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11)
을 위한 세계는 없다-211화(211/817)
〈 211화 〉 지구에 있는 너에게 (4)
* * *
***
차원문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한 개성이나 마르세유같은 차원문 도시들과 달리, LA에서 차원문이 차지하는 영역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기껏해야 LA 카운티 동부 일부 지역을 차지한 게 전부.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LA 차원문이 비교적 가난한 지역에 연결된 차원문인 것도 있었고, 시카고 차원문에 비해 지원받지 못한 점도 컸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로스앤젤레스가 차원문이 열리기 전부터 이미 부유한 도시란 점이었다.
태평양 물류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롱비치 항구, 문화 산업의 메카인 할리우드, 초인 격투판을 비롯한 현대 엔터테이먼트 사업의 산실인 애너하임…
이미 세계 경제와 문화를 주도하는 판에, 굳이 차원문 사업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차원문 하나 없는 대부분의 후진국이 들으면 분통 터질 말이었으나, 원래 세상은 있는 놈들이 더한 법 아니던가.
“미국 사기맵.”
산초의 기나긴 설명을 들은 네티의 평가는 솔직하다 못해 웃겼다.
차원문 속에서 만난 잡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여명조차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미국 사기맵이라, 확실히 그 말이 맞소. 소련과 중국까지 싹 사라져버렸으니, 이렇듯 혼자 독주하는 게 이상하진 않지. 그렇지 않소? 천여명?”
산초는 그렇게 말하며 백미러로 여명을 슬쩍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도 아니고, 대뜸 그렇지 않겠냐니.
그건 아마 여명이 아닌 플레이어에게 하는 말이리라. 여명은 굳이 플레이어가 아니란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역시 캘리포니아 혼자 아프리카 대륙 전체보다 GDP가 높은 건 너무한…”
심심한 네티와 산초의 대화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트럭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아무튼.
한두 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목적지는LA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거주지였는데, 낡은 전원주택이 쭉 늘어선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거주지로 보였다.
산초는 그런 거주지의 외곽,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2층 주택 앞에 트럭을 주차하며 말했다.
“도착했소.”
일행은 그의 안내를 따라 주택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 바로 조금 전에 청소한 것처럼 깨끗했다.
“기사단이 LA에 준비한 거점 중 하나요. 지하실에 벙커까지 있으니, 나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이지.”
겨우 며칠 묵고 가기엔 과분한 건물이었으나, 산초의 선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티 양? 요구한 물건은 이틀 내로 배달될 것이오. 꽤 양이 많을 텐데, 공간 문제는… 천여명, 당신이 있으니 별문제 없겠지.”
그건 세티가 대가로 요구한 돈과 보물, 기타 잡다한 물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명은 인벤토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나는 이만 제미니 시티로 돌아가겠소. 혹시 연락할 일이 생기면, 여기, 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시오. 아니면 두 블록 옆에 있는 햄버거 가게 사장을 찾거나.”
“…햄버거 가게?”
일행 대표로 미국식 핸드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받던 여명이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산초는 어깨를 으쓱였다.
“은퇴한 기사단원이 운영하는 곳이오. PTSD 때문에 더 이상 무기를 잡지 못해 정보원으로 활동하는 친구지.”
망한 기사단이 한국군보다 복지가 낫네.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산초가 덧붙였다.
“대머리에 애꾸눈인 친구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요. 도움이 필요하면 더블 치즈버거를 시키면서 0611이란 번호를 말하면 되오. 그러면 알아서 도움을 줄 것이오.”
“오… 비밀 암호! 무슨 의미가 있는 숫자인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네티가 물었다. 산초는 살짝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기사단이 해체된 날이라오.”
“….”
급격히 싸해지는 분위기. 네티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짐을 푸는 세티에게 도망가 버렸다.
결국, 여명과 성녀 둘이서 그를 배웅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산초.”
“나도 다음 만남을 기대하겠소. 천여명, 그리고… 성녀님?”
“네?”
“호아나와 아버지에게 언제 한번 찾아오라고 전해주십시오. 단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 네,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다섯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부단장님도, 다섯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작별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산초는 일행 모두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인 뒤, 저택을 나섰다.
다시 만날 거란 확신 때문일까, 여명은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배웅했다.
길게 햇빛이 늘어지는 창밖, 멀어지는 트럭의 뒷모습.
여명이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트럭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세티를 불렀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응, 바로 하길 원한다면야. 준비는 이미 다 끝내놨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짐을 전부 정리한 세티가 네크로맨서와 나란히 서 있었다. 네크로맨서는 뭐가 그리 무서운지, 몸을 덜덜 떨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문까지 안 갔으면 좋겠는데.”
“그거야 우리가 아니라 이 여자에게 달린 일이지.”
무시무시한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으면서, 세티와 여명은 네크로맨서를 이끌고 저택 지하실로 향했다.
그리고 성녀가 쫄래쫄래 두 사람을 쫓아가려던 그때.
네티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성녀님은 저랑 가시죠.”
“으, 응?”
“우리는 우리만의 계획을 세우자구요.”
“…계획?”
네티는 대답 대신 은밀한 손가락 모양을 만들어 성녀에게 보여줬다. 성녀는 그 손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해리 마이어는 이 동네에서 유명한 햄버거 가게 사장이었다.
물론, 음식 실력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다. 그가 유명해진 건 어디까지나 외모 덕분이었다.
살벌한 애꾸눈에 번들거리는 대머리, 거기다 근육질의 덩치까지.
누군가는 참전 용사 출신일 거라고 존경을 표했고, 또 누군가는 깡패 출신일 거라며 혐오했으나, 해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햄버거 가게는 딱 망하지 않을 정도만 운영해도 상관없었고,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질수록 동네 양아치들이 그를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햄버거와 감자튀김 냄새로 가득한, 평화로운 도시의 나날.
몇 년간 무탈하게 이어지던 해리의 나날은, 정체불명의 청년에 의해 깨져버렸다.
“더블 치즈버거 세트 다섯… 아니, 일곱 개 포장해주세요.”
“더블 치즈버거 세트 포장 일곱 개. 음료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전부 콜라로 주시고, 감자튀김에는 소금 적게 쳐주세요.”
“예 그럼 가격은 53달…”
“0611달러. 맞습니까?”
뭐라고? 해리는 돈을 내미는 청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0611. 혹시 모자란 가요? 제미니 시티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물가를 잘 모릅니다.”
천연덕스럽게 지껄인 청년은 정작 딱 맞춰서 돈을 내밀었다. 해리는 그 돈을 받아든 뒤, 조용히 한 가지 질문을 추가했다.
“사은품으로 지도와 장난감 병정이 있는데, 혹시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정보냐, 아니면 병력이냐는 질문. 청년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도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LA에서 찾을 사람이 있어서.”
해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티도 내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더블 치즈버거 세트 일곱 개를 조리하고, 청년이 보는 앞에서 가방에 버거를 담았다.
그가 준비한 가방 아래, 비닐에 싸인 USB와 휴대폰이 있다는 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도는 가방에 넣어 놨습니다. 맛있는 식사 되시길.”
“감사합니다.”
해리는 조용히 가게를 나서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청년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레 가게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걸어 잠그기 직전, 한 남자가 가게 문을 두들겼다. 이마가 다 드러난 M자 탈모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콧대가 특이한 남자였다.
해리를 그를 무시하고 문을 닫으려다가, 그의 뒤에 선 한 노인네를 보고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오늘 장사 끝났어. 다음에 오게. 월라드.”
그러자 월라드라 불린 남자 대신, 그의 뒤에 서 있던 노인이 대답했다. 러시아 억양이 강한 걸 보니, 옛 소련인이 분명했다.
“우리는 거래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요구를 하러 온 거다. 차원문 너머의 야만인아.”
“….”
야만인? 해리의 표정이 딱딱해지고, 월라드의 표정이 난감해졌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도시에 숨어든 교단의 정보를 넘겨라. 그렇다면 내일 해를 보게 해주지.”
그 광오한 말에 해리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지 않은 두피를 긁적인 뒤, 월라드를 향해 말했다.
“월라드, 이게 푸른 쥐의 진심인가? 우리 거래가 벌써 5년째인데, 이렇게 관계를 망치겠다고?”
그러자 월라드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해리, 오늘은 내 얼굴 봐서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게.”
이놈도 뭔가 인질로 붙잡혀있군. 해리는 월라드를 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작은 USB하나를 꺼내왔다.
조금 전 청년에게 준 것과 달리, 거짓 정보가 담긴 더미용 USB.
진실 여부를 알아내려면 적어도 3일은 걸리는 물건이었으나, 노인은 별말 없이 USB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노인의 손가락이 해리의 애꾸눈을 찔렀다.
전조도, 경고도 없는 기습.
“크윽!”
이미 실명된 눈이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해리는 눈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원로님!”
옆에서 지켜보던 월라드마저 놀라 노인을 불렀으나, 노인은 가볍게 손가락을 털며 말했다.
“왜? 멀쩡히 내일 해를 보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혐오와 오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 그러나 해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USB가 더미인 걸 눈치챈 월라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
화려한 야경과 관광객으로 가득 한 LA의 밤거리.
딜라 카탁포이어는 멍하니 한인 타운을 향해 걸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그것처럼 처량했다.
빌어먹을 놈들이 그녀에게만 더블 치즈 버거를 주지 않아서?
물론 그런 것도 있었지만, 고자질쟁이가 되었다는 죄책감이 그녀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조금 빨리 걷는 게 어때. 시간도 없는데.”
그렇게 걸음이 조금 느려지자마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청년이 말했다.
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딜라는 감히 그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상대는 그림자 신성을 쓰는 마녀와 다섯 신의 사제를 동시에 유혹한 괴물이었으니까.
심상 세계에서 본 실력을 되새겨보자면, 분명 이성을 유혹하는 종류의 신성을 지닌 음탕한 신의 화신이 틀림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도 그 마성에 빠지게 되리라.
육체의 소유권을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정신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걷는 속도를 늘렸다.
“빠, 빨리 가겠습니다.”
“표정 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네, 넵.”
그녀는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청년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렸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느끼기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지난 뒤, 딜라는 한인타운의 유명 클럽 뒷문에 멈춰 섰다.
“손님, 죄송하지만 클럽 정문은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곳은 직원용입니다.”
뒷문에는 경비원 차림의 떡대가 서 있었는데, 얼핏 마나가 느껴지는 게 이제 막 초인의 영역에 발을 걸친 반 초인이 틀림없었다.
반 초인을 겨우 문지기로 쓰다니, 놀랄 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딜라는 물론이고 그녀의 뒤를 쫓아온 세 명의 남녀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곳이 목적지가 틀림없다는 확신만 주었을 뿐.
“손님? 정문은 반대편에 있다고 분명 말씀 드렸…”
“좀 닥쳐.”
딜라는 문지기의 말을 끊은 뒤, 슬그머니 이곳으로 다가오는 금색 눈동자를 확인했다. 씨발, 씨발.
“아니, 이 쌍년이 뭐라는”
그리고 눈치 없는 문지기 놈이 그녀에게 다가온 순간.
문지기의 시야가 위아래로 뒤집혔다.
염동력에 다리를 붙잡혀 거꾸로 매달린 것이었지만, 문지기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마 가슴팍에 달린 호출기 버튼을 누를 정신은 있었지만, 염동력이 한발 앞서 그의 호출기를 빼앗아 버렸다.
“….”
문지기가 멍하니 멀어지는 호출기를 보건 말건, 여명은 호출기를 딜라에게 내밀었다.
“대화부터 하자고 전해.”
“누, 누구한테요?”
“최소한 관리자급으로. 그 이하는 어차피 죽일 가치도 없으니까.”
시발 그게 무슨 대화냐. 딜라는 치미는 욕을 참은 뒤, 쭈뼛쭈뼛 호출기를 받았다.
“아, 아, 여기는 딜라 카탁포이어. 카탁포이어 가문의 5대 독녀이며, 왕의 왼손 새끼손가락이다.”
그녀가 평소에는 오글거려서 쓰지 않는 칭호까지 써가며 정체를 밝히자, 호출기 너머에서 살짝 당황 섞인 말이 돌아왔다.
딜라 카탁포이어? CIA에게 저격당한 거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빠져나온 겁니까?
“그, 그게…”
사실 CIA보다 더 무서운 놈들한테 잡혔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딜라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타, 탈출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지금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오른 엄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
구멍이 송송 뚫린 말이었고, 상대 또한 그걸 눈치챈 듯 차갑게 대답했다.
꼬리를 붙이고 이곳까지 오다니. 딜라, 그렇게나 살고 싶었나? 가문의 조상들을 보기에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
이런 젠장, 딜라는 호출기를 붙잡고 소리쳤다.
“야, 너 뭐 하는 새끼야? 감히 추측만으로 우리 가문을 모욕해? 아니면 어쩔 건데? 응? 어쩔 거냐고! 니가 책임질 거야?”
…
“염병할 새끼, 책임지라니까 아가리 꾹 닫는 거 봐. 너 같은 놈 선에서 처리할 일 아니니까, 닥치고 당장 엄지손가락 호출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으나,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젠장. 딜라는 침을 삼키며 여명을 돌아봤다.
그는 조용히 클럽 뒷문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는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어지는 침묵.
하늘에 떠있는 달의 각도가 변할 동안 답이 돌아오지 않자, 녀석이 허공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검으로 문을 자르려고? 아니, 녀석은 상상 이상이었다. 다짜고짜 검을 붉게 물들이더니, 불씨를 흩날리는 것 아닌가.
이런 미친, 이 건물을 통째로 폭파해버릴 생각이냐?
딜라는 후다닥 그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여기서 뭘 더 기다려? 도망갈 시간 벌어주게?”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녀는 다급했다. 이대로 유용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폐기당할 게 분명했으므로.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반드시 열릴 겁니다!”
딜라는 사력을 다해 빌었고, 여명은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검을 회수했다. 물론, 검에서는 여전히 불씨가 흩날리고 있었지만…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응답한다고 했던가? 딜라가 번 그 찰나의 시간 뒤, 뒷문이 활짝 열렸다.
그곳에서 천천히 바깥으로 나온 건 기다란 뿔을 가진 반마족 남성이었다.
불사의 왕이 총애하는 엄지 손가락.
그는 보랏빛 눈동자를 굴려 딜라와 여명, 그리고 골목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세티와 성녀를 향해 말했다.
“오랜만에 손님이군요.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