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83)
을 위한 세계는 없다-283화(283/817)
〈 283화 〉 꿈의 끝, 현실의 일. (6)
* * *
***
시간을 조금 돌려, 성녀가 여명을 향해 뛰어내리던 시각.
시카고 차원문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에서, 구더기 공주가 소리쳤다.
“막이 사라졌어!”
망원경을 내려놓는 그녀의 말대로, 시카고 차원문 주변 섬을 통째로 뒤덮고 있던 타락석의 검은 마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다행이다… 내 후원금…”
다행이란 말을 연발하며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맞은 편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네티의 반응은 심심했다.
“뭘 그리 흥분해요. 언니에 성녀님까지 합세했는데, 이게 당연한 거죠.”
마치 ‘내 이럴 줄 알았지.’ 라는 듯한 말투.
하지만 조금 전까지 커피잔을 덜덜 떨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던 구더기 공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년이?
네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스카이라운지의 직원과 손님들 모두가 차원문을 찍느라 정신이 팔릴 때쯤.
답장을 받은 네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가다니? 어딜?”
“저쪽 일은 저쪽이 알아서 할 테니, 우리는 우리 일은 해야죠.”
라쉬크는 우리 일이 뭔데 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커피값을 계산한 네티가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으니까.
“야! 어디 가?!”
그녀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네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감시 카메라조차 보이지 않는 뒷골목에 이르러서야, 네티는 구더기 공주를 향해 대뜸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휴대폰은 [팔선녀]라는 괴상한 이름의 상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누군데?”
라쉬크가 묻자마자, 휴대폰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꾀꼬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안녕하세요. 핑크… 아니, 연지벌레의 주인.]“….”
[지금부터 여명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 있는데, 좀 도와주시겠어요?]갑자기 뭔 소리야? 라쉬크가 슬그머니 네티를 바라봤으나, 네티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자매가 쌍으로 도움이 안 되네.’
하지만 성녀도 그렇고, 드워프 재벌도 그렇고… 여명과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한 끗발 하는 사람이라는 걸 떠올린 라쉬크는 저자세로 대답했다.
“그, 중요한 일이 뭔지 먼저 알려 주셔야…”
[아,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냥, 여명과 세티가 그 도시에 있었던 흔적을 지워주시면 돼요.]“흔적? 무슨 흔적이요?”
[공항처럼 눈에 띄는 장소의 CCTV나, 숙박 기록, 이동 기록, 그리고 암시장 기록 정도면 충분해요.]듣기만 해도 존나 어려운 일 같은데? 라쉬크는 황당함을 삼키며 대답했다.
“저, 죄송하지만… 저는 그냥 연금술사일 뿐이라, 그런 일은 좀…?”
[그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부분은 정보 길드에서 할 테니. 연지벌레의 주인께서는 지하에 잠든 구더기로 암시장의 CCTV 저장 서버만 부숴주시면 돼요.]지하에 잠든 구더기 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라쉬크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건 그녀가 꼭꼭 숨겨 놓은 비장의 패였으니까.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정보 길드와 관련된 사람인가?
라쉬크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네티와 휴대폰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휴대폰 너머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저요? 저는… 아, 그 휴대폰에는 뭐라고 저장되어있나요?]“팔선녀… 라고 저장되어 있는데요.”
풉, 휴대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네티가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라쉬크를 째려봤다. 뭐, 어쩌라고.
아무튼, 그렇게 잠시 웃음을 이어가던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흠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팔선녀라, 음, 괜찮은 조직명이네요.]“….”
[저는 팔선녀에서 뒤처리를 맡고 있는 귀 큰 선녀랍니다. 대답이 되었나요?]귀 큰 선녀? 방금 지은 게 분명한 칭호였다. 라쉬크가 이런 일은 못 도와주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휴대폰 너머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도와주시면, 대가로 엄지 손톱보다도 큰 세계수의 결정을 드리죠. 어때요?]“…?”
[이 조건이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당신은 절대 거절 못 할 거라는 말투였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라쉬크는 휴대폰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세계수의 결정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귀 큰 선녀님.”
선녀님이란 단어가 그렇게 웃긴 건지, 아니면 다른 기쁜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라쉬크의 대답을 들은 휴대폰 너머에서 끅끅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비례해 네티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지만, 구더기 공주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
다행히 성검은 바로 여명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원문과 그 주변에 있는 용병들을 향해 달려갔다.
여명은 피눈물의 환상으로 얼굴부터 가렸다. 성녀의 얼굴도 환상을 뒤덮으려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이미 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꿈의 바깥에서 그녀가 뭘 하고 있었는지 짐작한 여명은 별말 없이 성녀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 잠든 세티에게 다가가 얼굴 위로 환상을 덮었다.
그리고 성검이 오기 전에 일행들을 깨울 생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간단하게 얼굴에 물이라도 뿌릴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말게. 이 잠은 마법적인 거라, 억지로 깨워봤자 소용없으니.”
브라우닝이 끄응, 상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허리를 쭉 펴고 찌뿌둥한 기지개를 켠 그는, 여명을 보자마자 눈을 비볐다.
“벌써 얼굴을 바꾼 건가? 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가?”
“…꿈속에서 보던 얼굴이 진짜 접니다.”
“진짜로 우리 큰딸보다 어린 학생이었다니… 허, 참.”
브라우닝은 그렇게 말하며 턱수염을 꼬다가, 문뜩 차원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타락석의 영향력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모습.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
“내가 오늘 일을 위쪽에 보고하면 자네는 아주 힘들어질 거야. 주가시빌리에, 빨갱이 환상에… 적어도 전담 요원이 스무 명은 달라붙을 거라고 장담하지.”
여명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브라우닝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짐작한 탓이었다.
“오늘 공로를 전부 내 것으로 해준다면, 내 기꺼이 이번 자네의 정체를…”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브라우닝.”
여명이 말을 가로채자, 브라우닝의 수염이 축 늘어졌다.
“거, 어른이 위선 떨 때는 그냥 장단 좀 맞춰줘야지. 요즘 젊은것들은 영 눈치가…”
거기까지 말한 브라우닝은 투덜투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그가 먼지에 덮인 옷가지를 정리하는 사이, 차원문 방향에서 낯선 빛이 번쩍였다.
“저건… 씁, 나 말고도 지각생이 있나 보군?”
“…예, 성검이 오셨습니다.”
“호주의 애꾸눈? 주 방위군보다도 먼저 오다니, 주지사가 엿 좀 먹겠군. 뭐, 아무튼… 입을 좀 맞추지.”
브라우닝은 성물지기와 여명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대외적으로 이 사건은 성물지기와 나, 단둘이서 성물로 해결했다고 말하겠네. 정부에는 파순과 붉은 별이 도와줬다고 보고하지, 그리고 또…”
브라우닝의 시선은 이곳에 없는 파순을 찾다가, 여명의 등 뒤에 딱 붙어 있는 안대의 소녀를 향했다.
“그녀도 자네 일행인가?”
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일행이고… 워낙 본 사람이 많아서, 그녀의 정체를 숨기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긴, 성녀들은 언제나 눈에 띄는 법이지.”
그러자, 성녀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성녀들? 저 말고 다른 성녀도 있어요?”
브라우닝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성녀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여명은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시죠. 성녀가 바깥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 성물지기와 어르신이 사건을 해결한 걸로. 저와 세티는… 성녀의 호위인 척하겠습니다.”
조금 엉성하지만, 나쁘지 않은 설명이었다. 브라우닝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며 덧붙였다.
“그러면 적의 정체는 아야톨라가 아닌, 누군지 모를 종말 교단의 사제인 걸로 하지. 완벽하진 않아도, 시간은 끌 수 있을 테니.”
성녀가 ‘아야톨라’라는 말에 놀라 여명의 등을 콱 붙잡건 말건, 브라우닝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정보 길드를 불러 수습하건, 잠시 숨어 지내건… 되도록 CIA와는 엮이지 말고.”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검 님은 어쩔까요? 성검의 능력이라면 제 환상도 꿰뚫어 볼 수 있을 텐데…”
“성검? 그녀는 별로 걱정할 필요 없네. 이제 곧 도착할 주 방위군이면 모를까.”
“…예?”
브라우닝은 담배를 입에 물며 턱 끝으로 호르아를 가리켰다.
“여기 성물지기가 있잖나.”
“…?”
여명과 성녀가 동시에 뭔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브라우닝이 역으로 당황했다.
“어… 성검과 성물지기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둘이 사이에 무슨 비사가 있나?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탁
익숙한 여성이 브라우닝 앞에 착지했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황갈색 포니테일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왼쪽 눈의 안대까지.
“안녕?”
성검, 프레아 칸이 손을 들고 여명과 브라우닝에게 인사했다.
***
성검, 멜버른의 구원자, 화이트파이어의 수호자, 호주의 자랑…
프레아 칸의 인사는 온갖 칭호로 불리는 사람의 인사치고는 담백한 맛이 있었다.
물론, 그 인사를 받는 브라우닝의 반응도 담백했다.
“안녕 못하다. 지각생.”
“…뭐? 지각생?”
“일이 다 끝난 뒤에 와서 안녕은 뭔 놈의 안녕이냐? 부르지도 않은 파티에 와서 숟가락 얹지 말고, 썩 꺼져.”
브라우닝의 날 선 태도에 프레아 칸은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한쪽만 남은 그녀의 담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같이 늙어가는 사이에 이러기야?”
“가정도 없는 년이 같이 늙어가기는 무슨… 호주에서 여기까지 왜 날아온 거냐?”
“그야 댁 정부에서 불렀으니까 왔지.”
“하, 이 나라에 나 말고도 올 놈이 몇 명인데 널 왜 불…”
브라우닝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여명은 어렵지 않게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자칫하면 핵을 날려야 하는 곳에 자국 초인, 그것도 최상급 초인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리라.
브라우닝은 크흠, 헛기하며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일은 전부 끝났다. 여기서 네가 할 일은 없어.”
“거참, 깐깐하네. 이대로 빈손으로 가라고? 나도 출장 온 건데, 뭐라도 챙겨가야지.”
속물적인 말이었으나, 브라우닝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에 호주라는 국가의 이름을 짊어진 초인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브라우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여명과 성녀를 가리켰다.
“그럼 성녀와 사진이나 한 방 찍고 가라.”
“…성녀?”
성검은 그제야 성녀와 얼굴을 가린 여명을 바라봤다. 두 사람을 보는 성검의 시선은 묘하다 못해 의미심장했다.
짧은 침묵, 오가는 시선.
브라우닝의 말처럼 정말로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이미 꿰뚫어 본 건가?
여명이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순간, 프레아 칸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그리고…
“…아카데미 가출하더니, 이런 곳에 계셨던 겁니까?”
성검이 피식 웃으며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는 가출이란 단어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가, 가출 아닌데요.”
“무단결석이란 말보다는 가출이 낫지 않나?”
“….”
“결석 일자가 70일 넘기면, 2학년으로 진급 못 합니다? 동기들은 다 진급했는데, 혼자만 신입생들하고 놀고 싶으세요?”
성검은 그렇게 말하며 성녀의 머리카락을 파바박 쓰다듬었다. 마치, 귀여운 조카를 다루는 듯한 태도와 말투.
성녀는 질겁하며 소리쳤다.
“아, 아직 70일 안 채웠거든요? 아슬아슬하지만! 그리고 가출도, 무단결석도 아니에요! 위험한 사람들 구하러 온 거지!”
“어이구, 그러셨어요? 아빠랑 다르게 대견하시네요.”
성녀가 도와달라는 듯 여명을 바라봤으나, 그는 일부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혜성검의 목소리가 인벤토리를 뚫고 그의 머리를 울려대고 있었으니까.
[야, 이 나쁜 놈아! 마지막으로 쓰고 돌려준다고 했잖아!!] [프레아!! 나 여깄어!! 나 좀 살려줘!!] [이제 나 없어도 되잖아! 진의도 다 먹어 치웠으면서! 빨리! 빨리 풀어줘!!]애처롭다 못해 간절한 목소리. 여명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사정 때문에 지금은 안 돼요.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싫어!!]‘그런 멋진 혜성검도 뿜어냈는데… 저 좀 서운한데요.’
[그거 내 진의도 아니었잖아! 내 진의를 기억하긴 하냐?!]‘당연히 기억하죠. 빛이 흘러넘치니,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혜성검이 입을 다문 순간, 여명은 재빨리 대화를 마무리했다.
‘혜성검은 저한테도 뜻깊은 무술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바로 돌려드릴 테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명은 유니콘에게 그랬던 것처럼 혜성검의 목소리를 끊어버렸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혜성검이 무어라 소리치려 했으나…
[야, 이 개자식ㅇ!]…다시 마음의 평온을 얻은 여명은 아직도 성녀를 괴롭히는 성검에게 다가갔다.
“저, 성검님? 거기까지만 해주셨으면 합니다.”
“응? 넌 뭐냐?”
여명이 성녀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하자 프레아 칸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꿰뚫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왜지? 그의 의문과 상관없이, 성녀는 여명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이, 이 사람은 내 호위에요!”
“…성녀님께 남자 호위가 있다고요? 성녀님의 애ㅂ… 아니, 성물지기가 그걸 허락할 리가 없는데?”
날카로운 지적. 성녀는 발끈하며 그녀의 뒤편으로 손가락질했다.
“여, 여자 호위도 있거든요?!”
프레아 칸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깨어나서 몸을 일으키는 세티와 드워프들, 그리고…
“…호르아?”
성물지기와 프레아 칸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두 남녀 사이로 당혹스러운 침묵이 오가고, 기절한 드워프들이 쿨럭거리길 잠시.
“제기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물지기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프레아 칸의 등 뒤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
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길쭉한 백색의 검.
대체 무엇으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새하얀 검신에는 칼날을 따라 다섯 신의 상징이 음각되어 있었고, 투박하지만 간결한 손잡이는 은은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빛 맨 아래, 폼멜에는 다섯 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저게 바로 정화된 마왕의 심장이었다.
“성검…”
아카데미에서는 정확히 보지 못한 성검의 실물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여명이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길을 빼앗긴 사이, 성검은 혼자 두둥실 하늘에 떠올랐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호르아를 똑바로 겨눴다.
“씁… 어쩐지 축복이 옅더라니, 타락석 때문이 아니었구나?”
프레아 칸이 뒤늦게 중얼거리는 순간, 성검이 또다시 빛을 뿜어내며 호르아를 향해 날아갔다.
성물지기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치고는 능숙하게 성검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쉬익 쉭! 성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칼춤을 추며 호르아의 뒤를 쫓았다.
마치 분노한 아줌마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한 검술.
여명과 성녀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도망치는 호르아를 바라보는데, 브라우닝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내 말이 맞지?”
“…저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브라우닝은 수염을 꼬며 대답했다.
“비유하자면 이런 거지. 바람나서 이혼한 마누라가 옆에 있으면 어떻겠나?”
“….”
“다른 게 눈에 보일 턱이 있나. 저러니 프레아 칸이 자네의 환상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네.”
“그게 뭔…”
여명이 황당해하는 순간, 성검이 성물지기의 어깨를 베었다. 피가 튀는 모습을 보아하니,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베였을 상처였다.
“저거 저러다 정말로 죽는 거 아닙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프레아 칸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어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명색이 성검인데, 죽이지는 않아. 난도질하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닌가? 눈살을 찌푸리는 여명의 눈에 보이는 성물지기의 회피기동은 처절했다. 그가 자랑하는 성물들은 성검이 다가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무장해제 되거나, 힘을 빌려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프레아 칸은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젊었을 때는 진짜 멋졌는데… 어쩌다 저렇게 늙었나 몰라.”
그러자 브라우닝이 발끈했다.
“그의 딸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군.”
“아니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프레아 칸은 동의를 구하듯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는 당황하기는커녕, 당돌하게 되물었다.
“프레아 칸, 우리 아빠 좋아해요?”
“…예?”
“아니, 아빠를 보는 눈빛이 좀… 그래서요.”
“….”
황당한 말에 프레아 칸의 하나 남은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브라우닝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신음하는 드워프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커다란 폭소.
프레아 칸은 무언가 할 말을 찾는 것처럼 성녀와 성물지기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턱을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의외로 친엄마보다는 전대 성녀님과 비슷한 소리를 하시네.”
칭찬으로 한 말이겠지만, 여명과 브라우닝의 얼굴에 동시에 쓴웃음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프레아 칸은 한숨을 쉬며 브라우닝을 바라봤다.
“브라우닝, 미안한데 내 사정 좀 봐줘.”
“…그놈의 사정은. 한 일이 없는데 무슨 사정을 봐달란 건가?”
“나도 한 거 있거든? 차원문 주변에서 오염으로 끙끙 앓던 사람들 치료해주고, 이상한 놈도 썰었거든? 그리고 여기 드워프들도 치료해줄 생각이었거든?”
공무원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프레아 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브라우닝은 한마디 더 쏘아주려다가, 어느새 깨어난 세티가 여명과 성녀의 뒤편에 서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 정도 인정해줄 수 있지.”
“나 빈손으로 돌아가면 총리가 개 지랄… 뭐?”
“치료 말일세. 성녀님이 너무 많은 힘을 쓰셨으니, 자네가 오염 치료를 도와주게.”
“….”
프레아 칸은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지? 같은 얼굴로 브라우닝을 바라보다가, 반쯤 여명에게 매달린 성녀를 보고 상황을 납득했다. 성녀가 저꼴이라면 성검도 쓸모가 있겠지.
“…기자들 오면 사진도 같이 찍는 거다?”
“마음대로 해라.”
손사래를 친 브라우닝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여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명은 프레아 칸을 향한 존경심이 아주, 아주 살짝 깎여 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척하는 성녀를 등에 업고 기절한 드워프들을 향했다.
“이제 뭐 하게?”
어느새 따라붙은 세티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여명은 성검을 회수하려는 프레아 칸을 슬쩍 바라본 뒤, 아직도 신음하는 다룰마를 찾아냈다.
“아직 못 끝낸 일이 남아 있잖아.”
“끝내지 못한 일…?”
여명은 대답 대신 반쯤 눈을 뜬 다룰마를 불렀다.
“다룰마. 저 여명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어, 으… 여명… 나, 난 괜찮네…”
“다룰마, 시간이 없으니 하나만 묻겠습니다. 본사 빌딩에 비밀 금고가 있습니까?”
“비밀 금고… 사장실 벽면, 뒤에…”
다룰마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금고가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본사 건물을 바라보자마자, 세티는 다룰마를 잘 눕혀준 뒤, 금방 돌아오겠노라고 그를 다독였다.
“가자, 파순 잡으러.”
파순이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여명의 등에 업혀 있던 성녀가 리볼버를 뽑았다.
“어쩐지 그 자식 안 보이더라니…”
다행스럽게도, 세티는 성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 * *