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34)
을 위한 세계는 없다-234화(234/817)
〈 234화 〉 잡몹을 위한 도시는 없다. (5)
* * *
***
인사를 끝낸 여명과 장만은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뱀 가면 삼 형제와 칼잡이 놈의 얼굴 위로 당황이 떠오르는 가운데, 노인은 포옹하며 소년의 등을 두들겨줬다.
“이놈아,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여기에 있는 게야?”
포옹이 끝나자마자, 장만이 그렇게 물었다. 여명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르신이야말로 왜 여기 계세요? 은퇴하신 거 아니었어요?”
“은퇴야 당연히 했지. 난 널 찾으러 가던 길이다.”
“예? 저를요?”
여명이 살짝 놀라자, 장만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몇 주 전에 요제프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
“아카데미에 있다고 뉴스에 나오던 녀석이 차원문 너머에 있다지 뭐냐? 요제프가 자기 부모님 이름까지 걸어가며 진짜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락이 많이 늦었네요.”
“그러게, 늦어도 너무 늦었구나. 하마터면 차원문 앞에서 길이 엇갈릴 뻔했어.”
장만은 허허 웃다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여명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못 본 사이에 완전 초인이 다 됐구나. 소문이 모자랄 정도야.”
옅게 웃은 여명은 이러지 말고 제대로 된 곳으로 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때, 지켜보던 꽁지 머리 칼잡이가 끼어들었다.
“어르신, 이놈 혹시… 어르신의 양자입니까?”
뭐가 그리 웃기는지, 장만은 수염을 들썩였다.
“양자? 양자는 아니고, 내가 이 아이 대부쯤 된다.”
그 대답을 들은 독고와 뱀 가면 삼 형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놀라움 같기도, 부러움 같기도 한 표정.
그사이 장만은 여명과 세티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면서, 칼잡이를 향해 말했다.
“독고, 잠시 우리 둘… 아니, 셋이서 이야기 좀 해도 되겠느냐? 혹, 오늘 경매품 중 상한 게 있다면 내가 갚아주마.”
“상한 물건은 없습니다. 제 칼이 망가지긴 했지만… 뭐, 목숨값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독고는 그렇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렇게 세 사람이 창고 바깥으로 향하는데, 독고가 여명의 뒤통수를 향해 작게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붙어보자, 꼬맹아.”
“….”
나중에 붙어도 내가 이길 거 같은데? 여명이 속으로 말을 삼키는 사이, 장만이 여명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네가 이해해주면 좋겠구나, 실력에 비해 승부욕이 좀 과한 친구라서.”
“…다 들립니다. 어르신.”
장만은 껄껄 웃으며 나왔던 창고의 뒷문으로 향했다. 여명과 세티는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지켜보던 뱀 가면 삼 형제와 독고는 잠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주섬주섬 경매 준비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여명이 들어선 방은 예상대로 경매 진행자를 위한 대기실이었다. 옷장과 거울, 냉장고와 작은 테이블 등 딱 필요한 물건 몇 개만이 휑하니 놓인 장소.
다행히 의자는 넉넉했기에, 장만은 세티와 여명을 자리에 앉히고 마실 것을 꺼냈다. 탁, 능숙하게 음료가 담긴 컵을 내민 장만은 의자에 허리를 묻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건 또 누구고?”
짧은 질문이었으나, 여명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설명해야 했다.
만주, 아카데미, 남부 마경, 드레이테리얼…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은 전부 제외했음에도, 상당히 긴 이야기였다. 특히 그가 ‘플레이어’를 죽이고 차원문 너머로 날아갔다고 말했을 때, 장만은 목이 타는 듯 연신 술을 들이켰다.
이윽고, 여명의 이야기가 다 끝난 뒤.
장만은 짧은 한마디로 감상을 정리했다.
“작업반장 그 양반도 참… 자식 하난 잘 키웠어.”
“….”
여명은 살짝 울컥한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미소지었다. 장만은 진한 향기가 올라오는 버번 위스키를 잔에 따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명아. 너와 세티 양은 왜 여기에 있느냐?”
“그게,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걸까,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리는 장만 어르신의 얼굴로 살짝 당황이 피어났다.
“으음… 여기가 어딘지 알고서 온 건 아니로구나?”
“예, 어쩌다 보니 오게 됐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암시장과 관련된 곳이 아닐까 싶은데…”
여명이 그렇게 말하자, 장만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설명했다.
“…이곳이 암시장과 관련된 건 사실이다. 같은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니.”
“….”
“엄격히 구분하자면, 이곳은 시장이 아니라 경매장이란다. 암시장은 더러워서 싫지만, 불법적으로 뭔가를 구매하고 싶은 높으신 분들을 위한 경매장.”
여명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니까. 당장 칼잡이 녀석이 하원의원을 운운하지 않았던가?
장만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은 팔지 않는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권력이나 돈으로 노예를 잔뜩 거느린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럼…납치된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없을까요?”
“…납치?”
“예, 사실 전 납치된 사람을 쫓아서 이곳에 온 겁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 연락에서 이곳의 좌표를 불러줬습니다.”
“네이비 피어에서 납치라… 흐음… 혹시 다른 힌트도 있느냐?”
다른 힌트? 성녀의 어머니란 이야기는 할 수 없었기에, 여명은 조금 더 직접적인 힌트를 꺼냈다.
“…소련 놈들에게 납치됐습니다.”
다행히 그 힌트가 결정적이었던 걸까, 장만은 소련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소련?”
“예,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전직 KGB 요원들입니다.”
“그래? 그러면 그 납치됐다는 사람 말이다… 아마, 여객선에 있을 게다.”
“…여객선이요?”
예상치 못한 단어에 여명은 물론, 세티의 고개마저 기울어졌다.
“네이비 피어를 거점으로 차원문과 미시간 호를 도는 여객선들이 꽤 있다. 사람을 숨기기엔 여기보단 거기가 낫지, 그리고… 딱 열흘 전부터 그런 여객선을 통째로 빌린 부자가 하나 있는데, 그 부자가 때마침 모스크바에서 온 사람이다. 그 사람이 KGB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참 공교롭지 않느냐?”
버번 위스키가 찰랑거리는 잔 위로, ‘이거다’ 라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친 여명과 세티가 비췄다. 장만은 살짝 웃으며 잔을 비웠다.
“내가 알기로, 그자는 오늘 경매에 참가할 게다. 아마 여객선도 이곳에 정박하겠지.”
관계자가 아니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정보. 여명은 장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니, 감사 인사는 일이 끝난 뒤에 하거라.”
“예?”
되묻는 여명을 향해, 장만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여객선에 오르기 전에, 녀석이 네가 찾던 놈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지.”
“….”
“내가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직접 경매에 참가하거라. 어떠냐?
여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어르신이 내민 잔을 받았다.
***
네이비 피어의 비밀 경매장은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된다.
회원 가입의 기준은 매우 엄격해서, 재산이 많아도 사회적 영향력이 적다면 가입조차 할 수 없었다. 이는 암시장 관리자의 철칙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암시장 관리자의 정체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장만은 좀 특별한 존재였다. 회원이 아니었음에도, 경매장을 들락거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차원 여명기 시절부터 한국과 미국의 세 차원문을 누비며 온갖 인맥을 쌓은 전설적인 밀수꾼은 그럴 자격이 있다나?
장만이 뒷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역만리 미국 시카고에서조차 어르신의 이름이 먹힐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점은 세티도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장만을 대했다. 마치, 처음 시부모를 마주한 며느리처럼.
장만은 그런 세티를 보며 껄껄 웃었다.
“대뜸 발차기부터 날리던 그 앙칼진 아가씨가 어쩌다 이리되었는가?”
“….”
세티는 대답하지 못하고 괜히 여명의 옆구리만 찔러댔다. 경매장 측에서 제공하는 가면을 쓰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옆구리가 욱씬거릴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경매장의 좌석들이 대부분은 주인을 찾을 때쯤.
뱀 가면을 쓴 장만이 경매장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네가 찾던 녀석들이 들어오는구나.”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그가 왔던 입구가 아닌 다른 입구에서 들어오는 네 명의 남자가 보였다. 손님은 가운데 선 별 가면의 남자뿐이었고, 나머지 셋은 커다란 덩치를 보아하니 아마 보디가드인 듯했다.
문제는… 그 보디가드 중 한 놈이 매우 익숙하다는 것.
푸른 쥐의 초인, 이름이 모티머였던가? 하도 오래전이라 잘 생각나진 않지만, 인천에서 월라드와 함께 장만 어르신을 압박하다가 여명에게 팔이 잘린 그놈이었다.
여명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장만이 물었다.
“…저 녀석들이 네가 찾던 놈들이 맞느냐?”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소련놈들이 맨 뒷자리에 착석했다. 아마 그들이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경매장 좌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에 전등이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경비병들이 거대한 유리관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
“제87회, 일리노이 VIP 경매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명과 세티가 가장 먼저 쫓았던 뱀 가면 삼 형제는 역시나 진행자였다. 여행객 복장 대신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예복을 입은 세 사람은 각각 소개, 진열, 경매 진행을 맡고 떠들기 시작했다.
[스타트 상품은 차원문 너머에서 넘어온 보검입니다!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징그러운 심장은 그 유명한 런던의 괴수와 같은 종류의 괴수의 심장으로서, 저희가 보증하는 영약…]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이 털목도리는 최후의 수인 저항군이었던 황금 씨족의 털로 만든 진품…] [이 꽃은 스탈린이 먹었다는 바로 그 엘릭서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인 별부리미 꽃으로…]진귀한 동시에 지루한 경매가 이어지길 한참.
여명은 맨 뒷 좌석에 앉아 있는 소련 놈들을 향해 감각을 세우고 있는데, 옆 좌석에 앉은 세티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명, 잠깐만.”
“왜?”
“저거, 뭔가 익숙하지 않아?”
세티는 여명이 무시하고 있던 경매장 무대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유리관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장식도 뭣도 없는 기다란 검은 막대기 하나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무기도, 그렇다고 예술품도 아닌 것 같은 막대기.
[이번 상품은, 매우 특별한 상품입니다.]어째서인지, 뱀 가면의 진행자는 바로 유리관을 열지 않았다. 그는 가면 아래 숨겨진 그윽한 눈동자로 경매장을 쓰윽 훑어봤다.
침묵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쏠린 걸 확인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 삼아 다른 뱀 가면이 조심스레 유리관을 열었다.
푸흐흐
유리관이 열리기 무섭게, 내부에서 짐승이 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경매장의 분위기 때문인지, 어딘가 음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세티는 그저 익숙하다고 말했지만, 여명은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우라간의 몸통.’
그제야, 여명은 파순이 심상 속에서 알려줬었던 시카고 창고의 지도를 떠올렸다. 여태껏 잊고 있었는데, 설마 이 경매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모두 들으셨습니까? 이건 조작이 아니라, 이 막대기에서 직접 흘러나온 목소리입니다.]뱀 가면의 진행자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유리관으로 조명이 집중됐다.
[이 영롱한 막대기의 자태를 보십시오. 이 물건은 무려 드워프 구봉산에서 발견된 물건입니다. 드워프의 지팡이일까요? 아니면 말뚝? 어쩌면 다른 무기의 몸통일지도 모릅니다.]다른 무기의 몸통. 그 키워드를 듣고 나서야 세티는 저 물건의 정체를 깨달았다.
“여명, 저거 설마…”
“그 설마 맞아.”
“….”
세티가 침묵하는 가운데, 진행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물건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물건은 무려, 순도 백 퍼센트! 바이콘의 뿔로 만들어졌습니다! 크기로 보아 적어도 200년은 살아온 어마어마한 녀석의 뿔이지요!]진행자의 목소리가 커졌으나, 의외로 경매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까놓고 말해서, 저걸 어디에 쓰겠는가? 처녀 감별? 그거야 다른 바이콘의 뿔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예 유니콘의 뿔을 구해서 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행자도 그걸 알고 있는지, 그 이상 약을 치거나 과장하지 않았다.
다른 곳이었다면 드워프 공주의 처녀 감별기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곁들였겠지만, VIP 경매장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봤자 자기 신뢰만 깎아 먹을 뿐이었으므로.
[그럼 우선 가볍게, 11만 달러로 시작하겠습니다.]가격도 다른 물품들에 비하면 반의반 값으로 시작했다. 물론 그 가격조차 미국 평균 연봉의 몇 배였지만…
“사야 하는 물건이더냐?”
여태껏 여명과 세티가 쑥덕거리는 걸 지켜보던 장만이 운을 띄웠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돈은?”
그 대답에 반응한 건 세티였다. 그녀는 산초가 건네준 수표 봉투를 슬쩍 꺼냈다. 대충 봐도 이백 만 달러는 될 법한 액수가 적힌 수표.
그것을 본 장만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혹, 모자라면 보태주마.”
그리고 다음 순간, 장만은 좌석의 손잡이를 툭툭 터치했다. 어째 손을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 했더니, 손잡이에 달린 컴퓨터로 가격을 입력하는 형태였다.
[12만! 12만 나왔습니다! 혹시 더 없으십니까?]다행히 그 이상의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없으시면 5초를 세겠습니다.]진행자가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고, 여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어… 잠시만요. 120만! 120만 나왔습니다!]누군가 가격을 올렸다.
‘몇 배도 아니고 단번에 열 배를 올린다고?’
여명이 놀라고, 세티가 눈썹을 찌푸리는 사이, 장만이 물었다.
“어쩌겠느냐? 아마 여기서 네 배는 더 오를 게다.”
“그러면 혹시… 돈 대신 현물은 안 될까요?”
“현물?”
“금화, 금괴, 보석… 그리고 용의 뼈요.”
플레이어가 인벤토리에 쌓아놨던 재산과 여명이 차원문 너머에서 얻은 재산들. 아마 카할 마그두의 뼈 중 절반만 팔아도 천만 달러는 가뿐히 넘기지 않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장만은 고개를 저었다.
“금화나 금괴는 받겠지만, 용의 뼈는 좀 힘들겠구나. 여긴 경매장이지, 물물거래소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면…”
“내가 힘 좀 쓰마.”
거기까지 말한 장만은 다시 손잡이를 두들겼다. 여명이 그를 말리려 했으나, 장만은 먼저 손사래를 쳤다.
“작업반장은 내 친우였다. 집 나간 탕아가 친우의 복수를 했는데, 내가 어찌 돈을 아끼겠느냐?”
곧이어, 진행자가 소리쳤다.
[130만!]그 외침을 신호로, 경매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140만, 200만, 300만…
설마 이렇게 경쟁이 붙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진행자는 기쁜 얼굴로 가격을 소리쳤다.
그리고 그쯤 되자, 가만히 구경하던 자들도 레이스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갑작스레 치솟는 금액을 보며 여명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장만이 말했다.
“본인들이 모르는 뭔가가 숨겨진 물건이라고 착각하는 게지.”
“…경매장에서 뿌린 미끼면 어쩌려고요?”
“VIP에게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한 곳이었으면 차원문 코앞에서 경매를 열지도 못했다.”
“….”
묘하게 그럴싸한 말에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시작된 이상, 막을 방법도 없었다. 그저 장만의 주머니가 넉넉하길 바랄 뿐.
그런 그의 마음을 비웃듯, 경매 금액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장만 어르신의 말로는 오늘 유독 각국의 졸부 놈들이 많이 왔다던데, 그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아무튼, 한창 과열되었던 레이스가 멈춘 시점에서 우라간의 몸통의 가격은…
듣기만 해도 아찔한 가격이었다. 850만 달러까지 따라왔던 장만조차 고개를 젓게 만드는 가격.
인벤토리 속 용의 뼈 일부만 팔아도 충분히 충당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끼어들 수 없었다.
[870만 달러! 낙찰입니다!]여명은 아쉬움에 한숨을 쉬면서도, 머리 한편으로는 강제로 빼앗거나 용의 뼈와 거래할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도둑질로 가져가려고 했던 거, 강도질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여명이 손가락으로 세티의 손등에 ‘강도질?’ 이라고 적는 사이, 진행자가 새하얀 장갑을 꼈다.생각 이상의 가격을 받은 덕분 인지, 조명 아래에서 여러 각도를 보여줄 심산인듯했다.
진행자는 진지하면서도 과장된 몸짓으로 막대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는,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진행자는 막대기를 붙잡지 못했다. 손을 뻗은 순간, 막대기가 마나를 뿜어내 그를 밀어냈으니까.
[어?]엉덩방아를 찧은 진행자가 한심한 소리를 내뱉는 사이, 경매장에 있는 사람들 중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했다.
계승형 마도구?
드워프가 만들었다더니, 계승까지?
하지만 주인이 있는 물건을 팔려고 하다니… 쯧, 오늘 물건의 질이 영…
들으라는 듯 숙덕거리는 목소리들 너머로, 당황한 진행자가 다른 직원을 부르는 게 보였다.
“이게 어떻… 이런 씹…”
“어제까지… 아무 문제 없…”
“닥ㅊ…! 병신 같…! 당장 치워!”
초인의 청각으로 화를 내는 진행자와 안절부절 못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명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 한숨을 본 장만이 물었다.
“대체 저게 무슨 일인 게냐?”
“…저 물건이 주인을 알아봤나 봅니다.”
“그래? 그러면 그 주인이 혹시…?”
장만은 은근히 여명을 바라봤고, 여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 네 덕분에 재밌는 꼴을 봤구나.”
투덜거리는 졸부들의 꼬락서니가 진심으로 재밌었던 건지, 장만 어르신은 수염을 들썩이며 웃었다.
여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슬그머니 무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막대기가 무대 뒤로 사라지는 타이밍에 맞춰 인벤토리로 회수할 생각이었는데, 장만의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걱정하지 말 거라. 내가 싼값에 챙겨올 테니.”
“…예?”
“저 막대기 말이다. 내가 합법적으로 구해다 주마.”
“아…감사합니다. 어르신.”
여명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이곳에 온 목적은 소련 놈들을 확인하고 모리네를 쫓는 것이지, 우라간의 몸통을 훔치는 게 아니었으므로.
“고맙기는 무슨, 노인네가 돈이 없지, 인맥이 없겠느냐? 다 이럴 때 쓰려고 쌓은 인맥이다.”
장만이 어깨를 으쓱이고 여명과 세티가 미소 짓는 사이, 진행자는 손님들에게 사과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한 번 망가진 분위기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의 소란이 흐른 뒤에야, 경매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재개되었다.
몇몇 VIP들은 대놓고 딴청을 피우거나 진행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술을 홀짝거렸는데, 진행자는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경매를 진행했는데, 믿는 바가 있었다.
[드디어, 저희 경매장이 자랑하는 특급 상품 차례가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오신 분들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앞으로 나오는 세 가지 상품 모두, 전문가의 인증을 받은, 이곳이 아니면 결코 구할 수 없는 물건들입니다.]꽤나 비장한 목소리였고, VIP들도 딴청을 그만두고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무대의 조명이 밝아지길 잠시.
깔끔한 양복 차림의 경비원 다섯 명이 커다란 금속 박스를 끌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조심스럽다 못해 과장된 모습으로 박스의 잠금을 풀었다. 따각, 따각 두꺼운 1차 잠금을 풀고, 그다음으로 자물쇠,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채 인식 시스템까지 거치고 나서야 금속 박스가 열렸다.
푸쉬이익
짙은 연기와 함께 박스가 열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호박석?’
흔히 앰버라고 불리는, 나무 수액이 굳어 만들어지는 결정. 보석방에 가면 옥만큼이나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었고, 박스 안에 있는 건 심지어 반쯤 깨져서 너덜거리는 하품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경매장에 있는 모두가 그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이 보석은… 단순한 보석이 아닙니다.]심상치 않은 목소리, 짧은 뜸 들이기.
[무려, 핵미사일이 떨어졌던 변경백 성의 폐허에서 회수된… 보석 꿀입니다!]보석 꿀? 다큐멘터리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에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건 말건, 진행자는 계속 말했다.
[눈치가 빠른 분은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건 바로 변경백의 검에 박혀있는 깨진 노란 보석의 짝입니다! 프랑스와 미국을 엿 먹인 불세출의 초인, 변경백 가문이 상징으로 삼는 바로 그 보석이지요!]듣고 보니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긴 했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자, 그럼 가볍게 500만부터 시작하겠습니다!]하지만 여명과는 별 상관없는 물건이었기에, 그는 무대 대신 장만 어르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은 뭘 사려고 온 걸까요?”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여태껏 아무것도 사지 않은 걸 보면 아마 특급 물건을 노리려는 모양인데…”
그때, 기다렸다는 듯 소련 놈들이 움직였다. 톡톡, 녀석들이 손잡이를 두들기는 소리가 여명의 날카로운 청각에 들어왔다.
[1,500만 달러! 시작부터 1,500만 달러가 나왔습니다!]진행자의 기쁜 목소리와 달리, 여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KGB가 변경백 가문의 보석을 노린다고? 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