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72)
을 위한 세계는 없다-272화(272/817)
〈 272화 〉 한계를 마주하는 법. (5)
* * *
***
아야톨라.
각자 눈물, 피, 꿈, 진실, 그리고 허무를 흘리는 자라는 칭호를 지닌 종말 교단의 정점들.
종말 교단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녀석들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어디서 육성되며,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는지…
기나긴 세월 동안 녀석들을 박멸해온 다섯 신 교단조차 녀석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느냐만을 알 뿐이었다.
예를 들어, 눈물을 흘리는 자는 목소리를 듣는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녀석은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권능이 깃든 말로 대중을 현혹한 뒤,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학살을 일으켰다. 마치 지구의 독재자들처럼.
피를 흘리는 자는 만진 사람의 육체를 뒤틀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는데, 어찌 보면 네크로맨서와 비슷한 권능이었다.
물론, 산 사람을 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질이 나빴지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꿈을 흘리는 자의 권능은…
주변에 있는 인간의 꿈, 현대인들이 무의식이라 부르는 영역을 자신의 꿈 속으로 집어삼키는 능력이었다.
선대 성기사들께서 기록하시길, 모든 권능 중 가장 음습하며, 두 번째로 까다로운 권능.
타인의 마음과 욕망을 집어삼키기에 음습하며, 녀석의 자각몽 속에서 싸워야 하기에 까다롭다.
여태껏 알려진 대처법은 권능을 유지할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꿈속에서 버티거나, 권능을 사용하고 있는 아야톨라를 장거리에서 죽이거나, 단 둘 뿐이었다.
바깥이었다면 미사일을 퍼부어 아야톨라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이만한 타락석의 결계 안에서는 둘 다 불가능했다.
성기사단의 기록에 비춰볼 때, 이대로 타락석의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꿈을 흘리는 자는 무적이나 다름없었…
“무적은 무슨. 딱 들어보니 핵 맞으면 그냥 골로 가겠구만.”
바라나의 설명을 끊은 건 파순이었다.
[…핵?]핵이 뭔지 모르는 바라나와 달리 브라우닝과 여명은 즉시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봤다.
“…미쳤냐?”
파순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잘 생각해보라고. 성기사들이나 저딴 거에 끙끙거리지. 지구인들까지 그러겠냐? 진짜로 핵 한 발 쏘면 결계고 뭐고 싹 지워질 텐데?”
여명은 계속 비각술을 펼치며 말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시카고 한가운데에 핵을 날려?”
“그야… 미국이?”
“….”
“이대로 내버려 두면 차원문까지 싸그리 오염되서 괴수들을 쑴풍쑴풍 낳아댈 텐데. 그럴 바엔 그냥 핵 쏘는 게 낫지 않나?”
여명이 헛소리 좀 하지 말라고 반박하려는데, 대뜸 브라우닝이 끼어들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로군. 우리가 제때 못 막으면 정말로 정부에서 핵을 날릴지도 모르겠어.”
“….”
나란히 달리고 있던 바라나는 그제야 핵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브라우닝은 들고 있던 총으로 이마를 벅벅 긁으며 덧붙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시베리아보다는 히로시마가 낫지 않나?”
오직 지구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 여명이 쓴웃음을 짓는 사이, 바라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저 말을 듣고도 갈 생각인가?]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질구레한 설명 하나 붙이지 않은, 하지만 무엇보다도 확고한 대답. 바라나는 여명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자네가 꿈속에서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네만… 그렇게까지 뜻이 확고하다면야, 자네를 믿어보는 수밖에.”
데스나이트가 된 성기사의 체념이 끝난 그 순간, 파순이 끼어들었다. 녀석은 피식 웃으며 여명에게 손가락질했다.
“노인네가 뭘 모르고 분위기 잡고 있네. 저놈 심상 속에 뭐가 있는지 알고 하는 소리……”
거기까지 말한 파순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뭐지? 벌써 꿈을 흘리는 자의 범위에 들어온 건가 싶어 여명이 그를 바라봤다.
파순은 대뜸 쌍욕을 내뱉었다.
“아… 이런 씨발… 커헉!”
갑자기 폐에 구멍이라도 뚫린 건지, 녀석은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래에 갑자기 피를 뒤집어쓴 성물지기는 질색하며 자리를 피했다.
아무튼, 그렇게 거의 한 바가지가 넘는 피를 토하고 나서야 파순은 토혈을 멈추고 여명을 노려봤다.
“…징글징글한 새끼.”
“…?”
또 뭔 지랄이야? 여명과 일행들은 파순이 브라우닝에게 맞은 상처가 덧났나 싶어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한 명,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독화만이 진지한 얼굴로 파순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타락석에 오염된 둔간 종합 금융 빌딩까지 채 300m가 남지 않은 순간.
“모두, 잠깐 멈추게!”
바라나가 일행의 걸음을 붙잡았다. 그는 일행의 시선이 모이는 걸 확인한 뒤, 성물지기에게 다가가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여명의 위치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성물지기의 표정이 굳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이야기인 듯싶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쪽이 말하고 한쪽은 불안한 표정으로 갈굼 당하길 잠시. 바라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권능 안에 들어가기 전에, 성물을 나눠주겠네.]일행들, 특히나 브라우닝은 아까 전 협박하던 모습과 다르게 바라나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 일행을 보며 데스나이트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이대로 그냥 꿈을 흘리는 자의 권능 내부로 들어가는 건 죽으러가는 것과 다르지 않네.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성물을 쥐고 가게.]설명을 들은 브라우닝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그 옆에 있던 중령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히 입 열지 마십시오. 분위기 초치는 건 미군이 아니라 CIA나 대행자가 하는 짓입니다.]“···.”
[말보다도 행동이면 충분합니다.]브라우닝은 유머 섞인 데스나이트의 설득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나는 그런 두 미군을 보며 씁쓸하게 웃은 뒤 성물지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물을 내주게.]“선배님 하지만…”
성물지기는 ‘이건 제가 훔쳐 온 물건이라 남한테 나눠주면 성녀의 아버지고 뭐고 사형당할지도 모릅니다’ 라는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바라나가 기수로 그를 압박해서? 아니, 성물지기가 성물을 나눠주기 위해 손을 움직인 순간, 그의 등 뒤에 떠 있던 성물들이 직접 움직인 까닭이었다.
단창은 브라우닝에게, 도끼는 독화, 대검은 파순에게 날아가더니, 그대로 빛을 내뿜으며 작은 팔찌나 목걸이로 변했다.
[…이렇게까지 성물을 다룰 줄이야. 성물지기답군.]바라나가 감탄했으나, 정작 성물지기는 놀란 얼굴로 하늘 위를 바라봤다. 오, 다섯 신이시여.
그 사이, 지켜보던 중령이 한마디 했다.
[나는?]바라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데스나이트는 성물을 쥐어봤자 쓸 수 없네. 솔직히, 꿈 속에 들어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쓰읍, 죽으니 별걸 다 못하네.]당연한 소리를 뇌까린 중령은 슬쩍 여명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럼 나야 그렇다 치고, 이 녀석은? 여명에게는 안 주는 건가?]그제야, 성물지기는 성물이 여명에게 향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미군은 물론이고, 마인에게까지 스스로 날아간 성물이 어째서 여명에게는 가지 않았지?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작은 성물을 꺼냈으니까.
“성물이라면 저도 가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성물을? 설마 빨갱이 성물은 아니겠…]거기까지 말하던 바라나는 여명의 손에 들린 성물을 보며 말을 흐렸다.
여명의 손에 들린 건 교차하는 검과 도끼 위, 피 흘리는 하트의 상징이 새겨진 펜던트였다.
만주에서 성녀와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레독스의 성물.
사실, 여명은 이 성물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푸른 쥐가 장만 어르신을 해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담보로 받은 성물이었으므로.
[성녀님의 성물이라… 그래, 자네는 굳이 다른 성물을 챙길 필요가 없겠군.]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귀한 성물이었던 건지, 바라나는 조금 감탄한 말투로 여명을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여명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성물지기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도 한때 부모였기에 해주는 말 이네만, 딸은 보통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어른이 된다네. 힘들겠지만, 받아들이게.]“….”
성물지기가 일생 최고로 거북한 표정을 짓건 말건, 살아있는 일행 모두 각자 성물을 착용했다.
곧이어 작은 성물의 빛이 일행의 몸을 감싸고, 파순이 독화를 보며 ‘빨갱이 새끼 아편 장신구 차네’ 라며 키득 거리길 잠시.
성녀가 준 펜던트를 목에 건 여명이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재생력이 가장 강한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반대하시는 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브라우닝이 아공간에서 거대한 게틀링 건을 꺼내 쥐며 한마디 했을 뿐.
“살아서 보지.”
여명은 피식 웃은 뒤, 바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빌딩 주변에 펼쳐져 있던 ‘막’이 그를 집어 삼켰다.
***
꿈과 현실 사이에서, 여명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봉인 속에서 수도 없이 떠올렸던, 천사님의 목소리.
소년이여, 너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운 나를 용서하거라.
빛나는 천사님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손을 올렸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허나, 이 모든 게 필요한 희생이었음을 알아다오. 그것은 반드시 봉인되어야 했다.
천사님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고, 그녀의 몸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흐릿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천사님은 죽어 가고 있었다. 봉인을 위해, 자신을 위한 힘까지 전부 써버린 탓이었다.
만약 그것이 풀려난다면, 오늘 이 도시에서 일어난 비극과 비교도 되지 않을 거대한 재앙이 될 터이니…
소년이여.
부디, 봉인을 지켜다오. 봉인이 너의 육체를 짓누르고, 그것이 너의 정신을 고문하는 고난의 길이겠지만… 이 길이야말로 옳은 길임을, 세상을 위한 것임을 알아다오.
그 말을 끝으로, 천사님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여명은 천사님의 목소리에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세티에게, 성녀가 그에게 느끼는 사랑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건 작업 반장님과 장만 어르신, 그리고 성녀의 어머니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
…
…
『다섯이나 모여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너희는 너희가 가진 주사위나 굴려라.』
…
…
…
『약속에 따라, 그의 운명은 오롯이 그의 것이니. 나의 간택자에게 수작 부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
…
…
『꺼져라.』
***
여명은 눈을 떴다.
역시 아야톨라의 권능이라고 해야 할까, 여태껏 꿈속에서 깨어났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몸과 머리가 무거웠다.
그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쥐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
빌딩 내부에서 온전히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들은 그의 기대를 벗어나도 너무나 벗어나 있었다.
온갖 크기와 모양의 TV가 벽면을 가득 채운, 정체 모를 방.
끝이 보이지 않는 방의 TV에서는 모두 다른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TV를 바라보던 여명은 주변을 경계하며 방을 가로질렀다.
화려한 영상 사이로 조용한 발소리가 울리길 잠시.
여명은 문뜩 지나치던 화려한 TV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녀의 어머니, 모리네.
어딘가 젊어 보이는 그녀는 두꺼운 철장 뒤편에 엎드린 채, 창백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명이 이게 뭔가 싶어 TV에 가까이 다가갈 때쯤, 철창 너머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등에 익숙한 성검을 메고, 두꺼운 열쇠를 쥔 그는… 성녀의 아버지였다.
그제야 이 영상이 무엇인지 깨달은 여명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잠시 서로 끌어안는 모리네와 성물지기를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여명이 다른 TV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저벅, 저벅…
TV의 불빛이 닿지 않는 방의 구석 저 너머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