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45)
을 위한 세계는 없다-245화(245/817)
〈 245화 〉 세 개의 뿔, 인연, 악연, 드워프. (6)
* * *
***
카가각!!
붉은 아지랑이를 따라 아스팔트가 뒤집히고, 차가 날아다녔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으나, 쫓기는 드워프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달려! 톈린! 더 빨리 달리란 말이다!”
늙은 드워프는 굴라그를 기억했다.
그 지옥 같은 추위와 비인간적인 실험으로 가득 찬 곳에서, 가장 끔찍했던 건 ‘훈련’을 빙자해 살인을 저지르던 괴물들이었다.
주가시빌리, 오, 다섯 신이시여.
톈린에게 매달려 뒤를 본 할 파갈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아지랑이라니, 어디서 어쭙잖게 주가시빌리를 깨달은 애송이가 아니었다.
시베리아에서도 거의 볼 수 없었던, 완성형 주가시빌리.
“이런, 썅.”
거리가 계속 좁혀지자, 톈린은 걸음을 멈추고 드워프를 땅에 내려놨다.
그리고 할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톈린이 권총을 들며 소리쳤다.
“당장 역으로 달리십쇼. 이대로면 둘 다 잡힙니다.”
“톈린, 자네…!”
“어서요! 시간 없습니다!”
할은 벌벌 떨면서도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의 등 뒤에서 시민들의 비명이 들리고, 총성이 귀를 찔렀다.
탕!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가슴에 응어리진 공포는 그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 소리쳤으니까.
그렇게 할이 현장에서 멀어지는 사이.
톈린은 코앞까지 다가온 여명에게 한 번 더 권총을 발사했다. 일부러 빗맞히긴 했지만, 아지랑이를 뚫고 지나가는 총알은 꽤나 그럴싸했다.
…뭐, 아무튼.
“이거 이래도 괜찮냐?”
톈린은 아지랑이를 피하며 물었다. 여명이 달려오며 박살 낸 도로를 보니, 피해 금액이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죽은 사람은 없으니까.”
깨진 유리에 맞아 다치거나, 들썩이는 차에 앉아 있던 사람은 있겠지만.
“그래? 근데 그러면 리얼리티가 좀 떨어지지 않겠냐? 이만한 일에 사상자가 없다는 건…”
톈린은 마법과 총을 연달아 쏘아대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래도 리얼리티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건 좀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어진 여명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호위 중이던 초인이 중상을 입는 정도면 모두 리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뭐? 이 새끼야?”
톈린이 기겁하며 얼음 방패를 준비했으나, 여명은 이미 그에게 비각술을 펼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씹, 다룰마한테 백지수표 준비하라…! 커헉!”
펑!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톈린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간 톈린의 몸은 전신주에 부딪혀 튕겨 나가더니, 가까운 슈퍼마켓의 과일 바구니 위로 추락했다.
오렌지 더미 사이로 팔다리가 축 늘어진 게, 모르고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무 세게 찼나?
여명이 아지랑이 속에서 살짝 미안함을 느끼는 사이, 멀리서 구경하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화끈한 반응이었다. 거기다 때마침, 저 멀리서 경찰 사이렌이 들려왔다.
여명은 이제 물러나야 할 때라는 걸 깨닫고 아지랑이를 더 짙게 피워냈다.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아지랑이.
용기 있는, 혹은 성능 좋은 카메라를 가진 시민들은 그 아지랑이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까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찰이 도착하고 아지랑이를 포위했는데…
바람과 함께 흩어지는 아지랑이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텅 비어있었던 것처럼.
***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는 조금 특이했다.
두툼하게 저민 토마토와 쇠고기 소시지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케첩도 뿌리지 않고 커다란 피클을 통째로 올리다니?
‘정말로 맛있는 거 맞아? 가게 평점은 좋던데…’
네티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핫도그를 한입 씹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별이 반짝였다.
부유한 드워프가 왜 핫도그로 아침을 때우나 했더니, 맛 때문이었구나?
그렇게 한동안 핫도그를 우물거리던 네티는, 문뜩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투명 망토 아래, 허공에 머리만 둥둥 뜬 여명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맛있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네티. 여명은 피식 웃었다.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네티는 그제야 이 핫도그가 형부의 아침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꿀꺽, 입에 남아있던 핫도그를 삼킨 뒤 조심스레 반쯤 남은 핫도그를 내밀었다.
“…드실래요?”
실수한 강아지처럼 눈동자를 굴리는 네티를 내려다보던 여명은 손을 뻗어 그녀의 짧은 단발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점심 좀 일찍 먹지 뭐.”
“….”
네티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건 말건, 여명은 투명 망토를 벗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서 있는 건물 옥상 저 멀리, 네티와 함께 박살 낸 도로가 보였다.
경찰과 기자들이 에워싼 도로는 혼잡하다 못해 난장판에 가까웠는데, 예상대로 크게 다치거나 죽은 민간인은 없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은 톈린 뿐.
아마 꼬박 일주일은 요양해야 하지 않을까? 여명은 미안함에 쓴웃음을 삼키면서도 이 정도로 끝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호위와 드워프 모두 한 달은 병원 신세를 지게 됐을 테니까.
하필 첫 목표의 호위가 톈린일 줄이야. 예상외의 전개였지만 뭐, 그래도 그가 적당히 연기에 가담해준 덕분에 더 적은 피해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살아 돌아간 드워프가 주가시빌리를 알아봤으니, 이제 둔간 내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지도를 꺼내 다음 대상을 확인했다.
“…바로 다음으로 가시게요?”
어느새 핫도그를 전부 먹어 치운 네티가 지도 사이로 쏙, 고개를 내밀었다.
여명은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과 가장 먼 위치를 연달아 짚으며 말했다.
“첫날에 몰아치는 편이 효율적이니까… 오늘은 좀 빡빡하게 가자.”
빡빡하게? 네티는 살짝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형부, 오늘 몇 곳이나 습격하시려고요?”
“절반?”
“어… 시작이 절반이다… 뭐, 그런 뜻인 건가요?”
“아니?”
“….”
“내일부터 따로 할 일도 있고… 보안이 가장 약할 때 날뛰어야지. 안 그래?”
합리적인 말이었기에, 네티는 반박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뒤지게 고생할 거란 확신이 스멀스멀 등허리를 차고 올라오는 가운데, 여명이 옥상 난간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그럼 바로 갈까? 점심 먹으려면 그전에 적어도 세 명은 더 습격해야지.”
“….”
설마 핫도그 뺏어 먹어서 삐지신 건가? 그런 실없는 네티의 생각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각자 투명 망토를 쓰고 비각술을 펼쳤다.
***
[긴급 속보입니다. 조금 전 노스 킴볼 애비뉴 도로에서 정체불명의 초인이 테러를…] [테러범이 노린 것은 둔간 의료 기기의 사장인 할 파갈다 씨로 보이며, 파갈다씨는 다행히 호위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대낮부터 드워프를 노렸습니다. 이건 암살이 아니라 테러입니다! 분명 공화당의 종족 차별주의자가…!] [올턴 주지사께서는 이번 일로 도시 사업에 차질이 생겨선 안 되며, 차원문 주변의 방비를 더욱 강화할 것을…]TV 채널을 돌리던 성녀는 푸 한숨을 내쉬었다.
여명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정작 화면에 보이는 건 정치인들과 아나운서, 그리고 조잡한 화질의 붉은 아지랑이뿐.
몇 번 더 채널을 돌리던 그녀는 리모콘을 내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차원문과 시카고 시내가 동시에 보이는 비지니스 호텔의 꼭대기 층.
전망부터 장식까지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이곳은 여명이 떠난 직후 세티가 일행을 이끌고 온 장소였다.
코르부스가 마법진을 설치하는 데더할 나위 없는 곳이고, 저격 포인트로도 나쁘지 않은 곳이라나?
척 듣기에는 좋아 보였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겨우 일주일을 빌리는데, 시카고 외곽에 있는 가정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라니.
다룰마와 성녀는 돈을 아껴서 일반 호텔에 묵자고 했지만, 세티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돈 가진 사람이 정하는 거지.
추적을 피해 가진 카드를 전부 버린 다룰마와 원래 가난한(?) 성녀는 세티의 지갑 앞에 무릎 꿇었다.
마지막 희망인 코르부스 또한 어디로 가건 상관없다는 태도였으므로, 세티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성녀는 울쓰바티의 신전이 떠오를 만큼 사치스러운 공간을 가로질러 세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커다란 대리석 식탁 앞에 기댄 채로 뭔가 시간표 같은 걸 적고 있었다. 성녀는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든 뒤 세티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해?”
성녀가 은근히 묻자, 세티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나머지 계획 점검하는 중이야.”
“…드워프 습격은 여명이 알아서 하는 거 아니었어?”
“그거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아. 네크로맨서 추적이랑, 용의 심장을 다루는 장인을 찾는 거랑 또…”
“…또?”
다음 순간, 세티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는 무언가 가늠하듯 성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
“저기… 그런 눈으로 보면… 좀… 부끄러운데…”
성녀가 자기도 모르게 세티의 시선을 피하자, 그녀의 주머니 속에 있던 유니콘이 한마디 했다.
[처녀여,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세티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시간표를 밀어내고 지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성녀.”
“응?”
“너 요즘 너무 노골적이야.”
“…노골적이라고? 뭐가?”
“여명이랑 눈밭에서 눈사람 만들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는 거 같다고.”
푸흡! 예고도 없이 날아온 말에 성녀는 마시던 생수를 뿜었다.
지도에 물이 튀었지만, 세티는 여전히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성녀인 걸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래? 적어도 복수가 끝낼 때까지는 숨겨야지.”
“어… 세티? 잠깐만, 갑자기 왜 이런 대화로 흘러가는 건지 나는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아, 그러셔? 머릿속에 가득한 마구니나 치우고 말하시지?”
“….”
성녀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세티가 그녀의 안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말리지 않을 테니까, 너무 급하게 가지 마.”
“세, 세티…”
말끝을 흐리던 성녀의 머리로 뒤늦게 세티가 한 말이 인식됐다.
“…뭐? 안 말린다고?”
“왜, 말리면 안 하려고?”
“….”
성녀의 머리는 필사적으로 세티의 말을 해석했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뜻은 딱 하나뿐이라는 걸 10번쯤 재확인한 뒤, 짧게 심호흡했다.
[처녀여, 제발 정절을 소중히 하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각… 읍! 읍읍!]비명을 지르는 유니콘의 입을 틀어막은 성녀는 세티에게 다가가 양팔을 크게 벌렸다.
“세티…!”
“뭐, 왜.”
“…고마워.”
성녀가 그대로 세티를 껴안으려 하자, 세티는 곧바로 지도를 놓고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우라간의 몸통을 집어 성녀에게 휘둘렀다.
퍽, 퍽! 바이콘도 입이 막혀 있는 건지, 성녀를 때릴 때마다 비명 같은 연기를 내뿜었다.
아마 더러운 처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내뱉고 있으리라.
뒤이어 유니콘 또한 두 소녀가 나눈 대화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깨닫고는, 그제야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텔 최상층은 갑자기 뿜어져 나온 연기와 섬광으로 가득 찼다. 조용히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룰마는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었다.
“유니콘과 바이콘을 동시에 미치게 하다니… 역시 성녀님이시군요.”
바닥에서 깃털로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코르부스는 다룰마의 목소리를 따라 성녀와 세티를 바라봤다.
그리고 기어코 성녀가 세티를 껴안을 때쯤,그녀는 이 자리에 없는 제자의 미래를 걱정하며 혀를 찼다.
“벌써부터 저 무슨… 쯧, 제자의 고생길이 훤하구려.”
***
시카고가 노을에 젖어 드는 시간, 둔간 중공업 사내 비밀 서버에서는 가상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젊은 3세대 드워프는 물론이고, 임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회의.
비밀회의니만큼, 서버에 마련된 자리는 고작 열두 자리에 불과했다.
삐빅
깜빡거리던 빈 서버 페이지 위로, 누군가 접속하는 소리가 울렸다.
[1번]이라 적힌 자리에 불이 들어오기 무섭게, 다른 번호에도 연달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2번, 3번,4번,5번,6번, 8번, 9번, 11번…
아홉 자리는 금세 찼지만, 나머지 세 자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차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1번이 가장 먼저 마이크를 켰다.
[7번, 10번, 12번이 당했나.]전자음으로 조작된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11번이 마이크를 켰다.
[하루 만에? 우리 경호가 이거밖에 안 됐나?]그러자 이번에는 2번이 끼어들었다.
[경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소.]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이 꼴이 된 거냐? 염병하지 말고 당장 오늘부터라도 경호를 늘려!] [불가하오. 시카고 한가운데서 드워프가 초인 경호원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다니? 공화당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잔 거요?] [좆같은 정치 이야기 집어치워! 동포들이 당하고 있는데, 이대로 손 놓고 있자는 거냐!?]11번과 2번이 언성을 높이던 그때. 1번이 둘 사이를 중재했다.
[그만.]1번이 이 회의의 주최자인 듯, 그가 끼어들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짧은 정적 찾아오고 나서야, 1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누구 탓을 하려는 게 아니라,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겁니다. 모두 의견 주십시오.]짧은 침묵이 흘렀다가, 3번이 마이크를 켰다.
주가시빌리란 단어가 나온 직후, 너 나 할 것 없이 마이크를 켜고 소리쳤다.
[주가시빌리? 헛소리!]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무술이 어디 한두 개인가? 그걸 어떻게 알아보겠어?] [맞아, 할은 초인도 아니잖아?] [그는 굴라그에 있었다. 주가시빌리를 못 알아볼 리 없어!] [염병할, 언제적 소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 서버에 가주도 있었나?]저들끼리 떠들기를 한참, 침묵이 찾아오고 나서야 1번이 다시 마이크를 켰다.
[그 저주받은 것들은 멸종했을 텐데.]다른 누구도 아닌, 맨정신이던 시절의 가주가 그렇게 만들었다.
[직접 본 드워프도 있지.]그러자 조금 전 헛소리라고 소리쳤던 9번이 마이크를 켰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가주가 모스크바의 정치인들과 노멘클라투라에게 막대한 돈을 뿌려 주가시빌리들을 시베리아 지하 미로에 몰아넣고, 모든 출구를 막아 묻어 버린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그것이 가주의 복수였다. 살기에 미친 살인귀들이 미로에 갇혀 서로 잡아먹고, 죽이며 스스로 멸종하게 만드는 것.
그때, 1번이 말했다.
[지하 미로에 처박힌 주가시빌리들은 모두 죽은 게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입구를 무려 11년이나 감시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주가시빌리도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9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다른 드워프들은 조금 다른 상상을 떠올렸다.
[…11년 이후에는 안 지켜 봤다는 소리로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떤 생물이 물도 없는 지하에서 11년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주가시빌리는 생물이 아니야. 살기를 먹는 괴물이지.] [비과학적인 소리는 그만한 됐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지. 만약 지금 우리를 습격하는 녀석이… 마지막 생존자라고 가정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나?]그 순간, 회의에 참여한 모든 드워프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무고(??) 혹은 고독(??).
맹독을 가진 벌레와 파충류들을 한 항아리에 넣어놓고 서로 잡아먹게 한 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마리에게 저주를 몰아넣는 지구의 악독한 비술.
만약 지금 살아남은 주가시빌리가 그런 녀석이라면…
[그런 거 치곤 사망자가 전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다친 드워프야 많습니다만…]5번이 께름칙하게 말했지만, 다른 드워프들은 이미 자신들의 상상에 빠져버린 뒤였다.
[오늘은 부상으로 끝났지만, 내일은? 주가시빌리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옳소! 녀석이 피를 본 순간 온 시카고가 붉게 물들 거다!] [이건 단순히 습격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당장 호위를 늘려야 한다니까!]또다시 이어지는 소란, 그리고 이번에도 소란을 정리한 건 1번이었다.
[그만, 그만들 하고 제 말을 경청해주십시오.]다시 조용해진 회의 페이지 위로, 1번이 어떤 데이터를 띄웠다.
일인군단 호세 아기날도를 시작으로 성검, 메이커, 브라우닝, 알파 원, 마탑주…적어도 세계 30위 권에 드는 초인들의 목록.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무작정 경비를 늘려봤자 주가시빌리의 밥이 될 뿐이니, 적어도 단번에 녀석을 제압할 만한 초인을 불러야 합니다.] [그럼 성검은 어떻소? 호주 정부가 이번에 우리 기업과 협업을 요청했…] [그 탐욕스러운 죄수의 후손들이 성검을 내어주면서 그것만 요구하겠습니까? 분명 원천 기술이나 주식을 내놓으라고 하겠지요! 그러니 호주 말고, 연방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합시다. 가능하면 알파 원이나 브라우닝 같은 빅 쓰리로!] [둘 다 레드넥 꼴통 새끼들이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주지사에게 부탁해 주 방위군을 동원하겠다!] [알파 원이 레드넥이라는 건 오해요. 그는 그냥… 좀, 솔직한 것뿐이오.] [두 번 솔직하면 이 나라의 모든 동성애자를 때려 죽이겠… 으응?]11번과 2번이 또다시 언성을 높이던 바로 그때, 비꼬던 11번 드워프의 마이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고 무언가가 착지하는 소리.
[이… 씨발… 이거… 방탄유리… 아아악!]곧이어 드워프의 비명 소리가 마이크를 흔들었다.
무언가 부서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마지막으로… 낯선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두 명… 둔간 중공업 내부의 이너서클인가?]드워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황급히 회의 프로그램을 종료했고, 누군가는 침을 삼키며 마이크를 주시했다.
그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이어지길 잠시.
1번과 5번만이 남은 회의 화면을 향해, 1번이 마이크를 켰다.
[누구냐, 너.]노골적인, 하지만 그렇기에 진실한 질문.
11번의 마이크를 쥐고 있던 여명은 조금 장난기를 담아 대답했다.
[가주의 핏줄과 인연이 있는 사람.]진실과 거짓이 반반 섞인 말.
조롱의 의미로 꺼낸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너는 역시…? 허, 좋아, 그러면 나와 거래하지 않겠나?]뭐지 이 새끼? 여명은 마이크를 붙잡은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거래? 무슨 거래?] [우리와 손잡자. 그러면 가주의 위치는 물론이고, 그의 직계 혈족을 죽일 수 있게 도와주마.]그 순간, 여명은 직감적으로 1번 마이크 너머에 있는 드워프가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녀석이, 다룰마를 노리는 진범이다.
[…장난질은 거기까지만 하지. 거래는 서로 필요한 걸 나누는 일 아닌가. 네가 알려주는 정보가 없어도, 난 혼자서 충분히 둔 가문에 복수할 수 있다.]여명은 최대한 동궁정백의 말투와 목소리를 따라 하며 말했다.
다행히 그 말투가 먹힌 건지, 1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워, 워 오해하지 마. 이건 선수금에 불과하니까. 그쪽이 진짜로 둔 가문 직계의 핏줄을 끊는다면, 더 좋은 걸 주지.] [더 좋은 거?] [복수 이후의 삶.] [….]여명의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이해한 걸까? 녀석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새로운 신분과 막대한 재산…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까지. 어떤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