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64)
을 위한 세계는 없다-264화(264/817)
〈 264화 〉 비둘기 속의 고양이 (5)
* * *
***
동생의 염동력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사이, 세티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녀가 익힌 무술에 관한 생각.
한국 정부가 그녀를 비롯한 자매들에게 가르친 기술들은 대부분 극단적이었다. 그게 무술이건 마법이건 상관없이.
예를 들어, 지금 발아래 있는 네티는 무술과 마법 모두 직접적인 공격 기술은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그러면 세티 자신은? 그녀가 배운 무술은 기본기인 비각술을 제외하면 모두 일점돌파와 광역 학살에 특화된 것들뿐이었다.
천번류, 태번벽력공, 광리오흠검, 천둔폭뢰…
한국 정부가 어째서 그녀들을 이렇게 키웠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단순히 재능이 모자란 결함품이라서? 아니면 이렇게 극단적인 게 다루기 편해서?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한국이 알려준 무술로는 한국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다른 무술을 갈구했다. 평생 익혀온 일점돌파에 어울리면서도, 한국의 그것보다 더 나은 무술을.
물론 그런 무술을 손에 넣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부가 만들어 놓은 가축우리에 갇힌 그녀는 누군가의 제자로 들어갈 자격도, 몰래 유통되는 무술을 살 자본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시간은 많았고, 복수심은 더욱더 많았다.
그리고 복수심은 지팡이와 같아서, 쓰러지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개성 뒷골목의 쓰레기들과 시크릿 소사이어티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도, 이게 정말로 가능할까 포기하고 싶을 때도…
그녀는 버텼다. 뿌리 깊은 복수심과 증오로.
그렇게 수많은 시련을 버티고 버틴 끝에, 그녀는 기어코 원하던 무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홍단벽력(????). 무지개를 끊는 벼락이자, 복수를 위한 망치. 이 무술은…
딱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질 때쯤, 상승이 멈췄다.
네티가 염동력으로 띄울 수 있는 최대 높이에 도달했다는 뜻.
세티는 슬쩍 발아래를 확인해 봤다. 빌딩이 옥상이 작게 보이는 게, 떨어지기에 적당한 높이였다.
“후우.”
곧바로 깊게 숨을 들이신 뒤, 그녀는 양손으로 망치를 높게 들어 올렸다. 1m가 넘는 거대한 망치는 피뢰침처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홍단벽력의 진의를 따라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망치가 빛을 머금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 매달린 다룰마가 눈을 질끈 감는 게 느껴졌다.
겁먹은 드워프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으나, 마나가 완전히 충전될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세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과 본사 건물 사이의 하늘을 눈에 담았다.
투명 망토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저 하늘 사이 어딘가에 여명이 있으리라.
세티는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여 그의 이름을 불러봤다.
‘여명’
첫 번째로 그를 부르자, 불현듯 아이러니함이 느껴졌다.
복수를 위해 익힌 무술로 사람을 돕고 있다니.
‘여명’
두 번째로 그를 부르자, 이전에 홍단벽력을 사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인천에서 네크로맨서에게 죽을 뻔한 그를 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동급생과 성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지금, 드워프를 위해.
‘…되돌아보면, 전부 너 때문이었네.’
그래, 그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고민의 끝은 결국 여명이었다.
유일한 복수의 동반자이자, 복수가 아닌 길을 알려준 사람.
별로 웃긴 깨달음은 아니었고 딱히 웃을 상황도 아니었지만, 세티는 웃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망치의 손잡이를 꽉 잡은 뒤, 허리를 뒤로 젖혔다.
망치를 따라 무게중심이 기우뚱 뒤로 이동하자, 갑자기 땅과 마주 보게 된 다룰마가 기겁했다.
“자, 이제 출발할 테니, 마지막으로 숨 깊게 들이쉬세요.”
훈련할 때 수도 없이 했던 말을 끝으로, 세티 자신도 길게 숨을 삼켰다.
곧이어 넘치는 마나를 머금은 망치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세티는 망치를 쥔 손아귀에 꽈악 힘을 주며 마지막 궤도 계산을 끝냈다.
목적지는 둔간 중공업 본사 옥상, 목표는 폭격도, 강습도 아닌 착지.
마지막으로 계획을 되새긴 세티는 온몸의 근육을 끌어당겨, 본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힘껏 망치를 내리쳤다.
***
시카고 차원문이 내려다보이는 보이는 고급스러운 창가.
온갖 축복으로 강화한 대물 저격총을 거치하고 있던 성녀는 하늘에서 번쩍인 섬광을 보며 감탄했다.
“와, 그냥 보면 번개인 줄 알겠네.”
그러자 성녀 옆에서 인식 저해 마법과 음소거 마법을 준비하던 코르부스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집중하시지요. 성녀님.”
“거, 감탄도 못 해요? 우리 세티가 저렇게…”
“…집중 안 하시면 평생 키스만 하다가 끝나실 겁니다.”
“….”
성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떠올리지 못하고 조준경에 눈을 댔다.
그녀의 조준경 너머에는, 옥상 헬기 착륙장에 정확히 내려꽂히는 벼락이 보이고 있었다.
***
파순은 허공에서 다가오는 벼락을 바라봤다.
밝게 빛나는 벼락 속에는 망치를 든 계집애 한 명과 그 계집애 등에 매달린 드워프 한 놈이 숨어 있었다.
그중 드워프는 만주에서 봤던 녀석이 틀림없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에 주렁주렁 반지를 단 드워프가 둘이나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어떻게 침투하나 했더니…’
홍단벽력처럼 강대한 무술을 이런 미친 짓에 이용할 줄이야. 지구 놈들의 상상력이란.
파순은 입꼬리에 씰룩이며 계집애가 멀쩡히 본사 옥상에 착지하는 걸 바라만 봤다.
잠시 후, 그의 무전기가 지직 소리를 내며 당황한 보안요원들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여기는 보안실 2, 보안실 2, 몇몇 용병들이 조금 전 비정상적인 마나 활동을 감지했다. 무전을 받은 사람 중 이상 현상을 발견한 사람 있나?]용병들이 전부 병신은 아니었나? 뭐, 그래봤자 조연들일 뿐이지만.
파순은 히죽 웃으며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여기는 비둘기 6, 공중에서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보안실 2, 확인했다. 혹시 그 외에 찾은 것 없나?]“…조금 전까지 고양이 한 마리가 건물 주변에 어슬렁거리던데. 이런 것도 보고 합니까?”
[그런 사소한 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이상.]파순은 무전기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허공에서 편한 자세로 누웠다.
이제 어떤 개판이 벌어질지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아, 맞다. 술 가지고 올걸.”
***
움찔.
해밀턴 둔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낯선 마나의 파장에 피부가 파르르 떨렸다.
‘…누구지? 설마, 다룰마?’
하지만 그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격한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끄집어낸 탓이었다.
“그럼, 제108회, 둔간 중공업 임원 회의의 첫 의제를 상정하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늙은 드워프가 선언하자, 회의실 탁자에 둘러앉은 모든 드워프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개중에는 손을 들고 의견을 내는 드워프도 있었다.
“저, 의장님? 아직 오지 않으신 임원들이 많습니다. 더 기다리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외부 자문을 포함한 27명의 임원 중 11명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만, 더 기다린다고 빈자리가 채워질 것 같지는 않군요.”
가주 대리, 겉으로는 회의 의장을 맡은 늙은 드워프가 그리 말하자, 의원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늙은 드워프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자, 그러면 첫 의제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 후보에게 얼마만큼 후원금을 지원할 것이냐 입니다. 일족의 미래가 달린 정치적 문제인 만큼, 기탄없이 의견을 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임원들은 머릿수가 부족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열성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시카고는 언제나 민주당 텃밭이었으니 민주당에 줄을 대야 한다는 의견부터, 이번에는 공화당 또라이가 이길 테니 공화당을 밀어줘야 한다는 의견까지.
‘…놀고들 있군.’
해밀턴 둔은 속으로 혀를 찼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정치 이야기에 열과 성을 올리는 이유가 뭔지 뻔했으므로.
‘붉은 별과 다룰마에 관한 이야기는 하기 싫다 이거냐?’
나이만 처먹었을 뿐, 현실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늙은이들.
해밀턴은 남들 몰래 휴대폰을 꺼내며 생각했다.
잠시 시간을 늦출 수는 있어도, 결코 피할 수는 없으리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삐익
그는 휴대폰을 눌러, 오늘 회의를 박살 낼 비장의 패를 호출했다.
[독화, 계획대로 실행하시오.]***
“우웨에엑”
다룰마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무릎 꿇은 채, 속을 게워냈다.
다행히 기절하는 건 면했지만, 위산이 목구멍을 역류하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물론, 세티는 다룰마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엎어진 다룰마를 일으키며 말했다.
“토하고 있을 시간 없어요. 눈치 빠른 용병들은 마나 파장을 알아챘을 테니, 바로 출발해야 해요.”
“자, 잠깐! 조금, 조금만 쉬… 우웨엑!”
세티는 다시 바닥에 엎어지는 다룰마를 뚱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대뜸 그의 허리춤을 붙잡아 들었다.
초인의 완력은 드워프 한 명쯤 너끈히 들 수 있었다. 그녀는 다룰마를 짐짝처럼 붙잡은 채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지이잉
꼴에 재벌 기업 본사라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낯선 마법이 그녀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이대로 경보라도 울리면 난리가 날 상황.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주인이 왔다고 경보를 울리는 멍청한 경보기는 없었으므로.
[다룰마 둔. 확인했습니다. 환영합니다. 가주의 핏줄이시여.]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세티는 잠시 창문 바깥을 보며 여명이 올 시간을 가늠해봤다. 빠르면 대략 1분 남짓, 아무리 늦어도 5분.
이대로 먼저 출발하면 딱 맞는 시간이었다.
“다룰마, 회의장 위치 한 번 더 확인해주세요.”
“여, 여기서 2층 아래, 복도에서… 웁! 가, 가장 커다란 문… 우웨엑!”
2층 아래라, 세티가 미리 알아둔 위치와 동일했다. 좋아. 세티는 다룰마를 짐짝처럼 들어 올린 뒤, 어깨에 짊어지며 말했다.
“회의실까지 바로 달려갈 테니까. 꽉 잡으세요.”
“뭐? 잠깐, 세티 양, 나는… 우웁!”
다룰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세티가 비각술을 펼쳤다.
휘리릭 바람 소리와 함께 줄어드는 복도, 거의 추락하는 수준으로 내려가는 계단,
회의실까지 가는 사이 몇몇 용병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렸으나, 덤비거나 길을 막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다룰마 때문이리라. 설마 드워프 본사 건물에 드워프가 무단 침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테니.
어쨌거나, 세티와 다룰마는 순식간에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고급스러운 드워프 모습이 조각된 돌문.
드워프 문 앞에 선 다룰마는 허리를 펴고 심호흡했다. 경비고 뭐고, 지금은 당장 회의에 참석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쪼그라들었던 드워프의 폐를 따라 다룰마는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갑자기 안으로 들어선 다룰마를 본 드워프들의 표정은 둘로 갈렸다. 놀람, 당황.
다, 다룰마?
그동안 뭐 하다가 여기에 나타났지?
몰골은 왜 저래?
누구에게도 반가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멀미와 구토로 엉망이 된 드워프를 누가 반가워하겠는가.
하지만 다룰마는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몰린 시선을 이용하겠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존경하는 임원 여러분, 그리고 의장님! 회의에 늦은 입장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의제 상정을 요구하겠습니다!”
다룰마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혐오의 표정을 지었으나, 의장이라 불린 늙은 드워프는 달랐다.
“새로운 의제? 회의에 늦을 만큼 중요한 의제인가?”
“예! 우리 일족의 미래가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룰마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치자, 의장은 수염을 쓸었다.
“…그러면 어디 말해보게. 합당한 의제라면, 내 의장 재량을 써서라도 자네 의제를 투표에 부쳐주겠네.”
말투는 조금 딱딱했으나, 다룰마는 의장의 배려심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품에서 미리 준비해둔 장부를 꺼내 드워프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세티와 여명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일족의 치부가 담긴 장부.
“모두, 이 장부를 잘 봐주십시오! 이 장부는 지난 몇 년간 일족의 재산이 빼돌려진 증거입니다!”
재산을 빼돌려? 어떤 미친놈이? 회의장의 드워프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장부를 읽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드워프들은 대부분 기업체를 운영하는 자들이었고, 다룰마가 나눠준 장부에 적힌 자금 흐름이 전형적인 돈세탁 흐름이라는 걸 꿰뚫어 봤다.
이거… 대체 어떤 놈이야?
알뜰하게도 해 먹었군.
돈세탁에 암시장이 엮여 있다. 설마 한량 놈들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임원들은 회의장의 가장 어린 드워프, 해밀턴 둔을 향해 눈초리를 모았다.
하지만 해밀턴 둔은 겁을 먹긴커녕 당당하게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의장님, 제가 지금 새로운 의제를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해밀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원래는 조금 나중에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때마침 범인이 찾아와서 말입니다.”
“범인…?”
횡령의 범인을 말하는 걸까? 드워프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으나, 해밀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다룰마 둔. 그가 바로 붉은 별과 손을 잡고 임원들의 위치를 노출한 배신자입니다.”
“…뭐?”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던 세티는 물론이고, 다룰마조차 깜짝 놀랄 소리.
다룰마는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는 대신,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소리쳤다.
“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냐!? 내가 붉은 별과 손을 잡았다고?”
해밀턴은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사촌 형님,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뻔뻔하게 나오시는 겁니까? 이미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다룰마는 헛웃음을 삼켰다.
증거? 여명이 피눈물의 환상으로 얼굴을 가리고, 투명 망토까지 써가며 정체를 숨겼는데, 무슨 증거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만에 하나 진짜로 증거가 있다면…?’
다룰마는 슬그머니 망치에 손을 올리는 세티를 곁눈질하며 침을 삼켰다.
정말로 증거가 있다면, 그리고 그 증거가 여명으로 이어진다면… 이 세티란 소녀가 어떻게 나올지 불 보듯 뻔했으니까.
‘엿 됐군.’
상황 파악을 끝낸 다룰마는 세티가 움직이기 전에 버럭 소리쳤다. 일단은 증거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증거? 무슨 증거 말이냐? 난 결백하다!”
그래, 중요한 건 해밀턴의 증거였다. 다룰마는 녀석의 증거가 단순한 정황증거라면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정말 끝까지 모른 척하실 겁니까? 이걸 보고도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해밀턴이 증거라고 내민 건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종류의 물건이었다.
허리춤에서 막 꺼낸 무전기.
해밀턴이 무전기 버튼을 누르자, 그동안 음소거 되어있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회의장으로 간다! 막아! 막으라고!]총소리와 함께 무전이 끊어진 바로 다음 순간, 회의장 전체가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벽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이 틀림없었다.
“…오, 맙소사.”
그 섬뜩한 쿵쿵거림 속에서 누군지 모를 드워프의 신음이 이어진 바로 그때.
쨍그랑!!
회의실 유리창이 박살 나며 거대한 덩치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코트로 몸마저 꽁꽁 가리고 있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아지랑이.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부, 붉은 별…?
주가시빌리다! 저 살기! 진짜 주가시빌리야!
용병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드워프들이 제각각 공포에 빠져 뒷걸음치건 말건, 덩치의 주가시빌리는 회의장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다룰마와 눈을 마주친 순간, 녀석은 복면 위로 보일 정도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룰마 둔.”
“….”
“계약을 이행하러 왔다.”
다음 순간, 의장을 비롯해 이 회의장에 있는 모든 드워프가 다룰마와 붉은 별을 번갈아 바라봤다.
해밀턴의 말처럼, 정말로 다룰마 둔이 배신자인 걸까? 아니, 이건 배신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오, 맙소사, 가주의 핏줄을 이은 네가 어떻게…?”
원로 한 명이 침통하게 중얼거리건 말건, 다룰마는 기가 차는 얼굴로 해밀턴과 붉은 별(?), 그리고 겁에 질린 원로들을 차례대로 보며 말했다.
“거, 참… 이게… 어르신들? 안 믿기시겠지만, 저는 정말로 결백합니다. 조상님을 걸고, 저는 저 녀석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어이없음을 넘어, 황당하다는 목소리.
그건 주가시빌리를 마주한 드워프가 흔히 보여줄 수 없는 태도였다. 붉은 별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다룰마 둔. 이제와서 계약을 어길 생각인가?”
“계약? 그쪽하고 무슨 계약을 했는데?”
이번에 녀석의 말을 받은 건 다룰마가 아니라 세티였다.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붉은 별의 위아래를 훑었다.
“응? 말해봐. 이 드워프가 너랑 무슨 계약을 했어?”
주가시빌리의 살기에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
그 건방진 모습에 붉은 별은 한층 더 위압적인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다룰마, 고작 이따위 호위를 믿고 계약을 파기하려 했는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붉은 별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날 위로 응축된 살기는 깨진 유리창 너머에서 흘러드는 햇빛을 받아 더욱더 붉어 보였다.
“안타깝지만, 너도 그냥 드워프였군. 죽어야만 정신을 차리는 드워프!”
이윽고 그 손날이 다룰마와 세티를 향해 내려쳐지는 순간.
창문 너머에서 날아온 섬광이 붉은 별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푸확!
잘려 나가는 붉은 별의 오른손, 허공을 수놓는 피, 그리고 공간을 침범하는 또 다른 붉은 아지랑이까지.
모든 드워프들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살벌한 침묵 속에서, 또 다른 붉은 별이 피에 젖은 회의장에 도착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