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48)
을 위한 세계는 없다-248화(248/817)
〈 248화 〉 세 개의 뿔, 인연, 악연, 드워프. (9)
* * *
***
빌딩 사이로 부는 도시풍과 미시간 호에서 불어오는 해륙풍이 만나는 시간.
여명은 가장 먼저 일어나 조용히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 두 번에 심호흡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주방으로 가, 빈 피자 상자가 쌓인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잔에 담긴 김 빠진 콜라를 홀짝이며 청소를 끝낸 그는 조용히 펜트하우스를 빠져나와 시내로 나왔다.
냉장고에 별다른 식재료가 없는 탓이었다.사실, 맥도날드와 피자로 해결하는 식사에 진저리가 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미국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한국 사람은 가끔 매콤한 걸 먹어줘야 하는 법.
기왕이면 한인 마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새벽 시내에 그런 건 없었다.
한참 동안 거리를 돌아 다녀봤지만, 찾을 수 있는 건 24시간 운영하는 유기농 마트가 전부.
“저기요, 거기 손님!”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마트 안으로 들어서려는 여명의 발을 붙잡았다.
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잠시 인터뷰 괜찮으실까요?”
방송국 여기자인가? 뒤에 서 있는 카메라맨을 보아하니, 아마 아침 뉴스라도 찍는 것 같았다.
“아뇨, 시간이 없어서.”
여명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하자, 여기자는 그의 앞을 막으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딱 하나! 딱 한 질문만 받아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나 말고 다른 사람 알아보쇼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하필 마트에 들어가는 손님은 여명 말고 아무도 없었다.
“…바쁘니까 빨리하시죠.”
여명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여기자는 활짝 웃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여명과 나란히 서더니,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바로 어제, 붉은 별에 의해 도시 곳곳에서 테러가 벌어졌는데요. 민주당이 강세인 시카고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민주당? 뭔 개소리야?
여명은 뚱한 표정을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건 살짝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고, 여기자는 이때다 싶어 말을 이었다.
“그는 민주당의 주장처럼 정말 종족 차별주의자일까요? 아니면 드워프에게서 미국인의 일자리를 되찾으려는 영웅일까요?”
“어… 그건…”
“민주당의 주장과 달리, 사상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는데요. 역시 붉은 별은 드워프의 시장 잠식에 항의하는…”
전형적인 유도 질문. 여명은 그냥 장단 맞춰줄까 하다가, 자신이 얼굴에 환상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엿 먹여도 얼굴만 가리면 그만이라는 뜻.
“아니, 민주당이고 뭐고, 그런 거 상관없고.”
깨달음보다 빠르게 여기자의 말을 끊은 여명은,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다 언론 때문이야. 알아?”
“…예?”
“아니, 별명부터가 그렇잖아. 붉은 별이 뭐야, 붉은 별이? 지금이 냉전 시대도 아니고… 이거, 이거 딱 봐도 빨갱이 몰이하려는 거라니까?”
“….”
인천 뒷골목 식당에서 정치를 논하던 아저씨들의 투박한 말투.
당황한 여기자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여명은 먼저 입을 나불거렸다.
“드워프랑 사이 안 좋으면 다 빨갱이야? 응? 빨갱이냐고! 언론이란 것들이 말이야, 정치인들은 좌우 가릴 거 없이 드워프 돈 처먹고 있는데, 그런 건 찍소리도 못하면서!”
“저기, 자, 잠깐…”
분위기를 탄 여명은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까지 했다.
“어!? 영웅이건 테러범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일단 이름부터 좀 제대로 지어줘야 할 거 아니야! 지 자식 이름도 그따위로 지을 거야?!”
그가 버럭 소리 지르기 무섭게, 여기자는 카메라맨에게 황급히 끊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붉은 별이 뭐야, 붉은 별이?]성녀는 여명이 있는 주방을 힐끗 확인한 뒤, 다시 TV를 바라봤다.
[드워프랑 사이 안 좋으면 다 빨갱이야? 응? 빨갱이냐고!]아침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는 억지로 웃으며 당황을 숨기고 있었고, 게스트들은 저런 의견도 있었다는 식으로 상황을 넘겼다.
아마 PD가 재밌으라고 넣는 장면 같은데…
[이름부터 좀 제대로 지어줘야 할 거 아니야! 지 자식 이름도 그따위로 지을 거야?!]성녀는 황급히 넘어가는 카메라 화면을 보며 앞으로 절대 빨갱이라고 놀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에 반해, 같은 화면을 보고 있던 네티는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핫!”
뭐가 그리 웃긴 지, 웃다가 소파 아래로 떨어지는 네티, 부리를 딱 다무는 코르부스, 못 본 척 커피를 홀짝이는 다룰마,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동생의 배를 밟아버리는 세티까지.
어딘가 풀어진 아침 풍경은 여명이 밥을 다 차릴 때까지 이어졌다.
“먹을 사람은 와서 먹어, 차린 건 없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명이 차린 아침상은 풍족했다.
라면과 대충 고춧가루를 버무려 만든 겉절이,계란 프라이와즉석밥, 그리고 밥에 익숙하지 않은 다룰마를 위한 구운 보리빵과 잼.
“잘 먹겠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식탁 앞에 둘러앉은 일행은 감탄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그릇 위로 숟가락과 포크가 오고 가는 내내, 조금 전 TV 인터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티가 피눈물의 환상을 뒤집어쓴 여명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세티는 동생의 옆구리를 꼬집어 사고를 방지했다.
…뭐, 아무튼.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세티가 입을 열었다.
“연금술사를 찾으러 가는 거, 언제 갈 거야?”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계란 프라이를 반으로 갈라 네티와 성녀의 그릇 위에 반반씩 나눠준 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바로 가자.”
“…바로?”
“괜히 밤에 갈 필요 있어?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기왕이면 일찍 가는 게 낫지.”
당연히 밤에 연금술사를 습격할 거라고 예상했던 세티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해보니, 연금술사와 굳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쪽은 돈과 정보를 들고 가는 손님 아닌가. 왜 당연히 싸울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건 그런데…”
세티는 애써 말끝을 흐렸다.
어째서일까, 연금술사와 한바탕 드잡이질하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 아니, 확신이 등허리를 쓸고 지나갔다.
“…안 되겠다. 나도 같이 갈게.”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성녀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나도! 나도 갈래.”
여명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걸 본 네티는 눈치껏 설거지하러 갔고, 세 사람은 각자 후식과 함께 무기를 챙겼다.
커피 두 잔, 아이스크림 하나, 탄창을 꽉꽉 채운 소총탄 수백 발과 수류탄 열두 개.
“…전쟁하러 가냐?”
여명이 한마디 했지만, 성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낭에 무기를 챙겼다.
탄 부족으로 고생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나?
결국, 성녀가 완전무장에 가까운 상태가 되고 나서야 일행은 출발할 수 있었다.
***
시카고 운하.
시카고의 역사와 함께해온 이 운하는 시카고 시내를 가로질러 수백 킬로 떨어진 미시시피강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일리노이미시간 운하의 일부였다.
긴 시간 동안 미국 중서부 물류를 책임져온 운하는 자연스레 온갖 이권을 창출해왔는데, 차원문이 열린 뒤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란 표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리고 젖과 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벌레들이 몰려드는 법.
시카고 운하 주변에 암시장이 생겨나는 건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미국답게, 시카고 암시장은 그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여명과 세티가 본 적 있는 인천 암시장을 아득히 뛰어넘는 규모.
차원문에서 넘어온 영약과 보물은 물론이고, 차원문을 넘어갈 마약이나 무기들조차 시카고 암시장을 거쳤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조금 과장해서,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무엇이라도 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카고 암시장이었다.
“…그런 거치곤 입구가 영 구린데.”
총알로 가득 찬 배낭을 멘 성녀는 ‘영업 중’ 팻말을 걸어 놓은 타코 가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뭔가 이상해?”
“아니, 암시장 입구면 그 뭐냐, 막, 분위기 있는 술집이나, 클럽… 뭐 그런 거 아니야?”
암시장에 오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런가, 성녀는 뭔가 이상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거보다 더 후줄근한 인천 암시장의 입구를 기억하고 있던 세티와 여명은 별 감상 없이 타코 가게로 향했다.
“그런 곳도 있기야 있지. 근데 그런 곳은 이 시간에 안 열잖아.”
“그런가?”
성녀가 쪼르르 두 사람을 쫓아 타코 가게로 들어가자, 아침 겸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 찬 가게 내부가 세 사람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달리 타코입니다. 몇 분이세요?”
“세 명, 식사는 지하에서 먹고 싶은데.”
식사는 지하에서. 여명이 산초가 알려준 암시장 구호로 대답하자, 종업원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는 아줌마 아저씨로 변장한 세 사람을 쓱 훑었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매장에 지하는 없는데요?”
여명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순식간에 종업원의 펜을 낚아챘다. 뒤이어 종업원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펜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푹 찔러 피를 냈다.
“….”
살짝 피가 흐른 손가락은 눈에 띄는 속도로 재생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초인의 증거.
펜을 돌려받은 종업원은 주변을 확인하더니,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장은 있으신가요?”
“아니, 초대장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게… 며칠 전부터 도시가 좀 흉흉해서요. 초대장 없이 들어오시는 건 힘들겠습니다.”
“초대장은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제 담당이 아니라서.”
그 말을 끝으로 도망치는 종업원을 향해, 여명이 한마디 했다.
“지금 이 가게에 초대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
“한 명쯤은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노골적인 협박. 종업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여명을 바라봤다.
“그 방법은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실 생각이 아니시라면요.”
그때, 여명 대신 성녀가 슬그머니 배낭을 땅에 내려놨다.
지이익 배낭 지퍼를 연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수류탄을 꺼냈다.
일련의 행동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흡사 물병을 꺼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수류탄 하나, 둘, 셋, 넷, 다섯… 종업원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일행의 발치에 수류탄이 쌓일 때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종업원이 말했다.
“…건물 왼쪽 끝, 주방 사이 뒤편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초대장은?”
“…초인이시니 초대장 없이도 입구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저 위험한 물건들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성녀는 그제야 내려놨던 수류탄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아주 느긋한 속도로 수류탄을 챙긴 성녀는 마지막 하나를 가방에 넣지 않고, 종업원의 손에 쥐여줬다.
“가져, 팁이야.”
뭐 이딴 또라이가 다 있어 라는 표정의 종업원을 뒤로한 채, 세 사람은 계단으로 향했다.
암시장으로 향하는 계단은 지하 냉장고로 위장해 있었는데, 경매장에서 봤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은폐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경매장에 있던 마법진보다는 훨씬 약했기에, 몸으로 미는 것만으로도 쉽게 뚫렸다.
“협박이 먹혀서 다행이긴 한데… 그러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랬어?”
계단을 내려가면서, 여명이 성녀에게 물었다. 성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 종업원 사정이지.”
“….”
“우리는 그냥 얼굴 바꾸고 또 다른 입구로 가면 그만이잖아.”
세티는 감탄과 경악 사이 어딘가쯤에 있는 감정을 담아 성녀를 바라봤다. 아직 상식이 남아있었는지, 성녀는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몇 층 내려가지 않아 일행은 계단의 끝,하수도와 비슷한 지하 통로에 도착했다.
“…지하 수로에 따로 물길을 낸 건가? 어마어마한 규모네.”
세티의 말마따나, 통로의 중앙에는 시카고 강에서 흘러드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물을 따라가면 암시장의 입구가 나오리라.
“걷는 게 일이네.”
배낭을 들어주겠다는 여명의 제안을 거절한 성녀가 꾸역꾸역 걸어가는 동안, 일행은 드문드문 다른 계단과 연결된 입구와 다른 암시장 손님들을 볼 수 있었다.
“…다들 가면 쓰고 있네? 무슨 규칙 같은 건가?”
다른 손님들을 힐끗거리던 성녀가 말했다. 여명은 계속 걸으며 대답했다.
“규칙은 아니고, 암묵의 룰이야. 얼굴 까고 다닐 만한 곳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우리도 가면 써야 하나?”
“왜, 쓰고 싶어?”
이미 얼굴에 피눈물의 환상을 덮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싶기도 했지만, 남들이 다 가면을 쓰고 있는 곳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것도 조금 걸렸다.
“환상으로 그런 것도 돼? 그럼… 나는 매 가면. 매 가면으로 씌워줘.”
여명은 기꺼이 환상을 추가했다. 그리고 기왕 하는 김에, 인천에서 썼던 가면을 재현해 세티와 자신의 얼굴에 씌웠다.
매, 검은 개, 태양.
각자 가면을 쓴 세 사람은 자연스레 다른 손님들 사이에 섞여 수로를 가로질렀다.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암시장 입구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암시장 입구는 드레이테리얼에서 봤던 지하 벙커 입구와 유사했다. 거의 5m에 육박하는 두꺼운 철문이 벽을 통째로 틀어 막고 있는 광경.
굳이 차이가 있다면 주변에 무장한 경비들이 쫙 깔린 것 정도일까.
‘지하 벙커를 개조한 건가?’
어쩌면 군사 기지를 개조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건, 암시장을 만든 자가 순수한 민간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네이비 피어의 경매장도 그렇고 이 암시장도 그렇고… 분명 정부와 관련된 사람이겠지.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암시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성녀가 감탄을 내뱉었다.
“오…”
그럴 만도 했다. 시카고 암시장의 내부 풍경은 외부에서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으니까.
딱딱 규격을 맞춘 유리 천장 아래, 커다란 도로가 쫙 뚫려 있는 모습이라니.
도로 양옆에는 다양한 크기의 가게와 노점들이 쫙 늘어서 있었는데, 시장보다는 쇼핑몰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시장통이나 다름없던 인천 암시장과 비교하면 진짜 ‘사업장’이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여명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질서가 잡혀있는 곳이라면, 의외로 별문제 없이 거래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성녀가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보며 시간을 끌었음에도, 세 사람은 의외로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연금술사의 공방이라기보다는, 작은 병원 건물처럼 보이는 곳.
그 건물 입구에는 가면을 쓴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줄의 길이만 봐도 족히 수십 명은 돼 보였다.
거기다 앞줄에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 후줄근한 게, 아마 며칠 동안 계속 줄을 서 있던 것 같았다.
“…새치기할까?”
성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에 털 난 소리를 내뱉었다. 여명은 휴대폰을 꺼내며 고개를 저었다.
“우선 전화부터 해보자.”
“…여태껏 안 받은 전화를 지금 받을 거 같진 않은데. 오는 동안 거의 열 번도 넘게 했잖아.”
세티가 그렇게 지적했음에도, 여명은 한 번 더 카할 마그두가 남긴 번호를 입력했다.
혹시 암시장 안에서라면 연락되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봤으나…
뚜 뚜 뚜
역시나, 번호는 연결되지 않았다. 카할 마그두가 그를 엿 먹일 생각으로 번호를 남겼을 리 없으니, 상대가 안 받고 있다는 소리인데…
“새치기? 콜?”
성녀가 다시 새치기를 제안하자, 세티는 한술 더 떴다.
“그러지 말고, 그냥 문 박살 내고 들어가자.”
“…무단 침입은 범죄인데?”
“이 암시장 자체가 불법이야.”
그렇네? 뭔가 깨달음은 성녀가 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사이, 일행은 공방의 입구로 다가갔다.
줄을 선 사람들의 눈빛이 세 사람을 향하고, 세티가 슬그머니 마나를 끌어 올리려는 그때.
갑자기 공방의 문이 열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꽁꽁 싸맨 남자가 바깥으로 나왔다.
나왔다!
씨발, 다 비켜! 내가 첫 번째야! 나는 벌써 일주일이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저놈 말고, 나한테! 나한테 팔게!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여명 일행은 보이지도 않는지,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로브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파도처럼 공방으로 밀어닥치기 직전, 남자는 소매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 사람들 머리 위로 던졌다.
분홍색 가루가 든 비닐 팩.
안에 든 분홍색 가루가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비닐 팩을 보자마자 모두 방향을 바꿔 비닐 팩에 달려들었다.
저리 꺼져! 이건 내 꺼야!
씨발, 안 내놔?!
으아악! 내 팔! 내 팔이!
비닐 팩의 숫자는 줄을 서 있던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물자의 부족은 자연스레 폭력을 불러왔다.
누군가는 주먹을 휘두르는 걸 시작으로, 비닐 팩을 사이에 둔 싸움이 시작됐다.
차고, 후려치고, 넘어지고, 붙잡고, 깨물고… 출동한경비병들조차 기겁할 난장판.
그런 혼란 속에서, 로브의 남자가 여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턱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 쓴 로브 너머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시지요. 카할 마그두를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시여.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