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25)
을 위한 세계는 없다-225화(225/817)
〈 225화 〉 All That Jazz (7)
* * *
***
일이 꼬였군. 블라디미르는 방아쇠를 당기며 생각했다.
하지만 날아간 마탄이 정확히 여명의 다리를 꿰뚫었음에도, 그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마탄을 맞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무시무시한 육체와 무한한 재생력.
그건 극한에 다다른 주가시빌리의 특징이었다. 살기를 마나로 바꿔 영원히 자신을 불사르는 공산 영웅의 표본
쩌엉!!!
다음 순간, 검과 기관단총이 충돌했다. 검에 담긴 마나의 양이 끔찍할 정도였다. 피 대신 영약이 흐르기라도 하는 건가?
그는 파르르 떨리는 총을 휘둘러 검을 떨쳐내고, 촉수를 이용해 솔방울을 집어 던졌다.
아직 마나가 충분히 들어가지 않은 솔방울은 폭발력이 부족했으나, 그만큼 빠르게 폭발했다.
콰앙! 코앞에서 솔방울 속 화염 폭풍이 터져 나오며 여명과 블라디미르 사이의 시선을 가렸다.
거리를 벌릴 생각으로 터트린 솔방울이었으나, 여명은 오히려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인공 성물로 얻은 극한의 감각들이 여명을 놓쳤다. 그에게 보인 건 화염 속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와 검기의 번쩍임 뿐.
다음 순간, 블라디미르의 왼쪽 어깨 감각이 사라졌다.
그가 뒤늦게 반응했지만, 그의 어깨를 베고 내려간 검은 이미 각도를 돌려 하체를 노리고 있었다.
무릎과 허벅지에서 끔찍한 고통이 치솟기 무섭게, 그는 털썩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아니, 이, 무슨…”
순식간에 사지가 썰린 블라디미르가 중얼거렸고, 여명은 개의치 않는 듯 검을 늘어트렸다.
겨자가스를 닮은 연노란 검신을 따라, 검붉은 공산주의자의 피가 흘러내렸다.
“주가시빌리와 그 검술…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글쎄, 그쪽이 상대 실력을 제대로 못 알아본 거겠지.”
블라디미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그의 웃음소리를 따라 상처에서 피가 질질 흘러내렸다.
“…하지만 주가시빌리라니, 어떻게?”
“저승에 가서 스탈린에게 물어봐.”
여명은 그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들었다. 블라디미르는 난감한 듯, 수염을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어렵겠군. 서기장 각하께서는 아직 살아계시거든.”
개소리를. 여명이 그대로 목을 자르려는 순간. 블라디미르의 몸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촤아악!!
그건 상체에 가득한 인공 성물 아래에서 무수한 촉수가 튀어나오는 소리였다. 검은 촉수는 그대로 여명을 붙잡으려는 듯, 그물처럼 넓게 퍼졌다.
여명이 뒤로 굴러 아슬아슬하게 촉수를 피한 자리로, 블라디미르가 일어섰다.
잘린 두 다리 대신 상처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문어발처럼 그의 몸을 받치고 있었고, 잘린 왼팔에서는 새 팔이 솟아났다. 혐오스러운 손톱이 가득 달린 게, 사람의 팔이라기보단 괴수의 팔처럼 보였다.
“그쪽도 힘을 숨긴 건 똑같은 것 같은데.”
여명이 이죽거리자, 블라디미르의 눈동자와 숨결에서 살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든 살기가 주가시빌리의 연료가 되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질문을 내가 한다. 천여명 동무, 주가시빌리는 어디서 배웠나? 상잔 끝에 살아남은 유파의 계승자는 겨우 셋뿐이거늘.]조금 전 목소리와 달리 깊고 뒤틀린 목소리였다. 마치, 역겨운 무언가가 억지로 인간의 성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보다 더한 괴물들의 목소리를 들어온 여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검을 들었다.
“다른 주가시빌리와 싸우며 어깨 너머로 훔쳐 배웠지.”
[….]“그리 어렵진 않았어.”
[부모님이 어른과 대화할 때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던가? 예의를 모르는 동무로군.]블라디미르는 비대한 왼손을 휘둘렀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달려드는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여명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늘어트린 검을 위로 휘둘렀다. 까앙! 손톱과 검이 충돌하며 귀를 찌르는 금속음이 울렸다.
충돌 사이로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고, 발아래에서 채찍처럼 솟구치는 촉수들을 쳐냈다.
풍압이 일어나며 나뭇조각과 유리 파편을 밀어내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여명과 블라디미르 사이 시야가 혼탁해졌지만, 두 괴물 모두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청각, 촉각, 심지어 마나에 의지해 계속 공격을 이어 나갔다.
번쩍이는 검광, 손톱과 검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불씨, 끝없이 잘려 나가는 촉수 다발.
격돌이 격렬해지는 만큼, 블라디미르의 상체에 박힌 인공 성물들이 붉게 달아오르며 마나를 뿜어냈다.
[모리네가 왜 그렇게 딸자식을 아끼나 했더니, 아주 제대로 값을 받아냈군. 성녀의 가랑이가 그렇게 달콤하던가?]주둥이를 나불거릴 때가 아니었음에도, 블라디미르는 도발을 걸어왔다.
[내가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주지. 네가 사랑하는 성녀는 사실 우리 실험용 쥐새끼가 멋대로 만들어낸 잡종이다.]“….”
[머리카락은 북방 대공의 혈통에서, 특별한 눈동자는 남부의 전사 혈통의 특징이지. 다섯 신들도 참 악랄하지 않나? 우리 소련의 재산을 강탈한 것도 모자라, 잡종 쥐새끼를 성녀랍시고 앉혀 놓다니!]그러나 그 도발은 여명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성녀가 잡종이건 말건,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나불거리느라 촉수의 정교함이 떨어져 다른 무술을 준비할 틈을 벌 수 있었다.
짧은 여유가 생긴 직후, 검 위로 붉은 살기가 파도쳤다.
파양결에 진의를 뒤섞은 붉은 검기.
그 검기는 촉수의 숲을 뚫고 블라디미르의 상체, 정확히는 쇳조각 중 하나를 관통했다.
까그극! 성물의 마나가 반발하며 저항했으나, 넘치는 살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감히! 조국의 상징을!]반으로 갈라진 상징을 본 블라디미르가 기겁하며 촉수를 휘둘렀지만, 하지만 이미 거리를 좁힌 여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른 상징들을 향해 차례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드워프들의 증오로 담금질 되었기 때문일까? 낫과 망치() 모양을 한 인공 성물들은 무력하게 토막 나버렸다.
[이익! 꺼져라!]블라디미르가 코앞에서 솔방울을 터트려 간신히 여명과 거리를 벌렸지만, 이미 그의 몸에 남은 성물은 하나뿐이었다.
심장 위에서 맥동하는 금빛 낫과 망치.
[어이가 없군… 아무리 주가시빌리를 익혔다지만, 고작 서른도 되지 않는 애송이에게…]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블라디미르는 은밀히 촉수를 뻗어 떨어진 기관단총을 주워들었다.
철컥, 총구가 여명을 노린 순간.
여명의 검에서 한발 앞서 불씨가 터져 나왔다.
위력을 포기하고 속도를 우선시하는 솔방울을 보고 응용한 화산쇄설.
콰앙!
폭발에 휘말려 균형을 잃은 블라디미르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그렇게 생겨난 짧은 빈틈 사이로, 여명이 뛰어올랐다.
떨어지는 검기가 블라디미르의 몸을, 남아있는 오른팔을, 그리고 다리를 대신한 촉수 다발까지 전부 난도질 했다.
마지막으로, 여명은 쓰러지는 블라디미르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쿵!
그렇게 그의 몸이 중력에 이끌려 땅에 처박히자, 여명의 발은 자연스레 블라디미르의 얼굴을 짓밟았다.
피범벅이 된 블라디미르는 꿈틀, 피를 토하며 말했다.
[자비가… 없군… 서기장, 각하처럼…]여명은 허리를 굽혀 녀석의 심장에서 마지막 성물을 뽑아내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정말로 그의 계승자인가 보지.”
블라디미르가 피식 웃으며 무어라 대답했지만, 성물을 잃고 죽어가는 그의 폐와 혓바닥은 오직 한 문장만 내뱉었다.
[……그래, 그럴지도.]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깨진 식당 유리 너머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여명은 무거운 눈으로 죽은 공산주의자를 내려다봤다.
***
귀를 찌르는 사이렌 소리가 식당 앞에서 멈춘 그때.
블라디미르의 시체와 장비들을 전부 챙긴 여명은 식당 주방 뒷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가장 먼저 세티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는데, 그녀는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났다.
식당 2층 창문.
분명 벤치에 앉아있었던 그녀는, 창문에서 훌쩍 뛰어올라 여명의 앞에 착지했다.
“…왜 거기서 나와?”
여명이 코피를 닦아내며 묻자, 세티는 작은 USB를 흔들었다.
“식당 CCTV. 이것도 챙겨가야지.”
“…아, 맞다.”
블라디미르의 시체와 무기를 챙겨 올 생각만 했지, 거기까지 생각 못 한 여명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세티가 그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우선 튀자.”
튀다니, 우리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아니, 범죄자 맞나?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세티가 비각술을 펼쳐 옆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명이 살짝 당황하는 사이, 세티는 건물들 지붕을 훌쩍훌쩍 뛰어넘어 처음 도착했던 마트, 정확히는 주차장 뒤편에 착지했다.
“어디 보자,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이대로 걸어 다니면 경찰이 먼저 쫓아오겠다.”
그녀의 말마따나, 격전을 치른 여명의 옷은 너덜너덜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데다가, 피가 가득 묻어 있는 게, 마치 좀비 영화 속 좀비가 떠오르는 꼬락서니였다.
“환상으로 덮으면…”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말끝을 흐렸다. LA에서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볼 KGB 요원이 과연 한 명뿐일까?
물론 투명 망토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세티는 완강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마트 가서 옷 사 올 테니까.”
“…그런 거라면 네티에게 시키는 게 낫지 않아?”
“네티는 네 옷 사이즈 모르는데? 아, 혹시 성녀는 알고 있나?”
“….”
“농담이야. 사실은, 연락할 핸드폰이 없어서 그래.”
세티는 그렇게 말하며 여명의 주머니를 향해 눈짓했다.
여명이 주머니를 뒤져보자, 해리가 나눠준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값싼 보급용 휴대폰은 폭발에 휘말린 듯 아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역시 내가 가서 옷 사 와야겠지?”
“….”
“가는 김에 휴대폰도 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혹시라도 사람들이 오면 투명 망토 덮고.”
“…내가 무슨 길잃은 꼬마냐.”
세티는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쿡 찌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마트 방향으로 뛰어갔다.
여명은 그렇게 멀어지는 세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너덜너덜한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리고 푸른 쥐와 성녀,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에 관한 생각을 차례대로 떠올리길 잠시.
주차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하필 어떤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짧은 백금발의 머리카락 아래, 여행객 복장을 한 그는 여명이 봐왔던 모든 남자, 아니, 모든 사람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긴 자였다.
시우 같은 연예인은 물론이고, 전윤성이나 성녀와 맞먹을 정도 인상 깊은 외모.
나이는 대충 어림잡아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청년과 중년 사이 어딘가로 보였으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성물이었다. 흰색 태양이 새겨진, 백색 신 울쓰바티의 성물.
왜 하필, 이 순간에 성물을 든 남자와 눈을 마주친 걸까.
여명이 묘한 불길함을 느끼는 사이, 그는 여명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명의 바로 앞에 도달한 남자는 성물과 여명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설교하는 사제가 떠오를 정도로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런 목소리와 달리, 이어지는 그의 질문은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빨갱이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