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39)
을 위한 세계는 없다-239화(239/817)
〈 239화 〉 잡몹을 위한 도시는 없다. (10)
* * *
***
“…괴수 다음에는 카미카제라니, 미국에 오니 별꼴을 다 보게 되는구려.”
불길 속에서 괴수와 함께 타오르는 경비행기의 잔해를 보며, 코르부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카미카제? 부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여명은 쓰게 웃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장 먼저 두메아 가주부터 찾았다.
‘설마 경비행기 아래 깔린 건 아니겠지?’
데스나이트 늙은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여명의 바로 뒤에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죽을 뻔했군.
여명이 고개를 돌려보니, 물에 흠뻑 젖은 데스나이트가 옷을 짜고 있었다. 어디 있나 했더니, 남들보다 먼저 호수로 뛰어든 거였나.
“…몸은 좀 어떠세요?”
내 몸이야 죽은 뒤로 언제나 찝찝하지. 그보다, 카미카제가 대체 뭔가?
“카미카제요? 일본어로 신의 바람이란 뜻을 가진 단어인데…태평양 전쟁 당시에 폭탄을 싣고 자폭하던 일본 비행기를…”
여명이 대답이 길어지려 하자, 두메아 가주가 손사래를 쳤다.
지구 역사 이야기였나? 에이, 그 이상 설명할 필요 없네.
“….”
그리고 이럴 때는, 그런 진지한 설명 대신 가벼운 농담을 하게, 그래야 여자한테 인기가…
거기까지 말한 두메아 가주는 여명의 옆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세티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경비행기에서 시작된 불길이 여명의 얼굴을 붉게 물들일 때쯤, 두메아 가주가 침묵을 깼다.
더 어색해지기 전에 아공간에 넣어주겠나?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두메아 가주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세티는 고개를 돌려 불길을 바라봤다.
아직 살아있는 괴수들은 도망가지 않고 불타는 경비행기 주변을 맴돌며 안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남아 있나?’
여명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박살 난 경비행기 파편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떠오른 비행기 잔해들은 마치 액체처럼 제멋대로 늘어나고, 줄어들고, 합쳐지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컹! 컹!
무언가를 느낀 괴수들이 소리를 내지르고, 강철의 변신이 이어지길 잠시.
이윽고, 변신을 끝낸 경비행기를 본코르부스와 여명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불길 사이에서 우뚝 솟아오른 그것은, 웬만한 2층 건물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전기톱이었다.
“…미국이란.”
한숨 섞인 코르부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기톱이 살벌한 엔진 소리를 내뿜기 시작했다.
전기톱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잡은 것처럼 하늘로 떠오르더니, 그대로 괴수들을 머리 위를 덮쳤다.
지이잉 !
엔진 소리가 괴수들의 비명을 집어삼킨다. 코르부스는 재빨리 얼음 방벽을 펼쳐 날아오는 피와 살점들을 막았다.
방벽이 붉게 물들기 무섭게, 방벽 너머에서 괴수들의 애처로운 비명과 전기톱의 엔진 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마치, 격렬한 락 음악처럼.
그리고 잠시 후, 엔진 소리가 완전히 멎은 뒤에야 여명은 입을 열 수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인간을 부른 거야?”
그러자 세티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메이커.”
“메이커? 빅 쓰리의 그 메이커?”
세티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여명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메이커라면 알파 원과 함께 미국의 삼대 초인, 흔히 빅 쓰리라 불리는 자였다. 이름값만 따지면 성검에 뒤지지 않을 정도.
그런 사람이 도와주러 왔으니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여명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활동하는 도시는 이곳에서 족히 1,000km는 떨어져 있는 뉴욕이었으니까.
장만 어르신과 대체 무슨 인연이 있길래, 이 머나먼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서 날아왔단 말인가?
다행히 여명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와 세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이, 메이커가 얼음 방벽을 뛰어넘어 왔다.
한데, 사뿐히 땅에 내려선 메이커의 꼬락서니가… 조금 그랬다.
검은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목욕 가운과 그 아래 살짝 드러나는 호피 무늬 비키니.
급하게 정리한 듯 반쯤 덜렁거리는 속눈썹, 그리고 맨발바닥까지.
조금 전까지 수영장에서 놀다가 뛰쳐나온 것 같은 중년의 흑인 여성은, 복장과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카 딕의 요청을 받고 왔다. 모카 딕은 어딨지?”
TV 너머에서 보던 진중한 태도. 여명은 그제야 눈앞의 중년 여성이 메이커라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뭐? 모카 딕?
“…혹시, 장만 어르신 별명이 모카 딕이야?”
속으로만 생각한 여명과 달리, 세티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명은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메이커를 향해 말했다.
“먼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커, 장만 어르신은 저기 저 호텔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이커는 후다닥 호텔로 뛰어갔다.
여명은 물론이고 코르부스마저 황당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번에도 세티가 한마디 했다.
“저 사람, 뭔가 익숙한데…?”
코르부스와 여명은 동시에 성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메이커가 남은 괴수들을 전부 갈아버리는 것을 끝으로, 네이비 피어는 평화를 되찾았다.
파괴된 산책로와 괴수들의 시체가 가득 쌓인 평화.
멍하니 구경만 하던 경찰들은 방송사가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상황을 정리하는 척 쇼를 시작했고, 기자들은 그런 쇼를 찍으며 특종을 준비했다.
그 사이 호텔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민간인들 또한 긴장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몇 민간인들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전투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영상은 인터넷에 올라가지 못했다.
경찰이 호텔에 폴리스 라인을 치기도 전에, 투명한 무언가가 객실을 돌며 그들의 스마트폰을 전부 박살 내버렸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귀찮은 뒤처리가 다 끝난 뒤에야 여명 일행은 호텔 방에 다시 모일 수 있었다.
“구해준 답례는커녕, 귀찮은 일만 잔뜩 받았네요.”
네티는 투명 망토를 벗으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자신들이 목숨 걸고 지켜주는 동안 영상을 찍고, 그 영상을 무단으로 뿌리려던 호텔 투숙객들이 괘씸하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좋은 일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지. 힘들고, 가성비 안 좋고, 엿 같은 인간들과 마주하고…”
네티의 말을 받은 건 메이커였다. 장만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녀는 기다란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일은 좋은 일이지.”
어딘가 초인으로서 연륜이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네티는 감동하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
목욕 가운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비키니가 너무나 남사스러웠으므로.
“…예의도, 도덕도 모르는 모든 병신들을 대신해 말할게, 고마워. 너희 덕분에 오늘 밤 죽었어야 할 수백 명이 목숨을 구했어.”
“….”
“그리고 혹시라도 오늘 영상이 풀리는 건 걱정하지 마. 내 매니저한테 말해서 전부 저작권 걸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메이커는 대뜸 장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장만은 익숙하다는 듯 잔에 술을 따르더니, 그녀의 손에 딱 잔을 끼워줬다.
“술 가지고 다니는 건 여전하네. 이제 몸 관리할 때 되지 않았어?”
“…술 장사꾼이 술을 끊는 건 죽을 때뿐이야.”
“아, 그러셔.”
메이커는 코웃음 치며 술잔을 홀짝였다. 버번 위스키의 진한 향기가 호텔 방안을 가득 퍼졌다.
그리고 그 향기의 끝자락,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여명이 한마디 했다.
“두 분, 굉장히 친해 보이시네요.”
“친해? 우리 사이는 그 이상이야.”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메이커와 달리, 장만은 아주 잠깐,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이 저런 표정을? 여명은 신기한 걸 본 사람처럼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어르신이 모카 딕이라 불리는 이유가 뭔가요?”
“이 사람을 어르신이라고 부르면서 그것도 몰라? 칠레의 모카 섬의 전설적인 밀수…”
메이커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장만이 끼어들었다.
“…대단치 않은 일이니, 들을 필요 없다.”
여명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장만이 부끄러운 듯 그의 시선을 피해서? 아니, 과거의 장만이 어떤 사람이었건, 현재의 장만은 장만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경매장에서 물건을 구해다 주기로 했었지. 지금 당장 구해오마.”
그러나 어르신은 이 방에서 있기 거북스럽다는 듯, 핑계를 대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메이커 또한 그런 장만을 따라가려다가, 뭔가 떠올린 듯 발을 멈추고 여명 일행에게 물었다.
“저… 혹시, 옷 한 벌 빌릴 수 있을까?”
“….”
여명은 헛웃음을 삼키기 위해 입을 꾹 다문 뒤, 인벤토리에서 성녀가 입던 평상복을 꺼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메이커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옷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거보다 조금 더 예쁜… 옷은 없을까?”
“….”
빅 쓰리에 대한 환상이 살짝 무너지는 것을 느끼면서, 여명은 다른 옷을 꺼냈다. 플레이어가 넣어둔 옷이었다.
파란 꽃무늬가 들어간 원피스.
다행히 그 옷은 마음에 들었는지, 메이커는 여명이 보는 앞에서 가운을 벗고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대뜸 마나를 끌어 올리더니
끼기긱
호텔 방에 있던 철제 의자를 뜯어 ‘변형’시켰다.
경비행기 잔해를 전기톱으로 바꿨을 때와 마찬가지로, 철제 의자는 멋대로 크기를 늘리고 줄이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하이힐이 되었다.
급하게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여명을 보며…
“고마워, 빨갱이 소년. 옷값은 나중에 천 배로 갚을게.”
…라고 말한 뒤, 장만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문 너머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네티가 말했다.
“…형부, 저 사람이 정말로 미국 초인 10위 권에 든 최초의 흑인 여성 초인 맞죠?”
“응.”
“어… 근데, TV에서 나오던 거랑 조금 다른 사람이었네요? 저는 뭔가 더…”
네티가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입술을 우물거리자, 여명이 한마디 거들었다.
“터프할 줄 알았다?”
“맞아요. 터프! 저는 메이커가 마초남처럼 터프한 여자일 줄 알았어요. 왜, 그 작년에 한 남자 배우를 패서 코뼈를 부러트렸잖아요?”
“….”
여명이 연예계 사정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지만, 터프하지 않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맨땅에 비행기를 꼬라박고, 거대 전기톱으로 괴수를 썰어 버리는 여자가 터프하지 않다면 뭐가 터프하단 말인가.
장만 어르신 앞에서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의외이긴 했지만… 그거야 개개인의 사정인 거고.
네티가 뭐라 더 말하려는데, 방문이 열리며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평범한 까마귀로 변장(?)한 코르부스와 어느새 몸을 씻은 세티와 성녀, 그리고 모리네까지.
세티는 반쯤 박살 난 철제 의자를 보며 물었다.
“어르신은?”
“…경매장에 물건 챙겨오겠다고 나가셨어. 메이커는 어르신 뒤를 따라갔고.”
“그래?”
순식간에 북적거리게 된 방에서, 일행들은 각자 침대나 의자에 앉았다.
그중 성녀가 노골적으로 여명의 옆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모리네가 그녀보다 한발 앞서 여명에게 다가갔다.
“여명, 잠깐 단둘이서 대화 좀 할까?”
“…지금이요?”
“빠를수록 좋은 이야기니까.”
아까 여객선에서 나눴던, 용사의 마도구와 혈통에 관한 이야기.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네티와 세티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눈짓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모리네를 따라 방을 나섰다.
***
복도에 나서자마자, 모리네는 마나를 끌어 올리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녀와 여명 주변의 마나가 일렁거리더니, 소리를 차단하는 작은 막이 펼쳐졌다.
소리를 억제하는 무술, 아카데미에서는 미처 훔치지 못했던 무술이었다. 혹시 나중에 써먹을 때가 있을까 싶어 여명은 모리네의 마나 움직임을 기억해 뒀다.
아무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걸 확인한 모리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잘한 내용들은 다 건너뛰고, 여명. 용사가 각 종족 지배층의 시조라는 사실, 알고 있니?”
“예, 대충은요.”
드워프, 인간, 수인 등 온갖 종족의 왕들은 모두 용사 혈통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그거,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나 왕들이 개나 소나 제우스의 후손이라고 했던 거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여명의 의견은 타당했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신화 속 혈통. 그건 지배층이 지배 명분을 얻기 위한 가장 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모리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스와는 경우가 달라. 제우스와 달리 용사는 실존 인물이고, 그의 혈통을 증명할 마도구들도 있으니.”
혈통을 증명해줄 마도구. 여명은 자신의 팔목에 걸린 가느다란 팔찌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현대에는 거의 유명무실해졌지만, 용사의 핏줄은 모두 황금과 관련돼 있어.”
“황금?”
“드워프 왕가의 황금 옥새, 초원 수인들의 황금 씨족, 제국 황제의 황금 왕관…”
“…잠깐, 잠깐만요. 그럼 변경백님은 뭡니까? 이 마도구를 준 게 변경백님이라면서요? 제가 알기로 변경백 가문 상징에 황금은 안 들어가는데요?”
여명이 그렇게 지적하자, 모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나 있는, 정치적인 문제야. 한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는 것처럼, 한 제국에 용사의 혈통이 둘이나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
“그렇기에 변경백 가문의 상징은 황금이 아닌, 같은 빛으로 반짝이는 꿀이야. 황금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썩지 않지만, 가치는 비교할 수 없는 꿀.”
다큐멘터리도 알려주지 않은 역사 속의 뒷이야기였고, 동시에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당장 변경백이 용사의 혈통이라는 게 밝혀졌다면, 현 제국 황제가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스탈린의 도움을 받아 형을 죽이고 집권한 유약한 황제, 그리고 이 시대의 용사로 불리는 변경백.
제국이 둘로 쪼개지다 못해, 어느 한쪽을 싹 쓸어버릴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제 혈통이 위험하다는 건…?”
“현 황제는 유약하고, 자식들은 모두 폐급이나 다름없어. 강대한 변경백께서는 자식을 가질 수 없지. 즉, 여명… 너는 현재 용사의 혈통을 이은 인간 중 가장 이용 가치가 높으면서, 손에 넣기 쉬운 존재란 뜻이야. 정치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생물학적 가치? 여명은 그게 무슨 말인지 되물으려다가, 한국 정부가 벌였던 희생양 프로젝트 뒷면에 숨겨진 이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인공 용사 프로젝트.
“네 혈통을 비밀로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어? 미국, 유럽, 한국, 심지어 차원문 너머의 제국까지 너를 회유하거나, 남이 이용하기 전에 죽이려 들 거야.”
“….”
더럽게도 꼬였군. 여명은 용사가 남긴 가느다란 팔찌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저하고 모리네, 둘만 비밀로 하면…”
“영원한 비밀은 없어.”
“….”
“여명.”
“…예.”
“네가 원한다면, 변경백님께 도움을 요청할게.”
변경백에게? 여명은 살짝 놀란 얼굴로 모리네를 바라봤다.
“도움이요? 도움이라면 정확히 어떤…”
여명의 말꼬리가 흐려지자, 모리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모든 종류의 도움.”
“….”
“단, 보석 꿀을 돌려줘야겠지만.”
경매장에서 얻은 반쪽짜리 보석 꿀. 지구에 빼앗긴 변경백 가문의 상징.
“변경백님은… 아주 좋은 분이셔. 장담하는데, 가문의 보석을 되돌려준 동포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으실 거야.”
여명은 잠시 고민했다. 아니, 사실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차원문 너머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이 세상 누가 그걸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변경백이 한국 정부를 향한 그의 복수를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필요하지도 않았고.
역시 거절해야 하나, 짧게 고민하는 여명의 뇌리로 세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복수가 끝나면 차원문 너머로 가서 함께 살자던 말.
정말로 차원문 너머로 가서 살게 된다면, 변경백의 입김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어차피 적당한 대가를 받고 보석 꿀을 돌려줄 생각이기도 했고…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여명은 순순히 보석 꿀을 꺼내 모리네에게 내밀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내 판단에 따라줘서.”
모리네는 그렇게 말하며 보석 꿀을 받았다. 품속에 고이 보석을 챙긴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바로 떠나시려고요?”
“지금 딸아이 얼굴을 보면 못 떠날 거 같아서.”
진한 모정이 담긴 말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모리네, 잠깐만요.”
“왜?”
“변경백님께, 몇 세대인지 물어봐 주세요.”
“세대?”
“예, 마도구가 저보고 저는 44대라던데, 혹시 제가 변경백님보다 윗세대면… 어색할지도 모르잖아요?”
“둘이 나이 차이가 얼만데…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
“….”
“하지만 몇 세대인지는 물어볼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모리네. 다음에 또 봬요.”
여명의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자, 모리네는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복도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에는 장모님이라고 부르렴.”
그녀를 구하기 위해 KGB와 싸운 것치고는 담담한 이별이었으나, 여명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걸로 그녀에게 받은 빚은 다 갚았으므로.
잠시 모리네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던 여명은, 한숨을 쉬며 호텔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긴 하루였고, 머리가 복잡했다. 당장이라도 세티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고 싶었다.
물론, 정말로 잠들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장만 어르신이 돌아올 때까지는 깨어 있어야…
가시면 안 됩니다!
이상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메이커님 얼굴이나 좀 보는 게 뭐가 문제냐!
하지만…!
시발, 안 꺼져? 짭새는 우릴 막을 권한이 없어!
그때, 아래층에서 경찰과 누군가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한 마나가 느껴지는 게, 아마 이 사유지를 지키던 용병들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적지는 메이커가 있던 일행의 방.
여명은 즉시 피눈물의 환상을 준비하며 방문을 열었다.
메이커의 관계자로 위장해야 하니, 이번에도 국밥집 아줌마처럼 절대 못 알아볼 얼굴로 바꿔야…
그의 생각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창문으로 들어오는 의외의 인물과 눈을 마주쳤으니까.
반지가 가득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낑낑대며 창문으로 올라오는 드워프.
“메, 메이커님의… 허흐, 헉… 관계자… 십니까?”
드워프는 환상을 덮은 여명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숨을 헐떡이면서.
“….”
여명은 뚱한 얼굴로 성녀와 세티 자매를 찾았다. 그녀들은 미리 침입자를 예측한 건지, 침대 아래 숨어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래서 못 봤나.
성녀가 입 모양으로 ‘조심!’이란 신호를 보내건 말건, 여명은 창가로 다가가 드워프의 팔을 잡았다.
“헉, 가, 감사… 합니다… 저, 저는… 그게… 그… 둔간… 중공… 헥, 헥… 중공업의…”
“다룰마 둔.”
“아! 저를, 헥, 아신다면… 쿨럭, 일이… 쉽게… 헉, 저는… 지금… 암살, 위험에…”
다룰마 둔이 헐떡이는 가운데, 성녀가 빼꼼 침대 위로 고개를 들었다.
환상으로 가리지 않은, 안대를 찬 성녀의 얼굴과 마주한 다룰마는 숨을 헐떡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성녀님? 그럼 설마…”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여명을 바라보자마자, 여명은 얼굴을 덮고 있던 피눈물의 환상을 해제했다.
“….”
“오랜만이네요. 다룰마.아카데미에서 검을 준 뒤로 처음이죠?”
“….”
“메이커님은 잠깐 일이 있어서 나가셨는데…마실 것 좀 드릴까요?”
다룰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이다가, 반지가 가득한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짝!
다행히 꿈은 아니었다. 뺨이 찢어질 듯 아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