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75)
을 위한 세계는 없다-275화(275/817)
〈 275화 〉 한계를 마주하는 법. (8)
* * *
***
“빌딩에 발을 디딘 순간, 이 꿈속에 갇히고 말았다.”
어긋난 턱뼈를 재생하는 여명을 향해, 성물지기가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아야톨라에게 한 방 먹었다.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꿈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어.”
“그래요? 그럼 뭐였는데요?”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전대 성녀님. 성물지기는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역으로 물었다.
“성녀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있으십니까?”
“어…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꼽기 어렵네요.”
“…저는 바로 어젯밤에 한 선택을 가장 후회했습니다.”
성물지기는 시선을 돌려 기절한 꿈속의 자신을 내려다봤다.
“현실에서, 저는 갇혀 있는 아내를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감옥에서 홀로 딸아이를 낳아야 했지요. 저는 옆에 있어 주기는커녕, 딸이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몰랐고요…”
“오…”
전대 성녀님은 새삼스레 휘어진 철창 너머로 시선을 돌려, 기절한 꿈속의 호르아를 바라봤다.
현실의 성물지기와 달리, 모리네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 대가로 등에 수도 없이 매질을 당한 남자.
“후회를 되돌릴 수 있는 꿈이라… 치사한 함정이네요. 아마 제가 같은 상황이었어도 깨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
“그러니 호르아?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꿈속 성녀님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사이 재생을 끝낸 여명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말 몇 마디에 깨어나신 게 어딥니까.”
여명의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한 대만 치고 멈출 줄이야. 역시 엄마가 이상하면 아빠가 정상…
“아니, 내가 깨어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네 거짓말 덕분이다. 고맙다.”
“…?”
거짓말? 여명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성물지기가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디 당부하건대, 다음에 이런 상황이 생기면 차라리 폭력을 휘둘러라.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아버지 앞에서 딸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여명은 거짓말한 적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뭐, 어쨌든.
“이제 가시죠. 다른 사람까지 구하고 녀석을 막으려면 시간이 빠듯합니다.”
성물지기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지만, 타락석이 완전히 무르익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가능하면 자력으로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있기를…”
여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물지기가 튀어나왔던 공간의 틈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TV화면에 손을 넣을 때와 마찬가지로 손이 쑥 들어갔다.
아마 이 틈새가 꿈과 꿈을 이어주는 상징 같은 것이리라. 여명은 눈을 반짝이는 전대 성녀님 너머, 성물지기를 향해 말했다.
“먼저 가서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따라오세요.”
호르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뭔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사격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사격이요?”
“어젯밤, 그… 모리네와 나를 노리고 정체 모를 총알이 날아왔다. 성국의 누군가가 날 암살하려고 한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꿈에 더욱 사로잡히게 하려는 아야톨라의 수작이었던 거 같다.”
걱정 어린 조언이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치듯 틈새 너머로 사라지는 여명의 뒷모습을 보며, 성물지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
꿈의 바깥, TV 화면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나온 여명은 우선 주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꿈을 흘리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살기를 넓게 펼쳐봤지만,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녀석도 여명처럼 다른 꿈속에 들어간 게 아닐까?
꿈속의 꿈이라니… 여러모로 상대하기 귀찮은 권능이었다.
어쨌거나, 여명은 다시 성물지기의 TV화면에 손을 넣어 신호를 보냈다. 다음 순간, 꿈 너머에서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여명은 별 의심 없이 그대로 손을 끌어당겼는데…
“오.”
그의 손을 잡고 TV 화면에서 튀어나온 건 성물지기가 아니라, 전대 성녀님이었다. 그녀는 사뿐히 땅에 내려서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꿈을 흘리는 자의 꿈속인가요? 꼭 현대 미술 같네요.”
그녀를 꿈속에서 꺼낸 여명도, 뒤늦게 화면에서 튀어나온 성물지기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전대 성녀님을 바라봤다.
“어떻게…? 성녀님은 분명 제 꿈속의 존재이실 텐데…?”
그러자 전대 성녀님은 뭐가 문제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여기도 꿈속인걸요? 꿈속에서 다른 꿈으로 이동 못 할 건 또 뭔가요?”
“….”
그럴싸한 말이었으나, 여명은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단순히 꿈속 존재라기엔, 눈앞의 성녀님께서 너무나 생생하셨으니까.
하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여명은 다른 TV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물지기, 그리고 성녀님? 여기에 있는 TV가 전부 다른 사람의 꿈입니다.”
호르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훑었다.
“…이렇게 많은 TV 들이 전부?”
“예, 성물지기님을 찾은 것도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
“우선, 일행들 찾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갈라져서 찾지. 나는 좌측으로 갈 테니, 너는 우측. 그리고 성녀님은…”
성녀는 슬쩍 여명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전 여러분의 일행이 누군지 몰라요.”
“…그와 함께 가시죠. 여명? 일행을 찾으면 바로 들어가지 말고, 신호부터 보내라.”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성물지기는 바로 TV 화면들을 훑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녀님 또한 누구인지 모를 TV들을 확인하는 여명의 뒤를 따랐다.
타닥 TV의 빛 아래로 겹지는 여명과 성녀님의 발소리.
꼼꼼히 TV 화면 너머를 확인하는 여명과 달리, 전대 성녀님은 오직 여명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TV를 확인했을까? 여명이 대략 수백 개가 넘는 TV를 넘겼을 때쯤.
성녀님이 입을 열었다.
“아까 호르아에게 했던 말. 거짓말 아니죠?”
“….”
“정말로 호르아의 딸이 성녀가 되고, 당신은 미래의 성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죠?”
여명은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하냐고 되묻는 대신, 짧게 대답했다.
“네.”
“어쩐지 순순히 주먹에 맞아주더라니… 미래의 성녀는 어떤가요? 활기찬 아이인가요? 아니면 사랑스러운 아이인가요?”
“성녀는… 음… 그게… 사랑스럽다기보다는… 뭐랄까…”
“어떤 아이인지 설명하기 어려우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요?”
이 상황에서 할만한 대화는 아니었으나, 어째서인지 여명은 전대 성녀님을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TV 화면을 확인하는 틈틈이 현재의 성녀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만주에서부터 아카데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리고 그 설명이 전부 끝날 때쯤, 전대 성녀님께서 한 마디로 감상을 정리했다.
“장인어른에게 주먹이 아니라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네요.”
“….”
“뭐, 그래도 수백 대 매질을 당한 호르아만 하겠냐마는… 사위 한번 제대로 만났네요.”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녀님의 평가가 너무나 신랄해서? 아니, 드디어 일행의 꿈이 재생되고 있는 TV를 찾았으니까.
그가 이번에 찾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파순이었다.
화면 너머의 녀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산 정상에 앉아, 산 아래에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를 굽어보고 있었다.
저게 녀석이 가장 후회하는 순간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여명은 고민하지 않았다. 후회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인 법이고, 파순의 개인감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쨌든, 녀석을 깨우는 게 우선이었다. 여명은 성물지기 때와 마찬가지로 TV 너머로 손을 넣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손을 넣는 순간, TV 화면 너머 파순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어머.”
그걸 본 전대 성녀님이 놀라건 말건, 파순은 눈살을 팍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여명의 손을 맞잡았다.
여명이 반사적으로 손을 끌어당기자, 녀석은 그대로 TV 바깥으로 쑤욱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리다 뒈지는 줄 알았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냐? 그러면 왜 여태껏 안 나오고 있었어?”
“그럼 나 혼자 나와서 뒈지리? 내 목적은 보상이지, 미국을 구하는 게 아니란다.”
대답을 들은 여명이 한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전대 성녀님을 발견한 파순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으엑, 늙은 성녀잖아. 꿈속이라지만 뭐 이런 걸 데리고 다니고 있어?”
무례하다 못해 불경한 태도였으나, 전대 성녀님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재밌는 친구네요.”
“…재미는 무슨, 뒤진 년이 뭐라는 거야?”
파순이 그렇게 이죽거리기 무섭게, 녀석이 차고 있던 성물이 빛을 내뿜었다.
성녀를 모욕해서 성물이 화를 내는 것일까?
파순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성물을 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성물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허공을 둥둥 날아 전대 성녀님의 손아귀에 안착했다.
성녀님은 잠시 성물을 내려다보다가, 파순을 향해 말했다.
“베눌께서 여태껏 당신이 꿈에 먹히지 않도록 지켜주고 계셨네요. 악몽이 아니라 이런 꿈에 갇혀 있던 건 성물 탓인가 본데요?”
“….”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전대 성녀님은 성물을 쥐락펴락하시다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파순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아먹었으면서 그분의 성녀를 모욕하다니… 평생 여자로 사는 저주에 걸릴 겁니다.”
“…뭐? 시발 지금 뭐라고 했어?”
파순이 화들짝 놀라건 말건, 성녀님은 고개를 돌려 여명을 바라보았다.
“다른 일행분들도 성물을 지니고 있나요?”
“…예.”
“그럼 금방 찾을 수 있겠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전대 성녀님은 그대로 눈을 감고, 성물에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기도를 따라 성물이 빛을 내뿜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TV 화면은 물론이고, 권능 속 어둠을 밀어낼 정도로 강렬한 청색 빛.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체감상 5초 정도 지났을까? 성물의 빛이 은은하게 줄어드는 가운데, 성녀님이 말했다.
“찾았어요.”
성녀님은 다시 어두워진 공간 너머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다른 TV들보다 유독 강한 빛을 내뿜는 TV 세 대가 보였다.
“너무 감탄하진 마세요. 그냥 성물을 추적하기 위한 간단한 축복이니까.”
여명은 확인차 뒤를 돌아봤다. 역시, 저 멀리서 성물지기의 성물이 빛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반대편 어둠에서 또 다른 빛이 보였다.
뭐지?
성물이 더 있나 싶어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그 빛이 여명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발걸음.
저 빛의 정체를 짐작한 여명은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검을 꺼내며 성녀님에게 물었다.
“성녀님, 혹시 그 성물 추적 축복… 다른 교단의 성물도 추적합니까?”
“네, 물론이죠. 사실 그 용도가 주력인데… 갑자기 그건 왜요?”
“….”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파순에게 말했다.
“파순, 성녀님 모시고 다른 일행들 깨우러 가라. 지금 당장.”
“뭐?”
“아야톨라가 온다.”
파순이 여명의 시선을 따라가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황금 가면이 보였다.
꿈을 흘리는 자의 가면… 상황을 파악한 파순은 쓰읍, 혀를 차며 성녀님의 허리를 붙잡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녀석이 전대 성녀님의 허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성녀님이 탁, 녀석의 손을 쳤다.
“나 말고, 당신이 호르아와 합류해서 일행들을 깨우세요.”
“…호르아?”
“성물지기 이름이에요. 저기 빛나는 점 보이죠? 가서 합류하세요.”
파순과 같이 안 가겠다는 말. 여명은 성녀님을 향해 물었다.
“성녀님은 어쩌시려고…”
“저는 당신과 같이 싸워야죠.”
“….”
“걱정하지 말아요. 전 꿈속의 존재잖아요?”
여명은 반론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반론할 시간이 없었다. 아야톨라의 황금 가면은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으므로.
“야, 뒤질 거 같으면, 버티지 말고 알아서 튀어라.”
파순이 걱정인지, 아니면 조언인지 알 수 없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성물지기를 향해 뛰어가고, 여명이 검에 마나를 모은 바로 그 순간.
쿵!
황금 가면을 쓴 남자가 여명 앞에 착지했다.
***
여명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아야톨라에게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이런 실수를?
자책 섞인 검이 길게 꼬리를 그리고, 그대로 아야톨라의 목을 노리고 떨어진 그 순간.
녀석은 검을 피해 목을 뒤로 뺐다. 마치, 그의 검이 보이는 것처럼.
여명은 검을 회수하며 물었다.
“이제는 보이냐?”
꿈을 흘리는 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의 시선은 성물을 꽉 쥔 전대 성녀님에게 고정돼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죽은 자가 이곳에 있는 거지?”
아야톨라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불쾌한 목소리가 몇 배는 더 불쾌하게 들렸다.
“꿈속이니까?”
여명이 간결하게 대답하자, 아야톨라의 고개가 뚜두둑 기괴하게 돌아갔다.
“꿈속? 그래, 이곳은 내 꿈이다. 내가 이미 죽은 자 따위를 꿈꿀 것 같으냐?”
뭐? 아야톨라의 반론을 들은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의 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못해 다른 꿈속의 성녀님마저 꺼낸 자신은 뭐란 말인가?
아니, 새삼 생각해보면… 그는 다른 일행들과 달리 처음부터 녀석의 권능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왜지? 단순히 꿈에 익숙해서 이런 건가? 아니면 미그니움 때문에?’
여명의 의문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야톨라에게 그의 공격이 통하는 걸 확인한 이상,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성녀님, 조금 물러나 계세요.”
성녀가 왜냐고 되묻기도 전에, 그의 검에서 화산쇄설의 불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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