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49)
을 위한 세계는 없다-249화(249/817)
〈 249화 〉 세 개의 뿔, 인연, 악연, 드워프. (10)
* * *
***
공방 내부는 겉모습만큼이나 병원과 닮아 있었다.
새하얀 복도, 굳게 닫힌 병실, 코를 찌르는 약 내음…
진짜 병원을 인수한 건지, 아니면 병원처럼 보이도록 개조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이곳의 주인이 꽤 심한 결벽증을 앓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먼지 한 톨 없네.’
여명은 복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소부였던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청결함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드는지.
자주 쓸고, 닦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벽 틈새에 고이는 먼지나 손잡이에 쌓이는 기름때조차 남기지 않으려면, 문자 그대로 비정상적인 집념이 필요했으니까.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여명이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앞서가던 로브의 남자가 물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깨끗하다 싶어서.”
칭찬으로 들은 걸까, 로브 너머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울렸다.
[연금술사의 실력은 청결과 직결되는 법입니다. 히라리아에 마탑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어지던 유구한 전통이지요.]주인 자랑치고는 예스러운 맛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연금술사가 제약 회사 직원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시대에 전통이라니.
“청소는 어떤 방식으로 하지? 전통적인 방식을 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여명은 빗자루나 걸레질의 흔적이 없는 걸 보며 물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주인님께서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특별한 방법으로 청결을 유지하십니다.]“…특별한 방법이라.”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 특별한 방법이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상식적인 청소부가 써먹을 기술은 아니리란 확신이 든 까닭이었다.
아무튼, 각자의 속내를 숨기며 걸음을 옮기길 잠시.
로브의 남자는 공방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철문 앞에 멈춰섰다. 일반적인 병원이었다면 진료실이 있을 만한 위치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주인님께서 준비하시는 중입니다.]“…준비? 무슨 준비?”
이번에 말을 받은 건 성녀였다. 공방에 들어온 직후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문과 로브의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중요한 손님이신데, 그냥 맞이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녀석의 대답을 신호 삼아, 문 너머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무언가 우당탕 쓰러지고, 깨지고, 망가지는 소리.
한바탕 난리가 난 듯했지만, 다행히 소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충 성녀가 수류탄과 총에 축복을 걸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의 풍경은 복도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먼지 한 톨 없는 새하얀 공간.
문제는, 문 너머가 텅 비어있다는 점이었다. 조금 전 소음을 낸 물건은커녕, 주인이란 연금술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건 또 뭔가 싶어 성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감각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좌우가 미묘하게 휘어진 시각, 시큼한 딸기 냄새가 느껴지는 후각, 설탕을 한 움큼 물고 있는 것처럼 달달한 미각, 바로 옆에 있는 여명의 발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청각…
성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휘청거리는 세티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함정이라니.
반사적으로 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여명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덮었다.
“잠깐만, 잠깐만 쉬고 있어.”
어째서일까, 여명의 목소리는 뒤틀린 감각을 뚫고 그녀에게 닿았다. 마치, 이 뒤틀림 속에서도 그는 멀쩡하다는 듯이.
이것조차 감각의 뒤틀림이 낳은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성녀는 순순히 총을 내렸다.
그녀는 여명을, 그리고 여명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믿었다.
물론, 마지막으로 한 마디 쏘아주는 건 잊지 않았지만.
“…손님 대접 한번 개같이 하네.”
***
문 안에 들어선 순간, 여명은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에 살포된 약, 은밀히 작동되는 마법진.
두 가지 모두 그리 대단한 함정은 아니었지만,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맡은 약 냄새가 문제였다.
‘냄새부터 독이었나?’
그 치밀함을 증명하듯, 독과 마법은 시너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혈관을 내달리고, 전신의 신경을 중독시켰다.
만약 이곳에 있는 게 여명이 아니었다면, 꽤 애를 먹을 정도로 예리한 공격.
그러나 이곳에 있는 건 여명이었다.
네크로맨서와 싸우느라 감각의 저주에 진저리 쳐질 정도로 익숙한, 혈류가속을 통해 스스로 혈관을 조종할 수 있는 자.
그의 몸은 중독되는 것과 동시에 독을 해독해버렸다.
곧이어, 여명의 시야로 새하얀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이제 막 대학교나 졸업했을까? 새하얀 연구복을 입은 그녀는 비현실적으로 진한 분홍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동자를 지닌 여성이었다.
“벌써 해독했어? 대단한 걸, 역시 마그두를 죽인 괴물다워.”
여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성녀가 갑자기 총을 들어 자기 발을 겨눈 까닭이었다.
자칫하면 자해할 수도 있는 상황.
분홍 머리 년이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우선 성녀부터 말렸다. 그녀는 감각이 뒤틀린 와중에도 의외로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마지막까지 한 마디를 안 지는 건 여전했지만.
“…손님 대접 한번 개같이 하네.”
그러자 분홍 머리의 연금술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쪽 동료야? 저 여자도 걸물이네. 마치 옛날 성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휘둘렀다.
푸확, 그녀의 왼쪽 발목이 잘려 나가며 피가 튀었다. 성녀가 쏘려던 발목과 정확히 같은 위치였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연금술사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어머, 기분 나빴어? 미안. 그래도 내 친구를 죽인 사람에게 이 정도 장난은 칠 수 있다고 생각…”
이번에는 오른 발목.
“성질하고는. 죽는 독이 아니란 건 그쪽도 이미 알고 있…”
이번에는 왼팔. 입고 있던 새하얀 연구복이 새빨개지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피비린내 나는 침묵.
여명이 혼란스러워하는 두 소녀를 조심스레 안아 바닥에 눕힌 뒤에야, 연금술사는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장난이야. 10분이면 자연히 해독되는 독이라고.”
“너 같은 거랑 장난칠 생각 없어.”
“…그래? 청소 이야기도 그렇고 우리 잘 맞은 거 같은데. 아직 확신하지 말자고.”
연금술사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왼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잘린 팔을 어깨에 가져다 대자, 피가 울컥 쏟아지며 상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KGB의 성물이나 주가시빌리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재생을 뛰어넘는 속도.
똑같은 방법으로 굴러다니는 발목을 재생한 연금술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럼. 아저씨? 당신이 마그두를 죽였다는 증거를 보여주겠어?”
증거? 여명이 대답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이 공방 바로 앞에서 통화를 걸었던 그 번호. 그건 오직 마그두만을 위한 번호야. 마그두가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다고 맹세한 번호이기도 하고.”
“….”
“그 번호를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건… 마그두가 죽었고, 당신에게 번호를 남겼다는 뜻이지. 어때, 간단한 추리지?”
여명은 검을 털며 대답했다.
“…처음에 나를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부른 건 떠보기 위해서였나?”
로브의 남자가 입구에서 했던 말. 연금술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했다.
“최근에 그 번호를 추적하는 녀석들이 있었거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번호를 추적한 녀석들? 여명은 자연스레 산초를 떠올렸다. 그새 역추적 당했나?
하긴, 정보 길드도 아니고 반쯤 조폭화 된 기사단에게 그런 섬세함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그런 여명의 생각과 상관없이, 연금술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란 말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걸 보고 확신했지. 당신이 마그두를 죽이고, 마그두에게 번호를 받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명은 물리적 최후와 영혼의 최후가 달랐다고 설명하는 대신, 인벤토리에서 용의 심장을 꺼내며 말했다.
“마그두는 마그두답게 죽었다. 그뿐이다.”
짧디짧은 요약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명의 손에 들린 커다란 용의 심장 이상의 증거는 없었으므로.
“마그두답게… 그 꼴통이 꼴통답게 죽었단 말이지? 하, 당신, 그가 인정할 정도로 강한가 보네.”
거기까지 말한 연금술사는 손을 뻗어 용의 심장을 쓰다듬었다. 죽은 친구를 추모하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여명은 말리지 않았다. 마그두와 그녀가 무슨 인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애도할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가진 뒤, 연금술사는 고개를 돌려 여명을 바라봤다.
“이 심장으로 내가 뭘 해주면 될까? 마그두가 뭘 하라고 했어?”
“그쪽이 내 위장에 용의 심장을 이식하는 걸 도와줄 거라고 했다.”
“…뭐라고?”
여명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그녀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마그두의 심장은 뒤틀린 마나를 생산하는 공장이나 다름없어. 네크로맨서도 아니고 이걸 왜 위장에 이식해? 아니, 그것보다. 왜 물약으로 안 만들고?”
여명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카할 마그두가 그에게 남긴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이 타오르며 푸른 귀화를 피워냈다.
“터스키기의 귀화? 네크로맨서였어? 아니, 아닌데…”
혈관에 잠들어 있는 세계수의 마나는 물론이고, 불꽃을 피워낸 자신의 오른손을 통째로 불태우는 귀화.
연금술사는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손뼉을 딱, 치더니 곧바로 여명의 왼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대뜸 마나를 불어넣어 여명의 혈관을 확인했는데, 만약 여명이 아닌 다른 초인이었다면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은 무례였다.
어쨌든, 여명의 혈관 상태를 확인한 연금술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 대체 뭐야? 세계수의 남편이라도 돼?”
“….”
“영약도 정도가 있지. 세계수의 마나로 아주 혈관을 꽉꽉 채웠네? 이게 다 얼마짜리야? 이래서야 용의 심장은커녕 백성초 물약도 못 먹어.”
혈관 구석구석까지 영약이 들어찼으니, 여기서 영약을 더 먹기 위해선 아예 육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자기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위장에 심장을 이식해 뒤틀린 마나를 뽑아 쓰고, 겸사겸사 영약 외의 방법으로 마나의 총량도 늘린다… 확실히, 힘에 미친 용이나 할법한 생각이긴 하네.”
거기까지 말한 연금술사는 여명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도와주지. 대신, 비용이 조금 비쌀 거야.”
“비용? 친구 마지막 부탁에도 가격을 붙이나?”
“친구는 친구고, 직업은 직업이지. 내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가 뭔지 알아? 잘하는 건 절대 공짜로 해주면 안 돼.”
“….”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녀와 세티를 확인했다.
10분이면 해독될 거라는 연금술사의 말처럼, 그녀들은 서서히 감각의 뒤틀림에서 회복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만약 거짓말을 했던 거라면, 위장 이식이고 뭐고 죽여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여명은 다시 연금술사를 보며 말했다.
“…요금이라면 줄 수 있는 대로 주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개인적인 의뢰도 있다.”
“의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은 영약 더 못 먹어.”
“영약이 아니라, 인공 생명체에 관한 거야.”
“…인공 생명체?”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고, 여명은 이번에도 바로 달걀귀신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구멍 난 달걀 머리와 머리를 잃은 몸통이 새하얀 바닥에 툭, 떨어졌다.
“Holy Molly…”
연금술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체의 구멍 난 머리를 살펴봤다. 머리 안에서 회로 칩과 배양된 간 조각을 꺼냈을 때는 짧은 감탄마저 내뱉었다.
“이거… 엄청난 물건이야. 최신 지구 기술과 연금술의 조화라…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알아낸 건 그게 전부인가?”
“아니, 아니. 자세한 건 회로 칩과 살덩이를 연구해 봐야 알 수 있을 거야. 이 뇌를 닮은 살덩이는 아마…”
“뇌가 아니라, 배양한 간이다.”
“…간??”
연금술사는 놀란 얼굴로 한 번 더 살덩이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콱 구겼다.
“초인의 간을 먹으면 초인이 될 수 있다… 지구인들은 미신을 참 좋아한다니까.”
쯧쯧, 혀를 찬 그녀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브의 남자를 불렀다.
“이거 챙겨서 1번 방에 가져다 놔.”
[알겠습니다.]“입맛 다시지 말고 바로 수조에 처넣어. 되살아날지 모르니까.”
[….]로브의 남자는 살짝 겁에 질린 듯, 후다닥 달걀귀신의 시체를 챙겨 문밖으로 나갔다.
새하얀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며 연금술사가 말했다.
“저건 요금 청구 안 할게. 역으로 돈을 내고 연구하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물건이니까.”
“마음대로 해라.”
“까탈스럽기는. 그러지 말고, 어른답게 가자고. 응?”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보지 못한 연금술사는 여명을 중년인으로 착각한 듯싶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피눈물의 환상도 환상이지만, 가면 아래 또 가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을 안 했네?”
운을 뗀 연금술사는 여명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먼저 통성명을 하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여명은 차갑게 대꾸했다.
“말 꺼낸 사람부터 해.”
“당신… 여자한테 인기 없지?”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중독에서 벗어나는 두 소녀를 바라봤다. 중년인 얼굴을 뒤집어쓴 세티와 성녀.
연금술사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말을 고쳤다.
“정정할게. 젊은 여자한테 인기 없지?”
“….”
어쩌다 이런 인간이 카할 마그두와 친구가 된 걸까? 파순이랑 불알친구라고 하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나?
그런 여명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연금술사는 큼큼, 헛기침한 뒤 말했다.
“나는 이 시대 최후의 진짜 연금술사이자, 모든 연지벌레의 주인, 라쉬크야.”
***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자기소개였으나, 여명은 웃지 않았다.
정확히는, 웃을 수 없었다.
라쉬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벼락처럼 어떤 이명이 떠올랐으니까.
구더기 공주.
아카데미에 있는 작가의 노트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적.
스토리에서, 구더기 공주는 주인공이 2학년이 된 바로 첫 날에 등장한다.
아카데미의 모든 사람을 중독시키는 테러리스트이자 독자들이 뽑은 최악의 적으로.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히로인에게 미약을 먹여 둘의 관계를 파탄 내려고 했다던가.
‘….’
오랜만에 운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을 마주한 여명은 잠시 말을 아꼈다.
여기서 죽여야 하나?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운명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게 맞나?
당혹스러운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라쉬크가 말했다.
“저기? 내가 이름을 밝혔으면 그쪽도 밝혀야지?”
“….”
여명은 비현실적인 분홍색 눈동자를 보며 손을 쥐락펴락했다.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목을 치는 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을 거리.
그 짧은 거리 속에서 진실과 거짓이, 미래와 현재가 들끓으며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고민이 검으로 표현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운명에 순응할 생각이 없었고, 오지 않은 미래를 이유로 피를 흘릴 생각도 없었다.
여명은 주먹을 쥐며 말했다.
“내 이름은 천여명이다.”
“…?”
라쉬크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천여명이란 이름은 그녀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으니까.
“…용의 해방자? 아니, 아니지. 걔는 학생이잖아. 동명이인이야? 유명인과 같은 이름이라니, 그쪽도 힘들겠네.”
“….”
여명은 굳이 그녀의 오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근데 말이야, 이명 같은 건 없어? 지구인들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일인군단이니, 별내장이니 하는 거.”
“없다.”
“…카할 마그두를 죽인 사람이 무명이라니, 조금 충격인데. 아니, 세상일이 다 그런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라쉬크는 피에 젖은 연구복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안감 처리가 잘되어 있던 건지, 수첩은 피 묻지 않고 깨끗했다.
“자, 그럼 천여명? 정산을 시작하지. 재료비는 꽤 나갈 거야. 운송비는… 어차피 암시장에서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상관없고.”
라쉬크는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계산서를 쓰기 시작했다.
별돋이 꽃이 어떻고, 왕산이 어떻고…
쭈욱 물건과 가격을 써 내려간 그녀는, 빼곡한 수첩 페이지를 쫙 뜯어 여명에게 내밀었다.
여명은 순순히 그 종이를 받아 읽었다. 전 재산을 털 각오로 왔건만, 의외로 비싸지 않았다.
한데, 종이 맨 아래 적힌 [작업비 별도]가 눈에 밟혔다.
“…작업비?”
“아, 그거. 공짜나 다름없을 거야.”
“…잘하는 일은 공짜로 해주면 안 된다며?”
“다름없다고 했지. 공짜라고 안 했어.”
라쉬크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한 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로 여명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당신 말이야… 좋은 혈통을 타고났지?”
“뭐?”
“마그두의 인정을 받을 정도라면 평범한 초인은 아닐 테고, 세계수의 조각을 그만큼 처먹은 걸 보면 돈도 많을 거고?”
“….”
설마 피를 달라고 하려는 건가? 여명은 살짝 미간을 구기면서도 그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라쉬크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작업비로 당신 정액…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0ml만 넘겨. 어때?”
“…?”
뭐? 정액? 가격표를 살피던 여명이 확 눈살을 찌푸리고, 라쉬크가 당당한 표정으로 여명과 눈을 마주친 바로 그때.
탕!
여명의 뒤편에서 총알이 날아와 라쉬크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꺄아악!”
깔끔하게 절단했던 여명의 칼질과 달리, 축복까지 걸린 총알에 허벅지를 관통당한 라쉬크는 상처 부위를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축복받은 무기에 당한 상처는 바로 재생할 수 없음. 무심하게 구더기 공주의 약점을 기억한 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아직도 독에서 깨어나지 못한 성녀가 리볼버 총구를 후 불고 있었다.
여명과 눈을 마주치자, 성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알지? 나 병 있는 거.”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은 병?”
“응, 이거, 아무래도 불치병인가 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