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56)
을 위한 세계는 없다-256화(256/817)
〈 256화 〉 마왕으로 가는 길 (6)
* * *
***
안녕? 언제인지 모를 시절의 나?
다큐멘터리 인터뷰처럼 차분한 화면 속, 낡은 의자에 앉은 세티가 말했다.
그녀는 지금보다 한 열 살쯤 나이 들어 보였는데, 얼굴에 찌든 세월과 피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봐요, 홍세티 씨?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화면 돌리지 말고 그냥 들어줄래? 어차피 지금 할 것도 없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억지로 짜낸 활기였다.
흐음, 요즘 인생은 어때? 이 영상을 보고 있다는 건, 너도 어지간히 엿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거겠지?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세티의 목소리 아래 숨겨진 진한 고통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해골용을 쓰러트리기까지 얼마나… 쓰읍, 아니, 아니다. 넌 지금 어디까지 잃었니?
‘무엇’을 잃었느냐가 아니라, ‘어디까지’ 잃었느냐.
어디까지 잃었을지 모르겠지만, 장담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야.
“….”
가진 것들은 대부분은 잃어버린 뒤에야 잃었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 마치, 꿈처럼.
여명은 쓰러진 TV를 똑바로 세우고, 그 앞에 앉았다. 화면 너머의 세티를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세상이라는 게 참…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그렇지?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화면 속 세티는 계속 웃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시간도 없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네.
“….”
미안, 나도 감정이 격해져서… 쓰읍,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니까, 채널 돌리지 마.
긴 심호흡, 짧은 고민. 잠시 뜸을 들인 세티는, 또박또박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그래, 이거부터 하자. 앞으로 네가 아카데미에서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시대의 용사가 나타날 거야.
“…용사?”
그 황당한 단어에 여명이 되물었으나, 화면 속 세티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자기 할 말만 이어 나갔다.
믿기지 않지?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
근데 그거 알아? 용사라는 거, 사실 대단할 거 없어. 실제로 보면 쓰레기야.
쓰레기란 단어를 입에 올린 세티의 입꼬리는 씁쓸했고, 미소는 공허했다.
용사를 도와줘야 할 구봉산은 무너졌고, 세계수와 제국은 핵을 맞고 빌빌거리지. 기술을 전수해줘야 할 마탑과 영웅들? 다 병신이야. 그리고 또…
말끝을 흐리는 세티는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또… 성녀랑, 세계수의 공주도 딱히 용사 편이 아니었어. 걔들은 날 좋아했거든.
“….”
되돌아보면, 좀 이상하지? 미리디스야 내 도움을 받았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성녀는 왜 그렇게 나를 좋아했을까?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동경? 어쩌면… 이름 마지막 글자가 똑같아서?
거기까지 말한 세티는 몸에서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나는 걔한테 해준 게 없는데… 너도 그렇지?
여명은 대답할 수 없었다. 세티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마른 세수를 했다.
곧 그녀는 표정을 숨기려는 듯, 화면을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다시 용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용사가 나타난 건, 마왕이 나타날 거라는 증거야.
마왕?
여기서 내가 말하는 마왕은 전설 속 괴수의 왕이나, 종말 교단의 아야톨라 같은 녀석들이 아니야. 그런 거라면 미군이 알아서 쓸어버렸겠지.
“….”
미군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그런 마왕이 나타날 거야. 개인의 힘에 그치지 않고, 국가 권력, 경제력, 어쩌면 신의 힘까지 휘두르는 그런 괴물이. 마치…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여명은 화면 너머의 세티가 하는 말이 진실임을, 그리고 저 세티가 이미 한 번 마왕과 격돌한 적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이런 화면을 또 다른 자신에게 보여주는 걸까.
마왕과 싸울 힌트라도 주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명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세티가 화면을 바라보며 정답을 말했으므로.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지? 정답은 간단해. 우리는, 아니, 너는… 마왕이 되어야 하니까.
“…뭐?”
농담하는 거 아니야. 힘을 키우고, 마왕이 되어야 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한국을 불태우고 자매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 아, 이런, 씨…
거기까지 말한 세티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면을 갉아먹는 무언가를 억누르려는 듯이.
젠, 장… 겨우… 힌트만… 줬… 끅… 마왕이… 되는… 법은…
신음하는 그녀의 말소리를 따라, 화면이 흔들렸다. 구겨지고, 휘어지는 그녀의 모습 너머,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가 소리를 막았다.
네가 죽인… 카할 마그두와… 옛 지배자들… 해와 달의 아들… 엿 같은… 공산주의자… 그리고… 제 3의 길에게서… 모두… 빼앗… 빼앗아야…
여명은 죽어가는 세티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꿈속이었음에도, 입술에서 흐르는 피 맛이 선명했다.
결국, 세티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의자에서 쓰러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화면 너머로 사라진 그녀는 한참 동안 보이지 않았다.
여명에게는 억겁처럼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처절하게 의자 위로 기어 올라왔다.
위태롭게 의자에 앉은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미안,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 이상은 꿈을 통해서도 전달할 수가 없… 쿨럭! 쿨럭!
기어코 피를 한 움큼 토해낸 그녀는, 조금 전보다도 더 우울한 표정으로 입가를 슥슥 닦았다.
손등에 묻은 피를 보던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허리춤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너무나도 익숙한, 성녀의 리볼버.
엿 같은 인생. 이제 1분도 안 남았네.
그 말을 끝으로, 세티는 자기 관자놀이에 리볼버 총구를 가져다 댔다.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딱히 유언을 남길 것도 없네. 뭐, 나처럼 살지 말라는 소리는 할 필요 없어 보이고…
철컥, 리볼버의 노리쇠가 당겨지는 걸 본 여명은 으스러질 듯 브라운관 TV를 붙잡았다.
아, 그래. 아직 성녀가 살아 있다면… 친하게 지내줘. 죽은 뒤에 흘린 눈물은, 살아 있을 때 주고받는 욕보다도 가치가 없더라고…
“…세티.”
여명은 자신의 말이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말이 닿은 걸까? 화면 속 세티는 처연하게 웃었다.
그리고 만약에… 네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네티의 유언을 지켜주라. 그거 못 지킨 게, 그게 평생의 한이 되네.
세티의 미소는 거기까지였다. 그 말을 끝으로, TV 화면이 갑자기 꺼져버린 까닭이었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을까? 아니면 마지막 시간까지 무어라 더 유언을 남겼을까.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리에 마나를 모았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들어
콰직!
브라운관 TV를 짓밟았다. 박살 난 플라스틱과 유리가 피처럼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꿈속에서, 여명은 조용히 천장을 바라봤다. 죽은 벌레들이 꼬인 전구의 불빛이 흐릿하게 그의 눈을 비췄다.
기다란 침묵, 그보다 깊은 고민.
“…마왕.”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여명은 미래, 혹은 과거의 세티가 남긴 말을 혓바닥 위에 굴렸다.
“용사 혈통 다음에는 마왕이라니…”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여명은 비웃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몸속에 봉인된 악신은 뭐, 말이 되는 이야기던가?
마찬가지로, 그가 TV 너머로 본 화면이 무엇이건 간에 그는 성녀와 세티의 죽음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가족이 죽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무기력한 청소부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러니 이 좁디좁은 방 또한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를 지켜주던 방은 이제 없다. 놓고 가야 할 과거와 깨고 나가야 할 껍질만이 있을 뿐.
작디작은 깨달음, 혹은 뒤늦은 깨달음을 끝으로 여명은 주먹을 들었다.
곧 그의 혈관을 따라 마나가 파도쳤다. 세티가 그에게 처음 알려준, 파양결의 파도.
여명은 파도가 가득 맺힌 주먹을 뒤로 크게 젖히고는, 그대로 벽을 후려쳤다.
!!!
좁디좁은 방의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그를 가둬놓던 꿈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역겨운 약 냄새가 코를 짓누르는 연금술사의 공방.
세티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흩어지는 집중력을 붙잡기 위해서.
찢어진 입술을 따라 흘러내린 핏물이 혓바닥을 적시자, 흐릿해진 정신이 돌아오며 눈앞이 선명해졌다.
그녀는 피곤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손에 들린 망치를 쥔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멀었나요?”
“아니, 이제 곧 끝날 거야.”
세티의 말을 받은 건 라쉬크였다. 그녀는 각종 계기판이 오르내리는 기계와 잠든 여명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어제도 그 말 했어요.”
“그랬나?”
라쉬크는 붉게 충혈된 눈을 비볐다. 각성제를 빨아가며 버틴 탓인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진한 피로가 묻어나왔다.
“지금이라도 말해줘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
“아니, 아무 문제 없어. 시술은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그 말도 어제 했어요.”
“….”
“…하루면 끝난다고 했잖아요. 지금 벌써 73시간이나 지났어요.”
“73시간?”
라쉬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장갑을 거두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티의 말은 진실이었다.
이 시술을 시작한 지 벌써 73시간하고도 20분이나 흐른 시점.
“…이런 씨발.”
집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라쉬크는 작게 욕을 내뱉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걸 보면 뭐가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는데, 정작 계기판으로 보이는 정보는 모두 정상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핑계가 될 수 없었다. 현실은 현실이었고, 지식인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 논해야 하는 법이었다.
살벌한 세티의 눈빛을 마주 보던 라쉬크는 나름대로 답을 내놨다.
“아마 너무 큰 심장이라 오래 걸리나 봐. 그 외에는 정말로 아무 문제 없으니까… 가서 자고 와도 돼.”
라쉬크가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세티는 자러 가지도, 그렇다고 라쉬크에게서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라쉬크를 믿지 못했다. 73시간 동안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그런 불신은 성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랄하지 말고, 빨리 끝내기나 해요.”
72시간 내내 잠을 설친 성녀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잠들지 않기 위해 꼬집은 허벅지는 퉁퉁 불어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건, 그녀가 주렁주렁 꺼내놓은 무기들이었다.
양손에 총을 든 것으로도 모자라, 입구에 수류탄으로 부비트랩까지 설치해놓은 모습.
“…예, 예.”
라쉬크는 정신 나간 두 소녀를 설득하는 대신, 다시 여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몇 번을 체크 해봐도, 그의 상태는 정상이었다.
뼈와 근육, 피부와 혈관, 심지어 용의 심장이 들어선 장기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혹, 뇌사 상태에 빠진 게 아닐까, 뇌파를 확인해봤지만, 그의 뇌는 멀쩡했다. 심지어 꿈이라도 꾸는 건지, 종종 마나가 섞인 뇌파를 내뿜기까지 했다.
‘시발, 이유가 뭐지?’
라쉬크는 미칠 거 같았다. 차라리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면 모를까, 그녀의 시술은 완벽했다.
다시 하라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는 못 할 정도.
“대체 왜…”
그녀는 눈을 비볐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인데, 정작 기도 전문가인 성녀는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어서?
아니, 그동안 연금술사로서 쌓아온 지식과 자존심이 전부 무너지는 것 같아서.
무너진 자존심은 성녀의 총알보다도 더 아팠다. 오죽하면 그녀는 이런 이야기까지 꺼냈다.
“저기, 키스라도 해볼래?”
“…뭐라고요?”
“왜 있잖아, 왕자님이 키스하면 왕자가 일어나는…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자신이 내뱉은 말에서 참담함을 느낀 라쉬크는 얼굴을 쓸었다.
하다 하다 여기까지 떨어지다니, 연구소에서 구더기를 먹던 시절보다도 더 비참했다.
한데, 정작 세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조심조심 파이프들을 피해 의자에 앉은 여명의 곁으로 다가갔다.
“…진짜로 하려고?”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봐야죠.”
라쉬크가 황당해하건 말건, 세티는 새끼손가락으로 찢어진 자기 입술을 찍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맺히는 작은 핏방울.
세티는 키스가 아니라, 이 핏방울을 미그니움께 제물로 바쳐 여명을 깨워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술을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내는 건 누가 봐도 키스 준비로 보였고, 그걸 본 성녀가 쪼르르 세티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그, 나도 할까?”
“뭘?”
“…키스.”
다음 순간, 라쉬크는 두 소녀를 보며 고민했다.
‘조금 전까지 나한테 그 지랄을 해놓고 너희는 이게 무슨 짓이냐?’ 와 ‘두 명이 한 입술에 어떻게 키스하냐?’는 말이 동시에 떠오른 까닭이었다.
성녀의 손에 들린 소총을 보면 후자를 입에 올리는 게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키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무거운 그 목소리를 따라 세 여자는 동시에 의자를 바라봤다.
“키스라니? 누가 누구한테 키스하는데?”
73시간 만에 보는 황금색 눈동자.
어딘가 얄미운 그 눈동자를 본 세티는 피가 맺힌 새끼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꾹 찔렀다.
“넌 몰라도 돼.”
***
[탑승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22시 30분에 개성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한국항공 757편은 지금 3번 탑승구에서 탑승을 시작합니다. 탑승 마감 시간은 출발 10분 전입니다.]딱딱한 목소리의 기내 방송이 울리자마자, 장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켠 그가 바로 3번 탑승구로 향하려 하자, 아직 자리에 앉은 여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
“벌써 가려고? 아직 20분이나 남았잖아.”
“20분밖에 안 남은 거지.”
장만이 그렇게 말하자,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메이커는 입술을 삐쭉였다.
“…은퇴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것처럼 굴어.”
“늙을수록 빠릿빠릿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장만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에 스카프까지 쓴 너를 귀찮게 하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대신, 작게 미소 지었다.
“너도 할 일이 태산일 텐데, 괜히 시간 낭비할 것 없다.”
“아무리 그래도 20분 정도는 낼 수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메이커의 휴대폰은 계속 빛을 내뿜었다. 음소거를 해도 숨길 수 없는 긴급 신호.
장만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3번 탑승구로 향했고, 메이커는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뒤를 따랐다.
“미국에는 언제 또 올 거야?”
“인연이 있으면 오겠지.”
메이커는 콧방귀를 꼈다.
“…안 오겠다는 소리를 참 고풍스럽게도 하네. 그럴 거면 연락이라도 잘 받아 주던가.”
“난 CIA와 얽히기 싫다.”
“염병.”
짧은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대화보다도 더 섬세한 발걸음의 하모니가 이어지길 잠시.
휴대폰을 들던 메이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장만도 따라 걸음을 멈췄고, 자연스레 그녀의 휴대폰을 보게 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줄이 좍좍 그어진 미국 지도.
그 지도는 일반인은 보면 안 되는 기밀 정보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장만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순식간에 검은 선들을 읽어냈다.
다음 순간, 메이커가 그에게 질문할 게 뻔했으므로.
“이거… 혹시 뭔지 알아보겠어?”
장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FBI는 뭐라고 하더냐?”
“무슨 마법진 같은 거라고 예상하던데.”
“마법진… 하긴,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구나.”
“그럼 당신 의견은 다르단 거지? 그러면 이게 뭐라고 생각해?”
장만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걸 대답해도 될지, 그조차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윽고 이제 곧 탑승 마감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올 때쯤.
그는 한숨 쉬듯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이 검은 선들은 일종의 운반 루트 같구나.”
“…운반 루트?”
장만은 지도를 짚으며 설명했다.
“검은 선 대부분이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 특히 수로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마법진을 굳이 이런 인적 많은 곳에 설치할 필요 없으니, 이건 뭔가를 옮기기 위한 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구나.”
“….”
확실하진 않지만, 가장 그럴싸한 설명이었다. 메이커는 잠시 지도를 노려보다가, 한 번 더 질문했다.
“그럼 어디서 어디로 뭘 옮긴 걸까?”
“이 지도만으로 뭘 옮겼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렇게 옮겼을 게다.”
장만은 손가락으로 지도의 왼쪽 아래를 짚은 뒤, 서서히 반월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LA에서 시카고, 그리고 워싱턴과 뉴욕으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개의 도시를 꿰뚫는 장만의 손가락을 보며, 메이커는 불길함을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