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53)
을 위한 세계는 없다-253화(253/817)
〈 253화 〉 마왕으로 가는 길 (3)
* * *
***
여명은 공방을 나서기 전에 옷깃을 여미며 피눈물의 환상을 사용했다. 일행 모두 중년의 얼굴과 가면을 뒤집어쓰고, 들어올 때와 똑같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한데, 문 앞에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남은 희미한 핏자국과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화약 냄새를 보아하니, 결국 싸움을 보다 못한 경비병들이 잡아간 모양이었다.
그 분홍색 마약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한 걸까? 암시장에서 마약을 파는 곳이 한둘도 아닐 텐데.
라쉬크의 마약이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품질이라서? 아니면 딸기맛이 의외로 인기 있는 건가…?
여명이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암시장을 가로지르는 사이, 성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
“불길하다. 불길해…”
“뭐가 불길해? 드워프?”
암시장의 드워프들을 조심해라. 공방에서 라쉬크가 마지막 했던 경고.
“응, 그런 거 엮이지 말라고 하면 꼭 엮이더라고.”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
세티가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냥 조심하면 되지. 잠깐 암시장 좀 돌아다닌다고 별일 있겠어?”
그러자 두 소녀는 동시에 뚱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아니…아무리 그래도, 늘 사고만 날 리 없잖아.”
여명의 뭐라고 말하건, 두 소녀는 이미 사고가 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기 위에 손을 올리거나, 조심스레 주변을 경계하거나…
‘…그렇게 믿음이 안 가나?’
여명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슬그머니 마나를 끌어 올렸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어쨌거나,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시장 복도를 오가는 가면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암시장이 활성화되는 시간인 듯싶었다.
여명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속도를 높였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암시장이 가장 활발해지는 밤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내는 게 좋아보였으니까.
하지만 코카잎을 파는 가게에 도착한 순간, 일행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할리스코’라고 적힌 간판 아래, 대마초 가면을 쓴 사람 열댓 명이 일행을 노려보고 있는 탓이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눈빛은 멍하거나, 어딘가 병든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여명은 그게 약쟁이의 눈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인천 뒷골목에서 종종 보던 밑바닥 약쟁이들이 딱 저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또 뭔…”
여명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열댓 명이 흩어져서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단순히 오해였나? 아니, 녀석들은 복도를 둥글게 둘러싸는 각도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슬금슬금 여명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면 모를까, 초인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포위.
성녀는 추가 탄창이 장착된 자동 권총을 꺼내며 말했다.
“그래도 드워프는 아니네?”
“어허, 말이 씨가 된다니까.”
세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위망을 좁히던 약쟁이들이 품에서 작은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있는 곳에서 꺼내기엔 지나치게 단순한 무기였으나, 문제는 주변 경비원들이 녀석들은 본체만체한다는 점이었다.
하긴, 암시장 경비 따위에게 뭘 바라겠는가.
여명이 한숨과 함께 주먹에 파양결의 파도를 실었다.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몇 놈 턱주가리를 박살 내면, 알아서 도망치리라.
그때,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가면 아래 숨겨진 눈동자가 비교적 정상으로 보이는 놈이었다.
“이보게, 친구들?”
“난 칼 들고 다가오는 친구 둔 적 없는데.”
“인류는 모두 친구지, 특히 총구 앞에서는. 그렇지 않나?”
녀석은 복도 끝에 있는 경비병을 향해 눈짓했다.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은 녀석과 한패라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부리부리한 눈으로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명은 소매 사이로 슬그머니 얼음송곳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자네들이 들어갔던 그 공방… 거기서 뭘 했지?”
“공방?”
“연금술사 년의 공방 말이다.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냐? 지난 4년 간… 그년 부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공방에 들어가서 멀쩡히 걸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
“물건을 받아왔다면 물건을, 정보가 있다면 정보를 좀 나눠주겠나? 그러면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명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남미 상인들이 모여있는 암시장 복도, 라쉬크의 공방을 감시하고 있던 약쟁이들, 그리고 녀석들의 편을 드는 경비병까지.
‘남미 마약 카르텔이 라쉬크의 마약을 노리는 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약을 팔길래 이런 날파리들이 꼬이는 거지? 여명은 세티와 성녀에게 눈짓을 보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난 약쟁이랑은 친구 안 해.”
“그래? 아쉽군.”
녀석이 피식 웃으며 칼을 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약쟁이들이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칼날, 발 빠르게 도망치는 손님들, 권총을 겨누는 세티와 성녀, 그리고…
계속되는 발소리.
“…?”
두두두 암시장 복도를 메우는 발소리는 약쟁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고, 묵직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여명과 약쟁이들은 거의 동시에 발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암시장 복도 너머, 우르르 달려오는 그것은…
“이 약쟁이 새끼들!”
“자각! 오르세! 닥! 코불! 힐릴!”
“암시장은 미국의 것이다!”
어마어마한 함성을 내뱉으며 달려드는 드워프들이었다.
각자 몽둥이나 쇠 파이프를 든 녀석들을 피해 다른 손님들이 내빼는 사이, 어느새 거리를 좁힌 드워프가 펄쩍 뛰어올랐다.
자기 키의 두 배가 넘을 정도로 높이 떠오른 드워프는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아오더니…
“죽어라! 타코 새끼들!”
약쟁이들을 향해 몽둥이를 내려쳤다.
***
“…정말로 말이 씨가 됐네.”
암시장 복도에서 벌어지는 약쟁이와 드워프들의 패싸움을 보면서, 성녀가 중얼거렸다.
아니, 이건 패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몽둥이를 든 드워프의 머릿수가 약쟁이들의 두 배를 훌쩍 넘는 까닭이었다.
“씨발, 이 엿 같은 땅꼬마 새끼들!”
약쟁이들이 발작적으로 칼을 휘둘렀지만, 포위망을 형성하느라 넓게 퍼져있던 상황에서 한데 뭉쳐 달려드는 드워프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드워프가 휘둘러도 몽둥이는 몽둥이였고, 약쟁이라도 피는 붉은색이었다.
사, 살려… 억! 악!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쓰러진 약쟁이들이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만! 전원 정지! 이 이상의 소란은 용납할 수 없다!”
경비병들이 소리쳤지만, 드워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약쟁이들을 두들겨 팼다.
아악!
그리고 기어코 약쟁이 한 놈의 머리가 깨지자, 경비병들도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 맥콜 처먹는 한량 새끼들이!”
마지막 이성은 있는지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각자 삼각봉이나 몽둥이를 들고 드워프에게 달려드는 모습.
씨발, 이래서 타코 새끼들을 경비병으로 쓰면 안 된다니까!
뒤져!
자, 잠깐! 뼈! 뼈 맞았어!
이제야 패싸움에 가까운 싸움이 시작되었고,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있던 여명과 두 소녀 또한 그 아수라장에 휩쓸렸다.
“총은 쏘지 마.”
여명은 약쟁이의 턱에 주먹을 꽂으며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는 대답 대신 권총을 거꾸로 들더니, 총을 망치 삼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세티는 진짜 망치를 휘둘렀는데, 약쟁이들의 쇄골과 무릎 등 한방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곳만 노렸다.
좆 같은 히스패닉 불체자 새끼들! 시카고 암시장은 미국인의 것이다!
드워프들의 고함.
이 미친 난쟁이 새끼야! 니들이 왜 미국인이야?!
약쟁이들의 비명, 그리고 찰칵찰칵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손님들의 휴대폰 셔터 소리.
온갖 소음이 뒤섞인 싸움은 금세 끝을 보이는 듯했다. 아무래도 드워프들의 머릿수가 더 많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남미인들이 모여서 장사하는 복도였다.
드워프에게 동포가 처맞는 걸 본 약쟁이들, 장사꾼들, 그리고 그냥 단순히 무기를 휘두르고 싶은 꼴통들이 우르르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래, 덤벼! 이 타코 새끼들아! 전부 속 터진 치미창가로 만들어주마!
피와 고함, 번뜩이는 날붙이와 몽둥이.
“뭐라고 했더라? 잠깐 암시장 좀 돌아다닌다고 별일 있겠어 였나?”
성녀는 더더욱 개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여명을 놀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세티마저도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할 말이 없었던 여명은 그저 묵묵히 달려드는 약쟁이들을 때려눕혔다.
지금이라도 물러나고 싶었지만, 앞에는 패싸움이, 뒤로는 약쟁이들로 포위된 꼴이라 몸을 빼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튼.
피와 땀 냄새에 코가 절여지고, 쓰러진 약쟁이와 드워프들의 신음이 복도를 가득 메울 때쯤.
두들겨 맞던 경비병들이 소총을 들었다.
“이 애미 없는 새끼들아! 당장 손들어!”
철컥 소리와 함께 최신식 자동 소총의 안전장치가 풀렸다. 몽둥이나 날붙이와 달리, 손가락 하나로 수십 드워프를 죽일 수 있는 현대 화기.
눈치 빠른 드워프들은 몸을 날리거나 쓰러진 약쟁이를 방패로 들어 올렸지만,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이 이상 싸움을 키우지 않으려는 양심 때문에? 아니, 아니었다.
여명의 맞은편, 정확히는 암시장 입구 반대편에서 등장한 한 드워프 때문이었다.
드문드문 용의 뼈가 박힌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자기 키만큼이나 커다란 기관총을 든 드워프.
딱 봐도 ‘나 초인이오’라고 광고하는 듯한 그 드워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기관총과 경비병들의 소총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거 쏘면 재미없을 거라는 뜻.
노골적이고, 효과적인 위협이었다. 경비병들은 거의 동시에 총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짧은 침묵.
간신히 두 다리로 서 있는 약쟁이들은 경비병들을 따라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드워프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오, 느낌 있다… 나도 기관총 들고 다닐까?”
성녀가 감탄 섞인 감상을 내뱉는 사이, 여명은 두 소녀의 팔을 붙잡고 복도 뒤편으로 물러났다.
싸움도 끝났겠다, 괜히 여기서 드워프와 엮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또 다른 드워프가 일행이 도망치는 방향에서 나타났다.
“세 분 다 괜찮으십니까?”
다룰마처럼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열 개가 넘는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젊은 드워프.
그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드워프들과 달리,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놀라셨지요? 특히 레이디분들.”
“….”
“제가 암시장 대표는 아닙니다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남미 놈들은 암시장의 룰을 존중할 줄 모르는 놈들이라… 부디 오늘 일로 저 녀석들이 교훈을 배웠기를.”
짐짓 매너 있는 척했지만, 여명은 녀석의 혓바닥 뒤, 음습하게 숨어있는 마나를 읽어냈다.
‘…마법사로군.’
싸움 직전에 만들었던 얼음송곳의 마나를 느낀 건가? 아니면 단순히 싸움 실력을 보고 관심을 가진 건가?
어느 쪽이건 달갑지 않았기에, 여명은 차갑게 대꾸했다.
“교훈이고 뭐고, 저희는 별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 길을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드워프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아뇨, 아뇨, 그럴 수 없지요. 비록 저희가 같은 종족은 아니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전우 아닙니까? 이대로 빈손으로 여러분을 보내는 건 저희 조상님들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전우?”
“함께 불체자놈들을 두들겨 패지 않았습니까. 흑인과 백인이 함께 베트남 빨갱이들에게 맞서 싸웠던 것처럼!”
여명은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목걸이를 주렁주렁 걸고 있는 드워프는 물론이고, 다른 드워프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봐, 여기 좀 봐! 이 사람들, 겨우 셋이서 타코 녀석들을 수십 명이나 때려눕혔어!
오오!
멋지군! 애국자가 따로 없어!
세티는 물론이고, 성녀조차 몰려드는 드워프들의 개소리에 질색했다. 암시장에서 애국은 무슨 애국이란 말인가?
여명은 이 녀석들이 드워프의 정체성보다 미국인이란 정체성이 더 강해진 3세대 드워프임을, 그리고 왜 라쉬크가 이 녀석들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뒤틀린 애국심에 취한 녀석들은 언제나 위험한 법이었다.
“미안하지만, 저희는그저 싸움에 휘말렸을 뿐입니다.칭찬이나 보상을 바라고 싸운 게 아닙니다.”
여명은 억지로라도 목걸이를 가득 찬 드워프를 지나치려 했지만, 녀석은 끝끝내 일행의 앞을 막았다.
“그러지 마시고…부디, 저희가 여러분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저녁이라도 함께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든 조상님들과 황금 옥새에 맹세코, 여러분들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번에도 거절하려 했으나, 세티가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초대, 받아.’
여명은 세티를 향해 살짝 눈꼬리를 들었다. 세티는 조금 전보다 길게 덧붙였다.
‘이 드워프, 목표. 둔간 중공업, 임원.’
임원이라고? 재벌 기업 계열사 사장이 왜 암시장에 있어?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목걸이의 드워프가 가면을 벗으며 덧붙였다.
“아, 혹시 제 신분이 의심스러운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이름은 해밀턴 둔. 둔간 복합 에너지의 사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
녀석의 이름을 듣는 순간, 여명은 치미는 마나를 삼켰다.
해밀턴 둔.그는 3세대 중 유일하게 임원 자리에 오른 유능한 드워프이자, 다룰마 암살 미수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