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62)
을 위한 세계는 없다-262화(262/817)
〈 262화 〉 비둘기 속의 고양이 (3)
* * *
***
“…교단?”
파순의 말을 받은 건 성녀였다. 그녀는 축복으로 붉게 물든 리볼버 방아쇠에 손을 올린 채 파순을 노려봤다.
녀석은 여전히 허공에 누운 채로 대답했다.
“너희 다섯 잡신 말고.”
“다섯… 뭐? 야! 너 뭐라고 했냐?!”
성녀가 총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건 말건, 파순은 여명을 보며 말을 이었다.
“종말 교단. 그 바퀴벌레 녀석들은 이번 드워프 내전에서 뭔가 주워 먹을 게 없나 대가리를 기웃거리는 중이지.”
“….”
여명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드워프 내전? 회사 내부 권력 다툼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단순한 말실수라기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단어였다. 파순이 속한 조직에는 성녀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자가 있었으므로.
‘전투 헬기를 보낸 걸 보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여기가 미국이라는 점이었다.
전투 헬기를 보낼 수 있는 조직은 물론이고, 드워프 재벌조차 주 방위군 수준에서 정리해버릴 수 있는 강대국.
여명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미국이란 나라의 힘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전이라.
여명은 파순에게 내전에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자, 그의 생각대로 파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정보는 선금이야. 지난번 사소한 트러블의 대가이기도 하고. 자, 어쩔래? 거래할 거냐?”
“…뭘 거래할 건지나 말해.”
여명이 관심을 보이자, 성녀가 ‘거래는 무슨, 지금 당장 죽이자!’ 라고 소리쳤다. 파순은 성녀에게 중지를 날리며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 서로 힘을 합치자. 그리고 마지막에 사이좋게 남는 걸 나눠 먹자고. 어때?”
“만주에서 했던 거래랑 다를 게 없는 거 같은데.”
여명이 지적하자, 파순은 히죽 웃었다.
“어허, 우리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자,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
“그때는 우리 둘 다 용을 원했지만, 이번에는 서로 원하는 게 다를 거야. 드워프들의 창고를 털면 나눠 가질 것도 많을 테니까. 응? 그렇지?”
말은 청산유수였으나, 파순 본인도 안 믿을 소리였다. 여명은 슬며시 검에 마나를 불어 넣으며 대답했다.
“…그래,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
“오, 알아주는”
“내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거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명은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옅은 검기를 머금은 검이 길게 잔상을 남기고, 파순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
그러나 피는 튀지 않았다. 파순이 그 짧은 순간 검붉은 마나를 일으켜 목을 보호한 덕분이었다.
물론 충격을 완전히 흡수한 건 아닌지, 녀석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실핏줄이 흘러내렸다.
“…워우.”
여명은 연격을 가하지 않고 검을 늘어 트렸다. 네 목숨은 언제든 취할 수 있다는 듯이.
그건 강자에게 어울리는 태도였고, 파순은 즐거운 마음으로 입술을 핥았다. 혓바닥 끝에서 느껴지는 피 맛이 각별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심한 걸. 천하의 기재가 아니라 최악의 괴물이었네.”
“…할 말은 그거뿐이냐?”
싸움을 기다리고 있던 여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자, 파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니, 거래 내용을 바꾸자.”
“….”
“일이 끝날 때까지 서로 터치하지 말자고, 돕는 건 자유지만, 최소한 방해는 안 하는 걸로.”
여명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널 뭘 믿고?”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당연히 없지 개자식아 발아래에서 성녀가 소리쳤다. 파순은 껄껄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인데… 쯧, 그러면 우선 신용부터 증명해주지. 우리 조직, 그리고 나를 고용한 난쟁이 녀석에게 너와 성녀에 대한 정보는 전부 비밀로 하겠어. 어때?”
“그딴 거래 안 하고 이 자리에서 널 죽이는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정론이었다. 파순은 허공에서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나 혼자 왔으면 그렇겠지.”
바로 다음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성당 예배당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코트로 온몸을 꽁꽁 가린 거대한 덩치의 남자였는데, 여명과 성녀 모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경계심을 느낀 성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건 말건, 남자는 허공에 떠 있는 파순과 여명을 보며 말했다.
“파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있었지.”
“친구? 당신 같은 인간에게 친구가 있었습니까?”
“너보다는 많아 이 새끼야.”
웃기지도 않는 만담이 이어지는 사이, 여명은 슬그머니 남자를 가늠해봤다. 코트 아래 숨겨진 육체를, 그 속에 담긴 마나를 탐지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명의 수준에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하거나, 그의 탐지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모종의 기술이 있다는 뜻.
어느 쪽이건 파순이나 마그두만큼이나 골치 아픈 녀석일 게 분명했다.
‘…성녀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적어도 시작과 동시에 둘 중 하나는 처리해야 해.’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이 검에 화산쇄설을 담으려는 순간.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친구고 뭐고, 저와 약속하셨잖습니까. 우선 붉은 별부터 찾기로.”
“아, 그랬나?”
“기억 안 나는 척하지 마십시오. 불과 세 시간 전에 한 약속입니다. 파순, 제발 부탁이니, 오늘만 약속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오늘 내로 붉은 별을 찾아야 싸워보기라도 할 거 아닙니까.”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순이 미소 지으며 여명을 바라봤다.
녀석이 지금 눈앞에 있는 여명이 붉은 별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당장 싸움이 벌어지리라.
하지만 파순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여명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말 안 한다고 했지? 봐, 나도 나름 의리가 있다니까?”
“….”
“거래하는 거다?”
여명은 대답 대신 파순의 목덜미를 붙잡고, 그대로 성당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파순은 바닥에 처박히는 대신, 허공에서 휘리릭 회전해서 남자의 옆에 착지했다.
백 점 자리 착지였으나, 내던지는 힘이 어찌나 컸던지 성당 바닥에 작은 금이 갔다.
남자는 살짝 후들거리는 파순의 발목을 보며 말했다.
“…친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고향에서는 친구끼리 이러고 놀아.”
“….”
그가 황당해하건 말건, 파순은 얼음송곳을 밟고 허공에 떠 있는 여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만 가볼 테니, 나중에 또 보자고!”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거래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기에, 파순은 웃으며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남자와 함께 성당 밖으로 나가던 파순은, 뭔가 떠올린 것처럼 휙 고개를 돌려 성녀에게 소리쳤다.
“아, 오늘은 미안했어! 근데, 너희 탓도 있는 거 알지? 다음부터는 밤에 해! 그런 건 원래 밤에 하는 거니까!”
내려오던 여명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긴장하고 있던 성녀의 미간이 팍 찌그러졌다.
“저 개자식이 진짜!”
***
잠시 후, 시카고 시내 남부.
드높은 마천루들이 올려다보이는 거리에서, 여명이 말했다.
“잘 참았어.”
“….”
“거기서 쐈으면 경찰들이 몰려왔을 거야.”
나름대로 위로라고 하는 말이었지만, 성녀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삐쭉였다.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억울함, 서러움, 부끄러움, 그리고 미안함이 흘러내렸다.
“…미안.”
“미안하다고? 뭐가?”
“…나 때문에 안 싸우고 보내준 거잖아.”
성녀의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작았으나, 바로 옆에 있는 여명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런 거 아니야.”
“….”
성녀는 그의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명이 파순과 싸우지 않은 이유는 복합적이었으니까.
바깥에 있는 경찰과 주변 시민들, 곧 열릴 임원 회의, 파순의 동료 등등…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이유 중에 자신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괜히 여명의 짐이 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여명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건지, 살며시 어깨를 두들겨줬다.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성녀는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여명의 입술을 정면으로 보고 말았다.
그리고 멈췄던 그때의 설렘이, 잠시 미뤄두었던 첫 키스의 기억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빨개지는 귓불.
성녀는 휙,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저, 저기 여명…”
“응.”
“나, 나… 어땠어?”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뇌는 잠시 성녀가 생략한 주어가 뭔지 떠올리기 위해 고민했고, 주어가 입술이라는 걸 깨달은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았어.”
“…저, 정말이지? 그, 혹시… 막, 냄새나거나, 불쾌하진 않았지?”
“….”
뭐라고 해야 할까, 가끔 성녀는 사춘기 남학생처럼 구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여명은 청소부 형들이 자신에게 그랬듯 짓궂게 놀려줄까 하다가, 그냥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백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행동.
성녀는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여명이 손가락을 엮어 깍지를 끼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얼마나 걸었을까?
목적지였던 비스타 타워에 도착할 때쯤, 성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세티도 이렇게 꼬셨어?”
여명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티가 날 이렇게 꼬셨지.”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던 걸까, 성녀는 입을 쩍 벌렸다.
“정말?”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어?”
“아니, 없긴 한데…”
말끝을 흐린 성녀는 뭔가를 고민하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갈 때까지 계속.
그리고 여명이 몰래 전망대를 벗어나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쯤, 성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세티가 먼저 꼬셨던 거 같아.”
“…?”
“초인 올림피아에서, 세티가 먼저 친구가 되자고 했었거든. 이것도 먼저 꼬신 거 맞지?”
여명은 한국 정부가 성녀와 친해지라는 임무를 내려서 먼저 아는 척을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성녀가 그녀를 탈락 시킨 탓에 세티가 한동안 성녀를 미워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괜히 둘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서? 아니, 그건 세티가 직접 해야 할 이야기였으니까.
뭐, 어쨌든 그사이 두 사람은 빌딩 옥상에 도착했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황금 옥새를 가져다 대자 문은 손쉽게 열렸다.
끼익 옥상에서 가장 먼저 두 사람을 반겨 준 건 고층 빌딩 특유의 바람이었다.
성녀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르며 여명의 손을 꽉 잡았고, 여명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옥상에서 미시간 호를 바라봤다.
저 멀리, 차원문이 열린 섬과 차원문 주변에 우뚝 솟아있는 둔간 중공업의 본사가 보였다.
꽤 먼 거리였지만, 날씨가 좋은 덕분인지 이 거리에서도 유리창이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세티는 왜 이런 곳 사진을 찍으라고 한 걸까?”
여명이 휴대폰을 꺼내는 사이, 성녀가 물었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날아가기 좋은 위치를 찾는 거지.”
“…날아가? 어떻게? 용? 아니면 코르부스라도 타게?”
여명은 한쪽 눈을 감고, 둔간 중공업 본사와빌딩 옥상 사이의 거리를 재며 대답했다.
“그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지만… 용은 차원문을 못 넘어오고, 코르부스는 사람을 태우고 그런 급 강하 못 해.”
“그럼?”
“세티의 무술이 뭔지 기억하지?”
망치 들고 떨어지는 그거? 성녀는 그제야 세티가 무슨 일을 벌일지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둔간 중공업 본사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한마디 했다.
“…불쌍하네, 다룰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