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26)
을 위한 세계는 없다-226화(226/817)
〈 226화 〉 All That Jazz (8)
* * *
***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여명이 블라디미르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가던 시점.
월라드를 버리고 거리로 나온 성녀는 휴대폰을 든 네티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연락 안 돼?”
“네, 신호는 가는데 안 받아요.”
성녀는 입술을 씹었다. 머리는 별문제 없을 거라 말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가슴이 먹먹했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랑 형부 둘이 같이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네티도 묘한 불길함을 느끼는 듯 연신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러댔다.
하지만 연락은 계속 닿지 않았고…성녀는 성녀다운 선택을 했다.
심호흡 두 번, 기도 한 번.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미래를 마주했다.
여명, 그리고 여명과 함께 있는 세티의 미래는 정확히 볼 수 없었기에 쓰지 않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라면 달랐다.
세티나 여명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미래의 자신은 분명 정상이 아닐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성녀의 시야로 미래의 한순간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위치는 반짝이는 빌딩들이 올려다보이는 작은 다락방.
어딘가 익숙한 마천루를 보니 LA는 아닌 것 같았는데, 문제는 다락방에 놓인 작은 침대였다.
한 사람이 눕기도 어려워 보이는 좁은 침대 위에는, 성녀 본인과 흐릿한 누군가가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녀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흐릿한 누군가를 자세히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는 건 흐릿한 그림자뿐.
‘…역시 여명인가?’
당연한 의문이었다. 자신이 여명이 아닌 남자와 침대 위에 있는 미래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명이 있는 미래가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 또한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이 공간을 두리번거리며 힌트를 찾았다.
잠시 후, 그녀의 시야로 침대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가 들어왔다.
교차하는 검과 도끼 위, 피 흘리는 하트가 새겨진 펜던트.
익숙한 레독스의 성물을 본 성녀는 숨을 죽였다.
그건 만주에서 여명에게 내어준 바로 그 성물이었으니까.
그렇게 의심이 확신이 된 순간, 그녀는 마름집 딸 점순이마냥 발을 동동 구르고,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아예 입을 막고 환호했다.
흐히흐하흐히히 성녀는 입술 사이에서 멋대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이럴 틈이 없었다. 그녀가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르던 바로 그때.
주륵.
예지가 끊어졌다. 코피가 터지며 집중력이 흩어진 까닭이었다.
“언니?!”
갑작스레 피를 본 네티가 놀라서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들었으나, 성녀는 자신이 본 미래를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 도시는 어디였지? LA는 아니었는데, 야경이 묘하게 익숙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락방이었다. 대체 어디지?
‘…한번 더 봐야겠다.’
사심은 없었다. 그래, 이건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일이다.
사심은 몰래몰래 기술(?)을 늘려가는 세티를 두고 하는 말이지, 그녀의 의도는 순수했다.
“네티? 잠깐만 호위 좀 서줘.”
“여기서요?”
“응, 여기서.”
성녀는 네티에게 휴지를 받아 코를 막은 뒤, 다시 한번 미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에 보인 건 기대하던 다락방이 아니라, 익숙한 LA의 풍경이었다.
그것도 경찰차와 소방차, 심지어 특수 기동대의 장갑차가 도로를 메운 살벌한 풍경.
‘이건 또 뭔…’
성녀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실망과 예지를 살펴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기에, 그녀는 조심스레 예지 속 순간을 거닐었다.
유리창이 깨진 흉물스러운 상점들과 아스팔트가 드러난 도로, 그리고 무작정 도망치는 시민들.
테러인가? 아니면 초인끼리 전투?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종말 교단과 KGB의 망령들이 돌아다니는 도시에서는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네크로맨서들이 멀쩡히 클럽을 운영하고 있지 않았던가?
성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예지 속 거리를 가로지르길 잠시.
그녀는 문뜩 하늘 위를 바라봤다가,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흐릿한 누군가와 익숙한 백금발의 남자, 그리고 정체불명의 수인 한 마리가 빌딩 벽면에 매달려 도시를 박살 내는 모습을 본 까닭이었다.
‘…아, 이런.’
성녀는 즉시 예지에서 빠져나왔다. 순간의 반짝임을 끝으로 현실에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네티를 불렀다.
“…네티.”
“끝나셨어요?”
“지도 꺼내. 여명부터 찾자. 지금 당장.”
네티는 갑자기 돌변한 성녀를 보며 눈을 깜빡이면서도 순순히 지도를 꺼냈다.
하지만 성녀는 그 지도를 받는 대신, 길가에 세워진 오토바이로 다가갔다.
그녀는 신체 강화 축복을 이용해 대뜸 자물쇠를 뜯어내더니, 오토바이 전체에 축복을 걸어 강제로 시동을 걸었다.
“성녀님…?”
그 정중한(?) 강도질 과정을 본 네티가 기겁했으나, 성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토바이가 있던 자리에 전화번호와 [연락 주시면배상하겠습니다] 라는 글을 끄적였다.
“타.”
그렇게 바이크에 올라탄 성녀는 네티에게 턱짓했다.
“…네, 넵.”
네티는 순순히 오토바이 뒷좌석에 탔다. 성녀가 직접 끄는 오토바이라니, 제미니 시티에서 타지 못한 아쉬움을 여기서 푸는 구나.
그녀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도 있었으나, 오토바이 출발 5초만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어? 자, 잠깐만, 성녀님?!”
브레이크고 뭐고, 성녀는 거의 바퀴가 떠오를 정도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으니까.
부아아앙! 네티의 비명 섞인 배기음과 동시에, 두 소녀를 태운 오토바이가 LA 교통법을 유린했다.
***
‘빨갱이니?’
그 황당한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휘이잉, 두 사람 사이로 당황이 실린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이 모두 흘러간 뒤, 여명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남자는 성물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공산주의자?”
“….”
“조금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대답해주겠니? 나한테는 중요한 이야기라서.”
조금? 여명은 황당함을 감추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매카시도 아니고, 뭐 하는 사람이지?
손에 들린 성물을 보아하니 어디 정부 요원은 아닌 듯싶었다. 사제인가?
어느 쪽이건 그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 분명했기에,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닙니다. 전 한국인이라서요.”
남자는 이번에도 성물을 살폈다. 뭔가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던 건지, 남자는 조금 낭패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전부 진실…? 이상하네.”
그사이, 주차장 너머 도로에는 경찰차와 소방차도 모자라 특수기동대의 장갑차까지 사이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전부 전투가 벌어졌던 러시아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듯했는데, 개중에는 멈춰서 도로를 통제하는 경찰도 있었다.
괜히 경찰 눈에 띄어 오해를 사기 싫었던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뭔가를 고민하는 미남자에게 말했다.
“더 물어보실 거 있으십니까?”
더 이상 질문할 말이 없는 걸까, 남자는 입을 다물고 조금 가늘어진 눈동자로 여명의 위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곧이어 경찰차가 몰려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여명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 하는 놈이야?’
이상한 사람과 만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저 남자는 뭔가 묘했다. 얼굴이 애매하게 익숙하다는 점에서 더욱더.
뭐, 어차피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되리라. 그게 악연이 될지, 인연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겉옷을 챙겨 도로에서 조금 더 떨어진 주차장 구석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깔고 앉아, 세티를 기다리길 잠시.
그는 마트 입구를 바라보며 조금 전 전투에서 얻은 것들을 정리했다.
화산쇄설의 응용법, 마나메탈로 코팅된 기관단총과 무슨 마법이 걸린 건지 알 수 없는 마탄 87발, 블라디미르의 시체, 그리고…
소련의 인공 성물.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뒷정리를 하는 김에 챙겨온 물건이었다.
값어치나 쓸모를 따져 보려면 전문적인 업자에게 맡겨야 할 텐데, 이런 분야에서 믿을만한 인맥이 없다는 게 걸렸다.
시카고의 드워프들에게 맡길까? 그것도 아니면 오랜만에 인천으로 가서 장만 어르신께 보여드려야 할까.
기왕 처리할 사람을 찾는 거, 카할 마그두의 심장을 영약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드워프들에게 가는 게 나을지도…
그때, 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봐.”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던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여명은 그 익숙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투명 망토.’
저거 엄청 귀한 물건 아니었나? 왜 이렇게 자주 보는 거 같지?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성물을 든 손이 빼꼼 허공에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역시 놀라지 않는군. 투명 망토에 익숙한가?”
그렇게 말한 남자는 털털한 태도로 망토를 벗더니, 망토를 그대로 바닥에 깔았다.
아니 저 비싼 걸 저따위로?
여명이 당황하건 말건, 남자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꼬라지가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여기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초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더군. 그래서 경찰들이 저렇게 쫙 깔린 거고.”
“…그래요? 그거 큰일이네요.”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성물을 까닥거렸다.
성물에는 정교한 태양 장식이 새겨져 있었는데, 태양의 가장 큰 불길이 나침반의 바늘처럼 여명을 가리키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이건 이단의 마나를 쫓는 축복이 걸린 성물이다. 그리고 이 성물은 아까 전부터 계속 너를 가리키고 있고.”
“….”
“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
여명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남자는 즉시 그의 말을 끊었다.
“모리네, 알고 있지?”
“…푸른 쥐의 사장.”
그러자 성물의 태양에서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진실.”
저 성물은 거짓과 진실도 판별할 수 있는 건가? 그래서 아까 별말 없이 떠난 거고?
여명이 대충 사정을 짐작하는 사이, 남자가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갔다.
“모리네 납치 사건과 관련 있나?”
“…아니요.”
이번에는 성물에서 빛이 나오지 않았다. 거짓.
남자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는 가운데, 여명은 성물이 거짓이라고 판단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KGB가 모리네를 실각시키고 갑자기 전면으로 나서게 된 이유, 동 궁정백의 몰락은 바로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범위가 너무 넓지 않나?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남자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추가 질문, 넌 소련과 관계된 사람인가?”
“어… 조금 관계가 있긴 합니다만… 저기, 전 정말로 지금 하시는 일과 상관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 동료가 전부 설명할 수 있어요.”
“…동료?”
다행히 대화로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명은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성녀님이요. 지금 이 도시에 있는데, 제가 번호를 알고 있습니다. 휴대폰을 빌려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때, 남자가 조금 전보다도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내 딸은 실종된 지 한 달이 넘었다.”
“…?”
“이 도시에 있다고? 그쪽이 내 딸의 행방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딸? 딸이라고요?”
“그래, 성녀님께선 내 딸이다.”
여명은 눈을 크게 떴다. 사랑 때문에 성검을 포기한 세기의 스캔들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어서?
물론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밝게 타오르는 마나가 결정적이었다.
생전 성기사였던 데스나이트가 사용한, 바로 그 무술.
데스나이트의 뒤틀린 마나로도 여명의 내장을 으깨버렸는데, 진짜 성기사가 신성력으로 펼치는 위력은 얼마나 강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잠…”
일이 더럽게 꼬인다고 생각하면서, 여명은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어떻게 적당히 장법을 쳐낼 수 있을지 고민하던 바로 그 순간.
부아아앙!!
주차장 저편에서 바이크의 배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들려오는 스탑이라고 외치는 경찰의 고함, 익숙한 소녀의 비명, 마지막으로 방정맞은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거봐! 안 늦었잖아!”
그건 성녀의 목소리였다.
“아, 다행이…”
여명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데 어째서인지, 성녀는 바이크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
그렇게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이 지난 후.
성녀는 바이크의 앞바퀴를 살짝 들더니, 뒤에 탄 네티와 함께 갑자기 바이크에서 뛰어내렸다.
운전사를 잃은 오토바이는 관성과 가속도의 법칙을 충실히 따라 일직선으로 내달렸고…
그대로 성녀의 아버지를 덮쳤다.
쿠웅 !
만주에서 카할 마그두에게 오토바이를 충돌시키던 때보다 더 완벽한 일격.
오토바이에 치여 주차장 담장 너머로 날아가는 성녀의 아버지는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예전에 TV에서 해주던 초인 가족이란 시트콤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거 같기도 한데…
“아니 뭔…”
여명이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사이, 쪼르르 다가온 성녀가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우선 튀자! 우리 아빠 돌아오기 전에!”
“…뭔 가출 청소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 가출 청소년 맞나?
잠시 멍청한 생각을 떠올리던 여명은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낸 뒤,성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튼, 너 미쳤냐? 부모님에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지! 아무튼, 아빠한테 걸리면 괜히 일 복잡해지니까, 우선 튀자.”
“….”
누군지 몰랐다면 모를까, 여명은 차마 성녀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작업반장님께 평생 받아온 가르침이 그러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성녀란 이름의 불효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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