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42)
을 위한 세계는 없다-242화(242/817)
〈 242화 〉 세 개의 뿔, 인연, 악연, 드워프. (3)
* * *
***
마 우라간.
우라간 가문의 최고 장인이자, 드워프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손가락에 꼽힐만한 천재.
하지만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그는 조금 이상한 드워프였다.
대장간보다는 주방을 더 좋아했고, 동족보다는 이종족과 교류하기를 즐겼다.
그런 이상함 때문이었을까? 차원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지구의 지식을 흡수했다.
종교, 역사, 예술, 사상…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에서 넘어온 물건 중 그가 가장 심취한 것은 마르크스였다.
심지어 [맑스 번역 전집]이란 책을 써서 아샤 전역에 출판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차원문 너머에서 아직도 마르크스를 ‘맑스’라고 부르는 건 그의 번역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쨌든, 마르크스를 향한 관심은 자연스레 친 소련적 행보로 이어졌다.
마 우라간은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 우호적인 스탈린 덕분에 소련 핵심 인사들과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었는데, 그가 보낸 몇몇 편지들은 초기 냉전에서 소련이 우세를 점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세르게이 코롤료프에게 유인 우주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보로실로프에게 초인 육성법에 대한 교육법을 알려준 것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스탈린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마 우라간과 스탈린은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가득 주고받았다고 한다.마치 차원을 뛰어넘은 동지라도 되는 것처럼.
사적인 이야기인 만큼, 알려진 편지 내용은 많지 않았다. 몇몇 편지가 발굴되기도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할 뿐.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의 마지막 편지는 전설처럼 드워프 생존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스탈린이 드워프를 짐승으로 선언하며 군대를 움직인 바로 다음 날, 마 우라간은 스탈린에게 한 줄짜리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겠소?
그 편지를 받은 스탈린은 이렇게 답장했다.
알면서 묻지 마라.
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생존자들이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편지의 원본은 이미 겨자 가스 아래 파묻혔고, 사실 여부를 밝혀줄 스탈린과 마 우라간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현재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스탈린에게 답장을 받은 마 우라간이 홀로 공방에 처박혀 ‘용사를 위한’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과그 무기의 재료로 친구들의 육체와 영혼을 사용했다는 사실뿐.
유니콘 왕자의 뿔로 만든 손잡이.
바이콘 여왕의 뿔로 만든 몸통.
수룡의 눈물 진주로 만든 폼멜.
그리고…
***
[그만! 내가 졌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거라!]정확히 72번째 망치를 맞은 시점에서, 우라간의 몸통은 항복을 선언했다.
사실 60대까지는 가볍게 버텨냈으나, 성녀가 가세해 세티의 망치에 축복을 불어넣은 게 문제였다.
성스럽게 빛나는 응보의 축복은 바이콘의 영혼 그 자체를 후려쳤고, 바이콘은 영적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여전히 여명을 주인으로 삼는 건 싫은 눈치였으나, 분노한 두 소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바이콘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뭐, 아무튼.
짧은 소동을 뒤로하고, 일행은 즉시 호텔을 떠나기로 했다.
기자와 경찰, 심지어 FBI까지 주변에 있는 상황이었다. 1초라도 빨리 네이비 피어를 떠나는 게 옳았다.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가진 짐 대부분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 흔적을 싹 지운 일행은 호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로비에 있던 기자와 경찰들은 전부 호텔 바깥에 뻗어 있는 덕분에 여명은 눈치 볼 것 없이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일행이 타고 온 렌터카가 괴수의 발에 밟혀 박살이 났다는 점.
걸어서 네이비 피어를 벗어나야 하나 고민하는 일행들을 향해, 다룰마가 조심스레 말했다.
“모두 내 차를 타고 가지. 여섯이 타기엔 조금… 좁긴 하지만.”
다룰마의 말처럼, 그의 차는 좁았다.
가뜩이나 좁은 4인승 고급 세단이라서? 아니, 좌석이 전부 드워프 전용으로 개조된 차량이었으므로.
운전석에 다룰마를 앉히고 보니, 남은 좌석에 앉을 자리가 끔찍하게 부족했다.
평범한 까마귀 크기까지 몸을 줄일 수 있는 코르부스야 별 상관없었으나, 여명, 세티, 네티, 성녀 중 한 명은 다른 사람 무릎에 앉아서 가야 하는 상황.
모두가 은근슬쩍 눈치를 보는 가운데, 성녀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내가 여명 무릎에 앉아서 갈래!!”
물론 일행 중 누구도 그녀의 사적인 욕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성녀가 자신이 운전해버리겠다는 협박을 하든 말든, 네 사람은 제비뽑기로 무릎에 앉을 사람을 정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여명이 성녀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성녀는 이게 말이 되냐며 다시 하자고 항의했지만, 이미 뽑힌 제비는 되돌릴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투덜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 벨트를 핑계로 여명의 배를 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었다.
[내가 처박혀 있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언제부터 저런 사제가 축복을 쓸 수 있게 된 거냐?]그 꼴을 본 바이콘이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으나, 차마 저게 성녀라고 말할 수 없었던 일행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차가 시카고를 벗어나, 후미진 도로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
도시의 야경이 흐릿해지고, 가로등 대신 어둠이 실린 나무가 흔들리는 외곽 도로.
차를 멈춘 다룰마가 여명을 보며 물었다.
“자네가 부탁한 대로 도심지랑 떨어진 곳까지 오긴 했네만… 이제 어쩔 건가?”
“우선, 흔적부터 지우죠.”
지워? 어떻게? 다룰마가 눈을 껌뻑거리는 사이, 일행이 전부 차에서 내렸다.
엉겁결에 따라 내린 다룰마를 향해, 여명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다룰마, 이 차의 소유권은 잠시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소유권? 물론 차 키라면 얼마든지 주겠…”
“아뇨, 차 키는 가지고 계세요. 제가 말한 소유권은 이런 거니까요.”
그렇게 말한 여명은 가볍게 차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단순한 마나 감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실제로 겉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여명이 가볍게 주먹을 쥔 순간, 자동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벤토리의 회수 능력.
눈앞에서 차가 사라진 걸 본 다룰마가 놀라 눈을 크게 뜨건 말건, 여명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활동성 높은 여성용 일상복 세 벌,세티가 LA에서 산 남성복 한 벌, 그리고 드워프용 노동자 복 한 벌.
그중 드워프용 옷은 플레이어가 넣어놓은 물건이었는데, 아마 시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챙긴 옷인 듯, 몹시 지저분했다.
어쨌든, 여명은 일행들에게 옷을 전부 건네준 뒤 추가로 투명 망토를 꺼내며 말했다.
“탈의실 대용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투명 망토 뒤에서 차례대로 갈아입자. 누가 먼저 할까?”
그러자 세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귀찮게 그러지 말고, 그냥 너랑 다룰마가 눈 감고 있는 건 어때?”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 여명은 그녀의 머리 위에 망토를 덮어주며 농담을 받았다.
“내가 눈을 감아도, 달이 보잖아.”
“….”
직후, 세티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소름 돋는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코르부스는 아예 못 봐주겠다는 듯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
“바이콘이 벌써 제자를 타락시켰구려.”
예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여명은 난감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아니, 저는 그냥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
“한 번만 더 분위기 풀면, 부리에서 설탕이 나오겠소.”
“….”
이때다 싶어 바이콘과 유니콘이 동시에 입을 열려 했기에, 여명은 마나를 써서 둘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걸 본 성녀와 네티가 동시에 미소 지었다. 그렇게 조금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일행 모두가 옷을 갈아입길 잠시.
갈아입은 옷들과 흔적을 싹 다 인벤토리에 넣은 여명은 다룰마를 불렀다.
“다룰마, 이제부터 다룰마의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 의견? 무슨 의견 말인가?”
“일주일 뒤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하셨죠? 그거 시카고에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다른 도시에서도 할 수 있는 겁니까?”
다룰마는 문뜩, 이 질문을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일행의 방향이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시카고에 남아야 한다면 시카고로, 아니라면 방향을 돌려 세인트루이스 같은 곳으로 가지 않을까.
안전을 생각한다면, 시카고를 벗어나는 게 옳았다.
이 드넓은 미국 땅에서 마음먹고 주 경계선을 넘어 다닌다면, 적어도 몇 달은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생각을 멈춘 다룰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여명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일주일 뒤에, 둔간 중공업 본사에서 혈족의 회의가 있네.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 회사의 본사는…”
“시카고에 있죠.”
“다른 도시에 있다가 시카고로 돌아오는 건 어려울 걸세. 일주일 사이에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나를 노리는 혈족들은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시카고로 통하는 길을 봉쇄할 테니.”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시카고 내부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
말을 끝낸 다룰마는 수염을 꾹 붙잡으며 생각했다. 여명이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해도 이해하자고.
당연한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여명에게 많은 걸 내주었다 해도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지만 여명은 처음 질문을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빨리 시카고로 돌아가죠.”
“….”
이렇게 쉽게? 아무런 협상도 없이?
다룰마가 말을 잃은 사이, 여명 일행은 각자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적당한 곳까지 비각술로 이동하자, 성녀랑 다룰마는 여명이 챙겨, 나랑 네티는…
등잔 밑이 어두우니까, 대놓고 호텔 방을 잡는 건 어떨…
아예 관광객으로 변장해서 일주일 내내 돌아다니는 건요? 형부, 저는 이게…
유흥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딜라인가 뭔가 하는 네크로맨서를 보내놓지 않았…
갑자기 대화에서 소외된 다룰마는 멍하니 여명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다룰마를 본 성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일행의 대화에서 빠졌다. 그녀는 다룰마에게 다가와 말했다.
“감동했어요?”
“감동보다는… 조금 놀란 것 같습니다.”
“왜요, 이득도 없이 다룰마를 도와줘서요?”
정곡을 찔린 다룰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몹시 위험할 겁니다. 저를 돕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보답은 확실히 줄 거잖아요?”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다룰마는 고개를 저었다.
“겨우 돈 때문에 절 돕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 경쟁자가 더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여명 군은 절 배신하지 않을 테지요.”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계획을 정리하는 여명과 세티의 얼굴을 바라볼 뿐.
다룰마는 그녀와 같은 것을 보며 말했다.
“혹여, 제가 모르는 보상 같은 게 있는 겁니까?”
“보상?”
“다섯 신께서 이 우둔한 드워프를 도와주는 대가로 천국 약속하셨다거나…”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에, 다룰마는 말끝을 흐렸다.
그런 생각은 성녀도 마찬가지였는지,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신께선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예, 그렇지요. 하지만 제 머리로는 그것 외에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상인에게 선의란 단어는 불확실성과 같은 단어입니다. 아, 두 분을 못 믿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냥…알고 싶을 뿐입니다. 왜 저 같은 드워프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다룰마는 그렇게 말하며 여명에게 처음으로 주었던 물건, 세계수의 결정을 떠올렸다.
그건 성녀를 통해 성국의 늙은이들에게 전해질 뇌물이었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는 거의 빼앗기듯 결정을 여명에게 넘겼다.
그 과정에 선의가 있었나? 없었다.
있는 건 오직 하나, 성녀와 여명의 미래를 향한 어수룩한 투자뿐.
그 이후 여명에게 주었던 다른의 호의도 비슷했다. 한국 정부, 황금 옥새, 산의 눈물, 기타 등등.
매몰 비용이 발생한 이상, 투자를 멈출 수 없었다…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이런 선의를 받을만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단순히 여명이 호구인 걸까? 하지만 다룰마가 여태껏 봐온 여명은 호구와 거리가 멀었다. 정은 많을지 몰라도, 필요할 때는 매섭게 끊어내는 타입의 인간.
그러면 대체 왜?
다룰마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성녀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이렇게 생각해봐요. 다룰마 덕분에 수천만 명이 목숨을 구했다면?”
“…예?”
“저를 차원문 너머로 밀입국 시켜준 덕분에, 수천만 명이 죽을 미래가 바뀌었다고 한다면…이 정도 선의는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다룰마는 그게 무슨 비유나 농담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렇다기엔 성녀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내가 성녀님을 도운 덕분에 수천만이 살았다?’
상상만으로도 수염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다룰마는 수염을 붙잡은 채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나비 효과일 뿐, 제가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나비에게 태풍 피해 보상금을 내놓으라는 사람은 없는 법이잖습니까.”
이런 반론은 예상하지 못한 건지, 성녀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리볼버를 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준다는 데 자꾸 지랄할래요?”
“….”
“내가 이런 도움을 받아도 되나 우울해하지 말고, 어? 우리 여명이가 참 착하구나! 성녀님께서 시카고에 볼일이 있으시구나! 응?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호의에 어떻게 보답할까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계속 징징거릴래요?!”
철컥, 리볼버가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
“…예, 성녀님.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그렇게다룰마가 슬쩍 성녀와 거리를 벌리고얼마 지나지 않아, 작전 회의가 끝났다.
꽤 괜찮은 작전을 세운 건지, 여명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네티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이름의 소녀는 조금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다룰마는 여명의 계획을 듣고 나서야 그 표정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명과 세티란 소녀가 함께 내놓은 계획은…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으니까.
“다룰마,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 알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