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33)
을 위한 세계는 없다-233화(233/817)
〈 233화 〉 잡몹을 위한 도시는 없다. (4)
* * *
***
“경치 좋네.”
여명은 세티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산책로 저편을 보았다.
가장 먼저 따스한 호수 바람이 그의 볼을 쓸었고, 그다음으로 기울어지는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든 미시간 호의 수평선이 그의 눈을 밝혔다.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세티는 슬며시 손을 뻗어 여명과 팔짱을 꼈다.
찰칵.
눈치 좋은 네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남겼다.
실종자를 찾는 것보다는 관광객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여명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포즈를 잡으며 관광객을 ‘연기’했다.
세티와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라서? 아니면 당장 수백 명의 관광객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마나를 펼칠 수 없어서? 아니, 둘 다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선글라스를 쓴 채 쉴 새 없이 주변을 곁눈질하는 두 자매의 입에서 나왔다.
“오른쪽 위, 배낭을 맨 흑인 관광객. 초인.”
“가로수 아래, 커피를 마시는 노인, 마법사.”
“분수 앞에서 꼬마와 함께 졸고 있는 동양인, 초인. 꼬마는 마법사네요.”
네이비 피어에 쫙 깔린 정체불명의 초인들.
호텔로 향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초인들이 감각에 걸렸다.
대부분 여명 일행이 각을 잡고 감지하면 찾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초인들이었지만…머릿수가 두 자릿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여명 일행이 마나를 꽁꽁 숨기고 다녀서 망정이지, 먼저 발각됐다면 일이 어렵게 돌아갔으리라.
“…형부, 여기 관광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 자매들이 자라던 시설만큼이나 삼엄한데요.”
여명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척, 가까이 붙은 네티가 속삭였다.
“혹시, 차원문 앞이라서 그런 걸까요?”
네티는 그렇게 말하며 힐끗, 북서쪽 방향을 바라봤다. 차원문이 떠 있는 인공섬이 있는 방향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차원문 앞에 있어야지. 아니면 LA 차원문처럼 군부대가 깔려있거나…”
여명이 말끝을 흐렸지만, 네티와 세티 모두 그의 뒷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이 바보도 아니고 굳이 이런 관광지에 초인을, 그것도 일반인으로 숨겨서 쫙 깔아 놓겠는가?
“…역시, 쉽게 가기는 글렀네.”
세티가 한탄하자, 네티가 히쭉 웃으며 언니의 말을 받았다.
“언니랑 형부가 같이 가는 곳이 다 그렇지 뭐.”
“….”
여명은 세티 대신 네티의 이마에 딱밤을 먹여준 뒤,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이제 어쩔래?”
원래 계획대로라면 네이비 피어의 영화관과 쇼핑몰을 싹 돌고, 새벽에 호텔을 뒤져볼 생각이었는데…
“저는 상관없어요. 형부가 가는 곳으로 따라갈게요.”
어깨를 으쓱이는 네티와 달리, 세티는 최대한 주변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일단 전부 돌아보자. 쇼핑몰이랑 영화관에서 또 뭔가 찾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최대한 마나는 감춰. 관광객인 척하는 거 잊지 말고.”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뗐다. 세 사람은 묘하게 따라붙는 초인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쇼핑몰 안으로 향했다.
바글거리는 관광객들을 따라 쇼핑몰 1층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나 이곳에도 정체를 숨긴 초인이 있었다.
“…저기, 저 음식점 햄버거 맛있어 보인다.”
세티는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한 음식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머리를 빡빡 민 백인 남자가 햄버거를 서빙하고 있었는데, 그자 또한 속으로 마나를 숨긴 초인이었다.
‘관광객이 아니라, 아예 직원으로?’
다시 말해, 이 시설 전체 혹은 시설 관리자들이 이 초인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럽게 꼬이는 걸 느끼며, 여명은 연기에 몰입했다.
“밥 먹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 나중에, 제대로 된 레스토랑 가서 먹자. 어때?”
“뭐, 그러고 싶다면야… 대신, 오늘 저녁은 니가 사는 거다?”
“예, 예.”
네티가 두 사람의 연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건 말건, 일행은 쇼핑몰을 돌아다녔다.
뭐 대단한 쇼핑몰은 아니었고, 관광지답게 장신구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여명이 가게들 사이사이에서 숨겨진 초인을 둘이나 더 발견했다는 점.
이 정도라면 영화관은 가볼 필요도 없었다.
한 명이면 모를까, 직원으로 위장한 초인이 셋이라면 네이비 피어의 관리자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거의 확실했으니까.
“이거… 단순히 누구를 구하고 그런 수준이 아닌데요?”
다시 산책로로 나온 네티가 살짝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그럴 만도 했다.
정체를 숨긴 열댓 명의 초인이라니, 웬만한 대형 용병단이나 군부대가 숨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대체 여기 정체가 뭘까?”
세티가 묻고, 여명 또한 답을 찾지 못해 고개를 내젓던 그때.
선글라스 아래 숨겨진 그의 황금빛 눈동자로, 관광객 사이를 걷는 세 사람이 비췄다.
움직이기 편한 여행객 차림에, 커다란 가방을 멘 사내놈들.
전형적인 배낭 여행객의 모습이었으나, 여명은 은밀한 눈으로 그들을 계속 살폈다. 그들의 머리카락이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녹색이라서?
아니, 그들의 가방 아래 매달려있는 가면 때문에.
특별한 것도, 그렇다고 잘 만든 것도 아닌 조잡한 뱀 가면…그건 여명이 익히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암시장?’
여명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는 두 자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대신, 산초가 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카할 마그두가 알려준 연락처의 정보와 시카고 암시장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
이미 시카고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 읽어본 정보들이었지만, 여명은 꼼꼼하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확인해도, 시카고 암시장이 있는 장소는 이곳이 아닌 시카고 운하 주변 호텔의 지하 주차장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산초의 정보가 틀렸을지도.’
LA와 시카고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 시장의 위치가 변경된 걸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건, 확인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직후, 여명은 네티를 향해 말했다.
“네티, 미안한데, 너 혼자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지금요? 뭔가 찾아내신 거예요?”
“…확실하진 않아. 근데, 좀 위험한 일일 가능성이 커.”
그 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다. 네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명과 세티에게 ‘데이트 재밌게 하세요. 야한 건 하지 말고.’ 라는 말을 남긴 뒤, 꿀밤을 피해 후다닥 호텔로 도망쳤다.
멀어지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티는, 여명에게 물었다.
“그래서, 정확히 뭘 찾은 거야?”
여명은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는 세 여행객을 향해 눈짓하며 대답했다.
“…암시장 가면.”
***
여명과 세티는 가면을 가진 세 여행객을 따라 다시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들은 세티가 처음 직원을 찾았던 바로 그 식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게다가 정체를 숨긴 초인 직원과 묘한 눈길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저건 뭐, 확정이네.”
“속단하긴 일러. 조금만 더 지켜보자.”
짧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똑같이 식당으로 들어가, 가면을 가진 녀석들이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아 자연스럽게 녀석들을 관찰했다.
“주문하시겠어요?”
그 사이 평범한 점원이 다가와 메뉴를 물었다. 여명은 세 여행객이 앉아 있는 탁자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사람들이 주문한 거랑 똑같은 걸로 주세요.”
점원은 힐끔, 녀석들의 테이블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햄버거 세트 두 개에 칠리치즈 프라이 추가. 괜찮으시죠?”
“예, 그걸로 주세요.”
여명의 대답을 듣고 점원이 주방으로 돌아가는 사이, 식당 밖으로 늦은 오후의 연한 노을이 창문으로 흘러들었다.
햄버거 세트를 시킨 세 녀석들은 햄버거를 먹지 않고 느긋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여명과 세티는 녀석들을 지켜보지 않는 척하기 위해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끌었…
“성녀는 어떻게 할 거야?”
…아니, 사소한 이야기로 시간을 끌려던 건 여명뿐이었다.
세티는 새침한 눈으로 여명의 얼굴을 훑었다.
“복수가 끝날 때까지 살짝살짝 간만 보면서 무시할 거야? 아니면…”
“…세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여명이 말을 끊었다. 그러자 세티는 히죽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쓸었다.
“난 괜찮아서 하는 말이야.”
“…?”
“그러니까, 나 때문에 성녀를 무시하는 거라면… 내 눈치 보지 말고 보답해줘도 돼.”
“…뭐?”
“뭐긴 뭐야. 첫 번째의 자신감이지.”
충격적인 고백에 여명의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점원이 햄버거를 가지고 왔다.세티는 햄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는 조금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맛있진 않네? 하긴, 관광지 음식이 다 그렇지 뭐.”
“….”
“안 먹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명은 그녀를 따라서 햄버거를 입에 넣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생각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잠시 후, 가면을 챙긴 여행객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들은 팁을 주는 척, 초인으로 위장한 점원에게 뭔가를 건넸다.
직사각형의 고급스러운 종이 위로, 멋들어진 금박으로 어떤 글자가 새겨진 종이.
뭐지? 세티가 그 종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여명이 말했다.
“…명함이네.”
“명함?”
“뭐라고 쓰여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생긴 것만 보면 그래.”
아마도 저게 암시장으로 향하는 티켓 같은 것이리라.
판단을 끝낸 여명은 빠르게 햄버거를 먹어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들을 쫓았다.
이미 식사를 끝냈던 세티는 여유롭게 그를 따라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 지금 꼭 해야 돼? 그리고 좋아하다니, 내가?”
“흐응? 아니야?”
참다못한 여명이 한마디 하려는 데, 세티가 먼저 선수를 쳤다.
“복수가 끝나면, 나, 내 동생들, 그리고 성녀랑… 전부 데리고 차원문 너머로 가서 살자.”
“….”
“제미니 시티나 아폴로 시에서 사는 것도 좋고, 아예 시골로 내려가서 농장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리고… 아, 혹시 그거 알아? 제국은 아직도 일부다처제가 합법이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여명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일처다부제도 합법이야.”
“무슨 상관이야. 난 다른 남자는 필요 없는데.”
“….”
세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여명은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명은 그대로 항복선언을 하려다가, 세티의 귓불이 빨개진 걸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부끄러운 건 둘 다 똑같나. 여명은 팔짱 낀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단단하게 깍지 낀 손가락의 감촉을 따라, 훈훈하게 데워지는 마음.
여행객들을 추적하는 도중이 아니었다면, 여명은 그대로 그녀와 입을 맞췄으리라.
…아무튼.
두 사람의 연기 아닌 연기(?)가 조금 더 진해질 때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녀석들이 복도를 꺾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장실이 있는 복도 방향으로 가는 듯싶었기에, 여명과 세티는 굳이 따라가지 않고 주변 가게들을 돌며 녀석들이 다시 나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인조 보석 목걸이나 시카고 화이트삭스 팀의 티셔츠 같은 기념품을 사며 시간 때우길 한참.
노을의 때를 지나 별의 시간이 다가올 때쯤, 여명과 세티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녀석들이 사라진 화장실 복도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어. 땅으로 꺼진 것처럼.”
복도는 물론이고, 여자 화장실까지 전부 둘러본 세티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남자 화장실을 뒤진 여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이동?”
“…고작 암시장에 가는데 그런 고급 마법을 쓴다고?”
“녀석들이 우리 상상 이상의 마법사였거나…”
여명은 말끝을 흐리며 마나를 감지해봤다. 벽면의 틈새, 바닥의 먼지 한 톨까지 싹 훑는 바로 그 순간.
벽면과 바닥을 넘어 이 복도 전체에 새겨진 희미한 마법진을 발견한 여명이 덧붙였다.
“…고작 암시장이 아니거나.”
***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법진 앞에서, 여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마법진을 파훼하거나 이해하기에는 그가 가진 마법 지식이 부족했고, 아예 박살을 내는 건 네이비 피어에 있는 모든 초인과 싸우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래서, 여명은 전통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잡입. 정확히는, 투명망토를 쓰고 화장실 복도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
이 작전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생각보다 많이 좁네.”
세티와 함께 투명망토 아래 숨어 있는 게 쉽지 않다는 것.
혹시 이 복도를 사용할지도 모르는 일반 손님들을 피해야 했기에, 여명과 세티는 거의 껌딱지처럼 딱 붙어있어야 했다.
“힘들면 나 혼자 가도 돼.”
“누가 힘들데? 그냥 좁다는 거지.”
“….”
“근데, 여명? 내가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피부 냄새 엄청 좋다…”
세티가 히죽 웃으며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덕분에, 여명은 머릿속으로 반야심경을 외워야 했다.
그렇게 반야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번 넘게 외울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드디어 한 남자가 마법진 앞에 섰다.
여행객이라기보단 어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는 듯한 차림의 남자는 품에서 종이 한 장 꺼냈는데, 아까 여행객들이 꺼냈던 명함과 같은 물건이었다.
‘…뭔가 한다.’
여명에게 장난을 치던 세티도 숨을 죽이고, 투명 망토 안에서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지켜보는 그때.
남자가 명함을 찢었다.
찌직
명함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명과 세티, 그리고 남자가 서 있는 마법진 주변으로 마나가 퍼져나오며 얇은 장막을 만들어냈다.
CCTV의 시선은 물론이고, 소리, 먼지, 심지어 인기척조차 감춰버리는 투명 마법.
그 마법이 끝나기 무섭게, 복도 벽면이 그그극 소리와 함께 벌어졌다.
그 너머에는 좁지만 고급스러운 새하얀 대리석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아래에서 반짝이는 조명을 보니 생각보다 깊지는 것 같았다.
‘따라가자.’
남자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여명과 세티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73번 손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계단 아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드넓은 크기의 홀이었다.
마치 고급 공연장처럼 거대한 무대를 중심으로 고급스러운 좌석들이 좍 늘어선 공간.
그곳에는 초인이 틀림없는 보안요원들이 열 명 넘게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건 암시장이라기보단…
‘경매장?’
여명의 생각과 비슷한 걸 떠올린 걸까, 세티가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글자를 썼다.
위험 도주? 잠입?
여명은 똑같이 손가락으로 답했다.
잠입.
판단을 끝낸 두 사람은 즉시 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투명망토가 가려주고 있었지만, 발소리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의 걸음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경비병들을 피하고, 객석 사이를 걸어, 무대 위에 도달한 사람은 뒤 돌아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확인했다.
여기 말고도 따로 입구가 있던 건지, 족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경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아까 전, 세 명. 보이지 않음. 무대 뒤에. 공간. 있음.
이번에도 손가락으로 설명한 여명은 그대로 무대 뒤편으로 내려갔다.
화려했던 무대와 달리 뒤편은 광활한 창고에 가까웠는데, 문제는 창고에 있는 물건들이었다.
유리관 안에 보관된 온갖 마도구와 무기, 풀, 내장, 눈동자 등 정제되지 않은 영약들과 온갖 물약들…
전문 지식이 없는 여명조차 경매장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풍경.
한데, 이 창고에는 경비병이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들에게 맡기기엔 너무 귀한 물건들이라서? 아니면…
“거기, 누구냐?”
경비가 한 명이면 족하거나.
여명은 유리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 갈아놓은 사시미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꽁지 머리의 동양인.
마나가 느껴지는 걸 보면 초인이 분명한데, 허리춤에 찬 일본도에 손을 올린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바깥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자.
물러나자. KGB나 모리네의 흔적은 없어.
여명은 세티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티 또한 동의하듯 함께 무대로 물러나려는 그때.
스르릉, 녀석의 일본도가 뽑히며 섬광이 튀었다.
다음 순간, 투명 망토 바깥으로 뛰쳐나온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그대로 녀석이 날린 검기를 흘려냈다.
날아간 검기는 그대로 창고 벽에 충돌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벽을 그대로 파고들 만큼 날카로운 검기.
“오… 투명망토? 감이 맞았군.”
확실하지도 않은데 검기부터 날린 건가? 미친놈이거나, 비범하거나… 어쩌면 둘 다 일지도.
그러나 여명은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그는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 아무것도 안 훔쳤는데.”
“당연히 안 되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 괜히 있는 줄”
녀석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기습적으로 땅을 박찼다. 바깥 녀석들이 눈치채기 전에, 그대로 목을 잘라버릴 심산이었다.
그의 검 끝에서 붉은 검기가 치솟으며 녀석의 목을 내려치는 것과 상대의 일본도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오는 건 거의 동시였다.
검기와 검기의 충돌. 당연히 마나가 충돌하며 소음이 터져 나왔어야 했으나, 충돌 직전 여명의 검기가 몇 배로 불어났다.
파도가 평범한 물결을 삼켜버리듯, 거대하게 넘실거리는 검기.
붉은 파도가 일본도를 감싼 섬광을 집어삼키고, 그대로 녀석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다.
…내버릴 뻔했다.
그러나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검을 놓고 뒤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여명의 검이 일본도를 세로로 베어버린 순간, 녀석은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치며 바닥을 구를 수 있었다.
여명의 일격을 피할 만한 눈치와 실력, 거기에 비각술에 맞먹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거리를 벌린 무술까지.
제대로 싸운다면 꽤 애를 먹었을 강자였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려는 바로 그때, 뒤로 돌아간 세티가 그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눴으므로.
철컥.
얼굴에 차가운 총구가 닿자마자, 녀석은 크게 벌렸던 입을 슬며시 다물며 말했다.
“…총을 쏘면 경비병들이 올 텐데.”
“그 전에 망토를 쓰고 도망치면 그만이야.”
“이 경매장에는 사십 개가 넘는 비상 센서가 달려 있다. 경보가 울리면, 너희는 독 안에 든 쥐야.”
“혀가 길다.”
“그러지 말고,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지.”
“….”
“그냥 보내줄 테니, 이대로 떠나라. 내 검을 자른 값은 그걸로 대신하겠다.”
협박인지, 애원인지 알 수 없는 말. 여명은 검을 늘어트린 채로 녀석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거절한다.”
“…뭐?”
“내가 널 시작으로 이곳에 있는 경비병을 다 죽이고, 바깥에 있는 놈들까지 싹 다 죽이는 데 얼마나 걸릴까? 오 분? 십 분?”
“….”
녀석은 여명의 말을 상상한 것처럼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가,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글쎄, 내 생각엔 이십 분 정도 걸릴 것 같군. 이곳은 무능한 시카고 경찰이라도 십 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VIP들. 니놈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들은 절대 감당할 수 없을걸? 저 중에는 하원의원도 있다.”
“….”
녀석의 코앞까지 도달한 여명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VIP고 뭐고, 투명망토와 피눈물의 환상을 쓰면 그만이었으니까.
어차피 이곳에 KGB가 없는 이상, 그의 정체를 밝힌 사람은 없…
그때, 운명의 장난처럼 창고 뒤편의 문이 열렸다.
아마 창고관리인이나 경매 진행자의 대기실인 듯한 방에서는 여명과 세티가 처음 쫓던 뱀 가면의 여행객 세 명과 한 노인이 문밖으로 나왔다.
뭐, 뭐야?
독고가 당했다고?
닥치고 경비! 경비 불러!
호들갑을 떠는 세 놈과 달리, 여명과 세티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여행객과 함께 문밖으로 나온 노인이 너무나 익숙했으므로.
“그만, 모두 조용히 하거라.”
잠시 여명을 바라보던 노인은 손을 들어 세 녀석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렇게 모두가 입을 다문 그때, 노인은 여명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쇠똥… 아니, 여명아.”
여명은 독고라는 칼잡이에게 겨누던 검을 거두고, 노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도 설마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만 어르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