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21)
을 위한 세계는 없다-221화(221/817)
〈 221화 〉 All That Jazz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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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알려진 초인이 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신의 축복, 영약 섭취, 그리고 타고난 혈통.
지금은 상식으로 여겨지는 사실들이지만, 그 상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정보라고 해봐야, 미국엘프 전쟁의 원인이 엘프 숲의 영약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으므로.
하지만 광기로 가득했던 냉전 시대, 강대국들이 저지른 일이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체제 경쟁이라는 핑계로 정부가 자국민에게 인체실험을 자행하던 시대였다. 차원문 너머의 원숭이들에게 나눠줄 인권은… 없었다.
그렇기에 강대국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초인 생산 기술을 빼앗고자 했다.
경제를 침탈하고, 무덤과 도서관을 약탈하고, 현지인들을 이간질하고, 땅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물론,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은 전통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과 전쟁.
프랑스가 전쟁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지켜본 스탈린은 그들을 비웃으며 훨씬 ‘세련된’ 방법을 사용했다.
공산주의를 퍼트려 현지 스파이를 모으고, 차원문 너머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이용해 혼란을 일으킨 뒤… 사람을 납치했다.
소위 귀족이라 불리는, 마나에 민감한 혈통들.
소련의 납치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시골의 영주, 멸망한 왕국의 왕족, 심지어 제국 대공의 직계까지.
자발적으로 공산당에 투신한 극소수의 빨갱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인민의 초인을 ‘생산’하기 위한 실험의 재료가 되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미국이 수많은 정보원들을 시베리아로 보냈지만… 돌아온 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나마 돌아온 요원들도 많은 것을 알아내진 못했다. 기껏해야 초인 양산을 위해 비인도적인 시도가 있었고, 그 결과 몇몇 ‘인공적인 혈통’들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뿐.
그리고 그런 혈통의 특징이 바로…
***
순백의 채모와 특이한 눈이지.
데스나이트의 설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여명은 조용히 거실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 끝에는 세티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성녀가 보였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눈을 가린 안대.
인공 혈통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녀는 소련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TV 속 뉴스에 빠져 있었다.
[LA 경찰은 이번 폭발을 단순한 가스 누출 사고로 발표했습니다만, 테러라고 보는 시각 또한…]주방까지 들려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
저 정도 볼륨이라면 주방에서 주절거리는 데스나이트의 목소리를 묻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다행이네.’
소련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혈통이니 뭐니… 전부 성녀가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괜히 마음만 심란해질 뿐.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가스 불을 줄이고, 행주를 내려놓으며 데스나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를 소련 편으로 착각한 이유는 알겠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주가시빌리 유파와 소련의 인공 혈통을 만나고, 또…
“…스탈린의 솔방울이란 게 정확히 뭡니까?”
더럽게 촌스러운 작명이네 라는 여명의 생각을 읽은 걸까, 데스나이트가 히쭉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한 코드명은 7MZh3, 소련에서 제작한 마도구다만… 사실 솔방울보단 불알이라고 불리는 편이지. 스탈린의 불알.
“….”
그동안 써왔던 수류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도구였던 건가?
하긴, 그 정도의 물건이 아니라면 그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을 날려버리진 못했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이 질문을 이어 나가려는데, 데스나이트가 한발 앞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아봤냐고? 너도 다음에 보면 한눈에 알아보게 될걸. 폭발로 불기둥을 만들고, 마법적 열 폭풍을 일으키는 물건은 세상에 그거뿐이니까.
“….”
그래도 소련에서도 극소수만 사용할 수 있던 무기가 미국 도심 한가운데에서 터지다니. 스탈린 새끼는 죽어서도 문제만 일으키는군.
쯧쯧 그는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더니, 여명의 반응을 살폈다.
‘뭐지?’
여명이 이상함을 느끼고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자, 그는 대뜸 몸을 기울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네가 소련과 상관없다는 건 이걸로 충분히 알겠다.
“…?”
내가 만난 모든 주가시빌리는 스탈린이 모욕당하면 그대로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렸거든. 그에 비해 너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명은 스탈린의 불알이니, 새끼니 하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그 짧은 사이에 나를 시험했다고?’
어쩐지 설명을 길게 하더라니. 여명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물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냥 스탈린에게 쌍욕 한 번이면 되는 일을.”
오, 그래? 그럼 한 번 해봐.
“….”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그를 노려봤으나, 데스나이트의 창백한 얼굴 가득 고인 기대감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다시 없을 개새끼이자, 도살자고, 인간 쓰레깁니다. 됐습니까?”
휘유 데스나이트는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내 살아생전 스탈린을 욕하는 주가시빌리를 보게 될 줄이야.
“….”
좋은 구경 했군. 너랑 같이 다니면 지루할 일은 없겠어.
여명은 데스나이트 중 이 사람이 가장 이상한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상념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를 확인한 뒤, 데스나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다음에 말하지. 다른 징그러운 늙은이들처럼 가족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예, 나중에 뵙겠습니다.”
여명이 손을 쥐는 것을 끝으로, 데스나이트는 인벤토리 속으로 사라졌다.
***
끼이익
낡은 경칩이 비명을 지르며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옅은 빛이 어두침침한 지하실을 침범하자, 조용히 짐을 싸고 있던 애꾸눈의 대머리가 고개를 돌렸다.
“점심 좀 많이 차렸습니다. 같이 드실래요?”
그렇게 말하며 지하실로 들어온 건 쟁반을 든 여명이었다.
쟁반 위에는 대충 푼 밥과 된장찌개, 그리고 조금 탄 삼겹살이 두 그릇씩 놓여있었는데, 그걸 본 애꾸눈은 하나 남은 눈동자를 들썩였다.
“2인분?”
그는 잠시 여명과 음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료들하고 같이 먹지 않고. 왜?”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 대답을 들은 애꾸눈, 해리 마이어는 별말 없이 짐을 치우고 낡은 탁자 위를 비웠다.
같은 남자로서, 남자는 가끔 여자들이 없는 곳에서 머리를 식혀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여명이 식탁을 차리고 각자 의자에 앉은 뒤, 해리가 물었다.
“전부 직접 만든 건가?”
“예, 뭐, 음식을 차릴 수 있는 게 저뿐이라.”
수인까지 합쳐서 여자가 다섯인데, 음식은 남자 혼자서? 해리는 젓가락 대신 포크를 들면서 한마디 했다.
“…고생이 많군.”
쓴웃음 한 번, 음식 한 입.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여명은 해리 배려 속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소련, 운명, 푸른 쥐, 아카데미, 그리고 한국과 자신에 대한 보고서.
입으로 들어가는 게 찌개인지, 삼겹살인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대로 아카데미로 돌아가 복수를 준비해야 하는데…
어젯밤에 본 폭발을 생각하니 쉽사리 아카데미로 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푸른 쥐와 소련의 잔재.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핵미사일을 막아서 발생한 운명의 뒤틀림이 아닐까
그런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머리를 가득 채운 까닭이었다.
“후…”
짙은 한숨과 함께 고민이 길어지려는 그때, 해리가 지나가듯 말했다.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라.”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여명이 고개를 들자, 해리가 덧붙였다.
“전쟁터에 있던 시절, 단장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해주시던 말이다.”
“….”
“내가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남녀 문제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조언이라고 생각하는데.”
뭔가 오해가 섞인 조언.
하지만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라‘는 말은 그런 오해를 뛰어넘어, 지금의 여명에게 충분한 조언으로 다가왔다.
짧은 고민, 그보다 짧은 깨달음.
‘초인 올림피아까지 시간이 남았고, 아카데미에도 여유가 있으니… 이곳에 벌어진 일부터 확인하고 가자.’
기나긴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담백한 결론.
여명은 살짝 가벼워진 마음으로 밥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해리 또한 식사를 끝냈을 때쯤, 그가 빈 그릇을 정리하며 물었다.
“해리, 어제 푸른 쥐에게 줬다는 거짓 정보. 저도 볼 수 있을까요?”
해리는 왜 하필 그런 정보가 필요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부단장에게 여명을 도우라는 명령은 받았어도, 역으로 정보를 캐란 명령은 받은 적 없었으므로.
아무튼, 그는 개의치 않고 가방에서 가짜 USB를 꺼냈다.
“푸른 쥐와 소련 노인은 교단을 찾고 있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심하게.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닐 테니.”
***
“그래서, 제자는 왜 따로 먹는 것이오?”
4인분의 식사가 차려진 식탁 앞에서, 코르부스가 물었다.
저택 전체에 방어 마법을 설치하느라 이제야 1층으로 내려온 그녀로서는 제자도 없이 여자 셋이서 밥그릇을 깨작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코르부스는 가장 의심되는 부분부터 찔러봤다.
“혹, 성녀님께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이오?”
“…코르부스, 왜 내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녀가 어색한 젓가락질을 하며 말하자, 코르부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흡사 ‘그걸 몰라서 물으십니까?’라는 표정.
된장찌개를 퍼먹던 네티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다가, 문뜩 뭔가를 떠올렸다.
“아, 혹시 그건가?”
“그거? 그게 무엇이오?”
“그게 말이죠…”
네티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세티는 슬쩍 미간을 구겼다.
“뭐, 왜?”
“언니, 그거 때문 아니야?”
“…그게 뭔데?”
“아이, 그거 있잖아. 막내가 준 거.”
“…?”
“안 썼지? 아까 전화로 그 이야기할 때 형부도 옆에 있었잖아, 아마 형부도 안 쓴 거 기억하고, 설마 생겼나? 싶어서 입맛이 싹 달아난 거 아닐까?”
뭔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한 코르부스가 부리를 딱 부딪치는 가운데, 세티와 성녀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아, 이거 한 대 맞겠구나. 그렇게 확신한 네티는 기왕 맞는 거, 한 번 더 선을 넘기로 했다.
“나가서 테스트기 사 올까? 혹시 모르니까 그것도 한 박스…”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쟁반과 남자의 그림자였다.
“테스트기? 무슨 테스트기?”
네티의 목덜미에서 들려오는 여명의 목소리. 그녀는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요. 무슨 테스트기를… 으음, 형부, 어디서부터 들으셨어요?”
헛소리로 상황을 넘기려던 네티는 여명의 표정을 보고 말을 돌렸다. 여명은 쟁반을 싱크대로 옮기며 대답했다.
“그거 운운할 때부터?”
거의 처음부터잖아. 망연자실해진 네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가운데, 뒤이은 여명의 한마디가 그녀를 격추해 버렸다.
“네티, 의외로 그런 이야기 좋아했구나…”
***
US 뱅크 타워.
로스앤젤레스의 드높은 마천루 중 가장 유명한 빌딩을 꼽는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
은행이 빌딩을 차지한, 가장 자본주의적인 그 빌딩의 옥상에서, 한 공산주의자가 LA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두들기고 있었음에도, 그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도시 곳곳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목표물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건 오직 하나, 자본주의에 오염된 역겨운 도시뿐.
드높은 소비에트 궁전이 세워진 모스크바와 비교하면 이 얼마나 한심한 광경이란 말인가? 시베리아의 비극이 없었다면, 이딴 도시를 싹 쓸어버렸을 텐데.
지이잉.
노인이 한탄하던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의 연락처를 아는 건 한 사람뿐이었기에, 노인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월라드. 늦었군. 상황은?”
죄송합니다. 여기는 저희 관할이 아니라서…
“핑계는 됐다.”
거짓 정보를 넘긴 해리는 이미 가게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다른 정보상을 뒤져서 교단과 관련된 정보를 취합하긴 했는데… 정보의 진위는 직접 발품을 팔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인은 쯧, 혀를 찼다. 소련의 몰락이 피부로 느껴진 탓이었다.
KGB가 아직 멀쩡했던 시절이라면, 그깟 교단의 위치쯤은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찾아냈을 터인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KGB는 껍질만 남았고, 그 껍질조차 시베리아의 실험 쥐들의 가죽으로 만든 것을.
차량을 준비할까요?
휴대폰 너머의 쥐새끼가 물었다.
실력뿐만이 아니라 눈치도 없는 질문이었기에, 노인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 아깝다. 그냥 의심되는 장소를 전부 폭파해.”
예?
“전부 날려버려라. 교단이면 알아서 우리를 찾아올 것이고, 아니라면 경찰이 찾아줄 테니.”
하, 하지만 여긴 미국입니다. 어제 폭발도 간신히 무마했습니다. 여기서 인명피해라도 나면…!
겁에 질린 월라드의 목소리. 노인은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그래서? 상대는 미국인이다. 몇 놈 죽이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
…FBI에서 메이커나 브라우닝을 보낼 겁니다.
미국에서 흔히 ‘빅 쓰리’라 불리는 초인들. 그 이름이 나왔음에도, 노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오라고 해. 녀석들이 찾기 전에 타락석을 챙겨 차원문을 넘으면 그만이다.”
….
짧은 침묵. 하지만 노인은 침묵이 길어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모리네.”
푸른 쥐 사장의 이름이 나오자마자,입을 다물고 있던 월라드가 대답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휴대폰 너머로 느껴지는 숨죽인 한숨과 진한 분노.
노인은 쯧쯧 혀를 차며 휴대폰을 덮었다. 그리고 빌딩 옥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성녀를 생각했다.
그 튀기 년이 있었다면, 일이 조금 더 쉬워졌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운 날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