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6)
을 위한 세계는 없다-26화(26/817)
〈 26화 〉 다른 선택, 다른 길, 다른 이름
* * *
신도, 마나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니. 당신들은 그런 저주받은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온 거요?
『UN 기념관 소장품 – 차원문 너머와 첫 연락 기록 중 발췌』
***
장만, 인천의 모든 밀수꾼에게 어르신으로 통하는 노인은 뚱한 얼굴로 자신의 술집에 들어섰다.
창문이 깨져 있을 때부터 별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술집의 상황은 그 기대 이하였다.
바닥 곳곳이 움푹 파여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들은 전부 박살 나 있었다. 바닥에는 전구, 창문, 술병이 깨지며 남긴 유리 조각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카운터라도 남아서 다행인가.’
장만은 한숨을 쉬며 술집 안으로 들어가 청소도구와 포대자루를 들었다.
청소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장만은 노인다운 완고함으로 분주히 손을 움직였지만, 끝이 보이질 않았다. 원체 부서진 게 많은 탓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노인 혼자 낑낑거리며 청소하는 사이, 쇠똥구리가 술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광산이라도 갔다 온 건지, 옷에 검댕이를 가득 묻히고 있었다.
“어르신,무사하셨군요. 혹시 녀석들에게 뒤를 밟힌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걱정은 무슨, 도망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장만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밀수꾼이라면 누구나 도망갈 구멍 하나쯤은 준비해두는 법이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너는 어디 다친 곳 없느냐?”
“예, 좀 이상한 일을 겪긴 했습니다만…”
“그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다오. 우선 청소부터 하자꾸나.”
장만은 쇠똥구리에게 청소도구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쇠똥구리는 별말 없이 청소를 시작했다.
전직 청소부, 그것도 초인이 직접 청소에 뛰어들자 쓰레기들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집은 그럭저럭 제 모습을 되찾았다.
장만은 운 좋게 깨지지 않은 술병을 찾아 들고는, 쓰레기가 가득 담긴 포대 자루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게냐?”
쇠똥구리는 마지막 남은 포대자루를 질끈 묶은 뒤, 장만이 도망친 뒤에 벌어진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프레아 칸이 싸움에 끼어들고 푸른 쥐들을 풀어줬다는 것, 그녀에게 가르침을 빙자한 검술을 두들겨 맞고, 그녀에게 단검을 받았던 이야기까지.
술을 홀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장만은, 단검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프레아 칸이 무술이 담긴 단검을 줬다고? 정말이더냐?”
“보여드릴까요?”
쇠똥구리는 대수롭지 않게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검신이 드러나고, 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반짝거렸다.
“오….”
장만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장난감을 보는 꼬마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외형만 봐도 알겠구나. 이건 진품이다. 지구에서 만든 조악한 모조품이 아니라, 차원문 너머에서 가지고 온 진짜 비전(??)유물이야.”
“…비전유물?”
“왜, 처음 듣는 단어더냐?”
쇠똥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유물? 검정 고시용 교과서는 물론이고 TV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규 교육 중에는 들어볼 일 없는 단어니 말이다.”
장만은 들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말을 이었다.
“비전유물은… 차원문 너머 초인이나 마법사들이 후세에 기술과 가르침을 전수하기 위해 만든 물건의 통칭하는 단어다.”
“기술을요?”
“마나를 주입하면 유물에 기록된 마법이 발동돼 제작자의 기억을 볼 수 있다더구나. 동영상처럼 재생되는 경우도 있고, 꿈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알려지기론 그렇다.”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이었군요.”
“그래, 대단하고 그만큼 귀한 물건이지.”
“어르신 기준으로도 귀한 물건입니까?”
“당연히 귀하지. 나 같은 일반인은 사용도 못 하는 물건 아니더냐? 초인들끼리만 거래하니, 웬만한 밀수꾼도 평생 두어 개 보면 많이 본 걸 게다.”
쇠똥구리는 새삼스레 단검을 들어 검신에 새겨진 기묘한 글자를 눈에 담았다.
마나를 주입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번역가를 찾아서 글자를 번역할 필요는 없는 건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마나를 일으키는 사이, 장만이 쇠똥구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서 마나를 주입할 생각은 하지 말 거라.”
“….”
“…벌써 시도하고 있었던 게냐?”
쇠똥구리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장만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따라오거라. 적당한 장소가 있으니.”
앞장서는 장만의 뒤로 단검을 챙긴 쇠똥구리가 따라붙었다. 장만은 술집 뒷문을 나와, 뒷골목 깊숙한 곳을 향했다.
바닷냄새가 물씬 나는 골목을 지나, 사람보다 쓰레기가 더 많은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장만이 발을 멈췄다. 그는 잠시 바닥을 살피다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맨홀 뚜껑을 들어 올렸다.
끼익.
맨홀 뚜껑치고는 쉽게 들린다 했더니, 그건 맨홀 뚜껑으로 위장된 철문이었다.
쇠똥구리는 왜 골목 바닥에 이런 게 있는지 묻는 대신, 장만을 따라 철문 아래로 내려갔다.
철문 아래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기다란 복도가 있었다. 먼지만 조금 쌓인 걸 보니, 평범한 하수구는 아닌 듯싶었다.
“여기는…?”
“지하 벙커로 통하는 길이다.”
“벙커요? 어르신께서 만드신 겁니까?”
“내가 아무리 돈이 썩어 나도 이런 걸 지을까. 여긴 미국이 신탁통치 하던 시절에 미군이 지은 곳이다. 한국 정부도 모르는 장소지.”
장만과 쇠똥구리는 휴대폰 불빛을 횃불 삼아 복도를 걸었다. 두 남자가 좁아터진 복도를 지나자,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은행 금고의 문처럼 두꺼운 철문이었는데, 장만은 이곳에 온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 너머는 그야말로 보물창고가 따로 없었다.
커다란 벙커에는 큼직한 금고와 현금다발들, 그리고 금괴가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상상 이상의 부자셨군요.”
쇠똥구리가 짧게 평하자, 장만이 코웃음 쳤다.
“이 창고에 있는 물건들 전부 합쳐봐야 네가 들고 있는 단검 하나만 못할 게다.”
“….”
쇠똥구리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장만이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비전유물은 여기서 쓰거라. 여기라면 무슨 사고가 나도 쫓아올 놈은 없을 게다. 핸드폰을 두고 갈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고.”
장만은 쇠똥구리의 어깨를 두들겼다. 평생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은 밀수꾼의 투박한 호의였다.
익숙하지 않은 호의 앞에서, 쇠똥구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
혼자 남겨진 쇠똥구리는 벙커 한가운데 자리 잡고, 푸른 단검을 꺼냈다.
‘비전유물이라….’
금고에 있는 온갖 금붙이들보다 더 값비싼 단검.
프레아 칸이 순수한 호의로 이걸 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대단한 초인이라도, 호주 정부에 소속된 사람 아닌가.
분명, 나름의 이해득실을 따져서 그에게 단검을 주었으리라.
하지만 무슨 의도가 있건 간에, 호의는 호의였다.
‘언젠가, 갚아야겠지.’
쇠똥구리는 그간 받아온 호의를 떠올렸다. 장만 어르신, 프레아 칸, 그리고 세티.
복수가 끝난 뒤에도 살아있다면…호의를 되돌려주자.
쇠똥구리는 그렇게 다짐하며 단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벙커가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펴보니, 그는 드넓은 초원에 서 있었다.
벙커 천장이 있던 자리에는 처음 보는 밤하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금고와 지폐가 있던 바닥에는 낯선 풀들이 펼쳐져 있었다.
‘환상?’
쇠똥구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모든 감각이 정상이었지만, 그는 초원의 모든 것들이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미그니움의 꿈속에 있었을 때처럼.
꿈.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꿈.’
그것을 깨닫는 순간, 머리 위에서 가벼운 미성이 들려왔다.
벌써 자각했다고? 빠르구나. 빨라도 너무 빨라.
쇠똥구리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문자 그대로, 혜성이었다. 새하얀 꼬리와 푸른 꼬리를 밤하늘에 수놓고 있는 혜성.
이것이 적절한 표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쇠똥구리는 그 혜성과 눈을 마주했다.
계승자가 올 줄 알았건만, 웬 괴물이 왔구나.
혜성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쇠똥구리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평소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계승자가 뭡니까?”
나의 자유를 이어받을 자. 별의 검을 휘둘러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를 뜻한다. 그 아이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군?
“프레아 칸께선 그저 검술을 익히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 그 아이는 원래부터 말재주가 없었지. 혹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가.
혜성은 한숨을 쉬더니, 밤하늘에서 빙글 회전했다. 별의 꼬리가 꾸불꾸불 짜증 섞인 곡선을 그려냈다.
쯧, 그 아이는 너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만, 너는 이미 다른 것과 계약을 맺었구나. 아쉽지만 계승자가 아닌 것에게 별의 검은 줄 수 없…
짜증 섞인 목소리를 토해내던 혜성은, 불현듯 정지했다. 마치 밤하늘 한가운데 박제된 것처럼.
이… 이건, 대체…?
혜성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뭔가 턱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뭔가 이상함을 느낄만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혜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대체 뭐냐?
“혜성님?”
어떻, 이런, 계약, 악, 악!
밤하늘의 그림자가 요동치고, 혜성의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당황, 혼란,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한 별빛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아름답고도 황당한 풍경이었지만, 다행히 그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밤하늘이 혜성을 집어삼키려는 듯 빛을 빨아들이자마자, 혜성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 그만! 시, 시키는 대로 하겠다!
꼴사나운 목소리였다. 쇠똥구리는 애써 혜성을 외면했다.
지금 혜성을 괴롭히고 있는 그림자는 아마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존재일 테니까.
으, 으… 내가 직접, 주겠다, 그만… 그만해다오.
그 말을 끝으로, 혜성이 빛을 뿜어냈다. 여태껏 보지 못한 강렬한 빛이었다.
번쩍!
쇠똥구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혜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빛으로 이루어진 어린아이가 그의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다.
쇠똥구리가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아이는 몸을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아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얼굴을 보자마자,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바로 조금 전까지 대화했던 혜성이라는 걸.
너, 너… 검술을 원한다고 했지? 주겠다. 원하는 만큼 주겠다. 그러니… 웁!
혜성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혜성은 무언가를 토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혜성의 입에서 별빛이 쏟아졌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지만, 쇠똥구리는 내색하지 않고 그것에게 다가가 등을 두들겨줬다.
청소부 시절의 버릇이었다. 취객 혼자 토하게 내버려 두면 언제 끝날지 몰랐으니까.
그렇게 한참 등을 두들겨 준 뒤에야, 혜성은 입을 다물었다.
하아… 고, 고맙다.
혜성은 길게 심호흡하고, 등을 두들겨주던 쇠똥구리를 바라봤다.
빛으로 이루어진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울먹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너에게 나의 검… 혜성검을 주겠다.
“…계승자가 아니면 못 받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별의 힘까진 줄 수 없다. 하지만 검술의 진의를 주는 건 어렵지 않다. 이해하겠느냐?
이해고 뭐고, 쇠똥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울먹거리는 혜성의 얼굴을 보자 차마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빛이 흘러넘치니,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혜성은 그리 말하곤 손을 꽉 쥐었다. 잠시 후, 혜성이 다시 손바닥을 펴자 그 위로 작은 구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구슬이 혜성검의 진의다. 이것을 전부 이해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으나… 너의 재능이라면 일 년도 걸리지 않겠지.
쇠똥구리는 조심스레 구슬을 받았다. 아니, 받으려 했다.
혜성은 구슬을 넘겨주기 직전에 손을 멈췄다. 쇠똥구리가 뭔가 싶어 얼굴을 바라보자, 그것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저, 그… 아이야. 하나만 약속해다오.
“약속이요? 무슨 약속 말입니까?”
프레아 칸을 만나면 반드시 단검을 돌려주거라. 내,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쇠똥구리는 차마 싫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혜성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한 탓이었다.
“…예, 약속하겠습니다.”
고, 고맙다. 그게…흑, 약속 꼭 지켜다오…
혜성은 그제야 그에게 빛을 넘겼다. 쇠똥구리가 빛의 구슬을 쥔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꿈이 사라졌다.
샤아아
꿈속으로 들어온 때와 달리,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은 혼란스러웠다.
피부가 간질거리며 촉각이 깨어났고, 작은 이명이 들리며 청각이 돌아왔다.
그다음으로 깨어난 건 후각이었다. 벙커 안의 먼지 냄새 사이, 칼칼한 고춧가루의 냄새와 MSG의 진한 향기가…?
‘…라면 냄새?’
쇠똥구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시각이 돌아왔다.
흐릿한 시야를 몇 번 깜빡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아름다운 얼굴, 대충 올려 묶은 검은 머리, 그리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홍세티. 낯익은 그녀가 벙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채,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아직 꿈속인가?”
쇠똥구리가 입을 열자, 눈이 마주쳤다.
막 한입 먹으려던 참이었는지, 세티는 면발이 담긴 냄비 뚜껑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짧은 침묵, 긴 어색함.
“어…”
쇠똥구리의 한쪽 눈썹이 길게 휘어질 때쯤, 세티가 입을 열었다.
“…같이 드실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