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82)
을 위한 세계는 없다-282화(282/817)
〈 282화 〉 꿈의 끝, 현실의 일. (5)
* * *
***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브라우닝은 지각이란 말에도 웃으며 대답했다.
“영웅은 원래 늦게 오는 법이지. 소방관이나 경찰도 그러지 않나.”
“….”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여명은 입 밖으로 욕을 내뱉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저번에 만난 메이커도 그렇고, 사실 미국의 빅 쓰리는 전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여명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끄응.”
괴물의 시체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물지기가 흙더미 사이에서 꾸역꾸역 일어서는 게 보였다.
기세 좋게 달려간 것치고는 상태가 너덜너덜한 게, 성물이 없었다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를 꼴이었다.
“하…”
흙을 터는 성물지기가 이쪽을 바라보자, 브라우닝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는 수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큰일 날뻔했군.”
뭐가 그리 웃기는지, 전대 성녀님은 빵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늙은 여인의 웃음소리를 따라 브라우닝의 수염이 무안하게 떨렸다.
다행히, 그의 무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쑥밭이 된 거리의 공간이 쩍쩍 벌어지며 괴물들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덕분이었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겠군.”
브라우닝은 이때다 싶었는지, 커다란 기관포를 아공간에서 꺼내 들었다.
“목적지는 저 빌딩인가? 자, 어서 달리게. 내가 엄호해줄 테니.”
“…같이 가시죠?”
여명이 성녀님을 업으며 말하자, 브라우닝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전대 성녀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엄호하려면 이곳이 더 낫네. 그리고 무엇보다 정훈교육에 나오는 얼굴과 같이 다니는 건 좀…”
정훈교육?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전대 성녀님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 시간대까지 미군이 절 기억해줄 줄은 몰랐네요. 역사는 승자의 것 아닌가요?”
“…승자는 자신을 괴롭힌 패배자를 잊지 않는 법이오.”
성녀님이 피식거리건 말건, 브라우닝은 철컥, 양손으로 기관포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 죽인 미군과 낙선시킨 정치인들이 서운해할 소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자, 어서 가게.”
여명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땅을 박찼다. 이미 다리의 재생이 끝나있던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등에 업힌 전대 성녀님이 여명의 어깨를 꽉 붙잡는 사이, 그의 몸이 빌딩을 향해 죽죽 나아갔다.
“…빌어먹을 미국 놈 같으니.”
흙을 뒤집어쓴 성물지기가 따라붙으며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성녀님은 또 한번 웃음을 터트리셨다.
…뭐, 아무튼.
빌딩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내내 악몽의 괴물들은 방해가 되지 못했다.
브라우닝의 사격은 문자 그대로 폭풍과 같아서,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족족 그것들을 괴물이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메이커와 마찬가지로, 대량 살상 개인이란 표현에 걸맞은 위력.
그어어어 !
그렇게 괴물들의 비명과 총소리, 그리고 여명의 발소리가 이어지길 잠시.
순식간에 빌딩 코앞까지 도달한 여명은, 높이 뛰어오르며 등에 업힌 성녀님을 향해 말했다.
“꽉 잡으세요.”
성녀님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고, 여명과 성물지기는 그대로 정문을 박살 내며 빌딩 안으로 진입했다.
***
와장창! 고급스러운 유리가 깨져나가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내부로 들어선 여명을 맞이한 건, 괴물이 득실거리는 빌딩 내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까 봤던 다룰마의 꿈이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새하얀, 정신병동의 그것과 닮은 넓은 방과 그 방 한가운데 의자에 앉은 드워프 한 명뿐.
“…다룰마.”
업고 있던 성녀님을 내려놓은 여명은 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가까이에서 보자, 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성녀님의 추적 축복의 빛을 내뿜고 있는 그의 몸 곳곳에는 악몽의 살덩이가 자라나 있었다. 눈과 이빨이 잔뜩 달린 역겨운 살덩이.
여명은 즉시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살덩이를 뜯어냈다. 반쯤 드러난 드워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동자는 안개가 낀 것처럼 탁했다.
“다룰마? 제 말 들려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다룰마의 혼탁한 눈동자가 움직였다.
“여, 여명…?”
“예, 접니다. 괜찮으세요?”
여명이 걱정스레 물었으나, 드워프는 전혀 다른 대답을 꺼냈다.
“여, 역시, 자네는… 늦기 전에… 왔군… 다, 다행이야…”
“늦기 전에 왔다뇨,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시, 시간이… 없어… 어서 나, 나를… 주, 죽여…”
드워프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하는 눈을 까뒤집고, 침을 질질 흘렸다.
놀란 여명이 도움을 청하기 전에, 전대 성녀님이 끼어들었다.
“이 드워프가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인가요?”
“…?”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여명이 눈살을 팍 찌푸리자, 성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야톨라는 이 드워프가 당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게 무슨…”
“이 드워프를 오염시켜서 꿈의 핵 그 자체로 만들었어요. 꿈을 끝내고 싶으면, 그를 죽여야 해요.”
“….”
승리를 내주지 않겠다. 여명은 그 지독한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주물렀다.
“혹시… 꿈에서 깨어나면 되살아날 수 있을까요?”
“아뇨, 꿈속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 거예요. 예외는 없어요.”
“그러면 풀 방법은…”
여명이 조심스레 묻자, 전대 성녀님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있긴 있지만… 괜찮겠어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지도 몰라요. 늦으면 여태껏 했던 게 다 물거품이 된다구요?”
이전의 여명이었다면 고민했을 이야기. 하지만 자신만의 진의를 세운 현재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있는데,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대 성녀님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여명의 옆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다룰마를 뒤덮은 악몽의 살덩이를 쓸어내렸다.
성녀님의 손짓은 마법사의 그것처럼 섬세했고, 동시에 초인의 그것처럼 재빨랐다.
시간에 쫓기는 걸 아는 탓인지, 그녀는 순식간에 살덩이에서 뭔가를 읽어낸 뒤 말했다.
“꿈의 핵은 저주와 신성을 뒤섞은 제약으로 드워프와 묶여 있어요. 간단하면서도 단단한 종류의 제약이네요.”
“…그 제약만 풀면 되는 겁니까?”
“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제약이란 건 금제와 달리 단순할수록 단단한 법이니… 아무튼, 제약의 내용은 이래요. 이 꿈에 처음으로 빨려든 사람이 직접 풀어야 한다.”
꿈에 처음으로 빨려든 사람? 여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꿈을 먹는 자가 처음으로 권능을 펼친 것은 둔간 중공업 본사 빌딩.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꿈에 빨려든 건 드워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수많은 드워프 임원 중 누가 첫 번째인지 어떻게 알…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나간 여명은 문뜩, 세티를 떠올렸다.
다룰마의 옆에 있었던 그녀의 성정을 떠올려보면, 가장 먼저 이 꿈에 빠진 건 그녀가 아닐까?
아니, 분명 그녀가 첫 번째일 것이다…
의문이 확신으로 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없는 시간만큼이나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바로 다른 꿈으로 향하는 틈새를 열었다.
하지만 그가 틈새를 넘어가기 전에, 성물지기의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단 한 명의 드워프를 위해 이 섬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내 딸의 목숨을 걸 생각이냐?”
“….”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성물지기는 천천히 검 모양의 성물을 들어 다룰마를 겨눴다.
“이제와서 꿈을 뒤지기에는 늦었다. 만에 하나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명, 미안하지만 난 이런 도박은 하지 않을 거다.”
“…호르아.”
“찾으러 가는 걸 막지 않으마. 하지만… 시간이 늦어지는 순간, 내가 직접 이 드워프를 죽이겠다.”
“….”
여명은 성물지기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해주는 것 자체가 호의였으니까.
굳이 이런 말을 해줄 것도 없이, 여명이 꿈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성물을 휘두르기만 해도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명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건, 드워프를 죽이는 짐을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선언이리라.
“….”
투박한 배려심을 마주한 여명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정녕 다룰마를 살릴 확실한 방법은 없는가?
…없었다.
그가 운이 좋아서 몇 번 만에 세티를 찾거나, 아니면 세티가 지금 당장 이곳으로 오지 않는 이상…
“아.”
그 순간, ‘빛을 보고 찾아왔다’는 브라우닝의 말이 떠올랐다. 여명은 곧바로 꿈의 틈새를 닫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잠깐, 그렇다고 자네가 직접 죽일 필요는…”
성물지기는 그 행동을 오해한 듯 성물을 거두는 사이,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황금 옥새를 꺼냈다.
드워프 왕가를 상징하며, 이 세상의 모든 잠금과 금제를 풀 수 있는 네모반듯한 사각형의 금덩어리.
“어머, 설마 계승 받은 물건인가요?”
전대 성녀님은 옥새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뜨셨다. 여명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룰마에게 옥새를 사용해봤다.
이제 막 재생되던 마나가 쑤욱 빠져나갔지만, 역시나 다룰마의 몸을 휘감은 살덩이들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명은 실망하지 않고, 옥새를 높이 들어 올리고 옆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두 분 모두, 여기에 마나 좀 보태주세요.”
“…?”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성물지기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기울어지자, 성녀님이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짜악 때리며 말씀하셨다.
“안 도와주고 뭐 해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장인 노릇 하려고?”
“….”
성물지기는 억울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성녀님이 옥새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순순히 손을 보탰다.
“감사합니다.”
여명은 즉시 두 사람의 마나를 더해 옥새를 발동시켰다. 어떤 금제나, 잠금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빛을 내뿜기 위해서.
그렇게 세 사람 분량의 마나가, 특히 성녀님이 끌어온 다섯 신의 마나가 옥새에 집중된 다음 순간.
번쩍 !
옥새가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빌딩 바깥에서 총을 쏘던 브라우닝은 물론이고, 이 꿈의 바깥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빛.
빛은 벼락보다는 길게 이어졌지만, 등대에 비교하면 순간에 불과할 정도로 짧게 반짝였다.
누군가를 부르기엔 모자란 빛이었으나, 옥새의 마법을 해제한 여명은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성물지기가 초조하게 다룰마를 바라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직후.
꿈의 하늘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브라우닝은 물론이고, 성녀님조차 그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바로 다음 순간.
콰아아아앙 !!!!
벼락이 빌딩 정문으로 내리꽂혔다.
***
흙먼지와 빛, 그리고 벼락과 함께 빌딩 안으로 떨어진 건 자기 몸통만큼이나 긴 망치를 든 푸른 눈의 소녀였다.
“나 불렀어?”
홍세티. 망치를 지팡이 삼아 일어난 그녀를 맞이하는 반응은 셋으로 갈렸다.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짓는 여명, 뭔가 불길함을 느끼는 성물지기, 그리고 환하게 웃는 전대 성녀님.
이중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건 여명이었다.
그는 바로 세티에게 다가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성물지기의 눈이 가늘어지건 말건, 여명은 세티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어, 어?”
세티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여명을 밀어내기는커녕 똑같이 끌어안았고, 둘의 포옹은 거의 10초가 넘도록 이어졌다.
전대 성녀님이 손뼉을 치지 않았다면, 아마 더 오래 이어졌으리라.
“자, 자, 재회는 나중으로 미루시고, 우선은 여기 드워프부터 구하세요.”
여명은 그제야 세티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룰마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녀에게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꿈의 핵, 첫 번째로 꿈에 떨어진 자가 풀어야 한다는 제약.
세티는 뭔가 납득한 표정으로 ‘아, 그래서…’라고 중얼거렸다.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이게 징조로 끝날지, 아니면 진짜 해답으로 이어질지는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법.
전대 성녀님은 세티가 다가오자마자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제가 인도하는 대로 핵을 만져보시겠어요?”
세티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전대 성녀님은 아직도 다룰마의 얼굴 절반을 뒤덮고 살덩이로 안내했다.
다음 순간, 세티의 손이 닿은 살덩이가 파르르 떨며 다룰마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명과는 전혀 다른 반응.
“…맞네요. 첫 번째.”
전대 성녀님은 기쁜 듯 웃으셨다. 그제야 성물지기와 여명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세티는 순순히 전대 성녀님의 손에 이끌려 다룰마와 살덩이를 분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손을 움직이던 어느 순간, 세티가 성녀님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저… 누구신지 여쭤도 될까요?”
“전대 성녀라고 하면 될까요? 꿈속 인물이니 크게 개의치 않으셔도 된답니다.”
“…아?”
세티의 반응은 여명이 처음 전대 성녀님을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놀람, 납득, 그리고 현재 성녀에 대한 의문.
‘걔는 대체 뭘 보고 그렇게 컸지?’
그런 세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대 성녀님은 역으로 질문하셨다.
“우리 이쁜 아가씨 이름이 뭔가요? 세스? 셋? 세슈? 세테크?”
“…?”
“잠깐, 잠깐. 정답 말하지 말아봐요. 제가 맞춰볼 테니… 아, 혹시 세트나인가요?”
갑자기 쏟아진 질문에 세티는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 이름은 세티입니다. 성녀님.”
“세티…? 와, 예쁜 이름이네요. 다음 대 성녀랑 똑같은 티자 돌림이라니. 이게 진짜 운명인가 봐요.”
“…?”
뭐지? 놀리는 건가? 세티는 전대 성녀가 그 푼수 성녀를 키운 장본인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전대 성녀님은 그 이상 질문을 꺼내지 않으셨다. 묵묵히 다룰마와 살덩이를 분리하는 걸 도우실 뿐.
철푸덕
그렇게 다룰마의 몸을 휘감고 있던 모든 살덩이들이 분리되자, 성녀님은 조심스레 세티의 손을 풀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첫 번째.”
세티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성녀님을 바라보는 사이, 전대 성녀님이 여명을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 끝났어요!”
여명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검을 뽑고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살덩이는 여명이 다가올 때마다 도망치려는 듯 바닥을 기었다.
꾸직 성녀님은 살덩이를 짓밟으며 말씀하셨다.
“이게 꿈의 핵이에요. 이걸 부수면… 아야톨라의 악몽도 끝날 거랍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드디어…여명은 묘한 감흥을 느끼며 살덩이와 성녀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성녀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성녀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알면 됐어요.”
“….”
여명이 헛웃음을 흘리자, 전대 성녀님은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작별 인사는 짧을수록 좋은 법이지만, 굳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면… 미래의 제 무덤에 꽃 한 송이 놔줄래요?”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성녀님은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웃으며 살덩이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명은 마지막으로 성녀님을 비롯한 일행들을 싹 바라본 뒤, 검으로 살덩이를 내려찍었다.
살덩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 악몽, 그리고 악의.
그 모든 역겨움을 노려본 여명의 검에 어두운 검기가 맺히고, 살덩이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 지긋지긋한 꿈의 끝이었다.
뭔가 대단한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여명은 조금 실망했다. 여태껏 그가 겪어온 다른 꿈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아득함을 느꼈으니까.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성물지기와 세티가 거의 기절하듯 눈을 감는 순간.
“아무리 즐겁더라도, 꿈은 언젠가 깨어나야 하는 법. 재밌었어요. 이 기억으로 나는 또 살아갈 수 있겠죠.”
성녀님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감촉이 느껴졌다. 여명은 어쩐지 그 입맞춤이 익숙한 거 같다고 느꼈고,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다.
***
“천여명? 정신이 드나?”
여명이 눈을 뜨자, 익숙한 데스나이트 두 명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늙은 성기사와 미군. 그중 미군 데스나이트의 표정은 똥 씹은 듯 잔뜩 구겨져 있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요?”
듀크, 미군 데스나이트는 쓰읍 있지도 않은 침을 삼켰다.
“주인이 멋대로 권능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데, 데스나이트 된 입장에서 걱정이 안 되겠어?”
여명은 몸을 일으켜 앉은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 건물을 확인했다.
그의 옆에는 함께 꿈으로 들어간 일행들은 물론이고, 둔간 중공업 소속으로 보이는 드워프들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누가 이렇게 정리한 겁니까?”
“당연히 나랑 이 영감이 했지. 데스나이트는 꿈속에 못 들어가더라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게 전부더군.”
“아… 그래서 이렇게 공동묘지 같은 거군요.”
“공동묘지는 무슨, 조금만 늦게 나왔어도 전부 타락석에 육체와 정신이 모두 빨려 들어갔을 거다.”
그렇게 말한 듀크는 멀지 않은 곳에 누운 브라우닝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직후, 성기사 데스나이트, 바라나 카시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자네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꼭…”
“이야기가 좀 많이 긴데, 나중에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이런, 이제 막 깨어난 친구에게 내가 실수를 했군, 자네 편한 대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여명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고 팔로 땅을 짚었다. 겨우 꿈에서 겪은 일이라기엔 몸에 누적된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그의 재생력으로도 힘과 혈관들이 파르르 떨리는 게,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는 실감이 났…
그때, 여명의 감각으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너무나 익숙한 마나와 감각 그리고 이어지는, 방정맞은 목소리.
“여명!!!”
여명은 피식 웃은 뒤,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다. 곧이어, 그의 품으로 묵직한 소녀가 떨어졌다.
푹신한 몸의 대가일까? 그녀는 꽤 무거웠다. 하지만 여명은 무릎이 꺾이는 걸 마나로 붙잡아가며 그녀를 받았다.
그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므로.
“성녀님… 이 아니라, 성녀.”
여명은 그녀를 땅에 내려주며 얼굴을 마주했다. 그사이 잔뜩 고생했는지, 성녀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후줄근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으며, 헐렁한 안대는 눈물로 축축했다.
그녀는 주먹으로 여명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왜 존댓말을 하다 마냐?”
“그럴 일이 있었어.”
“고생했냐?”
“죽을 만큼.”
죽을 만큼이란 말속에 담긴 진심을 읽은 성녀는 입술을 삐쭉였다. 코가 시큰해진 까닭이었다.
“아주 지가 용사인 줄 알아. 여긴 미국이라 큰일 없을 거라더니.”
“…그러게.”
“또 이러면… 읍!”
성녀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여명은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성녀는 깜짝 놀라 여명의 팔을 때리다가, 이빨 사이로 설육이 엮이자마자 고장 난 인형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길지 않은 입맞춤, 두 번째 키스에서는 먼지와 눈물 맛이 났다.
“너, 너… 갑자기 이게 무, 무슨…”
얼굴이 멀어진 성녀가 기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냥 하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 깨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 성녀는 그제야 여명 뒤에 가지런히 누운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미쳤어?! 저기 아ㅃ… 아니, 성물지기도 있잖아!”
“아직 못 깨어나셨어.”
“저, 저 데스나이트는 봤거든!?”
성녀가 소리치며 바라나를 가리키자, 바라나는 못 본 척,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꽤나 노골적인 제스처였고, 그 제스처는 성녀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꿈에서 뭘 했길래 갑자기 이래?”
“깨달은 것도 있고, 좋은 조언도 잔뜩 들었지.”
“조언? 무, 무슨 조언?”
“그건 비밀.”
여명이 자신을 놀린 거라고 생각한 걸까, 성녀는 안대를 고쳐 쓰며 그의 등을 때렸다.
여명은 그녀의 손찌검을 맞아주며 깨어나지 아직 못 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코르부스의 날갯소리가 들려오고, 드디어 끝났음을 실감하는 순간.
하늘 저편을 보고 있던 바라나가 말했다.
“여명, 나와 저 친구를 회수하게! 지금 당장!”
“예?”
갑자기? 긴장을 풀고 있던 여명이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자, 하늘 위에서 새하얀 깃털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코르부스의 흑익류와는 다른, 신성한 느낌의 깃털들. 그건 분명…
“성검의 공간 이동일세! 성검! 성검이 왔어!”
여명은 대답보다도 빠르게 두 데스나이트를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곧이어, 하늘에서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머리를 올려 묶은 여인이 섬으로 강하했다.
갑작스러운 강자의 등장에 놀란 성녀가 그의 팔뚝을 꽉 붙잡는 것과 달리, 여명의 반응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또 지각생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