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77)
을 위한 세계는 없다-277화(277/817)
〈 277화 〉 한계를 마주하는 법. (10)
* * *
***
토막 난 빌딩이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은 한 편의 재난 영화 같았다.
추락하는 사람들의 비명, 흩날리는 파편과 먼지, 그리고 거대한 질량을 따라 불어 재끼는 바람까지.
후우우웅 !!
공기가 짓눌리는 소리를 앞에서, 여명은 등을 돌리고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붉은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그의 머리 위로, 길쭉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가장 먼저 그의 위를 덮친 건, 시카고 최대 높이의 트럼프 호텔이었다.
!!!!!
길쭉한 거체가 그대로 지면을 강타하고,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먼지 폭풍을 토해냈다.
전율하는 땅, 비명 섞인 바람, 바람을 따라 뒤통수를 후려치는 파편들… 아슬아슬하게 빌딩 범위를 벗어난 여명은 이를 악물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를 덮치는 빌딩의 비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으므로.
지이이잉
염동력으로 머나먼 곳의 건물을 붙잡은 여명은 그대로 건물을 향해 자신의 몸을 당겼다.
막대한 마나를 따라 허공에 떠 있던 몸이 가속하고, 건물에 닿는 순간 비각술을 펼쳐 방향을 바꿔 다시 날아오른다.
무술과 마법, 두 가지를 극한까지 응용한 초고속 이동. 임기응변치고는 참신한 맛이 있었으나…
“…꿈속의 원숭이와 다를 게 없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겠느냐?”
어느새 하늘에 떠오른 아야톨라가 말했다. 그는 붉은 아지랑이를 길게 피워내는 여명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작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고작 손가락을 까딱거린 것에 불과했지만, 이어진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쿠구구궁…
시야에 보이는 모든 빌딩들이 부러지고, 박살 나고, 뽑히며 하늘로 떠올랐다.
그것은 꿈보다는 악몽에 가까운 광경이었고, 그 모든 빌딩이 여명 한 명을 향해 쏟아지는 모습은 악몽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애써 도망치던 여명도 발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광경.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여명의 머리 위로, 그대로 수십 채가 넘는 빌딩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한한 재생력의 주가시빌리라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순수한 질량의 파도.
만에 하나, 아니 억에 하나의 확률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저 질량에 깔린다면 재생조차 할 수 없으리라.
꿈을 흘리는 자의 확신과 함께, 빌딩들이 여명의 머리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앙 !!!!
도시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듯한 충격과 함께, 꿈속 시카고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아야톨라는 가만히 서서 자신이 만들어낸 재앙을 내려다봤다.
도시를 뒤엎은 충격은 먼지구름이 되고, 꿈속 시민들의 비명이 황망한 울음소리로 바뀌며, 이윽고 모든 것이 침묵할 때까지, 계속.
“….”
이제 승리를 선언해도 될법하건만, 꿈을 흘리는 자의 두 눈은 여명이 파묻힌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빌딩에 파묻히기 직전, 그의 눈에서 죽음의 공포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일반적인 대적이면 모르되, 상대는 ‘바깥에서 온 자’였다.
그리고 언제나 ‘바깥에서 온 자’들은 그 종류에 상관없이 모종의 수단을 준비하는 법.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잠시 시간을 허비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빌딩의 잔해 사이에서 팍 손이 올라왔다.
아야톨라는 즉시 반응했다. 잔해를 파고 올라온 녀석을 향해 손을 뻗어, 그대로 공간을 비틀었다.
까그그극!
손은 물론이고, 잔해가 통째로 뒤틀렸다. 푸확 콘크리트와 철근이 뒤섞인 잔해 사이에서 살과 피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여명은 죽지 않았다. 으깨진 몸의 절반을 재생하면서, 뒤틀린 잔해 위로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여명을 바라보는 아야톨라의 황금가면이 갸웃, 기울어졌다.
주가시빌리는 재생력을 늘려주는 살인 기술이지,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변경백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변경백의 무술을 익힌 걸까? 아니, 그걸 익히고 있었다면 빌딩을 피해 도망치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꿈을 조종했군.”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꾸역꾸역 재생한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와 먼지를 닦아냈다.
아야톨라 또한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뒷짐을 진 채 여명의 주변을 돌며 홀로 말을 이었다.
“이 꿈은 나의 것이고, 이 꿈을 계탁??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이거늘. 어찌…?”
“….”
“심안心?? 아니, 너처럼 욕심으로 가득한 자는 마음의 눈을 열 수 없다.”
저벅, 저벅. 맨발로 콘크리트를 밟는 녀석의 걸음걸음마다, 의문 섞인 말이 따라붙는다.
“허나 네가 아공??을 알아보고, 법공??을 이해한 것 또한 진실. 돈망?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가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경우의 수는…”
아야톨라의 황금가면과 여명의 황금색 눈동자가 마주한다.
검을 늘어트리는 여명을 향해, 꿈을 흘리는 자가 말했다.
“일견즉해一??. 어떤 기술이든 한 번 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재능… 그것이 네가 가진 힘이로구나.”
여명의 대답은 불씨를 머금은 검이었다. 아야톨라는 검을 피해 훌쩍 날아올랐다.
“지구를 벌하는 폭발, 반도의 비각술, 붉은 주가시빌리… 그 잡다한 무술은 모두 일견즉해의 결과렸다.”
“….”
아야톨라는 웃었다. 마치, 여명의 베일을 벗기고 그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일견즉해와 재생력… 과연, 뛰어난 조합이로구나. 스스로 무적이라 착각할 만큼.”
검이 닿지 못할 정도로 높이 떠오른 아야톨라는 여명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엄지와 검지가 만나는 소리를 따라, 무색무취의 파동이 빌딩의 잔해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한눈에 보고 이해했다 해서, 그 깊이마저 따라 할 수 있겠느냐? 꿈을 조종하느라 입조차 열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명의 발아래에 쌓여 있던 콘크리트 잔해에서 무수한 철근이 튀어나왔다.
끼기긱!
여명이 반사적으로 비각술을 펼쳤지만, 하늘을 가득 뒤덮은 수백, 수천 개의 철근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그를 쫓았다.
결국,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철근들은 여명의 몸을 그대로 꿰뚫어 꼬챙이로 만들었다. 종아리, 무릎, 배, 심장, 심지어는 뒤통수까지.
주가시빌리라도 죽어야 할 상처였으나, 여명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꿈을 흘리는 자를 노려봤다.
“꿈을 조작해서 기껏 한다는 게, 재생력을 늘리는 것이냐?”
아야톨라가 뭐라고 비꼬건, 여명은 개의치 않고 계속 그를 노려봤다.
뭔가를 노리는 듯한 황금색 눈동자. 아야톨라는 여명의 두 눈을 향해 철근을 겨누며 말했다.
“동료를 기다리나? 하지만 무의미하다. 꿈속에서는 설사 빅 쓰리라 해도 내게… 뭐?”
그 순간, 아야톨라의 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뒤로 젖힌 황금가면이 본 것은, 하늘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네이비피어에서 챙긴 유람선.
꿈을 흘리는 자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유람선은 그대로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덮쳤다.
콰아앙!!!
콘크리트 잔해 위로 추락한 유람선이 찌그러지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와 파편이 튀는 막대한 폭발이 이어졌지만, 아야톨라는 멀쩡했다. 마지막 순간, 꿈을 조종해 충격을 무효로 돌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명을 찾았다.
어디냐. 어디 있는 거냐.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가 마나를 펼치고 채 10초가 흐르기 전에, 흙 먼지 사이에서 여명이 튀어나왔으니까.
“근접전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이냐?”
아야톨라는 손을 들어 여명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까그극! 공간이 뒤틀리며 달려오는 여명의 다리가 으스러졌고, 그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한데, 바닥을 구른 여명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바닥을 구른 녀석은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굵직한 여자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염병, 이런 건 다음부터 나 말고 영감님 시켜라!]그제야 아야톨라는 쓰러진 여명이 환상을 씌운 여성 데스나이트임을, 그리고 진짜 여명은 그의 뒤통수로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얄팍한 수를!”
아야톨라가 등을 돌렸을 때, 여명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몸을 날리고 있었다.
퍼억! 아야톨라의 주먹이 여명의 광대뼈를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여명이 그의 몸에 태클을 먹였다.
‘이제와서 넘어트린다? 어째서’
꿈을 흘리는 자의 의문은 짧았고, 답은 코앞에 있었다.
그가 여명을 따라 쓰러지는 바닥에는, 깨진 TV 화면을 닮은 금이 가 있었다.
“어리석은 놈…”
꿈과 꿈 사이를 연결해주는 꿈의 틈새.
쩌저적 꿈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여명과 아야톨라는 그대로 다른 꿈으로 떨어졌다.
***
추락한다.
아야톨라를 끌어안은 여명은 필사적으로 꿈을 조종했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꿈을 조종해 공격하기는커녕, 꿈 사이의 틈을 만들어 끝없이 추락하는 것.
반짝이는 백사장과 바다가 있는 꿈을 넘자, 이상야릇한 침대가 가득한 꿈이 그를 반겼다.
그 꿈을 넘자, 보석과 돈이 가득한 꿈이 나왔고, 그것을 넘자 누군가 전쟁터에서 영웅이 되는 꿈이 나왔다.
하지만 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혼한 어머니와 재회하는 꿈, 아픈 남편이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꿈.
동료들과 사이좋게 팔을 잘라 나눠 먹는 빨갱이의 꿈, 학살을 명령하는 상사에게 죽탱이를 날리는 미군의 꿈, 아버지와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는 드워프의 꿈, 언니에게 연인을 소개하는 소녀의 꿈, 그리고…
무아지경 속 성도.
울쓰바티를 상징하는 새하얀 신전 위로 떨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여명과 아야톨라는 추락을 멈췄다.
***
쿨럭.
뭣도 모르고 꿈을 조종한 대가일까, 땅에 추락한 여명은 피를 토했다.
아야톨라는 그런 여명의 뒤통수를 붙잡더니, 그대로 신전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쾅!
한참을 날아가 낡은 숙소 건물과 충돌한 여명은 바닥을 굴렀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재생력이 모자라서? 아니, 주가시빌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후유증이었다.
함부로 꿈의 틈새를 열어 여러 꿈을 뛰어넘은 후유증.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를 악물고 허리에 힘을 줘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허우적거렸을까? 일 초가 일 년처럼 느껴지던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줬다.
“괜찮으세요?”
그녀에게 기대어 일어나던 여명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한 까닭이었다.
“…성녀님? 왜 여기 계십니까?”
그러자 성녀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야 여기가 성녀 숙소니까?”
“….”
뭐지? 성물지기의 꿈에서 끌고 나온 전대 성녀님과는 다른 인물인가?
여명은 혼란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여명의 표정을 오해한 것인지, 전대 성녀님은 조금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혹시 새로 들어온 성기사인가요? 미안해요. 제가 사람 얼굴을 잘못 외워서요.”
“….”
“그보다, 대체 왜 창문을 뚫고 추락한 건가요?”
여명은 그제야 아야톨라를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허공에 높이 떠오른 아야톨라는, 양손을 들어 올린 채 하늘을 통째로 뒤틀고 있었다.
“꿈을 흘리는 자…?”
성녀님이 뒤틀리는 하늘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 바로 다음 순간, 하늘 아래 존재하는 성도 전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까그그그극 !!!!
신전이 뒤틀린다. 창문 밖 도로가, 다섯 신의 정원, 병영, 도서관, 법원이… 그 외에 모든 것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야톨라의 선언.
“바깥에서 온 자! 이 역겨운 꿈속 성도와 함께 통째로 으스러트려주마! 어디, 이번에도 살아남아 봐라!”
누가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여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뒤틀림에 휘말리는 순간, 확실히 죽게 될 것이라는 걸.
그는 당장 꿈의 틈새를 열어 도망쳐보려 했지만, 뒤틀린 공간으로는 틈새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이 뒤틀림에 휘말리기 전에 아야톨라를 죽이는 것뿐.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힐끗, 저 멀리 아야톨라를 올려다봤다. 그렇게나 열심히 싸웠건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설마 제 살아생전 종말 교단에게 성도가 파괴되는 모습도 보게 될 줄이야.”
여명의 상념을 깨운 건 성녀님의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명을 부축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는 저것과 싸우다가 내던져진 건가요?”
“…예.”
그녀는 여명과 신전 바깥에 아야톨라를 번갈아 봤다.
“혼자서요? 다른 성기사들은 뭐하고요?”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차마 여기가 꿈속이라고 말할 수 없던 여명이 대충 둘러대자, 전대 성녀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보니…? 그렇네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어쩌다 보니 태어나고, 어쩌다 보니 사는 것들이죠.”
“….”
그렇게 여명이 몸을 회복하는 사이, 아야톨라의 뒤틀림은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방의 뒤틀림을 따라 의자가 휘어지고, 바깥에서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거… 못 막으면 저도 죽겠네요. 혹시 저걸 이기거나 막을 방법은 있나요?”
“…제가 쓸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딱 하나를 빼고요.”
“마지막 수가 있다면 아직 진 게 아니죠. 마지막 수는 뭐죠?”
“…핵폭탄이요.”
여명이 인벤토리 속에 잠든 격발 직전의 핵폭탄을 떠올리며 말했다. 단 한 발로 수백 만이 사는 제국 수도를 날려버릴 수 있는 최강의 무기.
그거라면 설사 아야톨라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거, 당신도 죽는 거 아닌가요?”
“….”
“겸사겸사 저랑 성도의 모든 분들도 같이 죽겠네요. 뭐, 우리만 죽는 것보다야, 적과 같이 죽는 게 맞겠지만…”
여명이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사이, 신전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고함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신의 검이여! 성도를 지켜라!
꿈속 성기사들이 아야톨라를 막기 위해 달려오는 소리. 하지만 꿈의 지배자인 아야톨라에게 그들은 그저 머릿수가 많은 벌레에 불과했다.
“귀찮은 것들…!”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쓸려 나간다. 하지만 밀려드는 성기사의 머릿수는 수천이 넘었다. 아야톨라는 어쩔 수 없이 의식을 멈추고 성기사들에게 신경을 쏟아야 했다.
저런 거에 시간이 끌리다니, 꿈속에서조차 성기사들과 상성인 건가? 아니면 여명과 똑같이 후유증을 앓는 건가? 어느 쪽이건 간에…
“…잠깐 시간이 날 것 같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대화나 할까요?”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성녀님은 바깥의 지옥도와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명은 멍하니 성녀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이 제 유언을 들어주시면 영광이죠.”
“에이, 유언은 무슨. 아직 진 거 아니잖아요.”
성녀님은 웃으며 경전이 꽂힌 책장 사이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여명에게 내밀었다. 사탕과 쿠키가 든 과자 상자.
“자, 그거 먹고 힘내요.”
갑자기 이게 뭔가 싶었지만, 여명은 말없이 쿠키를 씹었다. 말린 과일이 들어간 쿠키는 달콤쌉싸름했다.
그사이, 전대 성녀님은 여명이 쿠키를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살짝 기울어진, 기쁨의 눈빛.
여명은 바깥에서 들리는 비명과 성녀님의 눈빛 사이의 간극을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성녀님은… 만약에, 살아남으시면 뭘 하고 싶으십니까?”
“하고 싶은 거요? 많죠. 어디 보자… 젊을 때 잘못한 것들도 되돌리고 싶고, 우리 아이도 보고 싶고, 오랜만에 지구인들도 쏴버리고 싶고…”
“…아이요?”
“지구인 쏘고 싶다는 건 지적 안 할 줄 알았어요.”
“….”
“푸핫! 농담이에요. 전 다 늙어서 하고 싶은 게 거의 없어서요. 그러니 저 말고, 당신이 하고 싶은 걸 말해보세요.”
여명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가, 과자 상자를 닫으며 대답했다.
“…이기고 싶습니다.”
여명이 대답을 들은 성녀님은 손을 뻗어 그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여태껏 어떻게 이기셨는데요?”
“…언제나 제 것이 아닌 적의 기술로 이겨왔습니다. 너무 강한 적은… 동료들의 힘을 빌렸습니다.”
성녀님은 작게 미소 지었다.
“재능과 협공. 꼭 용사님 같네요.”
“….”
“하지만 당신은 용사님이 아니고… 지금은 둘 다 못하고 있군요. 동료는 없고, 훔친 기술로는 아야톨라를 이길 수 없어요. 그렇죠?”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성녀님께서는 간단하게 결론 내놨다.
“그러면 혼자서, 훔치지 않은 자신만의 기술로 이겨야겠네요.”
“…?”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냐고 되묻기 전에, 성녀님의 그의 말을 가로챘다.
“못하면 이대로 죽는 거죠. 뭐.”
“….”
짧고, 황당한 침묵. 성녀님은 잠시 여명의 손등을 쓰다듬다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 맞다. 데메론드에게 배운 거, 제가 조언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예?”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
여명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입에서 성녀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극한의 상황에 떠오른 생각이야말로 진실이죠. 아까 죽을 뻔했을 때, 뭘 떠올렸죠?”
욕심.
“조금 더 자세히.”
복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전부 하고 싶고, 전부 가지고 싶다… 하지만 과한 욕심은 파멸을 부를 뿐이죠. 불이 스스로 죽는 것도 모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것처럼.”
…전 불이 아닙니다.
“복수에 성녀를 끌어들이고도 잘도 그런 소리를?”
…
“함께 파멸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비극이에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래서 비극인 거랍니다. 아, 그래서 욕심인가?”
전…
“욕심을 버리는 건 어떤가요? 분수를 알고 가질 수 있는 것만 손에 넣는 것. 삶의 요약으로 이만한 것도 없죠. 어때요?”
저는…
여명은 전대 성녀님의 입으로 말했다.
“제가 분수를 알았다면 세티랑 손잡고 도망쳤을 겁니다. 복수도, 증오도 잊고 조용히 사라졌겠죠. 하지만 저는 그걸 거부합니다.”
왜요?
“제가 다른 사람들의 꿈을 봤기 때문입니다. 포기하고 후회하느니, 욕심대로 살다가 죽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꿈으로 그런 깨달음을 얻다니, 나쁜 사람이네요.
“예, 저는 나쁜 욕심쟁이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불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언젠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죽음. 죽음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니, 우리는 언젠가 죽음에게 시집갈 신부요. 나는 식장에서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입니다.”
시적이네요. 하지만 너무 긴데요?
“원하는 건 다 가질 겁니다. 그게 제 인생의 한 줄입니다.”
감당할 수 있나요?
“세계수는 그냥 나무다 같은 진의보다는 감당하기 쉬울 겁니다.”
아, 그건 그렇네요.
“….”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성녀님은 주름살 가득한 손을 놓고, 웃으며 여명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세월의 주름을 짊어진, 부드러운 입술.
여명은 그 입술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무아지경에서 깨어났다.
***
“….”
추락을 멈춘 아야톨라는 TV 화면 사이에서 일어났다.
쿨럭.
뭣도 모르고 꿈을 조종한 대가일까, 끝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여명은 그의 몸에 피를 토했다.
아야톨라는 그런 여명의 뒤통수를 붙잡은 뒤, 그대로 집어 던졌다.
쾅!
벽면에 가득한 TV 화면과 충돌한 여명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꿈을 흘리는 자는 황금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대로 누워있어라. 바깥에서 온 자여, 너는 패배하였고, 너의 동료들은 죽을 것이니…”
“…쿨럭.”
“그러나 두려워하되, 후회하지 말라, 물살이 빠르건 느리건, 강은 바다로 향하는 법…너의 패배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노라. 너는 강했으나, 운명은 강함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진실을 깨닫고, 기쁘게 종말을 맞이하라.”
아야톨라는 손을 뻗었다. 여명의 머리를 통째로 뒤틀어 뇌부터 파괴해줄 생각이었다.
고통과 후회로 가득하지만, 금세 허무로 돌아갈 수 있는 마무리.
그것이 꿈을 흘리는 자의 자비였고, 여명의 최후였다.
쥐어지는 주먹, 뒤틀리는 공간.
까그그극!
소음과 함께 공간이 뒤틀렸고, 여명의 머리는 그대로…
뒤틀리지 않았다.
뒤틀린 건 여명의 머리 바로 옆,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TV 화면이었다.
“…?”
아야톨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의 천벌이, 그것도 권능 속에서 빗나갔다?
의심은 의혹을, 의혹은 당황을, 당황을 두려움을 낳았다.
아야톨라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고, 그사이 여명은 너덜너덜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색 눈동자와 황금가면이 마주한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아야톨라를 향해, 여명이 손을 뻗었다.
“고마워.”
“…무엇이?”
“너의 꿈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대가를 치른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을 거야. 네가 보여준 덕분에… 아무 후회도 없이 내가 어떤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었어.”
“….”
“내가 싸워온 모든 적들과 마찬가지로, 너는 나의 스승이다. 이제, 가르침의 값을 치르마.”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아야톨라를 겨눈 여명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설마?”
아야톨라가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여명은 손을 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