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50)
을 위한 세계는 없다-250화(250/817)
〈 250화 〉 세 개의 뿔, 인연, 악연, 드워프. (11)
* * *
***
허벅지 대동맥을 관통당한 라쉬크는 재생이 안 된다느니, 미친 사제라느니 같은 욕설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성녀는 중지를 드는 것으로 화답했고, 연금술사는 쌍욕과 함께 커다란 주사기를 꺼내 자기 허벅지를 찔렀다.
주사기 속 붉은 액체가 혈관 속으로 들어가자, 금방 출혈이 멎었다. 아마 군용 급속 지혈제와 치유 물약을 섞은 물건이리라.
“아으… 모르닥의 축복이 걸린 총알이라니, 뭐 하는 미친년이야?”
“아무리 미쳐도 다짜고짜 손님을 중독시키는 미친년만 하겠어?”
라쉬크가 으르렁거리자, 성녀는 가볍게 맞받아쳤다. 연금술사는 분홍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성녀를 노려봤다.
“아니, 이건 사정이 다르지! 나는 안전상의 이유로 중독시킨 거고, 너는 그냥…”
아쉽게도 라쉬크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성녀가 조용히 수류탄 안전핀을 만지작거린 탓이었다.
그 이상 아가리를 놀리면 폭사시켜버리겠다는 제스처.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은 뒤,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는 세티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
세티는 멍한 얼굴로 여명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확인하려는 것처럼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드문드문 굳은살이 박혀 있지만, 곱고 아름다운 손이 여명의 이마와 코, 그리고 볼을 차례대로 쓸고 지나갔다.
“…악몽을 꿨어.”
“악몽?”
단순히 신경 독이 아니었던 건가? 지금이라도 해독제를 써야 하나?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려는 참에, 세티가 벌떡 일어났다.
아직 독을 해독하지 못한 성녀는 물론이고, 수류탄을 보며 이를 갈던 라쉬크 또한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뭐야? 너는 또 어떻게 해독했어?”
연금술사의 말대로, 세티는 해독을 끝낸 멀쩡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뚜둑 목을 풀고, 주먹을 쥔 그녀는 성큼성큼 라쉬크 앞까지 걸어갔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라쉬크는 떠듬떠듬 변명부터 꺼냈다.
“어… 저기…? 나는 정말 나쁜 의도로 중독시킨 건 아니…”
“그건 괜찮아. 세상일이 다 그렇잖아? 당한 놈이 잘못이지.”
그렇게 연금술사의 말을 끊은 세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약팔이지? 모든 약을 딸기 맛으로 만드는 약팔이.”
약팔이. 그건 연금술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말 중 하나였으나, 라쉬크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세티의 검은 눈동자가 너무나 살벌했으므로.
“그… 돈 때문에 약을 만들고 있긴 한…”
라쉬크는 필사적으로 여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얘 좀 어떻게 해보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
하지만 여명은 세티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궁금했고, 라쉬크는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팔짱을 끼고 세티가 하는 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이어, 세티가 망치를 들었다… 아니, 망치는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망치 대신 바이콘의 뿔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 미약도 팔겠네?”
“…미, 미약?”
“발정제, 정력제… 뭐라고 부르건 상관없어. 아무튼, 만들었지?”
“….”
라쉬크는 지뢰밭을 마주한 병사처럼 긴장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런 건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만드는 물건이야. 나도 만들긴 했지만, 아직 팔지는 않았…!”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세티가 바이콘의 뿔을 휘둘렀다.
라쉬크가 기겁하며 고개를 뒤로 뺐지만, 번개가 번쩍이는 우라간의 몸통은 그녀의 이마를 놓치지 않았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라쉬크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라쉬크는 두통 속에서 눈을 떴다.
만약 그녀가 육체를 개조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두개골에 금이 갔다고 확신할 정도로 끔찍한 두통.
“끄으으…”
머리를 맞은 탓일까,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손을 뻗어 주머니 속에 있는 회복 주사기를 찾았다.
하지만 주머니를 아무리 더듬어도 주사기는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그녀가 짜증 속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 주사기를 쥐여줬다. 그녀는 당연히 부하가 센스 있게 주사기를 건네준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라쉬크는 즉시 팔뚝에 주사기를 꽂았다. 푹, 찌이익 특제 회복약이 혈관을 타고 흐르자, 그나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으…”
잠시 후, 약 기운으로 두통을 밀어낸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빌어먹을 부하도, 청결하게 유지한 공방도 아니었다.
“…?”
악몽 같은 황금색 눈동자.
뭐야? 난 분명 지구에 있었는데? 라쉬크가 화들짝 놀라 눈을 비볐다.
조금 선명해진 시야 너머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실험실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누구세요?”
청년은 대답 대신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만졌다. 그러자 그녀가 기절하기 직전에 만났던 익숙한 태양 가면과 가면 아래 숨겨진 중년인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
마그두를 죽인 남자.
그는 청년의 얼굴이 자신의 원래 얼굴이라는 듯, 다시 얼굴을 되돌리며 말했다.
“머리는 좀 어때?”
“어… 씨… 당연히 존나 아프지.”
“….”
“근데 그것보다, 대체 그거 뭐야? 얼굴을 어떻게 그렇게 바꿀 수 있는 거야? 가면하고 얼굴을 동시에 만들다니?”
황금색 눈동자의 청년, 여명은 ‘업무상 비밀’이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랄하지 말라고 대답하려던 라쉬크는, 그제야 기절하기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다른 두 여자 얼굴도 가짜였던 거야?”
“직접 봐.”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쉬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가 아끼는 비밀 공방, 온갖 실험 도구와 연금 재료, 그리고 대형 냉장고가 가득한 공간으로 한참 어린 계집애 둘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물약 냉장고 앞에는 안대를 쓴 계집애가 물약을 털고 있었고, 그 왼편의 시약 냉장고에선 재료 목록을 든 검은 머리의 계집이 연금술 재료를 잔뜩 꺼내고 있었다.
라쉬크는 자신의 공방이 털리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영 현실감이 없는 풍경이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공방의 첫 손님이, 도둑놈이라고?
“…지랄 났네.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 온 거야?”
이 공방은 병원 건물 지하에 이중삼중으로 숨겨진 비밀 창고나 다름없었다. 겉모습을 병원처럼 꾸민 것도 다 이곳을 숨기기 위한 일이었는데…
정작 여명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비교적 더러운 공간이 있길래. 거기가 비밀 통로다 싶었지.”
“…그 흔적을 찾아왔다고? 무슨 청소부라도 돼? 그게 말이나… 아, 뭐, 됐어. 통로야 우연히 찾았다 치고, 대체 문은 어떻게 연 거야?”
“만능키가 있어서.”
그러자 라쉬크의 표정이 팍 찌그러졌다. 그녀는 빈 주사기를 여명에게 집어 던지며 말했다.
“염병,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알려주기 싫다고 해. 만능키는 무슨.”
빈 주사기를 받은 여명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묵직하게 자리에 앉아 두 소녀가 공방을 털어올 때까지 라쉬크의 말동무가 되어줬다.
“그래서, 그건 왜 달라고 한 거지?”
“그거?”
“…작업비.”
여명이 애써 완곡한 표현을 썼으나, 라쉬크는 그냥 대놓고 그것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정액? 그거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이참에 호문쿨루스나 만들어볼까 해서.”
“…?”
이미 예상하던 대답이었지만, 직접 입으로 듣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놀라? 지구인들이 곧잘 하는 정자 기부랑 다를 것도 없구만.”
“…미쳤어?”
“오, 혹시, 혈통이나 가족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야? 의외네. 온갖 개잡종들이 날뛰는 시대에.”
“….”
“프랑스 스파이가 유명 마법사의 정자를 훔쳐서 도망치고, 몰락한 귀족들이 지구로 팔려 와서 새끼 치고…”
직설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표현에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그는 여자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영 거북했다.
“사람이 가축도 아니고 새끼 쳤다는 표현은 좀…”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고자인 변경백이랑 황족 아니면 다 잡탕 됐다니까? 당장 다섯 신의 성녀조차 혼혈 잡종…”
탕!
그때,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라쉬크의 분홍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더 오른쪽으로 쐈으면 머리가 그대로 관통당했을 위치.
“FUCK! 이 미친년이 진ㅉ…”
빽 소리 지르려던 라쉬크는, 안대를 찬 소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옆모습만 볼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정면에서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미친 총쟁이는…
“…성녀?”
“오냐, 성녀님이시다. 그러니 다시 말해봐. 혼혈이 어떻고, 잡종이 뭐가 어째?”
“….”
눈앞에 아카데미에서 가출한 성녀가 있고, 그 성녀가 자신에게 총을 쐈고, 심지어 수류탄으로 협박까지 했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간신히 소화한 라쉬크의 뇌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용의 해방자, 네가 바로 그 천여명이었구나?”
그녀가 여명을 돌아보며 말하자, 여명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무언의 긍정.
라쉬크는 성녀와 그를 번갈아 본 뒤, 은근슬쩍 그의 귀에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어린 쪽이 더 효과가 좋거든. 딱 반으로 줄여서, 15ml만 받을게.”
“….”
그 순간 여명은 얼굴을 공개한 걸 후회할 뻔했다. 하지만 아직 좌절할 때가 아니었다.
후회는 준비한 대화가 모두 엎어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는 후우 길게 심호흡한 뒤, 다시 공방을 털기 시작하는 성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쪽은 내 털끝 하나 못 받아 갈 거야.”
“…털끝 하나 못 준다고? 왜? 마누라라도 있어?”
“어.”
막힘없는 대답. 세티와 성녀는 움찔, 거의 동시에 여명을 바라봤다. 숨길 수 없는 감탄과 부끄러움.
그에 비해 라쉬크의 반응은 극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뒤,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까지 괴며 말했다.
“아 그러셔? 그러면… 돈으로 받지 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천만 달러만 내놔.”
“….”
“너희가 무단으로 물약이랑 재료 꺼낸 탓에 신선도가 떨어졌으니까, 그것들도 다 배상하고.”
정액 값치고는 아찔한 가격이었으나, 여명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인벤토리에서 산의 눈물을 꺼냈다.
드워프 장인들이 피와 증오로 담금질한 검.
겨자가스 색으로 반짝이는 검신을 본 라쉬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폭력? 미안하지만 그건 이제 안 통해. 뒤틀린 마나를 품은 용의 심장을 이식할 수 있는 연금술사는 나밖에 없고, 너는 날 죽이지 못하니까.”
연금술사가 자신만만하게 떠들건 말건, 여명은 라쉬크의 분홍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만남을 인연으로 만들지, 아니면 악연으로 만들지 결정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
“…글쎄?”
“정답은 사람이야. 사람이 인연과 악연을 정해.”
“….”
뭐지? 뜬금없는 선문답에 라쉬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검은, 드워프가 내게 준 인연의 상징이야.”
라쉬크는 드워프라는 말에 다시 검을 살펴봤다. 곧이어, 그녀는 턱 끝까지 올라오는 놀람을 꿀꺽 삼켰다. 통짜 마나 메탈로 만들어진 검이라니. 천만 달러가 헛소리가 아니었다.
여명은 검신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검에는 공산주의자들과 스탈린을 향한 그들의 복수심이 담겨 있어. 노골적이긴 하지만, 나와의 인연이 복수로 이어지길 바라는 거야.”
“…겨우 검 하나에 그런 의미를 둔다고? 참 약삭빠른 족속들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쉬크의 눈에는 무언가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검을 꺼내며 전한 진심,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기대감을 주고 있었으니까.
그 감정이 자신이 원하는 감정인지 알 방법이 없었기에, 여명은 아주 잠시 뜸을 들였다.
짧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여명은 준비했던 마지막 말들을 꺼냈다.
“그쪽의 인연, 나한테 걸어봐.”
“….”
“구더기 공주.”
라쉬크는 웃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여명을 노려봤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