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65)
을 위한 세계는 없다-265화(265/817)
〈 265화 〉 비둘기 속의 고양이 (6)
* * *
***
붉은 살기가 모든 걸 집어삼킨 회의장.
피눈물의 환상과 복면으로 각자 얼굴을 가린 두 명의 주가시빌리는 서로 마주 봤다.
말은 필요 없었다. 피 냄새가 누구냐는 질문을 대체하고, 곤두서는 감각이 답을 대신했으므로.
“흐읍, 흡.”
살기에 짓눌린 드워프들이 숨을 헐떡이는 사이, 검을 쥔 여명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가시빌리가 둘씩이나…”
어딘가 익숙한 드워프의 목소리를 신호 삼아, 여명의 몸이 붉은 잔상을 남기며 쏘아졌다.
붉은 살기 사이로 번쩍이는 우윳빛 검기, 본능적으로 휘두른 손날.
!!!
어느새 재생된 손과 검이 충돌하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두 주가시빌리를 중심으로, 회의장 탁자와 깨진 유리 조각이 흩날렸다.
하지만 두 붉은 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검과 손날을 맞댄 자세 그대로 무식한 힘겨루기를 이어 나갔다.
까그그극
손과 검이 아닌, 살기와 살기가 이빨을 부딪치는 소음.
여명은 지금 들고 있는 무기가 산의 눈물이 아닌 일반적인 합금 검이라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검은 검이었다. 살기 위로 플레이어의 우윳빛 검기를 더하자, 힘겨루기의 주도권은 여명에게 넘어왔다.
살기를 뚫고 살갗을 직접 파고드는 칼날, 떨리는 눈동자.
결국, 복면의 주가시빌리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먼저 움직였다. 그가 살기를 터트리며 검을 밀어내려던 바로 그 순간.
여명의 발이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엉!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복면 녀석은 그대로 유리창을 박살 내며 바깥으로 추락했다.
일반인이라면 떨어지는 순간 빈대떡이 되는 높이.
여명은 손을 털며 깨진 유리창 아래를 확인했다. 그리고 역시나, 추락한 녀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털고 있었다.
눈치 없는 용병들이 총을 들고 그를 포위했지만, 녀석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본사 빌딩… 정확히는 여명을 올려다봤다.
‘내려오라고? 웃기는 놈이네.’
그러건 말건, 여명은 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회의장의 드워프들을 확인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회의를 진행하고 있어야 할 드워프들은 겁에 질린 채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일이 꼬였다.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하지만 세상에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여명은 이렇게 일이 꼬인 김에, 분위기라도 착실히 잡아줄 생각으로…
“난쟁이들아. 시베리아에서 도망쳤다고 끝일 줄 알았냐? 여기서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라고 말했다.
곧 이어진 드워프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아예 선 채로 기절한 드워프도 있었다.
‘다들 연세도 있어 보이시는데,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여명은 살짝 미안함을 삼킨 뒤, 그대로 빌딩 아래로 뛰어내렸다.
실감 나는 연기까지 했으니, 회의장의 일은 세티와 다룰마가 알아서 잘 정리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할 일은…
쿵!
땅에 착지하자마자, 흙먼지가 튀었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복면의 주가시빌리는 여명의 다리가 순식간에 재생되는 꼴을 보며 말했다.
“…진짜 주가시빌리였군.”
“그쪽도.”
포위한 용병들이 총을 들어 올리건 말건, 두 사람은 각자의 간격을 확인했다.
직후, 먼저 한 걸음 내디딘 쪽은 여명이었다.
복면의 주가시빌리는 다가오는 여명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여명의 걸음걸이, 팽팽하게 곤두선 근육, 늘어트린 검의 각도… 그 모든 것들 속에 숨겨진 검술을 읽어낸 까닭이었다.
진짜 살인으로 단련된 검술. 복면인은 그렇게 판단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주가시빌리는 누구에게 배웠지?”
여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살인 기술을 어디서 배웠냐니, 당연히 사람 죽이면서 배웠지.”
그러자 복면 아래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연 발생한 주가시빌리…? 어이가 없군. 자기 자신을 단순한 살인마라고 소개하는 거냐? 그만한 경지에 도달했으면서, 자부심도 없나?”
“허, 사칭범이 자부심을 논하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
녀석이 입을 다문 사이, 여명은 계속 거리를 좁혔다. 그의 걸음걸음마다 짙은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는, 복면의 주가시빌리에게 옛 기억을 상기시켰다. 배고픔과 절망에 미쳐 서로의 피와 살을 탐하던 옛 전우들의 아지랑이.
“…자부심 없는 살인마야, 난 독화라고 한다.”
“붉은 별. 한심한 미국 언론이 붙인 촌스러운 이름이지.”
여명이 이죽거리자, 그는 복면을 바로 잡았다.
“그래도 유머 감각은 나쁘지 않군. 만약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너 또한…”
그 순간, 독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러 무언가를 막아냈다.
까앙! 소리와 함께 독화의 살기에 막힌 그것은 여명의 검이 아니라, 포위한 용병이 쏜 총알이었다.
“이 씹새끼들이, 여기가 어딘지 알고 다큐를 찍고 있어? 우리는 배경으로 보이냐?”
아마 어느 용병단의 단장인 듯한 남자가 소리쳤다. 여명은 쓴웃음을 흘렸다.
“주가시빌리랑 난전을 벌이겠다고? 좋은 생각은 아닌데.”
하지만 여명의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용병들을 움직이게 한 건, 그들을 고용한 드워프의 비명이었다.
[쏴라! 이후에 생기는 문제는 전부 내가 책임지겠다! 죽여! 저 두 놈 모두 죽여버려!]무전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이 끝나자마자, 용병들은 기다렸다는 두 사람을 조준했다.
“…승부는 용병들을 처리한 뒤로 미루는 게 어떤가?”
무수한 총구를 마주한 독화가 그렇게 말했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용병들을 쓸어버리기 전까진 너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스탈린의 이름을 걸고.”
“…그렇다면 나도 서기장 각하의 이름을 걸겠다.”
그렇게 임시 동맹을 맺은 여명과 독화는 동시에 살기를 끌어 올렸다.
저 멀리 시카고에서 보일 정도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용기 있는 용병이 방아쇠를 당긴 바로 그 순간.
탕!
여명과 독화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주변을 포위한 용병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
***
해밀턴 둔은 창문 아래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용병들이 총을 쐈다는 건,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증거였으니까.
‘붉은 별…’
오늘 이곳을 습격할 건 예측했지만, 설마 하늘에서 떨어질 줄이야.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독화를 불러들인 게 독이 되고 말았다.
“해밀턴. 아직 다룰마가 붉은 별과 손잡았다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 어서 증거를 보여라.”
겁에 질린 드워프들 사이, 완고한 표정의 의장이 물었다. 해밀턴은 푹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에 주가시빌리가 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녀석이 다룰마에게 계약을 운운한 것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건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 녀석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면 내가 배반자가 되는 것이냐? 그렇게 치면 네가 다룰마를 고발하자마자 붉은 별이 튀어나온 것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해밀턴은 지금 눈앞에 붉은 별이 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버럭 성질을 내려다가, 후우 숨을 들이켰다.
“다룰마가 붉은 별과 주고받은 문자가 있습니다. 보안용 USB에 들어 있으니, 시간을 주시면 당장 가지고 오겠…”
“…해밀턴.”
그의 말을 끊은 건 다룰마였다. 다룰마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사촌을 바라봤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내 자리가 그렇게나 탐난 거냐?”
“…사촌 형님.”
“양쪽에서 처맞는 이깟 자리,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하지만 이유라도 알려다오. 넌 지금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냐? 왜 혈족의 돈을 횡령하고, 또 그 많은 돈을 대체 어디에 쓰고 다닌 거냐?”
“….”
교묘하게 횡령의 주체를 해밀턴으로 돌리는 어투 같기도, 혹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어투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다룰마란 드워프는 그런 드워프였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해밀턴은 목에 걸린 목걸이들을 잘그락거리며 대답했다.
“사촌 형님. 이 상황에서 정말로 그게 궁금하십니까?”
“…그래, 궁금하다. 당장 알고 싶어서 미칠 거 같다. 내 자랑스러운 사촌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가슴이 터져버릴 것처럼 궁금하고 또 궁금하단 말이다.”
“….”
그 애타는 목소리를 들은 해밀턴은 목걸이를 잘그락거리며 어디서부터 계획이 꼬인 건지 고민해봤다.
다룰마가 살아있는 것? 아니면 누군지도 모를 초인 년의 도움을 받아 임원 회의에 도착한 것?
‘…전부인가.’
이것이 운명에 대항하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의 징벌인가?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운명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생각을 따라 늘어지는 침묵.
그리고 빌딩 아래에서 용병들과 두 주가시빌리의 싸움 소리가 기어코 비명을 바뀔 때쯤, 해밀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마지막 왕은, 왜 병신처럼 모스크바로 날아가다 뒤졌는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말,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드워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세계수는 불탄 뒤에도 결정을 뿌려대는지, 아십니까?”
“…이제와서 옛 역사를 모욕하기라도 하려는 거냐?”
의장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해밀턴이 버럭 소리쳤다.
“역사를 모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생각도, 의지도 없는 한심한 드워프들!”
“….”
“입으로는 위대한 왕이었다고 지껄이지만, 정작 다룰마가 왕의 마지막 유품을 일개 용병 놈에게 넘겼을 때는 침묵한! 역겨운 늙은이들…!”
해밀턴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좌중을 바라봤다.
“당신들은 영원히 모르겠지. 내가 무슨 각오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뭘 꿈꾸는지…”
거기까지 말한 해밀턴은 다룰마를 바라봤다.
“사촌 형님, 형님의 선택이 부디 옳았기를 바랍니다. 형님이 살아남은 대가로, 우리 동포들이 또 다시 고난을 겪을 거라 생각하면…눈물이 앞을 가리니 말입니다.”
“….”
다음 순간, 세티가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망치를 들었다.
“개소리는 개집에서만 하지?”
마법사인 해밀턴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거리.
세티는 일격에 그의 사지를 짓이겨 버릴 생각으로 마나를 모았고, 해밀턴은 망치를 보며 한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예상한 드워프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데…
해밀턴이 갑자기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횡령 죄와 원로님들을 모욕한 죄를 인정하겠습니다. 순순히 항복할 테니, 혈족의 전통에 따라 저를 체포하십시오.”
“….”
망치를 들던 세티는 물론이고, 다룰마조차 벙 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해밀턴 무뚝뚝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난리는 저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불길하기 짝이 없는 소리야? 세티의 고운 눈썹이 휘어지는 바로 그때.
깨진 유리창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