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67)
을 위한 세계는 없다-267화(267/817)
〈 267화 〉 비둘기 속의 고양이 (8)
* * *
***
파순은 웃었다.
붉은 살기로 가득한 발아래, 불쌍한 용병들과 두 명의 아수라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두 명의 주가시빌리가 동시에, 그것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래도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여명과 독화 둘 다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다는 점일까.
우선, 독화의 싸움은 매가리가 없었다.
녀석은 약자를 피해 강자만을 쫓아다녔다. 가득 찬 술잔이 흘러넘칠까 겁먹은 주정뱅이처럼.
“언제 봐도 먹은 게 아까운 놈이란 말이지…”
녀석에 비하면 여명은… 훨씬 주가시빌리다웠다.
쏟아지는 총탄에 달려들고, 날아오는 날붙이를 피하지 않았다. 뼈가 부러지건, 살이 갈라지건 개의치 않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그러나 여명에게는 가장 중요한 살육이 없었다. 마주친 용병들을 토막 내기는커녕, 기절시키거나, 팔다리나 부러트리는 게 전부.
“…이런 순둥이 새끼 같으니.”
파순은 쯧쯧 혀를 찼지만, 괜히 나서서 흥을 깨지 않았다. 용병들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으니까.
진짜 코스는 아직 시작도 안 했…
지이잉
그때, 그의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 타이밍에 전화를 걸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기에, 파순은 즐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엿 같은 메트로섹슈얼 새끼. 하늘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터져 나왔다. 파순은 독화를 향해 달려드는 여명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하고 있지요. 그 뭐냐, 군사 용어로 경계? 그런 겁니다.”
내가 좆까는 소리 듣자고 너희를 고용했다고 생각하나?
파순은 낄낄거리며 슬쩍 깨진 드워프 회의장을 바라봤다. 개판이 된 회의장에서는 드워프들이 서로 무어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해밀턴도 망한 거 같은데… 이제와서 제가 싸운다고 달라질 거 같진 않은데요?”
휴대폰 너머의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 담배라도 피는 건지, 그는 뭔가를 크게 들이쉰 뒤에야 말했다.
계획이 작살났군. 그 붉은 별인가 뭔가 하는 빨갱이 새끼 하나 때문에.
“작살이라니요. 높으신 양반치고는 포기가 빠르시네. 교단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요? 어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이라도 직접 나서시는 게?”
개소리는 개새끼 앞에서만 해라. 다룰마가 살아있는 시점에서 내 계획은 끝난 거다. 나는… 다음을 노리지.
파순은 히죽 웃었다.
“다음? 다음은 없을걸요. 별내장이 마왕은 한국에서 나올 거라고 말하던데.”
바로 며칠 전에는 시카고에서 마왕이 강림할 거라고 했지. 교회도 안 다니는 내가 샤머니즘 따위를 믿을 것 같나?
“…샤머니즘?”
예상치 못한 단어에 파순이 웃음을 터트린 그때, 여명의 칼이 부러지며 두 주가시빌리가 난타전에 돌입했다.
무술의 이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기와 주먹이 교차하는 무식한 싸움. 두 사람의 전투에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원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냥 나도 낄 걸 그랬나.’
파순은 뒤늦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흥, 처음부터 그걸 노렸던 게 아닌가?
“에헤이, 조금 다르죠. 저는 마왕 같은 건 관심 없거든요.”
비꼼이 가득한 긍정. 휴대폰 너머의 남자는 쯧쯧 혀를 찼다.
이해할 수가 없군. 목숨을 걸어가며 비둘기 사이에 고양이를 집어 던지는 이유가 뭐냐? 대체 왜 그딴 짓을 하는 거지?
“그거야… 재밌으니까?”
정신 나간 답변, 기가 막힌 침묵.
휴대폰 너머의 남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친 새끼. 하지만 마음에 드는군.
이번에는 파순이 침묵할 차례였다.
남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는 건지, 통화를 시작한 이후 가장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키면 언제든 내 밑으로 와라. 기왕이면 붉은 별이란 녀석도 함께.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파순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명과 독화의 싸움은 끝을 향하고 있었다.
파순은 독화의 패배를 예상했다. 살기 사이에서 여명이 투명한 무언가를 독화에게 휘둘렀고, 독화는 반응하지 못했으니까.
여기서 독화가 봉인을 푼다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독화는 팔다리가 썰리는 와중에도 꿋꿋이 봉인을 풀지 않았다.
‘모자란 놈 같으니…’
파순은 그제야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독화를 구해줄 생각은 아니었다. 이대로 녀석이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재밌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여명은 독화를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독화 또한 여명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무어라 대화를 쑥덕거렸다.
그리고 심각해진 여명의 표정을 보아하니, 독화가 꽤 중요한 비밀을 말해준 모양이었다.
같은 주가시빌리라고 챙기는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비밀을 말해줄 생각으로 싸운 건가…
어느 쪽이건 간에, 독화가 별내장의 뒤통수를 쳤다는 이야기였다.
‘옛 지배자는 무슨. 이놈이나 저놈이나, 믿을 놈 하나 없는 조직이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파순이 훌쩍, 하늘에서 뛰어내린 순간.
땅이 비명을 질렀다.
***
가장 먼저 이상을 느낀 건 LA 햄버거 가게에 있던 성물지기였다.
그가 조용히 감자튀김을 씹는 순간, 허가 없이 빌려온(?) 수많은 성물들이 일제히 입을 연 까닭이었다.
[아악! 이 땅에 타락이 흐른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순리에는 순서가 없다.]성물지기의 몸에서 오색 빛깔이 터져 나오자, 가게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특히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콧수염의 남자는 욕까지 내뱉었다.
“이런 씹, 이건 또 뭔 지랄이야? 성기사들은 식사 예절도 안 배우냐?!”
그러나 성물지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욕을 듣지도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성물의 목소리만이 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군.] [이번에는 우리도 굴릴 주사위가 있으니.] [하지만 그건 룰 위반 아닌가?] [아니! 주인공 없이는 룰도 없다!]열정적이고, 폭발적이며, 엄격하고, 냉담하며, 온화한 다섯 목소리.
성물지기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짐작하고 몸을 떨었다.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그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순간, 다섯 목소리가 일제히 그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으므로.
[성물지기여, 우리가 문을 열겠다. 타락 속으로 가라. 지금 당장.]***
같은 시각, 이제 막 새벽이 무르익는 서울.
6.25 당시에는 한강 인도교, 지금은 한강 대교라 불리는 다리 위에서, 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한강 너머, 미국을 향해서.
“…교단도 몸이 달았군.”
주변에 듣는 사람 하나 없는, 두서없는 말.
하지만 남자는 한강 대교 난간에 손을 올린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의식을 준비하기 위한 인원을 제외하고, 타락석이 허용하는 만큼 양치기와 요원들을 보내라. 주인공이 나타난 건지 봐야겠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 또한 대답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는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이제 막 새벽이 무르익는 서울.
6.25 당시 이승만이 끊어버린 다리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온다.
타락석의 마나를 느낀 직후, 여명이 가장 먼저 떠올린 감상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것’은 비명 같은 지진과 함께 시작되었다.
!!!!
축포가 터지듯, 맨홀 뚜껑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곧 하수도에서 튀어나온 섬뜩한 마나가 피부를 짓누르고, 썩은 고기처럼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모든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용병들은 쓰러져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초인들조차 지독한 멀미를 느끼며 휘청거렸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 벌어지는 일을 본 사람은 여명을 비롯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번쩍!
타락석의 마나를 본 시카고 차원문이 빛을 내뿜었다. 주위에 있는 모두가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강렬한 빛.
하지만 타락석의 목표는 처음부터 차원문이 아니었다. 검게 멍울진 마나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차원문의 빛을 피해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차원문이 떠 있는 인공섬 전체를 뒤덮었다.
모든 건 눈 몇 번 깜짝할 만큼 짧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명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섬의 하늘과 지평선 전체가 타락석의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당했다.’
깨달음은 빨랐고, 행동은 조금 더 빨랐다. 여명은 독화의 이마를 누르고 있는 총에 무게를 실으며 말했다.
“독화,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당장.”
하지만 그 질문의 답은 독화의 입이 아닌, 의외의 장소에서 돌아왔다. 여명의 머리 바로 위.
“당연히 종말 교단이 종말 교단 한 거지. 타락석을 만드는 곳이 거기밖에 더 있냐?”
여명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파순이 훌쩍 땅으로 뛰어내렸다.
“설명해줄까? 근데 또 요약이니 뭐니 내 말 끊으면 거기서 끝인 줄 알아라?”
“….”
여명이 침묵하자, 녀석은 히죽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교단 놈들은 이 인공섬을 통째로 오염시켜서 제2의 시베리아를 만들 생각이야.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도시와 오대호, 거기다 차원문이 있는 섬을 오염시키면 어떻게 될까?”
“….”
“모르긴 몰라도, 미국도 고생 좀 할 걸?”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여긴 미국이다. 빅 쓰리나 주 방위군만 와도 상황은 끝이야.”
그러자 파순은 손가락을 탁탁 휘두르며 반박했다.
“빅 쓰리도, 주 방위군도 못 온다면? 이 섬 전체가 오염되기 전까지 몇 분이나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교단은 이 작전을 꽤 오랫동안 준비했어. 적어도 일이 끝날 때까지 미국이 도와주러 올 일은 없을걸.”
거기까지 말한 파순은 여명에게 윙크했다. 귀엽다기보다는 징그러운 윙크. 여명은 팍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우연히! 교단이 예상하지 못한 초인들이 이 자리에 있네?”
“….”
“우리 거래, 아직 잊지 않았지? 우리 둘이서 이 타락석의 핵을 박살 내고, 전부 털어먹자고.”
“…미친 새끼. 꿈 깨.”
여명은 한마디로 파순의 제안을 정리했지만, 녀석은 실망하기는커녕, 기세등등하게 여명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저게 타락석의 핵인데. 계속 튕길 거냐?”
파순이 가리킨 곳은 둔간 중공업 본사 빌딩이었다.
세티와 다룰마가 아직 안에 남아 있는 그 빌딩은, 그 자체로 거대한 타락석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