으로 대견스럽구나.]여명은 한숨을 참았다. 차라리 길에서 만났던 도적 떼나 심상 세계 속 괴물이었다면, 기꺼이 칼을 휘둘렀을 텐데.
이렇게 선의를 보내는 존재에겐 뭘 해야 한단 말인가?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여명은 결국 검 대신 질문을 꺼냈다.
“…정체가 뭡니까?”
거인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미소 지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을 내뱉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거세하였구나. 욕망, 자유, 죄악… 그 흔한 이상형이나 꿈조차 없다.]“….”
[필요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그대는 이 시대의 운명을 쟁취한 자이니, 운명을 빼앗은 상대의 욕망만큼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할 것이다.]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여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 위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아니, 선문답은 됐고, 그쪽 정체가 뭐냐니까요?”
[그래, 그런 태도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거인은 피식 웃더니, 대뜸 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파스스
거인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해체되어 가루가 되고, 가루가 한데 뭉쳐 하늘 위의 빛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물론 여명 입장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즐길 틈이 없었다. 저건 뭔데 대뜸 자기 할 말만 지껄이고 떠난단 말인가?
가뜩이나 네크로맨서니, 한국이니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운명이니 뭐니 더 떠드는 놈이라니.
이럴 거면 차라리 미그니움이 낫…
여명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거인이 별로 돌아간 순간, 정지된 세상이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아니, 잠!”
그가 타고 있던 트럭은 순식간에 차원의 틈 사이에서 사라졌다. 전문가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혼자 남겨진 별은 트럭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밤하늘이 그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계속.
『잘했다.』
별은 굳이 고개 돌리지 않았다. 밤하늘 어디에서나 어둠을 마주할 수 있었으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이 영원한 고통은 나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니니.]『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소? 하긴, 당신은 그저 놀고 싶을 뿐이겠지.]『그 또한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별은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뭐가 되었든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더욱더 즐기거라. 나의 간택자.』
정작 그녀는 가능성보다는 다른 것에 취해있는 듯했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
여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보던 차원의 틈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앞의 시야가 뒤바뀌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스모그 낀 하늘과 그런 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오른 빌딩들, 그리고 바로 코앞으로 길게 늘어선 무수한 검역 초소들과 트럭들까지.
트럭 사이로 초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밀입국하려다 잡힌 오크들이 포박된 채 우르르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명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켜보는 검역소의 군인들은 삼엄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유롭기도 했다.
감히 누가 이곳을 침범하겠느냐 라는 태도가 절절히 느껴지는 모습.
한 줄로 표현하자면, 가장 활기차던 시절의 인천을 몇 배로 키워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만약 조금 전에 봤던 정지된 세계와 별의 거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증폭되었다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는 감각들이 아니었다면 여명도 순순히 감탄에 빠졌으리라.
저기, 입꼬리를 씰룩이는 네티처럼.
“드디어 지구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듯 호들갑을 떨며 코까지 킁킁거렸다.
지구 도시 특유의 탁한 공기가 코를 찔렀지만, 그녀는 그것마저 좋다는 듯 키득거렸다.
코르부스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툴툴거리던 태도는 어디 가고,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런데 의외로, 성녀가 조용했다.
여명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걱정이 가득한 성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여명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 괜찮아?”
“…본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봤어. 대체 그건 뭐였던 거야?”
“난들 알겠냐. 물어도 대답 안 해주던데.”
“….”
성녀는 뭔가를 고민하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뭔가를 찾아 그의 몸 곳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등과 손바닥을 더듬고, 목뒤를 확인하고, 상의에 대뜸 손을 넣어 벌린 뒤 가슴과 등을 힐끗거렸다.
다행히 하의를 벗기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성녀가 찾던 무언가는 그의 머리카락 아래에 있었으니까.
“역시…”
성녀는 여명의 두피에 그려진 작은 동그라미 그림,
정확히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들어가 있는 문신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왜, 뭔데 그래?”
자신의 머리를 볼 수 없는 여명이 묻자, 성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방금 그거, 잡신이었어.”
“…잡신?”
“신이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워. 다섯 신과 달리 기원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마나 생명체들이거든.”
“….”
“종말 교단의 괴물들과 달리 평소에는 쥐 죽은 듯 사는데… 종종 쓸만한 인간이 있으며 이렇게 침을 발라 놓으려고 하지.”
성녀는 엄지손톱을 씹으며 중얼거리다가, 대뜸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널 너무 오랫동안 불신자로 내버려 둬서… 정말 미안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여명이 슬쩍 몸을 빼려는데, 성녀가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 당장 이 잡것의 흔적을 지워줄 테니까. 우선… 세례부터 받자.”
“…뭐?”
“다섯 신 중에 어떤 분이 좋아? 아, 함께 산 작업반장님이 모르닥님의 신도라고 했었지?”
여명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흑색의 모르닥이시여, 당신의 낫이 바라나이다. 제 눈앞의 불신자에게 당신의 수의를 내리시어 안식을 누리게 하…”
성녀의 세례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여명이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버렸으므로.
“뭐해?”
“…너야말로 뭐하냐?”
“잡신의 축복을 지울 생각이라니까? 왜, 모르닥님 말고 다른 분이 좋아?”
“아니,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야, 난 세례를 받을 생각 없어.”
여명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까 머리를 쓰다듬은 이유가 그거였나. 빌어먹을 자식.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성녀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건 그냥 내버려 두면 큰일 난다니까?”
여명은 다가오는 성녀를 보며 설득할 말을 고민했다.
뜬금없는 잡신의 축복은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 지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특히 다섯 신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면 더더욱.
그 잡신이 자신에게 축복을 내린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거인에게서 느낀 익숙함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그니움은 또 어떤가?
그녀의 성격상, 다른 신의 축복을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 없었다. 그러니 분명 그 잡신의 등장에 미그니움 또한 관계되어 있으리라.
물론 그런 내용을 성녀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간단하게 한 줄로 성녀의 접근을 차단했다.
“여긴 지구야.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이지.”
“…자꾸 개소리할래?”
차원문 너머의 종교인답게, 그녀는 손쉽게 종교의 자유를 짓밟아버렸다.
“잡신이 무슨 의도로 너한테 침을 바른 건지 몰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미 늦은 거야. 그러니까… 자, 어서.”
역시 성녀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완고했다.
여명이 슬쩍 그녀를 피하자, 그녀는 아예 도망칠 수 없도록 몸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좁은 트럭 짐칸에서 도담한 그녀의 몸을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순식간에 여명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성녀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어차피 잡힐 거 자꾸 빼기는… 가만히 있어. 빨리 끝내줄 테니까.”
“…너, 내가 그 말 기억해둔다.”
“그러시든가. 잔말 말고 세례나 받아. 자… 녹색의 이사기녹이시여, 당신의 꽃이 바라나이다. 이자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시옵…”
성녀가 여명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세례를 읊으려던 그때.
네티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여관 잡아드려요?”
“….”
“검역소 앞에 가면 트럭 기사들을 위한 여관촌이 있데요. 거기까지만 참아주세요.”
그제야 성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검역소 직원들은 물론이고, 주변 트럭 기사들과 초소 위의 군인들조차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버티기 힘든 건, 턱을 괴고 뚱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티의 차가운 눈동자였다.
“….”
성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대로 포장된 가구 사이로 들어가더니, 포장지로 얼굴을 가렸다.
“에잉,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네티의 마무리를 들은 검역소 직원이 웃음을 터트린 직후, 일행을 태운 트럭이 검역소의 문을 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