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51)
을 위한 세계는 없다-251화(251/817)
〈 251화 〉 마왕으로 가는 길
* * *
제자야,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잘못된 것을 찾는 것입니까?
아니,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대영박물관 소장품 어린 용을 위한 비석 중 발췌』
***
모든 진보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녀의 기억 속, 터스키기 연구소 입구에는 그런 표어가 적혀있었다.
그 표어가 연구소장의 악취미였는지, 아니면 담백한 사실 고백인지 작금의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연구소장은 용의 증오 아래 불타 사라졌고, 표어는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만 남았으므로.
*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첫 번째 기억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수술용 톱이었다.
마취된 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지만, 때로는 고통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것이 있는 법이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수술용 톱이 자신의 배를 가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뱃속 깊숙이 숨어있던 그녀의 간이 커다란 벌레 괴수의 그것으로 교체되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곧이어, 거부반응이 일어나며 신경과 심장이 발작을 일으켰다. 수술을 집도하는 연구원들은 별거 아니라는 듯 호르몬을 투입했다.
그녀의 쓸개마저 괴수의 것으로 교체되자, 어린 육체는 저항을 멈췄다.
살려주세요.
연구원들은 교체된 장기가 그녀에게 괴수의 능력을 부여할 것으로 예측했다.
살려주세요.
결과가 좋다면, 빨갱이들보다 한발 앞서 초인을 양산할 수 있으리라.
살려주세요.
안경을 쓴 의사 선생님은 그녀의 목에 주사기를 꽂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살아남아야지.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계속 생각했다.
살아남는 게 뭘까?
그들이 갈라진 배를 봉합하고, 안정제로 가득 찬 수조에 그녀를 집어넣을 때까지, 계속.
*
그녀는 공주였다.
무수한 실패 속에서 얻은 유일한 성공작이기에 공주였고, 결과가 시원찮았기에 여왕이 아닌 공주였다.
구더기 공주.
그것이 그녀가 첫 번째로 받은 이름이었다.
*
그녀가 기억하는 첫 번째 살인은 다른 실험체와의 대련이었다. 그녀처럼 장기가 아닌, 사지를 교체한 녀석.
그는 10m 바깥에서도 발톱을 휘두를 수 있는 완성작이었지만, 초인은 아니었다. 온몸을 뒤덮은 구더기 떼 앞에서 녀석의 발톱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녀석이 컥컥거리는 사이, 새하얀 연구복을 입은 연구소장이 다가왔다.
그녀는 못 하겠다고 말했다. 명령을 듣기도 전에.
연구소장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모든 진보에는 희생이 필요했으니까.
불가피한 희생이란 없었다. 성공하지 못했다면, 언제나 희생이 부족했을 뿐.
*
그녀는 빨갱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검은 피부의 사람을 검둥이라 부르듯, 빨간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빨갱이가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빨갱이가 싫었다. 그들이 무언가 성공하면, 연구소에 난리가 났으니까.
먼저 우주에 사람을 보냈다. 먼저 지구인 출신 초인을 만들었다. 먼저, 먼저, 먼저…
‘소련 놈들이 괴수의 재생력을 손에 넣었다.’
그녀는 실패작이 되었다.
*
2차 성징이 올 때까지, 그녀는 살아남았다.
폐기하기엔 그동안 투자한 자원과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폐기 당하지 않았을 뿐, 그녀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늘 그녀의 담즙을 뽑아가는 연구원조차 그녀를 무시했다. 연구소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공주에 쏠려 있었으니까.
사람의 몸보다도 더 커다랗고, 더러운 연구소 바닥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아름다운 진주색 알.
달걀 공주.
*
그녀는 새로운 자매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달걀 공주는 세상에서 그녀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매일 주사기에 찔리고, 연구원들에게 고문받는 자매.
그녀는 자매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했다.
배에 커다란 호스가 꽂혀 담즙이 뽑히는 것도 참았고, 괴수 생체 조직을 위해 칼에 찔리는 것도 참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노력은 자매를 노리고 침투한 ‘나쁜 사람’들과 싸운 것이었다.
그녀는 온몸이 으스러질 때까지 자매를 지켜냈다.
죽어가는 그녀를 발견한 연구소장은 기뻐했다. 그녀의 구더기가 초인을 죽였으므로.
*
그날 이후, 그녀의 일과에 특별한 교육이 추가되었다. 구더기로 사람을 암살하는 법.
연구소장은 소련의 고위층을 딱 둘만 죽이면 그녀에게 투자된 금액을 만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 예산을 투자받으면, 잠든 자매를 깨울 수 있다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예산이나 소련이 뭔지 몰랐지만, 기꺼이 연구소장의 유혹에 넘어갔다.
자매가 태어나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까.
*
가짜 신분을 받고 연구소 바깥으로 나왔으나, 그녀는 여전히 구더기 공주였다.
그녀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쿠바에서 혁명가 셋, 칠레에서 정치인 하나, 에콰도르에서 반동분자 일곱, 히라리아에서 보급관리관 셋.
하지만 연구소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달걀 공주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매끈한 껍질 위로 주사 구멍이 늘어났을 뿐.
*
그날의 기억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군인들의 피, 연구원들의 피, 실험체들의 피.
구더기에 휩쓸린 연구자가 팔을 휘두르며 그녀를 저주했다.
‘먹여주고 키워준 조국을 배신하다니! 부끄럽지도 않… 아아악!’
그녀는 무수한 구더기를 움직여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남자의 비난은 무의미했다. 그녀에게 조국은 없었다.
오직 자매가 있을 뿐.
더러운 연구소 복도로 구더기들이 들끓는다. 고작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배운 대로, 죽이고, 죽이며, 죽였다.
죄책감도, 복수의 쾌감도 없었다.
모든 일에는 희생이 필요하고, 자매가 태어날 권리가 그들의 살 권리보다 중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매가 있는 중앙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통로를 쩌렁쩌렁 울렸다.
‘버러지 년, 진즉에 폐기했어야 했는데.’
보안국장, 연구소를 지키는 초인.
‘공주부터 죽여라! 하이브퀸과 똑같이 본체만 죽이면 구더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초인의 머릿수는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됐다.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구더기 사이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
구더기 공주는 바닥을 기었다. 팔다리 중 왼팔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피가 바닥에 기다란 선을 만드는 가운데, 그녀는 두꺼운 보안 장치와 실험 장치 한 가운데 놓인 자매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울었다. 구멍 난 알을 보며 울었다.
그녀는 태어나지 못한 자매를 위해 울었다. 형체도 없는 자매를 애도할 수 있는 게 혼자라서 울었다.
‘개 같은 년, 저딴 알 하나 보겠다고 이런 짓을 벌인 거냐? ’
구더기를 전부 태워버린 보안국장은 이를 갈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애써 키운 초인 둘이 죽어버린 탓에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초 과학부터 가르칠 걸 그랬군. 내부 영양분을 잃은 알이 부화하지 못하는 건 상식이다. 이 멍청한 년아.’
보안국장은 그녀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느껴보라는 듯 천천히 힘을 실었다.
구더기 공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자매에게 사과했다.
연구소 위로 거대한 해골용이 강림할 때까지, 계속.
***
…뜨문뜨문 떠오르는 기억을 밀어낸 라쉬크는 여명을 노려봤다.
녀석이 대체 어떻게 구더기 공주란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터스키기 연구와 관련된 사람인가? 그럴 리 없었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카할 마그두가 옛이야기를 해줬을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다.
용의 입은 그 자존심만큼이나 무거운 법이다.
“…뜸 들이지 말고 대답해. 구더기 공주란 이름, 어디서 들었어?”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듯 조용히 검을 내려다보다가, 검신 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전통 연금술일까? 돈이건 명예건 최신 제약 회사에 들어가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었으나, 라쉬크는 지적하지 못했다.
이어진 여명의 말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으므로.
“내가 예상하자면…카할 마그두는 강령술로 딸을 살리지 못했을 거야. 애초에 태어나지 못한 자는 되살아날 수도 없으니까.”
“….”
“하지만 연금술이라면? 또 모르지. 남자의 정액에서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작은 흔적에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 수 있을지도.”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쉬크는 구더기들을 불렀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하 공방을 넘어 거대한 암시장의 지하 아래 십수 년간 잠들어 있던 무수한 구더기들이 공주의 부름을 듣고 일제히 깨어났다.
곧이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암살자의 뇌가 움직였다. 그러나 카할 마그두를 죽인 인간을 상대로 승산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암살은? 불가. 성녀가 있는 한, 독 구더기는 그냥 수가 많은 구더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까지는 어떻게 가능할 거 같았다.
단, 그 대가로 자매를 살리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가리라.
“…씨발.”
라쉬크는 주먹을 떨며 여명을 노려봤다. 괴수의 담즙으로 오염된 분홍색 눈동자 위로, 황금색이 비친다.
차원문 너머에서 그녀를 추적했던 정체불명의 검객과 닮은 황금색 눈동자.
“아주… 더럽게 정확한 추리야. 박수라도 쳐줄까?”
“아니.”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대체 어떻게 내 정체에 대해 알아낸 거냐?”
여명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돌려 성녀를 바라봤다. 뭐, 성녀가 어쨌다고?
라쉬크의 눈썹이 길게 휘어지는 찰나, 여명이 작게 속삭였다.
“성녀는 미래를 볼 수 있어.”
“….”
“1년 뒤, 당신은 종말 교단과 손을 잡고 로드 하우 아카데미를 습격할 거야. 자기 자신을 구더기 공주라고 소개하면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라쉬크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입술을 핥았다. 여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무리해서라도 내 정액을 요구하는 그쪽 태도, 호문쿨루스 제작 장비가 있는 공방, 그리고… 이걸 보고 대충 찍었어.”
여명은 작은 수첩을 들며 말했다. 그녀의 연구일지.
라쉬크는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기절한 여성의 몸을 더듬은 거냐?”
“…나 말고 성녀가.”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세상은 종종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법이다. 당장 눈앞에서 성녀가 도둑질하고 있지 않은가?
여명이 작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믿기 어려운 말이지?”
“…이 상황에 내 믿음이 중요한가?”
“중요하지. 아까 말한 것처럼, 난 이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길 바라니까.”
여명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강자의 여유가 아닌, 충분히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투.
라쉬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삶의 대부분을 실험실 쥐새끼, 암살자, 그리고 불법 연금술사로 살아온 그녀는 여명의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오글거리는 말이 진심이라고?”
그러자 여명이 슬쩍 눈썹을 기울였다.
“오글거려?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인데.”
“…?”
어색하고, 좀 황당한 침묵.
침묵이 길게 늘어졌지만, 라쉬크는 여명에게서 거짓의 징후를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진심이라고? 아니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바로 조금 전에 난 너희를 중독시켰고, 너는 내 팔다리를 잘랐어.”
“그랬지.”
“그랬지는 무슨, 씨발. 지금도 내 공방을 털고 있잖아!”
라쉬크가 소리치자, 포대에 물약을 담던 성녀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뭐 어쩌란 거냐는 태도.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갈 때 돈 낼게. 그냥 쇼핑하고 있는 거야.”
“….”
“…진짜로.”
그렇게 말한 여명이 손바닥을 살짝 쥐자, 손가락 사이에서 금화 한 장이 튀어나왔다.
라쉬크는 미간을 주물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로 이런 분위기조차 다 계획한 거라면?
‘…염병하네.’
하필 이런 놈에게 심장을 남긴 마그두가 원망스러웠다. 죽을 때까지 멋대로 살다 간 해골용 같으니.
“씁,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그쪽은 진심으로 날 믿어?”
“믿고 싶어.”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말. 오히려 그 말이 라쉬크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몰려오던 구더기들을 멈추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좆같네.”
“….”
“이딴 거에 흔들리는 나 자신이 좆같아.”
여명은 작게 웃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 미소를 본 라쉬크가 으르렁거렸다.
“야, 너 몇 살이야?”
“…뭐?”
“한국인은 나이 따지지? 내가 밥을 먹어도 너보다 두 배는 더 먹었을 텐데, 왜 자꾸 반말이야?”
“….”
“반말하지 말고 누나라고 불러라, 씨발.”
황당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여명을 보며, 라쉬크는 드디어 한 방 먹였다고 확신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